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봄

1 개요

일제강점기인 1926년 이원수 시인이 발표한 동시이며, 동요이일래(본명 이부근)작곡 버전홍난파 작곡 버전 두 종류가 있다. 이 중에서 세간에 알려진 버전은 홍난파 버전. 일본어 버전도 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일본식 운율인 7·5조가 사용되어 일본인들에게도 친숙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비슷한 7·5조 노래로 '학교'과 '섬집 아기'가 있다.

가사는 서정적이지만 곡조는 섬집 아기처럼 우울한 느낌이 드는게, 어두컴컴한 곳에서 혼자 듣다보면 좀 무서워진다(…).하지만 묘하게 착착 감기는 곡이라 초딩때 배우는 노래인데도 성인이 되어 잊어버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원수는 이 동요를 중학시절인 10대에 지었는데, 그 1절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이다.

이 노래의 배경이 되는 곳은 당시 이원수가 살고 있던 창원. 지금의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아니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창원은 마산 등에 비하면 시골에 가까웠다. 특히 서부지역은 더더욱. 예를 들어 도계동만 하더라도 90년대 초반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그래서 창원 팔용동에는 "고향의 봄 도서관"이라는 곳이 있다. 그러나 이원수가 노래한 꽃피는 산골은 팔용산 쪽이 아니라 그 반대인, 현재 하이트맥주 공장이 있는 천주산이다. 이 곳의 진달래는 산 사면을 따라 울긋불긋 피어올라가는 모습을 보인다. 참고로 당시 이원수가 살고 있었던 곳은 지금의 소답동.

2011년 초 이원수가 고향의 봄을 쓴 곳이 확인되었다. 마산(現 창원 마산합포구) 오동동 71번지라고. ‘고향의 봄’ 탄생지는 마산 오동동 71번지

여담으로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인 영구람보에서는 엔딩곡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예전에 고교야구 대회에 재일교포 야구단이 초청받아 참가했었는데 경기에서 재일교포 팀이 승리할 경우 한국의 여러 고교팀이 각자 학교의 교가를 트는 것과 달리 이 고향의 봄을 틀었었다.[1]

일제강점기 시기에 지어진 노래이다 보니 북한에서도 불리고 있는 노래다. 북한에서는 '동네'가 아니라 '동리'로 부르고 있다.

2 가사

2.1 한국어 원 가사

2.1.1 1절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2.1.2 2절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2.2 일본어 번역 가사

2.2.1 1절

我が生まれた故郷 花咲く 山里
桃の花 あんずの花 赤ちゃん つつじ
色とりどり鮮やかな 花の宮殿[2]
その中で 戯れた時が 懐かしい

2.2.2 2절

花の里 鳥の里 我が故郷
青い草[3] 南から 風が吹けば
川の ほとりの 柳が 踊り躍る[4]
その中で 戯れた時が 懐かしい

3 1을 패러디한 교도소 노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980~90년대까지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로 개작한 노래가 유행했다. 일설에 따르면 전두환노태우가 잡혀들어갔을 때 유행했다고 하나[5], 사실 이 노래개작 자체는 1980년대 국민학교 시절부터 존재했었다. 그 이전에 이 노래를 불러보셨던 분들은 수정바람.
지역마다 가사는 다르지만 내용은 거의 대동소이하게 XX교도소에 수감됐던 죄수가 꽁보리밥 먹다가 10년만에 탈옥해서 집에 와보니 아내는 도망갔다가끔 NTR는 내용이다. 대개 다음과 같은 가사로 불렸다. 물론 지역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
개 밥에 된장국도 맛만 좋더라
감옥살이 10년하고 집에 와보니
마누라 새끼 집 팔아먹고 도망갔더라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
눈만뜨면 꽁보리밥에 김치 깍두기
10년만에 탈옥해서 집에 와보니
마누라는 집 팔아먹고 토끼삐뜨라(도망갔대요)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
꽁보리밥에 된장국이 일품이라네
10년만에 탈옥해서 집에 와보니
여편네는 집 팔아먹고 도망갔대요

나의 살던 고향은 부산교도소
날만 새면 꽁보리밥에 김치 깍두기
집에 오니 아이들은 고아원가고
여편네는 집 팔아먹고 도망갔대요[6]

나의 살던 고향은 광주교도소
눈만뜨면 꽁보리밥에 빳다 열두대
한대 두대 세대 네대 아이구 엉덩이야
신신파스 붙일 때가 그립습니다[7]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
꽁보리밥에 된장국이 그립습니다
교도생활 10년에 집에 와보니
여편네는 집 팔아먹고 날랐습니다[8]

혹은 2번째 행이 썩은 밥에 개구리 반찬 그립습니다로 치환되기도...

대개는 그 지방에 있는 교도소의 이름을 따거나 아니면 인천교도소라고 불렸다.[9] 하지만 정작 인천에는 교도소가 없다. 현재 인천지방법원 옆에 인천구치소가 있기는 있다.[10] 대구에서는 달성군 화원읍의 화원교도소를 넣어 부른다. 구미도 인천교도소를 넣어 부른다. 서울 송파구 일대에서는 특이하게 성동구치소라고 하였다. 물론 교도소와 구치소의 차이를 아이들이 알 리가 없었으니...
  1.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에서 자세히 묘사된다.
  2. 직역하면 '알록달록 또렷한 꽃 궁전' 한국어 가사와 다르다.
  3. '파란 풀'로 번역되었다. 일본어로 '들'은 '野原(のはら)'. 박자를 맞추기 위해 조금 바꾼 듯 하다.
  4. 직역하면 '냇가의 수양버들이 춤추고 춤추네'. '춤추는 동네'라는 명사 서술어가 동사 서술어로 번역되었다.
  5. 이것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만화영화 '두치와 뿌꾸' 오프닝 노래를 개사한 것도 유행했다. 이쪽은 더 직접적으로 까고 있다(...). 두치와 뿌꾸 항목 참조.
  6. 부산지역에서 구전되던 가사
  7. 광주지역에서 구전되던 가사
  8. 서울 북부에서 구전되던 가사
  9. 전두환 잡혀들어갈 시절엔 안양교도소라고 불렸다.
  10. 이 인천구치소가 예전에는 인천소년교도소라는 이름으로 있었고 소년범을 수용했었다. 지금도 형기 5년 이하 초범수형자(기결수)가 일부 수용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