한양 | ||
사대문안 | 사대문 | 성저십리 |
漢陽
1 개요
서울특별시의 옛 이름. 한(漢)강의 북쪽(陽)을 지칭하는 지명.
2 역사
이곳의 지명이 처음 한양으로 정해진 것은 삼국 시대이다. 신라의 진흥왕이 고구려와 백제로 부터 현, 경기도 지역과 황해도 지역을 빼앗으면서 그 지방에 한산주를 설치하였고, 현 서울특별시가 위치한 지역을 '한양(漢陽)'으로 붙인 것[1]이 그 시초이다.
이 명칭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으며, 고려의 멸망 이후, 조선왕조가 창업하며 개성에서 천도하면서부터는 공식 명칭은 한성부(漢城府)가 되었지만 보통은 이전부터 계속 불린대로 한양으로 불린 듯하다. 물론 서울이라는 이름도 공식적 표기가 아닌 입말상으로는 함께 쓰였다.[2]
남연군 묘를 도굴한 서양인으로 잘 알려진 E,J.오페르트의 책인 <금단의 나라 조선>에서는 조선인들에게 한양에 대해 물었을 때, 조선인들이 한양이라는 명칭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중에서야 "아하~ 서울!"이라고 말했다고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볼때 적어도 구한말에는 한양이라는 말보다는 서울이라는 말이 조선인들에게 더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京城府)[3]으로 개칭되었다. 8.15 광복 후에 서울특별시로 바뀌면서 주변의 경기도 지역(광주, 양주, 고양, 김포[4], 시흥, 부천 등..)을 처묵처묵왕창 흡수하여 거대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1963년 서울 대확장 이전의 서울특별시는 남쪽에 영등포를 붙여놓은 한양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1963년 서울 대확장과 강남 대개발로 서울특별시 = 한양으로 보기에 애매해졌다. 물론 서울특별시의 전신이 한양인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서울은 한자어가 아니라서 따로 한자 표기가 정해진 게 없었기 때문에 중국 및 중화권에서는 20세기 이후에도 한성부에서 이름을 따와서 서울을 계속 한성(漢城)이라고 불렀다. 덕분에 서울대학교와 한양대학교와 한성대학교가 중국인들에게 혼동되기도 했다. 최근 서울의 음차표기로 '셔우얼(首爾, 으뜸가는 도시란 의미라고)'이라는 이름을 새로 만들어 중화권에 홍보하고 있는데 중국인들은 한성이 더 낫다면서 별로 마음에 안 들어하는 모양이다. 한성의 한은 한강의 한이지만 한자의 뜻을 읽었을 때 'city of China'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기분과는 별개로 많이 정착되고 있는 중. 아무래도 서울이라는 발음과 근접하기도 하고, 지명이기 때문에 한국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한양은 조선의 정치적 중심지로, 한양 성벽으로 둘러싸인 사대문과 사소문, 내부에는 여러 궁궐과 종묘가 갖추어져 있으며 양반관료 계층이 모여 살았다. 하지만 일제감정기 의 주요 건물들을 허문 일(예를 들면 의정부 건물과 서대문, 한양성벽)과 6.25 전쟁, 목조 건물의 한계, 경제개발시기의 도심 재개발로 인해 과거 한양의 모습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사대문, 도심내의 궁궐, 복원중인 성곽, 북촌, 서촌의 한옥 등에서 19세기 말 및 20세기 초의 한양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3 방어
성벽을 갖추고 있기는 한데, 인구와 병력에 비해 성벽이 너무 길고 지형도 평탄해서 막상 농성전에는 그리 적합하지는 않다.[5] 사대문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숭례문 항목 참조) 유교적 정치 관념을 반영시킨 도성이라는 의전적 의미가 강하며, 성곽은 한성부의 행정적 경계에 해당한다. 정확히 말하면 성저십리라고, 한양 성곽 바깥 10리 지역까지는 한성부의 관할지역이었다. 성저십리는 민락, 벌목, 매장 등이 금지된 도시(농업)산업배후지역이고, 한양성 안이 거주 및 생활지역이다.[6] 한양의 외성, 즉 서울 성곽은 로마 제국의 성벽과 마찬가지로 방어적인 성격보다는 행정적, 상징적 의미가 강했다.[7]앞서 말했듯이 성곽의 규모도 거대한데다가 10만명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를 끼고 농성전을 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어서 서울 성곽을 사이로 공성전이 벌어진 적도 없고 그런 시도도 없었다. 심지어 이괄의 난에서 시가전이 아닌 무악재의 야전이 벌어졌다.
한양성벽이 표시된 관광지도 ▶
어차피 난공불락의 철옹성은 없다는 점에서 더 현명한 방어정책일 수도 있다. 고구려는 2번이나 수도가 털린 이후에 천도하면서 계획적인 축성으로 행정성과 방어성을 통합하여 더 견고한 평양성을 구축했지만 단 한 타로 결국 나라가 멸망했으며, 고려의 경우 개경성을 수도 없이 개축하며 방어에 치중했지만 개경(현 개성특급시)은 허구한 날 털렸다.
4 트리비아
조선 건국 이후 정종이 왕자의 난 때 혈육들과 공신들의 피를 너무 많이 보았다는 이유로 도읍을 잠시 개경으로 옮겼는데, 태종 집권 이후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지만 개경과 무악(신촌)신도시를 주장하던 신하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그것이 못마땅했던 태종은 "내가 종묘에 들어가서 엽전을 던져 볼 테니 그 결정에 따르라"라는 말과 함께 신하 5명을 데리고 엽전을 던져 점을 쳤는데 2:1로 한양이 나와서 다시 천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건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는 실화이다.[8]
한성부 관아가 중부, 북부, 남부, 동부별로 건물이 따로 분포했었다. 마치 서울지역 검찰청이 서울중앙지검, 서울남부지검, 서울동부지검, 서울북부지검 이런 식으로 나뉘어진 것과 비슷. 한성부 중부 관아는 지금의 KT 광화문지사 건물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역사적 지명이 되었지만,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지방 소도시나 시골 노인들은 '서울'을 '한양' 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종종있었다.
- ↑ 양(陽)은 강의 북쪽지역에 붙이는 접미사이다. 낙양이나 심양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 ↑ 1668년의 하멜표류기에 조선사람들은 수도를 sior(서울)이라 부른다고 나온다.
- ↑ 단, 경성이란 명칭은 조선시대에도 흔히 쓰였다. 다만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로서 쓰였지 공식 명칭은 아니었다. 즉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일반명사로서의 경성은 일제의 잔재가 아니다. 하지만 아예 기존 명칭을 없애고 고유명사화시켰다는 점에서는 일제가 잔재가 맞다고 볼 수 있다.
- ↑ 이것 때문에 김포국제공항이 서울특별시에 있는 것이다.
- ↑ 한성 성벽에서 그나마 지형이 험한 곳은 북악북쪽의 북악산과 인왕산 자락 정도이다. 나머지는 남산을 제외하면 사실상 완전한 평지였다. 이런 이유를 들어 숙종은 북한산성을 포함해 경기도 일대에 산성을 여기저기 만들고 청나라에는 외적방어용이라고 강변한다.
그래놓고 한양성곽은 잘만 개축했다.실상은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제외하곤 반란대비용이었을거란 견해도 있다. - ↑ 물론 후기에는 인구가 늘고, 제한이 느슨해지면서 민락들이 생기기 사작한다.
- ↑ 그러나 로마제국 후기에 건설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은 순수한 의미의 '방어'용이었다. 이 때는 로마 시 외곽 전체를 시벽(市壁)처럼 둘러싸는 형태였다.
- ↑ 태종 8권, 4년(1404 갑신/명 영락(永樂) 2년) 10월 6일(갑술) 1번째기사. 하륜은 무악 신도시의 열성 지지파였다. 이유는 이미 이전에도 주장한적이 있어서 관철시켜야 자기 입지가 더 강화되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