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수(아동문학가)

李元壽
(1911년 11월 17일 ~ 1981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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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우리나라 근대 어린이문학과 문화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되며 그의 대표작으로는 홍난파에 의해 작곡된 <고향의 봄>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율곡 이이의 아버지와 이름이 동일해 네이버지식in에 이원수 선생님의 동요를 알려달라는 질문에 율곡 이이의 아버지라는 뜬금없는 답변이 달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니 맞긴한데 동요를 알려달랬지 가족관계 물어보드냐

배우자 역시 "뜸북뜸북 뜸북새"로 시작하는 '오빠생각'이라는 동요를 만든 아동문학가 최순애 씨(1914~1998)이다.[1]

2 생애

1911년 11월 17일 경상남도 양산군에서 태어났다. 창원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1922년 마산으로 이사해 마산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마산에 정착한 후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와 '신소년'을 애독하며 문학적 소양을 쌓았다. 1924년 '신소년'에 '봄이오면'을 발표했다. 마산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925년에 돌아가신 부친에 대한 그리움과 창원 소답리에서 지낸 유년시절에 대한 향수를 그린 동요 '고향의 봄'이 1926년 4월 '어린이'지에 입선하면서 정식으로 등단했다.

1925년 마산에서 활동하던 소년 단체인 '신화소년회'에 가입하여 문학을 접하고 민족애를 키워나갔다.

1926년 마산공립보통학교 6학년 때 조선인을 학대하는 일본인의 만행을 비난하는 글을 학급신문에 게재하여 경찰에서 문제를 삼았으나 당시 담임교사가 책임을 져 처벌을 면했다. 1928년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마산공립상업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는 '기쁨사'의 동인으로 가담, '어린이'지의 집필동인으로서 동시 '비누풍선'과 누나에 대한 그리운 감정을 그린 '섣달 그믐밤'등을 발표했다. 1931년 마산공립상업학교 졸업하고 경남 함안군 함안금융조합에 취직하였다. 같은 해 9월 조선의 아동예술운동을 위한 단체인 '신흥아동예술연구소'가 창립될 때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35년 2월 27일 '함안독서회사건'[2]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35년 4월부터 10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징역 10월, 집행유예 5년을 언도받고 출옥했다. 1936년 1월 출감한 후, 6월 기쁨사 동인 최순애와 결혼했다. 한성당 건재약방의 서기로 잠시 근무하다 금융조합 이사 김정완의 도움으로 1937년 함안금융조합에 복직했다. 문제는 이 금융조합에 입사한것이 이원수의 생애에 있어서 크나큰 여러 불명예를 안게 된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이원수는 총독부 체제에 순응하게 된다. 전시체제기 동안 이원수는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기관지의 기관지 '반도의 빛'이라는 곳에 내선일체를 지지하는 글들을 5편을 기고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이원수는 2008년 4월 29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광복이후, 경남 함안군 가야면 치안위원(건준이나 인민위원회로 추정된다.)으로 활동 하면서 한글강습소에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1945년 10월 경기공업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하였고, 12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에 가입했다. 1945년 2월 8일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이 통합하여 결성한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 당시 좌익계열의 '새동무'와 '아동문학', 우익계열의 '소학생'에 모두 참여하여 좌우익을 넘나들며 활동했다.

즉, 이원수는 '좌파와 우파 모두 넘나드는 중도파로 분류되는 문학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점때문에 이원수는 대한민국정부 수립 직후 국민보도연맹에 반강제로 가입해야했고, 우익 문학단체인 '한국문학가협회'에 가입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지 경기도 시흥군에서 영국군 부대에 노무자로 뽑혀 동두천에서 1년간 천막생활을 했다. 1952년 아동 월간지 '소년세계'를 창간하고 주간으로 일했다. 1953년 창작집 '오월의 노래'와 '숲 속 나라'를 신구문화사에서 간행하였고, 1954년 한정동과 함께 아동문학회 창립에 참여하여 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56년에는 아동 월간지 '어린이 세계'의 주간을, 1958년에는 자유자유문학가협회 아동문학 분과위원장을 지냈으며, 1959년에는 서울시 문화위원회 문학분과위원을 지냈다.

1960년 삼화출판사 편집장을, 1965년에는 경희여자초급대학 강사를 지냈다. 1968년 시 '고향의 봄'을 기리는 노래비가 경남 마산시 산호공원에 건립되었고, 같은 해 창작집 '메아리 소년'에 대한 기독교서회에서 출판되었다.

이밖에도 아동문학에 많은 공헌과 여러 각종 수상들을 받았는데, 그만큼 그는 '아동문학계의 거성'이었다. 1979년 11월에 갑자기 구강암이 발병하여 1981년 1월 24일에 사망했다. 1984년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그를 기리어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1970년대까지 활발히 활동한 아동문학가였기 때문에 작품도 상당히 많고, 동시, 동화, 아동소설, 위인전, 수필 등 장르도 다양하다. 활동 시대도 넓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1950, 60, 70년대의 사회 및 생활상이 작품 속에 다양하게 녹아 있다는 것도 특징할 일이다. 1983년에 웅진출판사에서 이원수의 작품을 모두 전집으로 출간한 적이 있는데, 30권이나 되는 분량이었다.

이원수는 '아동문학계의 거성'으로 어린이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문학인이었다. 그리고, 이념도 좌익이고 우익이고 얽히지 않았던 중도적인 노선을 띠었던 분이었지만 일제말기 전시체제때 내선일체를 지지하는 글들을 5편 기고한점 때문에 친일파로 몰려 비판을 받고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것은 2011년 이원수 선생의 유족들이 당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는 점이다. [1]
  1. 참고로 이 오빠생각이라는 노래는 가사 이면에 당시 암울한 현실의 모습을 담고 있는 가사이기에 가사가 시궁창/한국 항목에 등재되어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2. '독서회'라는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책이나 문학작품등 연구하는 단체조직을 말한다. 일제강점기때 일제 경찰은 이러한 책이나 문학작품들을 비밀리에 연구하는것 자체로 '사상범죄자'로 취급했을정도였다. 그만큼 그시대는 엄청나게 광기였던 시대였다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