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 「양호등전(羊祜等傳)」 | ||
양호 | 두예 |
목차
1 개요
羊祜 (221 ~ 278)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정치가 겸 장군. 자는 숙자(叔子).
두예, 마륭, 왕준과 더불어 서진의 명장, 그리고 형북 일대에서 진정으로 우러른 덕장.
2 생애
2.1 조위 시대
태산 남성 사람으로 그의 가문은 그에 이르기까지 9대가 2천석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며 청렴함으로 명성을 얻었다. 아버지 양신(羊茞)은 상당태수를 지냈으며 후한의 학자 채옹의 사위로, 즉 양호는 채옹의 외손자이자 채염의 외조카다. 거기에 신비의 딸 신헌영의 조카였고, 하후패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1] 그의 누이 양휘유는 사마사의 후처가 되어 경헌황후로 추존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를 잃은 뒤 숙부 양탐을 아버지처럼 공손하게 모셨다. 아직 아이일 무렵 문수가에서 놀고 있을 때 지나가던 어떤 노인이 그를 보면서 처사는 관상이 휼륭하니 노력하면서 60세가 안되어 천하에 큰 공을 세울 것이라 예언하고 사라졌다. 장성하면서 총명박학하고 키가 7척 3촌에 용모가 아름다워 눈썹과 수염의 풍모가 특히 돋보였다고 한다.
조상이 정권을 잡았을 당시 왕침이 양호를 눈여겨보고 관직에 추천하려 했으나 그는 '목숨을 다해 사람을 받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라 말하며 거절했다. 훗날 사마의가 주도한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이 몰락하자 왕침은 그의 생각이 옳았다고 했는데, 이 때도 일이 미처 그리될 줄은 몰랐다고 대답해 선견지명을 지녔음을 보여 주었다.
사마소가 대장군이 되었을 때 비로소 관직에 나갔는데 임용되기도 전에 중서시랑을 맡았으며, 이어 급사중과 황문랑을 역임했다. 당시 황제였던 조모가 시문을 좋아해 많은 신하들이 시문을 지어 바치다 혹은 황제의 비위를 거스른다 해서 배척당하기도 했는데, 양호도 이런 경우를 겪었으나 품행에 흔들림이 없어 식자들의 칭찬을 받았다.
조환이 제위에 오르자 관내후에 봉해졌다가, 외직을 구해 거평의 6백호를 받아 관의 비서감이 되었다. 종회는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시기해 매번 헐뜯을 구실을 찾았다고 하며, 이 눈치를 안 양호도 종회와 맞닿는 것을 피했다. 종회가 성도에서 난을 일으키려다 피살당하자 중앙으로 복귀해, 상국종사중랑이 되어 순욱과 함께 기밀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본 뒤 중령군으로 승진해 금군을 통솔했다.
2.2 서진 건국 이후
서진 건국 때 왕침, 순욱, 가충, 배수 등과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진이 세워진 뒤 중군장군 산기상시가 되어 식읍 3천호와 함께 군공에 봉해졌지만 이를 사양해 후의 작위를 받았다. 태시 연간에 상서우복야 겸 위장군에 올랐다.
도독형주제군사에 임명되어 양양에 주둔하며 형주 북부를 지켰는데, 농지 8백여 경를 개간하여 10년치 군량을 마련하고 형북 일대의 민심을 수습하며 오나라 포로 중 고국을 그리워하는 자가 있으면 기꺼이 보내주는 등 너그러운 정책으로 신망을 얻었으며 한편으로는 오의 석성 태수가 자주 양양을 침공하자 계책을 써서 그를 파면시키는 등 군략에서도 빈틈이 없었다. 오 지방 사람들은 감복해서 그를 양공(羊公)이라 칭하고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당초에는 몸가짐을 소탈하게 한 나머지 갑주도 걸치지 않은 채 호위를 단 10여명만 대동하고 낚시하기를 즐기며 정무를 잘 돌보지 않았는데, 어느날 밤에 또 그런 행색으로 장군부를 나서려 하자 서윤이 무기를 든 채 문을 막고 '만리 넓이의 땅을 감독하시는 장군께 나라의 안위가 달려 있는데 어찌 이처럼 가볍게 행동하십니까? 오늘 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절대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라고 간하자 웃으며 그만뒀고 그 후로는 나가 노닐기를 줄였다. 이후 진무제 사마염이 거기장군에 봉하며 장군부와 그 아래 관료를 삼사의 제도에 따라 하도록 명하자 극구 사양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72년 오의 서릉독 보천이 서릉을 바치며 투항했다. 뒤이어 육항이 보천을 급하게 추격하자 형주자사 양조와 더불어 보천을 구원하고 강릉을 공격하려 했으나 육항의 계략에 속아 군량을 나르기 곤란해져 철수했고, 보천도 죽음을 당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벼슬이 평남장군으로 깎였다.
육항에게 약을 전하는 양호 |
그 뒤로도 계속 육항과 대치하며 양양을 지켰는데, 육항과도 입장을 초월한 교분을 나누어, 서로 사자를 통해 술과 약을 거리낌없이 주고받는 등 대범하면서도 인간적인 면으로 주변을 감복시켰다.[2] 이 일화에 대해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김홍신 평역판 기준).
양호의 부하들이 양호에게 와서는 "지금 오군은 군주가 포악하여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군사들도 오합지졸이라고 합니다. 이 때 오군을 쳐야 합니다."라고 간하자 양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육항을 가볍게 보고 있다. 지난날 육항이 서릉으로 군사를 이끌어 우리 군사를 무찌르고 보천을 죽였을 때 나는 내 부하들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러니 가만히 있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자 부하들이 그 말을 듣고 움직이지 않았다.
한번은 양호의 군사가 사냥을 나갔는데, 마침 그 때 육항의 부하들도 사냥을 하고 있었다. 이에 양호는 부하들에게 "절대로 오군의 경계를 넘지 마라."라고 주의를 줬고, 부하들이 그에 따르자 육항은 "진군은 저렇게 질서가 서 있으니 쉽게 쳐부수지 못할 것이다."라고 감탄했다.
양측이 사냥이 끝나고 돌아와서 확인을 해 보니 오군의 화살을 먼저 맞고 진군에게 잡힌 짐승이 있자, 양호는 그러한 짐승들은 오군에게 돌려 주도록 했다. 오군이 사냥감을 돌려받고 기뻐하는데 육항이 심부름 온 군사에게 양호가 술을 좋아하냐고 묻자 부하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에 육항은 술 한 동이를 줘서 돌려보냈는데 부하들이 이유를 묻자 "적이 나를 덕으로 대하는데 똑같이 대하는 게 예의 아닌가?"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한편 술을 가지고 돌아온 부하가 상황을 설명하자 양호는 술을 마시려 했다. 부하들이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며 말리자 양호는 웃으면서 "육항은 그런 짓거릴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안심시키며 술을 다 먹었다. 이후 두 장군은 서로 부하를 보내 안부를 묻기도 했다.
한번은 육항의 부하가 와서 육항이 병들어 누워 있다고 하자, 양호가 혀를 끌끌 차면서 "장군의 병은 나와 같은 병일 것이다. 이 약을 가져다 드려라."라고 했다. 이번에도 육항의 군사들이 "그건 위험한 약입니다"라고 말렸지만 육항은 개의치 않고 약을 먹었고, 병이 나았다. 병이 나은 육항에게 부하들이 축하하니, 육항이 그들에게 "양호가 이끄는 군대는 질서가 잡혀서 무너뜨리기 힘드니, 우리가 섣불리 들어가는 것은 손해다. 그 쪽에서 무너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라고 말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함녕 연간에 정남대장군, 의동삼사로 임명된 뒤에는 육항이 죽고 오의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익주자사 왕준을 익주제군사로 세운 뒤 선단을 건조하게 했다. 뒤이어 진무제에게 상소해 오를 쳐야 한다고 했으나 가충, 풍담, 순욱 등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때 독발수기능이 서쪽에서 깽판을 치고 있던 때라서 진나라의 국력으로도 버거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쯤 독발수기능의 난을 진압할 도독으로 임명된 가충을 보내지 말라고 상소했다[3]. 277년에 거평후에서 남성군후로 책봉되자 이를 사양했으며, 그 후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임종의 자리에서 사마염에게 두예를 천거하고 병사했다.
양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사마염이 병문안을 와서는 "그대의 말을 듣고 오를 일찍 쳤어야 했다."라고 후회하자 양호는 목숨이 위중한 와중에도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두예를 총사령관으로 하면 쳐부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마염이 "왜 천거(추천)하는 글을 불사르고 이렇게 비밀스럽게 얘기하는가?"라고 묻자 "가끔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 추천했던 사람에게 와서 사례를 표하는 일이 많습니다. 신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후 얼마 못 가 사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마염은 통곡했다고 한다.
사후 태부 및 남성후에 추봉되었고[5] 사마염은 그의 장례에서 직접 소복하고 곡했다. 후에 오를 정복하자 사마염은 이 모두가 양호의 공이었다고 말하며 다시 눈물을 흘렸으며 소하의 선례를 본받아 그의 부인 하후씨를 만세향군에 봉했다. 후사를 두지 못해[6] 그의 배다른 형 양발의 아들이 사마염의 명으로 대신 거평후 작위를 이어받았다.
또한 남주 사람들은 양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곡하면서 상복으로 휘장을 쳤고, 형주에서는 그의 이름 호(祜) 자 발음을 피휘해 문을 문(門)이라고만 하고 호(戶)로 부르지 않으며 호조(戶曹)를 사조(辭曹)라 칭했다.
2.3 타루비
양호가 세상을 떠나자 양양 일대 백성들이 몹시 슬퍼하여 그가 도독으로 지내던 시절 즐겨 거닐던 현산 [7] 에 비석를 세워 고인을 기리기 시작했는데, 좀 더 구체적인 경위는 아래와 같다.
어느날 종사중랑 추담 등과 함께 현산에 올라 술과 시문을 즐기던 때 양호가 "이 산은 천지가 생긴 옛적부터 많은 현인재사들이 올랐고 그보다 더 무수히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올랐지만, 그들의 이름은 모두 역사에 묻힌지 오래이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하지만 나는 죽어서 사람들에게 잊혀진 뒤에라도 계속 이곳에 오르고 싶다네." 라고 말하자 추담은 "공의 높은 덕은 모두가 아는 바이니 이 산과 더불어 길이 전해질 것입니다." 라 답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세설신어에도 실려있다.
이런 연유로 양호를 기리는 비석을 현산에 세웠으며, 그 비석에 적힌 내용을 읽고서 울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라 해 타루비(墮漏碑) 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후대 당나라 때에 양양 출신인 맹호연이나 이백 등이 이 비를 소재로 시를 남기기도 했으며, 삼국지연의에도 위 호증의 시를 약간 변형해 양호의 죽음 뒤에 실어 놓았다.
덧붙여 우리나라에도 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타루비(보물 제 1288호)가 남아 있는데, 바로 이 양호의 고사를 본받아 장군의 덕을 길이 추모하려는 뜻에서 세웠다고 적혀 있다. 이로 미뤄보면 조선시대에도 양호는 여전히 덕장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평가
삼국지 팬덤에서는 맞수였던 육항과 비교하면 국력이나 내부 정세 등 명백하게 열세인 상황에서 서릉 탈환에 성공한 육항보다 상대적으로 평가가 처지는 경우가 왕왕 있으나, 양호가 발휘한 진정한 능력은 왕창이 마련한 형주 안정의 기반을 덕치로 확고히 다져 천하통일에 앞서 인심의 향배를 자연스럽게 서진 쪽으로 돌려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집안 인맥이며 개인 능력, 인격 어느 면에서도 당대 흠결이 없을 정도였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종회, 가충, 순욱, 풍담, 왕융 등 수많은 이들에게 정적으로 간주되어 생애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시기와 견제를 당했고 스스로도 그런 입장이 난감했는지 육항 사후 오 정벌의 건의가 좌절되자 "천하의 일 중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열 중 일곱여덟이구나(天下不如意 恒十居七八)" 라고 탄식했을 정도였다. 또 개인사적으로는 후사도 보지 못했으며, 그나 사마준, 사마유 등 몇몇 능력자들의 활약을 가정한다 하더라도 서진 정권의 문제점은 보다 근본적인 부분에 위치했기에 과연 미래가 달라질 수 있었을지 의문의 여지가 크다.
비록 자신의 뜻을 온전하게 펼칠 수 없었던 시대를 살았던 것은 그에게 불행이었으나, 그가 실행한 애민의 치적은 서진 시대의 몇 안되는 명신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근거가 되었다.
4 말말말
曉日登臨感晉臣(효일등림감진신) : 이른 아침 산에 올라 진나라 신하를 추억할 제古碑零落峴山春(고비영락현산춘) : 옛 비석은 낡았건만 현산은 (다시) 봄이로구나.
松間殘露頻頻滴(송간잔로빈빈적) : 솔잎 사이 남은 이슬 방울져 떨어짐은
酷似當時墮淚人(혹사당시타루인) : 흡사 그 시절 사람들 눈물짓던 모습이런가.- 만당대(晩唐代) 시인 호증의 영사시(詠史詩) 중 현산(峴山)
天下不如意 桓十居七八(천하불여의 환십거칠팔): 세상사 열에 일곱 여덟은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진서 양호전
5 미디어 믹스
5.1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9,10 | 삼국지 11 |
삼국지 12,13 | 삼국지 13 PK |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최후반부에 주력으로 쓸만한 무장. 등장 시기 자체가 어차피 장수들이 바닥나는 때라서 크게 의미는 없을수도 있겠지만, 60대 중반쯤으로 낮은 무력치 외에는 다른 능력들이 꽤 훌륭하다. 삼국지 9 이후 시리즈에 접어들수록 능력치 총합이 딱 10위권 전후를 왔다갔다 할만큼 균형잡힌 능력치 보유자로, 라이벌인 육항보다 지력은 약간 못하나 인품이 높았다는 평가 때문인지 매력은 늘 90대 근처이며, 총합능력치에서는 한끝차이로 육항에게 앞서나, 전투 능력에서는 살짝 밀리게 평가받는다. 등애와 강유의 관계와 비슷하게 묘사된다고 볼 수도 있다. 등애가 총합은 더 높으나, 강유가 전장에서 활용하기는 더 좋은 것과 비슷하다. 일러스트는 정사에서처럼 수염이 아름다웠다는 점을 반영해서 그려지며, 항상 관록 있어 보이는 명장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게 특징.
삼국지 3에도 등장하는데 제발 싸움꾼을 출연시켜달란 말이에요. 능력치는 거의 별거 없는 수준이다. 다만 지력 하나 정도는 군사는 될 수 있는 수준이긴 하다. 육지83 수지72 무력46 지력80 정치79 매력74에 야망8 운7 냉정5 용맹8로 싸움을 못하는 학소라 할 수 있다. 다른 능력치가 죄다 학소와 비슷한데 지력이 살짝 높고 무력이 현저하게 낮다. 능력치는 전형적인 문관 계열인데, 얼굴은 무관 계열 범용 얼굴로 등장한다.
삼국지 4에 와서 전용 얼굴을 가지고 있다.그게 7편까지 우려먹지만. 능력치는 90/73/80/78/85에 특기는 외교,작적,보병,궁병,해전,혼란,연환,수복,호통,허보을 가진 무장이다. 어째선지 후임인 두예보다 임관이 247년에 재야로 나와서 늦은편이다.
삼국지 5에서는 능력치가 무력 83/지력 82/정치 80/매력 86으로 좀 어정쩡하다.그게 제법 강한 능력치인데? 보유진형은 추행/기형/수진이며, 습득 특기는 침착/격려/수계/수신/화시/응사이다. 아무래도 양호가 무관인 이상, 전투에서 주로 쓰기 마련인데, 지력90-정치80이상을 동시에 만족하는 장수는 군사라는 별도 계급으로 취급하여 용명에 관계없이 20,000명의 군사를 거느릴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장수는 용명이 없을 경우 8,000명밖에 군사를 거느릴 수 없다. 양호는 당연히 221년생인만큼 제일 마지막 시나리오인 시나리오7에서도 초기엔 등장하지 않고 240년에 등장한다. 한마디로 모든 시나리오에서 바닥부터 올라가야 된다는 소리. 비슷한 처지로는 학소가 있는데(물론 학소는 적당한 시나리오에선 용명이 바닥까진 아니다.) 학소는 지력이 89이지만 수행 로또가 터져만 준다면 바로 군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저 양호는 안습. 그래도 무력이 83이라서 나름대로 위협이 가능한 편이다.
삼국지 6에서는 91/69/80/79/83이다. 근데 꿈이 왕좌나 대의정도에 어울린데 정복으로 나온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87/69/91/86으로 총합은 거의 사기적인 수준. 분투와 연사,누선,파괴,덫,고무도 보유하고 있지만 무력이 약간 낮은 게 흠이다. 제사 이벤트나 PS2한정이면 육성 포인트으로 무력을 키우자.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87/65/87/85/90에 특기는 12개이고 명사 특기가 있다. 능력치 총합이 무려 414로 강유에 이어 전체 11위. 군사 특기가 없는것이 조금 아쉬울 뿐.
삼국지 11에서도 전작과 비슷한 90/64/84/87/89의 능력치에 병과적성이 창,노가 S가 인 무장이고 총합, 순위가 모두 전작과 동일하게 414, 11위이다.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선 능력 및 병종적성이 괜찮아서 사마의 진영의 주력으로 활약시킬 수 있으나 보유 특기가 효율성 미묘한 정묘라는 게 문제. PK라면 강력한 특기로 바꿔주자. 삼국지 11 한국어판 열전에서는 "사마사의 아내"라고 오타가 나 있는데, 원문은 "누나는 사마사의 아내"이다. 완벽한 발번역
삼국지 11 콘솔판 추가 시나리오인 영웅난무에서는 양양에서 군주로 등장. 바로 아래인 강릉에는 육항의 아버지인 육손이 군주로 있으니 나름대로 고증을 잘 살렸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유표는 졸지에 저 멀리 북평에 자리잡았다 부하로는 두예, 왕준, 왕혼, 호열, 호분, 장화, 당빈, 양제, 양조, 왕융, 주지 등 진나라 장수들을 두고 있다. 양양에 재야가 전혀 없으므로 빨리 주변으로 진출하도록 하자. 근처에 있는 다른 세력들이 다 그렇듯 유종이 제일 잡기 쉽다.
삼국지 12에서는 전작 그대로인 능력치이며 복병이란 전법이 생겼다. 안그래도 병종이 궁병이라서 스나이퍼 플레이를 할수가 있으나, 궁군강사를 가지게 된 라이벌 육항과 비교해서는 대규모 전투에서 다소 밀린다는 평. 능력치는 전작과 동일하고 군사 특기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90/64/84/87로 중신특성은 창술조련. 전법은 범위 내 방어 +1, 사기 +2, 부상병 회복 +1의 군략지원으로 좋은 전법을 받았다. 같은 전법의 소유자인 노숙과 양호 본인 모두 인격자이기 때문에 이 전법을 부여받은 듯. 능력치는 전작과 동일하고, 전장과 내정 양면에서 쓸만하게 굴릴 수 있다. 유일한 약점은 출연 시기(...) 영걸전 DLC 마지막 시나리오인 영걸몽환에서나 모습을 좀 볼수 있는데, 기껏 위군의 병력을 깎아도 양호가 다시 회복시켜버리는지라 상당히 짜증난다. 양호를 먼저 제압하자니 능력치가 뛰어나다 보니 그것도 어렵고. 맹사지휘를 가지게 된 육항이 전장에서는 더 뛰어나다고 볼 수 있으나, 군략지원의 유지 능력 역시 만만치가 않기에, 이번 작에서는 진정한 용호상박이다.
특기는 상업6, 훈련8, 순찰7, 설파2, 교섭7, 언변7, 공성4, 견수8, 수련4, 귀모3 이라 좋은 외교관의 자질도 보여준다. 그 외에 전투관련특기가 약간 부실한데 아이템이나 인연버프로 매꿔주던지 전투특기를가진 부장들을 붙여주던지 하자. 병과적성은 창S/기A/궁A로 거의 탑급이다. 기병이 C인 육항보다 더 우세하다.
5.2 삼국전투기
삼국전투기에서는 예상대로 히카루의 바둑(고스트 바둑왕)의 도우야 아키라로 나온다. 전투외편 6-1에서 짤막하게 첫 등장. 소탈하게 지낸 기록이 있어서 전투시에 문관들도 갑옷입는데, 양호는 전투나, 평상시에 갑옷를 입지않는다.
5.3 삼국지대전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서의 기록과, 일본어 읽기 방법 때문인지[8] 삼국지대전에서는 아예 여성스러운 외모의 캐릭터로 그려졌다
5.4 신조협려
김용의 신조협려에서도 양과의 부탁으로 양양 영웅연을 암암리에 돕는 등장인물들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된다.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한 훌륭한 인물로 평가하는 듯. 극중 설명에 따르면 양과와 양호는 훌륭한 행적도 견줄만 한데다 이름을 읽는 법도 같다.[9]
5.5 진삼국무쌍 시리즈
당연하겠지만 활약하던 시대가 편입되지 못한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선 클론으로도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다. 다만 호적수였던 육항은 이미 한발먼저 클론으로 먼저 나와 두각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진나라 IF 시나리오인 건업전에서 육항이 플레이어를 가로막아서는 최종 적으로 등장한다는 식으로.. 등장 풀이 좁은 진나라인 만큼 육항과 함께 차기작에서 양호가 나올 확률은 생각보다 다분한 편. 하지만 진이라 써놓고 위 후반기 애들만 나오잖아? 양호는 안될거야 아마
그리고 육항이 진삼국무쌍 블라스트에서 일러스트 참전한지 몇개월 뒤 양호 역시 일러스트로 참전! 들고 있는 건 뜬금없이 화타고이다. 위에 서술된 약 일화를 반영한 듯.근데 대항해시대의 조안 페레로과 비슷하게 생겼다.
- ↑ 하후패의 동생 하후위가 태산에 부임했을 때 양호의 기량에 반해 하후패를 설득해 조카를 시집보내게 했다. 후에 하후패가 촉에 투항했을 때 많은 친족들이 하후패와 절연을 선언했으나, 양호는 오히려 장인의 안위를 염려하고 아내를 위로할 만큼 정이 깊었다고 한다.
- ↑ 그러나 액면 그대로 이들이 정말로 호의를 베풀 생각으로 교분을 나눴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양호나 육항은 서로의 적국의 백성이나 병사, 장수에게도 관대함을 내비쳤는데, 이것은 자신의 도량이 넓음을 어필하기 위한 전략에 가까운 행동이다. 이 둘은 서릉에서 한 번 맞붙었을 뿐이었지만, 이후로도 고도의 심리전으로 계속 대결을 이어왔던 셈이다.
그리고 아주 좋은 브로맨스의 소재거리를 제공하였다 - ↑ 가충과 양호는 사이가 절대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 가충은 양호를 엄청 견제했고, 양호는 가충을 피해다녔다. 따라서 이 진언은 양호의 훌륭한 성품, 가충의 찌질함, 그리고 독발수기능의 난의 스케일을 종합해봤을때 "가충님은 수도에서 더 큰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가 아니라 "가충따위로는 반란 진압이 될리가 없으니 다른 사람을 보내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라는 충언에 가까웠을 것이다.
- ↑ 양호는 연의 마지막회를 장식하는 인물 중 하나인데, 서릉 전투는 지나가는 말로 패했다 정도로 넘어가고 육항과의 우정 및 오나라 정벌의 포석을 다진 인물로 주로 언급된다. 딱 한 회 나올 뿐이지만 존재감은 그 회의 등장인물 중 그나마 가장 높은 편.
- ↑ 죽을 때까지 남성후에 임명되는 것을 사양했으며 고향에 묻히는 검소한 장례를 원했지만 사마염은 끝내 그의 관에 남성후의 도장을 넣었으며 낙양성 밖 황릉 근처의 장지를 골라 묘소로 하사했다.
- ↑ 풍수지리에 능한 사람이 양호더러 선조의 무덤에 제왕의 기운이 있다고 말하자 양호가 무덤을 파헤쳐 옮겼는데, 지관이 '무덤을 옮겼으니 자손이 없겠으나 그래도 팔 부러진 삼공이 나온다' 는 얘기를 했고 후에 정말 한쪽 팔이 부러진 일이 있었지만 삼공의 지위에 달했고 자식이 없는 것이 맞아 떨어졌다고 한다.
- ↑ 오늘날의 후베이성 샹판시 남쪽에 있는 현수산 (峴首山)
- ↑ 羊祜를 일본어로 읽으면 요코(ようこ)로 매우 여성적인 느낌이다.
- ↑ 물론 중국식으로 읽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