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

1 利潤, profit

1. 장사 따위를 하여 남은 돈.
2. 기업의 총수입에서 임대, 지대, 이자, 감가상각비 따위를 빼고 남는 순이익.

경제학 등에서는 '매출(수익)에서 비용을 뺀 것'으로 정의한다. '순수익'이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쉬운말로 이윤이란 얻은것- 들인것 = 남는돈"' 을 말하는 것이다.

회계학에선 "남는것 > 0" 인걸 회계학적 이윤이라고 하며, 흔히 알고있는 게 이것이다. 경제학에선 여기에 기회비용을 뺀다.

예를들어 어떤 사업을 한다고치면
100원을 들여서 120원의 수익이 나면 회계적으론 20이 이득인데 경제학에선 만약에 그 시간동안 두번째 최상의 선택을 해서 50을 벌수있었다면 100원들여서 120의 수익내는동안 50을 못했기 때문에 120-100-50 = -30 즉 30을 손해봤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기회비용이 50이라면 회계적 이윤 50까지는 경제학적으로는 초과이윤이 아닌 정상이윤이 된다.

1.1 초과이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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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 normal profit, abnormal profit, excess profit, surplus profit
쉽게 말해 대박이 났다는거다
초과이윤이란 이윤이 정상적이지않게 높은 값를 말한다. 이윤이 정상이윤보다 높으면 초과이윤을 가진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2가지 성질을 가지는데
한번 빤짝하고 (과도기적 성질), 언제나 나올수있다 (항구적 성질)

완전경쟁시장에서는 정보력이나 조그마한 발전같은 질적인 문제가 키워드고 독점시장에서는 하청을 쥐어짜서 생산비나 인건비를 낮추거나 물건값을 올려서 소비자를 우려먹거나 로비하고 정부에다 비싸게 주고 파는 방법이 있다.

2 상나라의 전설적인 재상

伊尹
(생몰년 미상)

본명은 윤지(尹摯). 유신씨(有莘氏) 씨족의 일파라고 알려져 있으나, 일설에 따르면 노예 출신으로 유신씨의 노복으로 있었다는 설도 있다. 하나라걸왕을 무너뜨리고 상나라탕왕을 임금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져있다.

이미 관직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름난 선비였으며, 탕왕의 초빙을 받아[1] 상나라에 입조하였으며, 탕왕은 이에 파격적으로 곧바로 상(相)에 임명하게 된다.

이후 이윤은 하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을 세우기 시작하는데, 수 차례 하나라에 파견되어 직접 정탐활동을 벌였으며, 내부 혼란을 부추기기도 했다. 또한 상나라 뿐 아니라 하나라의 다른 속국들까지 상나라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외교 활동을 벌이기도 했으며, 최종적으로는 군대의 지휘자로써 결전지의 지리를 미리 탐사하여 이를 전투에 적극 활용하는 방법으로 걸왕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지배국의 위치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한다. 이는 당시 사방 70리에 불과했다고 하는 상나라로써는 매우 놀라운 일로 이윤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

상나라의 집권 이후, 외병, 중임 등의 탕왕의 후임 왕들을 재상으로써 잘 모셨으나, 탕왕의 손자인 태갑 때에 이르러 태갑이 부덕한 행동을 보이자 궁궐 내에 별궁을 만들어 태갑을 가두어 버리고, 3년간 국정을 섭정하게 된다. 이 때 태갑을 비판하여 한 말이 습여성성(習與性成)이라는 사자성어로, 습관이 쌓이면 성품이 된다는 뜻. 이후 태갑이 자신의 부덕을 사과하자 이윤이 권력을 돌려주었다고 한다. 단, 여기에도 이견이 있는데 죽서기년에서는 이윤이 태갑이 어려 별궁에 가두고 7년 동안 왕 노릇을 하다가 태갑이 탈출하여 군사를 일으켜 이윤을 죽이고 왕권을 되찾았다는 기록도 있다.

사실상 권신이 약한 임금을 쫓아낼 때 가장 큰 핑계거리가 되는 두 인물 중 하나[2]로 이에 대해 비판을 받는 요소 중 하나이다. 수양대군단종을 쫓아낼 때도 이윤 핑계를 대면서 쫓아내기도 했다.

3 서진의 인물

李胤
(? ~ 282)

자는 선백(宣伯). 이민의 아들.

요동군 양평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렸을 때 아버지 이신이 공손도를 피해 달아났다가 근심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해 부모를 알지 못했지만 견식을 갖춘 나이가 되자 채소 반찬만 먹고 슬퍼하면서 3년 상을 치뤘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생사를 알지 못했으므로 신주를 세우고 이를 받들었다. 이로 인해 효성있는 인물이라고 세상에 알려졌고 용모는 검소하고 가난한 사람처럼 쓰러질 듯 했지만 마음이 침착하고 사리에 밝아 말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처음에는 군에서 상계연을 지냈고 이어서 주로부터 벽소를 받아 부종사가 되었다가 효렴을 통해 진북군사가 되었으며, 낙평후상으로 옮겼다가 낙양에 들어가 상서랑, 중호군사마, 이부랑 등을 지냈고 청렴하고 공평하게 인재를 선발했다. 이윤은 관중후의 작위를 받고 지방에 나아가 안풍태수를 역임했다가 사마소가 대장군의 종사중랑으로 삼았으며, 어사중승으로 옮겨 공평하고 삼가는 태도를 보이면서 곧게 바로잡아 백관들이 이윤을 꺼렸다.

263년에 촉나라를 정벌하자 서중랑장에 임명되어 관중의 군사를 감독했다가 하남윤에 임명되어 광육백의 작위를 받았으며, 265년에 상서에 임명되면서 후작의 작위를 받았고 정치를 제대로 하면서 문제가 있으면 시정해야 한다는 상소를 해 사마염이 이를 따랐다.

이윤이 충성스럽고 진실되면서 굽히지 않는 절도가 있다고 해서 사례교위에 임명되었지만 태자소부를 지내면서 낙양에 관청에 있으면서 감사의 직위를 겸임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해 사양했는데, 사마염은 태자소부, 사례교위가 충성스럽고 현명한 사람이 해야 한다면서 이윤이 사례교위도 겸임하게 했다.

275년에 황태자가 동궁으로 옮겼고 이윤은 아침, 밤으로 황태자와 교류하면서 바르게 인도해야 했으며, 이윤은 지치고 여위게 되어 장시간으로 일하는 것이 맞지 않았다. 이윤은 소부에서 물러나 시중에 임명되었고 특진이 되었으며, 상서령에 임명되어 시중, 특진을 그대로 유지하게 했고 이윤은 여러 관직을 역임했지만 아이가 아파도 약을 구할 정도의 돈이 없었지만 사마염이 이를 듣고 1만 전을 하사했다.

광록대부를 지내고 있을 때 양호가 거기장군이 더해지자 사양하고 이희, 노지 등과 함께 천거하면서 청렴하고 간소해 조정에 한 몸을 세웠다는 칭찬을 했으며, 이후 시중, 상서령을 지내다가 278년 9월 15일에 사도가 되었다. 280년에 오나라를 평정하고 사마염이 관직을 승진시키려 하자 이를 사양했지만 사마염이 허락하지 않아 승진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광록후의 작위에 봉해졌다가 282년 4월 1일에 죽었으며, 시호는 성후(成候)로 사마염은 사람을 보내 그를 기리는 사당을 만들게 하고 황태자는 사인을 시켜 조문하게 했다.

4 조선 경종

경종 문서 참고.

5 제로게임의 등장인물

이윤(제로게임) 문서 참조.
  1. 이에는 다른 설도 있는데, 이윤이 직접 탕왕을 초대하여 직접 요리한 음식을 대접하며 자신을 기용할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 사상 최초로 이름이 남은 요리사라고 불린다.
  2. 나머지 하나는 한나라곽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