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문서 : 이수영(가수)
1 성장기
분당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원전문대 유아보육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1] 고등학교 시절 연극부 창단 멤버로 활동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상당히 친해서 방송에서 고교 동창 친구들과 '까단리'(까만 단발머리라는 뜻)라는 모임을 만들어 서로 개그경쟁과 개인기 심사를 펼친다고 밝힌 적도 있다. KBS <해피투게더-보고싶다 친구야>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골목대장으로 놀았다. 메칸더V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이때 이마가 넓어서 붙은 별명이 만주벌판. 혹은 이마에 여드름이 많이 난다고 기름진 만주벌판, 줄여서 기만이.
2 1~3집
1집부터 3집까지 동양풍의 멜로디가 들어간 소위 오리엔탈 발라드를 선보이며 그럭저럭 인지도도 있고 음판 판매량도 괜찮았지만,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줄곧 2위만 하면서 지독한 콩라인을 겪었던 시기.
2001년 3집 '그리고 사랑해'부터 본격적으로 1,2위를 다투기 시작했으나, 2위만 14번하고 1위 수상에 실패했다. 안습 MBC 게릴라콘서트에서 고백하기로는 당시 <내 생에 봄날은 간다>로 최대 전성기를 누리던 CAN의 배기성이 '너는 가수 인생이 오래 남지 않았느냐, 우리는 이번이 마지막일 거다'라며 1위를 양보해 달라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수영 1집 타이틀 곡 I Believe
이수영 2집 타이틀 곡 Never Again
이수영 3집타이틀 곡 그리고 사랑해
2002년 초 MBC 라디오에서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 방송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인 <감성시대>의 DJ를 맡았는데, 조용한 프로그램이 주류였던 심야에 개그를 폭격하며 상당히 인기를 끌었고,[2] 4집 홍보에도 도움이 되었다. 2002년 그녀의 가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게 될 4집의 '라라라' 가 히트를 하면서 비로소 처음으로 1위도 차지하고 콩라인 탈출과 함께 발라드의 여왕이라는 칭호까지 얻게 된다. 첫 1위를 하고 눈물바다가 되었음은 당연한 일. 그리고 데뷔 후 처음으로 연말 시상식에도 참가했다. 4집은 이수영의 앨범들 중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앨범이 되었다.
2000년도에 제작된 애니메이션 하얀마음 백구의 오프닝과 엔딩을 맡기도 했다
2002년 당시 아동용 교육비디오 <빠빠라빠>, <WOW Go Go English>를 찍었다. 흑역사 of 흑역사 6.5집 발매와 비슷한 시기에 이 비디오의 음원들이 스트리밍사이트에 올라와 전 소속사의 횡포가 아니냐는 말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3] 이후 스트리밍이 중단되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사건 이후 7집이 발매되었을 당시 팬들 사이에서 팬사인회에 <빠빠라빠> 들고 가서 사인 받기가 유행했다.
3 4,5집
이수영 4집 라라라
이수영 5집 덩그러니
수정 이전에는 4집 이후로 콧소리 비중이 점점 높아진다고 서술되어 있었는데 사실이 아니다. 다만 타이틀곡에서 후렴구와 오케스트라에 집착하는 경향은 분명하며, 이는 7집 <Grace>까지 이어진다. 4집의 후렴구인 '라라라' 가 대중에게 제대로 먹혔던 것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4]
4집(2002.9)과 4.5집(2003.2) 사이의 활동 공백이 거의 없었던 것과 달리 4.5집-5집 사이에는 5개월 가까이 쉬었는데, 소속사에서는 이 사이 '이효리vs이수영' 구도와 발라드의 여왕 떡밥으로 언플을 융단폭격한다.(...)[5] 이게 먹혔는지 2003년 8월에 발표한 5집 "This time"의 타이틀곡 '덩그러니' 가 히트에 성공했다.[6]
<덩그러니>로 지독하게 가수를 돌리던 소속사가 의외로 후속곡 <여전히 입술을 깨물죠>는 별다른 방송 노출을 시키지 않았다.[7] 후속곡은 활동 투자 대비 괜찮은 성적을 내기는 했으나 '대히트'라고 보기는 거시기한 수준. 대신 음반 판매량은 그해 모든 가수들 중 독보적이었다.
그리고 다가온 2003년 연말 시상식.[8] 당시 신드롬으로 고공비행 중이던 이효리가 SBS와 KBS에서 '10 minutes' 으로 대상을 휩쓸면서 지상파 3사 그랜드 슬램을 목전에 두고 있었을 때 MBC에서 이수영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이효리의 트리플 크라운을 저지했다.[9] 이 때 이수영은 감격해서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 통곡했고 이후 2년 정도가 이수영의 가수 인생에 있어 정점이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10]
5집 활동 당시 시력 상실설과 청력 상실설이 있었으나, 소속사와 이수영 본인은 기사 내용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는 해명을 한 바 있다. 다만 '시력상실' 수준까지는 아니나 눈이 나쁘긴 한 듯. 안경 끼고 운전하다 접촉사고가 나서 눈 밑에 상처가 난 적도 있다. 라디오에서는 가끔 안경을 쓴 모습이 포착된다. # # 이땜에 동정 팔아먹는 가수라는 악플도 있었다
대상 수상 직후 리메이크 앨범인 5.5집 <Classic>을 내놓았는데, 이후 리메이크 음반 붐의 시초 격이었다. 이 음반은 익숙한 주멜로디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세련됨을 더하는 편곡으로 평단의 호평을 얻었다. 그러나 방송 활동은 하지 않았고 짧은 휴식기를 가졌다. 이때 타이틀곡은 이문세의 원곡인 <광화문 연가>. 2004년 음반판매량 2위를 기록할 정도로 히트했고[11] CD와 테이프 판매량이 거의 비슷한 기현상을 낳기도 했다. <광화문 연가>는 방송 출연 한 번 없이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후속곡인 <꿈에>도 꽤 히트했는데, 뮤직비디오가 '성인의 영혼이 빙의된 어린이'를 콘셉트로 촬영되어 방송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논란이 된 이유는 빙의 그 자체로 인한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 지금은 잊힌 일이지만, 사실상 최초의 페도필리아 콘셉트 논란이었다. 어린 아이가 짙은 화장을 하고 어른 역할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는 인식이 지금보다 강했기 때문에 뭔가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게다가 조덕배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이 곡의 본래 내용이 빙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어린이에게 성적인 역할을 맡기려는 핑계라고 보는 시각이 강했다.
4 6집, 일본에서의 실패와 소속사 문제
이수영 6집 휠릴리
2004년 상반기 일본 진출에 도전한다. 그러나 당당히 밝혔던 포부와는 다르게 일본 진출은 대실패하였고 2004년 6집으로 한국에서 컴백한다.[12] 타이틀 곡인 '휠릴리' 도 히트에 성공하며 2년 연속으로 MBC 연말 시상식에서 대상을 타고 골든디스크 대상까지 수상하였다. 그리고 6집이 끝난 후 팬텀 엔터테인먼트를 떠난다.[13]
팬텀 엔터테인먼트는 이수영과의 계약이 종료된 후에도 본인도 모르는 콘서트를 잡아 공연 사흘 전에 통보하질 않나, 베스트 앨범 등을 내서 팔아먹으며 끝까지 빨아먹었다. 이수영 7집은 팬텀이 '6.5집'이라는 명목으로 발매시킨 As time goes by 때문에 발매가 1년 이상 연기되기도 했다. 이 앨범에 수록된 <꽃들은 지고>의 뮤직비디오 주인공은 팬텀에서 곧 데뷔 예정이었던 아이비였다.[14] 그리고 팬텀 엔터테인먼트는 훗날...
5 7집, 또 한 차례의 소속사 문제
팬텀 엔터테인먼트를 떠나 2005년 봄 신생 회사인 리쿠드 엔터테인먼트에 정착했다. 생일파티 겸 팬미팅도 열었고 여름에 팬캠프 행사를 여는 등 팬서비스가 강화되는 측면이 보여 팬들 대다수가 이번에는 지원 빵빵하게 해주는 안정적인 소속사를 마련했다고 생각했다. 이때는.
이수영 7집 Grace
2006년 7집 <Grace>를 발표했다. 7집은 음악적 완성도와 대중적 인기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음반으로 호평받았다. 타이틀곡 외에도 여러 곡이 차트 진입에 성공했으며, 음반산업 사양세+2달간의 짧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21만장이라는 판매고를 올렸다. 이기찬의 피쳐링과 이준기 주연의 뮤직비디오가 화제가 되었던 타이틀곡 <grace>는 2달 활동기간 중 라디오에서 2000번이나 선곡되는 기염을 토했다. 벅스뮤직에서 8주간 차트 1위를 기록하기도 했고. 또한 이때부터 TV 오락 프로그램에도 자주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박경림이 레귤러 멤버로 출연하던 SBS <X맨>에서 대활약. 주얼리 이지현에 이어 '퀸오브 당연하지'로 등극했다. 너구나. 맹랑하구나.[15]
6월에는 신동엽과 함께 <신동엽 이수영의 음악공간>이라는 음악프로그램 MC를 맡기도 했다. 이수영이 공중파 방송에서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입었던 것이 이때였다.[16] 이 프로그램 주제가로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노래를 불러 음원을 발매하기도 했다. 개그 성향이 신동엽과 묘하게 비슷해서 두 MC 간 호흡은 나쁘지 않았다. 이문세가 출연했을 때는 <이별 이야기>,[17] 이기찬이 출연했을 때는 <또 한 번 사랑은 가고>를 듀엣으로 불렀다. 그러나 이듬해 4월 MC에서 하차했고 이후 해당프로는 <이적의 음악공간>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소속사와의 계약금 지급 등의 문제로 서로 맞고소를 하면서 2년만에 리쿠드 엔터테인먼트와 결별한다. 소속사 리쿠드 엔터테인먼트는 미숙한 업무처리로 인해 이수영에게 계약금을 지급하지 않았으며, 계약금 지급을 요구한 이수영의 요구에 이수영의 매니저팀을 전원해고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또한 2006년 하반기의 전국투어 콘서트 일정을 이수영의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체결하는 등 여러면에서 불성실한 계약이행을 해왔다는 것이다.
6 8,9집
2번 모두 소속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었기 때문인지 2007년 직접 해브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다. 경영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고, 대표이사는 이수영의 고모였다.
이수영 8집 단발머리
2007년 9월 8집 <내려놓음>을 발매하고 타이틀곡 <단발머리>로 활동했다. 3집 이후 고수하던 긴머리를 싹둑(!) 잘랐다. 컴백 당시 쇼케이스도 했고, 지상파에서 3위를 기록했다. 데뷔 이후 처음으로 의상 컨셉이 미니스커트였다(!). 다리가 예쁜데 지나치게 보수적인 패션 탓에 코디를 죽입시다 코디는 나의 원쑤 잘 드러나지 않았다가, 미니스커트 착용 이후 '다리 예쁘다'는 칭찬이 늘었다. 직접 작곡한 <라벤다>라는 곡이 수록됐는데, 친구 서민정의 결혼식 축가였다고 한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스스로 사투리와 개그성 꺾기창법으로 노래를 쑥대밭(...)으로 만든 패러디곡 <쑥대머리>를 공개하기도 했다. 11월 22일 8집 리팩키지를 내고 뮤직비디오도 홍보도 없이 타이틀곡 "남자를 모르고"로 활동했다.
2008년 11월 미니앨범 <Once>를 발매하고 타이틀곡 <이런 여자>로 활동했다. 특유의 동양적 색채를 버린 오리지널 발라드 넘버였으나 차트 진입에도 실패했다. 사실 <Once> 자체가 완성도가 높지 않았고, 애초에 심한 우울증을 겪은 이수영이 일단 무대에 오르고 활동을 이어가도록 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는 생존신고용 음반이기도 했다. 다만 김남조 시인의 <너를 위하여>를 가사로 쓴 <너를 위하여> 한 곡 만큼은 명곡.
이수영 9집 내 이름 부르지 마
2009년에는 김아중, 황정민 주연의 드라마 <그저 바라 보다가>에서 황정민 여동생의 친구이자 황정민을 짝사랑하는 '김승은'이라는 역할로 배우로 데뷔했다. 어색하지도 않고 자연스러운 연기였다는 평.[18] 이어 10월에는 조규만과 작업한 9집 <the DAZZLE>을 발매했으나 방송활동이 거의 없었고, 차트에서도 히트하지 못했다. 대중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던 탓인듯. 타이틀곡은 <내 이름 부르지 마>. 대신 다양한 음악적 시도가 돋보이는 음반이며, 제대로 들어본 이들은 대부분 호평. 정말 열심히 듣는다는 전제 하에 들으면 들을수록 좋다.
7 2010년대
2010년에는 전년도의 시즌 1에 이어 슈퍼스타K 시즌 2 지역심사위원을 맡았으며 라디오 개편을 통해 '이수영의 뮤직쇼' 를 맡아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몇몇 지역에서는 일부만 방송되거나 지역 방송이 나오는 등(아예 안 나오는 곳도 있다고 한다) 방송을 듣는 사람들의 애환인 지역 차이를 비껴가진 못한 듯. 4월 8일자로 뮤직쇼에서 하차.[19]
2011년 가을 나는 가수다의 새로운 가수라는 떡밥이 흘러나왔으나, 육아에 전념하고 싶다며 섭외를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출산은 7월 하순이었고 아이가 100일도 넘기지 않은 상황에서 방송에 복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20] 무슨 헐리우드도 아니고 그러나 이듬해 상반기에 시작된 나는 가수다 2에 출연해 첫 경연 1위를 기록했다.
2012년 9월에는 새로 방송을 시작한 KBS 2TV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내 생애 마지막 오디션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하고 있다. 심사위원으로서 우아하고 수사적이고 효율적인 독설을 구사해 박근태와 더불어 편집상 악역기믹을 도맡았다. 박근태가 직선적 돌직구라면 이수영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내마오 출연자들과 아직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트위터에서 친목질 하는 모습이 간혹 목격된다.
2013년 1월에는 SBS MTV의 더 스테이지 빅 플레져의 MC를 맡게 되었고 3월 28일 정말 오랜만에 앨범을 냈다. 9.5집으로 앨범 제목은 클래식 : 더 리메이크 두번째, 제목 그대로 리메이크 앨범이다.[21] 나가수에서 부른 6곡과 새로운 노래 두 곡을 리메이크하여 수록하였다.
4월 20일 방송된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 코리아에도 호스트로 출연했다. 유세윤, 김슬기와의 꽁트 연기에서는 '리액션 인간문화재' 캐릭터로 등장했는데, 김슬기에게 오렌지주스를 퍼부어야 하는 장면에서 얼굴을 살짝 피해주었다.[22]
2014년 9월 21일 채널A 광화문 콘서트를 녹화하였다. 아줌마 라이브가 일취월장하는군 흐뭇하구러
2015년 12월 13일자 복면가왕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특유의 비음과 손동작, 노래 부를 때 고개를 돌리는 각도와 마이크를 쥐는 자세까지 완벽하게 이수영이라는 추측이 있었으며 아프로디테는 2라운드에서 떨어졌고 네티즌들의 예상이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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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확히는 휴학 연장 신청을 제때 하지 않아 제적되었는데, 재입학이나 복학절차를 밟지 않았다.
- ↑ 이수영이 감성시대를 맡기 바로 직전엔 이주노의 뮤직토크가 있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12시~2시 슬롯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전반적으로 노래와 사연소개 위주로 진행한 프로그램들이 많았다. 어찌 보면 12시~2시 슬롯에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프로그램을 자리잡게 한 장본인이 이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수영의 후임 DJ인 UN 최정원이 다시 잔잔한 컨셉을 시도하였으나 다시 그의 후임으로 박경림이 오게 되는데..
- ↑ 비디오 제작사 측의 독단적 행위라고 한다.
- ↑ 4집-라라라, 5집-덩그러니, 6집-휠릴리. 또한 이 후렴구들은 그대로 곡의 제목으로 사용되었다. 7집-그레이스에서는 특이하게
라흘라흘랄랄라'라랄라를랄라라' 하는 유음구가 후렴구로 사용되었다. - ↑ 이효리의 가십성 기사를 쏟아내는 연예기자들에게 '이효리 라이벌'에 대한 수요가 있었던 것과 맞물리기도 했다.
- ↑ 그리고 5집은 이제까지 계속해서 이수영의 프로듀서로 강한 시너지효과를 냈던 MGR과의 마지막 작업이기도 했다. MGR의 동양풍 스타일이 유일하게 히트할 수 있었던 보컬이 이수영이었는데, 정작 이수영은 오리엔탈 발라드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 ↑ 이 당시 이수영은 엄청난 스케줄 때문에 평소 안 좋았던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주치의가 계속 이렇게 활동하면 평생 안경밖에 못 쓰거나(이수영은 평소 안경쓰기를 싫어해서 늘 콘텍트 랜즈를 꼈다고 한다.) 잘못하면 실명의 위험까지 있다고 진단했다고 한다.
- ↑ 이때가 이가엔터가 이수영을 가장 독하게 돌리던 시절. 12월 28일 SBS가요대전 리허설 당시 실신한 이수영을 안마 30분만으로 그대로 무대에 올렸다. 5집 라이브 중 제일 못했을 때가 이때였다. 영상을 보면 목에 핏대가 서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 당시 MBC가 10대가수 가요제의 수상기준을 명확한 수치에 따랐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음반판매량 비중이 가장 컸던 이 채점표에서 이수영은 음반 판매량에서 이효리를 따돌렸다.
- ↑ 이때 하도 울어서 이오열이란 별명이 붙었으며, 시상식 이후 일주일 간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이효리가 통곡하느라 바닥으로 무너져내리는(...) 이수영을 붙들고 대신 수상소감을 해주기도 했다.
- ↑ 1위는 서태지 7집 <Issue>. 그런데 3위가 이수영 6집 <the color's of my life>다.
흠좀무 - ↑ 성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식의 기사가 나갔고 아듀 콘서트까지 했다. 물론 이가의 무리수. 본인은 여기에 별 미련이 없는 듯 보인다.
- ↑ 사실상 수익을 내는 소속 연예인이 이수영 한 사람밖에 없던 이가엔터가 이수영 등골 빨아 회사 키워 팬텀 엔터테인먼트로 변신한 게 이때다.
- ↑ 발매경위와 별개로 <꽃들은 지고>는 명곡이다. 작·편곡 윤상에 작사 박창학이면... 더 설명이
필요한가?6.5집에는 치를 떨어도 <꽃들은 지고>는 좋아하는 팬들도 많다. - ↑ 이수영 본인은 원래 개그프로를 즐겨 보며, 스스로를 '웃긴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남 웃기는 걸 상당히 좋아하는 듯.
- ↑ 케이블에서는 MMF 때 한 번 입었다고 한다.
- ↑ 이수영은 이지훈의 음반에서 이지훈 신혜성과 함께 이 곡을 녹음한 적이 있다. 여담으로
이날 유난히 성량 컸다. - ↑ 이수영은 고교시절 분당중앙고 연극부 창단멤버였다.
- ↑ 임신이 이유였다. 나중에 SBS GO Show에서 설명하기로는 입덧이 너무 심해 음악 나오는 사이에 토하고 돌아와 진행했다고.
- ↑ SBS <GO Show>에서 털어놓은 내용을 감안하면 무대에 설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 ↑ 첫번째 앨범은 5.5집 클래식
- ↑ 대신 유세윤이 짤없이 퍼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