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井紘基刺殺事件(石井紘基議員暗殺事件)
1 이시이 코키는 누구인가?
이시이 코키는 일본 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국회의원으로 젊은 시절에는 안보투쟁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이었다. 이시이가 정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안보투쟁 당시 일본 사회당의 서기장이었던 에다 사부로가 시위대 앞에 서서 경찰을 가로막은데서 감명을 받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고.
소련에 유학을 다녀오고 러시아 여성과 결혼한 뒤 일본 사회당에 입당해서 에다 사부로의 아들인 에다 사츠키의 비서로 활동하다가 1978년에 칸 나오토와 함께 사회민주연합을 결성했다. 1992년에는 일본신당으로 당적을 옮겨 1993년 도쿄 제3구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쿠리모토 신이치로와 자유연합을 결성했고 쿠리모토가 자민당으로 옮겨간 뒤에는 일시적으로 자유연합의 대표를 맡기도 했다. 이후에 신당 사키가케를 거쳐서 1996년 일본민주당 결성때 참여하게 된다.
이시이는 이른바 폭탄 발언남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국회에서 내뱉는 발언들이 하도 폭발력이 높은 것들이라 그런 별명이 붙었다. 그가 주로 관심을 가진것은 일본 정부의 예산낭비와 인사비리 같은 것들이었는데 1997년에는 방위청 조달비리를 폭로하여 도쿄지검 특수부가 수사에 나서도록 하게 하기도 했다. 또한 관료의 낙하산 인사도 강하게 비판했으며 궁극적으로 낙하산 인사들이 장악한 공기업이 맡고 있는 부분들을 과감하게 민간 중소기업들로 이양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2 이시이 코키의 죽음
2002년 10월 25일, 이시이 코키는 세타가야에 있는 자신의 집 주차장에서 날카로운 회칼에 찔려서 살해당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를 죽였다는 범인이 자수했는데 그는 야쿠자 야마구치구미 출신의 우익단체 회장인 이토 하쿠스이였다.
이토는 이시이에게 집세를 부탁했지만, 이시이가 거절하자 앙심을 품고 그를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토의 진술에 의문이 많다는 지적이 있다. 애당초 이시이와 이토는 이전에 알던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런 관계에서 집세를 마련해 달라는 이야기가 나올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된것. 게다가 이시이가 평소 관료와 정부의 부패를 강하게 질타한 탓에 이토의 배후에 이런 관료와 정부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시이가 10월 28일에 대정부 질문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 그런데 이시이는 이 날 자신이 대정부 질문에서 중요한 사실을 밝힐 것이라면서 이 사실이 밝혀지면 여당은 뒤집어진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시이를 살해한 이토는 2004년 6월 18일, 도쿄 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법원은 판결에서 이토가 주장하는 범행동기를 믿을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후 2005년 11월 5일, 최고재판소에서 이토의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3 의혹
가장 큰 의혹은 사라진 이시이의 서류다. 이토가 이시이를 살해했을때 서류 가방에는 서류와 더불어 30만엔의 현금이 들어있었으나 정작 집세를 안줘서 죽였다는 이토의 말과는 달리 30만엔의 현금은 그대로 있었고 서류가 없어졌다는것.
게다가 죽은 이시이의 시신 상태를 살펴본 결과 왼손 중지가 밖에서부터 잘려져 있는 걸로 드러났다. 이시이의 아내는 이시이가 왼손으로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는 증언을 해 이시이가 서류가방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자 이토가 왼손 중지까지 절단해가면서 서류가방을 뺏어냈다는 결론이 된다. 결국 범인의 목적은 이시이가 가지고 있었던 서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
2009년 2월 11일 TV 아사히의 "슈퍼 J채널"에서 옥중의 이토를 전격 인터뷰한 내용에 의하면 이토는 누가 시켜서 이시이를 죽였다., 법정에서의 증언은 터무니 없었다.라고 진술해 이시이 살해에 배후가 있음을 드러냈다고 한다.
과연 이시이의 서류가방에 들어있었던 서류에는 무슨 내용이 있었길래 그가 살해당할 정도였을까? 사건의 실체는 아직도 미스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