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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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광(霍光) |
자 자맹(子孟) |
출생지 한(漢)나라 하동군(河東郡) 평양현(平陽縣)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山西省) 린펀(临汾)시) |
중국 전한 무제, 소제 선제 시대의 권신. 봉호는 박육후(博陸侯).[1]
폭군 기미가 보이는 황제를 갈아치우고 새 황제를 세웠다는 점에서 은(殷)대의 재상 이윤(伊尹)과 동등한 평가를 받았다.
2 초기 생애
2.1 출생
곽광의 출생년도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복형 곽거병(霍去病)이 흉노전쟁에서 돌아오면서 당시 10살이었던 곽광을 장안으로 데려갔다는 내용이 한서에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출생년도는 BC 130년이 아닐까 싶다. 곽거병이 흉노전쟁에 처음 참여한 것은 BC 123년인데 이 때는 삼촌인 대장군 위청 휘하의 장수였고 첫 출전이었으니 이런 행동을 하긴 어려웠을테고 위청과 권위가 동등한 사령관으로 출정한 해가 BC 121년 이었으니 이 때 친부 곽중유를 만나고 곽광을 데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훗날 한나라 최초의 권문세족 당주가 되는 곽광의 출신은 한미했다. 아버지는 곽중유(霍仲孺)라는 사람으로 평범한 하급관리였다. 곽중유는 장안에 있는 전한 제7대 황제 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의 저택을 공무 때문에 드나들었는데 이때 위소아(衛少兒)라는 평양공주의 하녀와 눈이 맞았다. 이후 위소아는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곽거병이다. 한편 곽중유는 하동군 평양현으로 임지가 바뀌었다는 핑계를 대고 도주했고 이에 위소아는 이후 진장(陳掌)이란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 한편 근무지가 평양으로 바뀐 곽중유는 위소아와 그녀의 아들은 깨끗이 잊고 다른 부인을 얻어 자식을 두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곽광이다. 위소아는 무제의 황후 위황후의 자매였기에 곽광의 이복형인 곽거병 역시 젊은 시절에 출세할 수 있었는데 곽광이 정계에 입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뒷배경 덕을 많이 본 셈이다.
2.2 황제의 총애를 받다
장군이 되어 자신을 찾아온 형을 따라 서울에 온 곽광은 10살부터 궁에 들어가 무제를 지척에서 섬긴다. 곽광은 곧장 낭(郎)[2]에 올랐으며 이어 제조시중(諸曹侍中) [3]이 된다. 이처럼 황제 근처에서 시중을 드는 부류를 내조(內朝)라고 하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청와대 비서실이나 경호실 쯤 되겠다. 반면 외조(外朝)는 일반 행정부를 말한다. 한나라는 건국후 개국 공신 진평(陳平), 왕릉(王陵), 주발(周勃), 관영(灌嬰) 등이 연이어 승상이 됐고 이들 개국공신 재상들이 여후 일족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자연스레 외조의 권력이 강해졌다. 하지만 한무제가 황제 직할 통치를 단행키 위해 필두 재상인 승상의 권한을 약화시키면서 대신 내조의 권세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후 곽광은 19살에 봉거도위(奉車徒尉)에 오른다. 봉거도위란 간단히 말해 황제의 마차를 끄는 직위로서 최측근에서 황제를 보필하는 자리로 출세가 보장된 자리였다.
곽광은 이복형 곽거병이나 곽거병의 외삼촌 위청처럼 천재적인 능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격이 굉장히 괴팍한 한무제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그의 행동거지 때문이었다. 반고가 지은 한서 곽광열전에서 그를 평가한 부분이 있다.
"곽광은 궁궐 문을 드나든 지 어언 20여 년이나 되었지만 조심하고 삼갔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는 적이 없었다. 그의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며 세심했기 때문에 매번 궁궐을 드나들며 수레를 내릴 때 나가고 머무르는 곳이 일정했다. 낭관(郎官)과 복야(僕야)들이 몰래 표시를 해두고 보았는데, 한 자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이와 함께 곽광은 매우 잘생겼다고 한다. 키는 별로 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4] 또 백옥같은 피부와 어릴적부터 몸에 밴 귀족으로서의 품격이 있던 인물인듯 하다. 또한 그는 공평무사한 인물로 평가를 받았다.[5]
곽거병, 위청 만한 능력은 없었지만 이와 같은 인간적 매력 덕분에 곽광은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2.3 고명대신(顧命大臣) - 새 황제의 후견인이 되다
무제가 죽기 4년전인 BC 91년, 무제는 이 때 '무고의 화'로 황태자를 죽게 만드는데 무고의 변이 혹리(酷吏:혹독한 관리) 강충이 여태자를 제거하기 위해 꾸민 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무제는 매우 낙심했다. 유능한 황태자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도 문제였지만 남은 아들(광릉여왕, 창읍애왕, 연날왕 등)들은 후계자로 믿을 만하지 않았다는 것이 한무제의 고민이었다.
결국 한무제는 구익부인(鉤弋夫人) 조 첩여[6] 소생인 막내 아들 7살짜리 유불릉(劉弗陵)을 태자로 책봉한다.
이같은 후계구도의 변화는 곽광에게 최고 권력자로 오를 수 있도록 한 기회가 된다. 한무제는 아직 어린 불릉을 위해 죽기 2개월전 곽광에게 주공(周公)이 주성왕(周成王)을 업고 제후들을 만나는 그림을 주었는데[7] 무제는 곽광을 어린 새 황제의 후견인으로 삼은 것이다.
BC 87년, 한무제가 죽었다. 무제가 죽기 직전 곽광은 봉거도위와 함께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올라 있었다. 광록대부는 황제의 간관(諫官)인데 2품계 광록훈의 하위 관직으로 2000석 3품계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무제는 죽기전 흉노족 왕자 출신으로 곽거병에게 잡혀온 김일제(金日磾)와 상관걸(上官桀), 상인 출신 상홍양(桑弘羊) 그리고 곽광을 불러 불릉을 부탁했다.[8] 이로서 곽광을 비롯해 김일제, 상관걸, 상홍양 등은 8살에 황제에 오른 불릉의 섭정인 보정대신(輔政大臣)이 된다.
2.4 보정대신 가운데 1인자
그해 불릉이 한나라(전한) 제 8대 황제 한소제(漢昭帝)로 등극한다.
소제 등극 후 이들 보정대신은 벼슬이 오르는데 우선 보정대신의 좌장격인 곽광은 3품계 광록대부에서 재상인 삼공(三公)에 속하는 대장군 대사마가 되어 한나라의 병권을 장악한다. [9]
재무장관격인 대사농(大司農)에 있던 상홍양은 역시 삼공의 하나인 어사대부(御使大夫)에 오른다. 어사대부는 감찰 역할을 하는 재상이지만 상홍양은 역시 하던 대로 경제 부총리 역할을 했다.
소제 등극후 투후(秺侯)로 책봉된 김일제는 대장군 다음다음 직급인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오른다. 그리고 소제 등극 이듬해인 BC 86년 사망했다. 사후 위경후(敬侯)로 추증된다.[10]
야심가 상관걸은 좌장군(左將軍)이 됐다. 다른 보정대신보다는 낮은 직급이다. 하지만 권세는 삼공 수준이었다. 상관걸은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로 어렸을 때부터 무제를 근위해 무제의 사랑을 받았고 궁중내 병권을 잡고 있었다. 또 소제 등극 후에는 그 아들 상관안(上官安)의 딸을 황후로 들여보냈다.[11] 상관안은 딸이 황후가 된 덕에 아버지 상관걸보다 높은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오르는데 대장군인 곽광보다 반 수 정도 아래직위라고 할 수 있다.
3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
3.1 곽광의 승승장구
김일제는 이민족 출신이라 발언권도 세지 않았지만 일찍 죽어 권력투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남은 보정대신은 곽광, 상관걸, 상홍양 세명인데 이들이 대권을 놓고 싸움을 벌일 것이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같은 보정대신이라도 권력은 곽광이 가장 높았다. 무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문제, 경제 시대의 느슨한 군국제를 깨부수고 황제 혼자 독재하는 중앙집권 관료국가를 만드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측근인 내조를 행정부인 외조보다 훨씬 키워놓았는데 그 내조의 수장이 곽광이었다. 상관걸은 오랫동안 한무제를 보필한 내조 사람으로 보정대신이 된 후 좌장군이 된다.
당시 곽광의 관직은 대장군 대사마로 병권을 가진 재상이었고 영상서(領尙書)[12]로 내조의 수장까지 겸하고 있었다. 내외조를 모두 장악하고 있는 것. 법상 필두 재상인 승상은 있었지만 유명무실한 자리였다. 무제 시대에 승상이 된 자는 대부분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무제에게 사사되었다.[13] 이로써 승상의 권력은 굉장히 약해져 어사대부에도 못 미쳤다. 이는 전천추 이후 승상은 곽광이 추천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또 당시 승상인 전천추 역시 곽광의 측근이나 다름없었다. 외조가 약해진 한무제 시대 승상은 보다 권력이 약했고 승상이 다시 필두 재상 대접을 받은 것은 곽광이 죽은 이후 곽씨 가문이 타도된 이후이다.
곽광은 상관걸과 사돈관계로 그의 딸이 상관걸의 아들 상관안과 결혼했다. 상관걸은 두 사람 사이에 낳은 딸을 황제 소제의 황후로 집어넣기 위해 곽광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곽광은 외손녀가 어리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고 이는 결국 두 사람이 원수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어사대부 상홍양은 유명한 경제관료로 벼슬도 곽광과 같은 재상급이었다. 하지만 외조에서만 활동했던 상홍양은 황제를 근거리에서 섬긴 적이 없기 때문에 애초 황제의 총애를 놓고 곽광과 싸울 처지는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8살에 제위에 오른 소제는 곽광만을 신임했다, 뒤에 나오는 모반사건 처리에서 알 수 있듯 소제는 어리석은 황제가 아니다. 보정대신 중에서도 곽광이 자신을 지켜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더 신임한 것으로 보인다.
소제의 곽광 편애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욱 심해졌고 이 때문에 상홍양-상관걸의 입지는 더 좁아지게 된다. 그나마 상관걸이 상홍양에 붙어 1대 2의 수적 우위를 지키고 있었으므로 이들 세력은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3.2 염철회의(鹽鐵會議)
결국 이들 양대 세력은 국가 재정 정책인 소금과 철, 술의 전매를 놓고 한판 대결한다. 바로 염철회의를 수도 장안 미앙궁에서 가진 것이다.(BC 81) 곽광은 40년 가까이 실시됐던 염철주 전매제도를 다시 논의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곽광은 상홍양의 적인 대상인의 편에 섰다. 애당초 이 회의는 곽광의 속관이었던 두연년(杜延年)이 제안한 것으로 두연년은 상홍양이 이뤄냈던 염철주 전매제도를 모두 철폐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곽광은 훗날 왕망, 동탁과 비견되는 권력을 가졌지만 그에 상당하는 교양은 없는 사람이었다. 당대에도 무학무술(無學無術)이라고 씹혔으며 심지어 1500년이 지나 멀리 조선에서도 곽광의 무식함을 씹었다.[14] 두연년은 바로 그런 곽광에게 정치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염철주(鹽鐵酒)의 전매는 상홍양이 입안한 제도다. 상홍양은 대도시 낙양의 거대 상인의 아들로 국가에 의한 경제정책의 주도를 역설했다 상홍양은 염철주가 민간에 독점되다보니 결국 엄청난 폭리가 몇몇 부자들에게만 몰리고 있다고 봤다. 염철주는 반드시 필요한 재화인데 일부 대형 상인들이 이를 독점해 이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게 상홍양의 시각이었다.
한무제 시기에 국가 통제의 경제 정책을 채택한 까닭은 그때까지 소금과 철, 술 등의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면서 황제의 직접, 개별적 인민 지배를 방해하고 있던 호족이나 상인 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 정부의 재정 수입을 확충하는 데 직접적인 목적이 있었다.
상홍양이 염철주의 전매를 시도한 것은 무제 통치의 전성기였던 BC 120년이다. 당시 시중이었던 상홍양은 염철주 전매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국가주도의 경제정책을 폈는데 대표적인 것이 균수법과 평준법이다. 전국 각처에 균수관(均輸官)과 평준관(平準官)[15]을 설치했으며 염철주 전매로 거둬들인 수익은 한무제가 BC 130년경부터 40년간 추진해온 대흉노전쟁의 기반이 됐다. 말이 잘나지 않는 중원에서 14만필의 말[16]을 투입했던 막북전투를 생각해보시라.
철의 경우, 철광을 생산하는 각 지방에 50여 개의 철관(鐵官)을 설치하고, 이 철관을 대농(大農)에 소속시켰다. 그리고 채광에서 철기의 주조에 이르는 모든 생산과정은 철관의 직영 아래 행하였다. 소금의 경우, 생산수단의 주요 부분이었던 염장과 제염에 필요한 일체의 설비와 기구는 국가가 공급하고 마련하였으나,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포함한 일체의 경영과 필요한 자본은 국가가 직접 관여하지 않고, 국가가 선발한 종래의 민간 제염업자가 담당하였다.
문제는 무제 치세의 거의 전 시기에 걸쳐 흉노와의 전쟁 등으로 재정이 지나치게 방만하게 운영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특히 흉노와의 전쟁은 명백한 낭비[17]와 비효율, 소모전으로 점철되어 국가에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적 배경 하에서 기획되고 실행된 소금과 철, 술의 전매 정책이 무제 사후에 '염철 논쟁'을 불러일으킨 까닭은 그것의 생산과 유통을 국가가 독점하면서까지 강행한 흉노와의 전쟁이 지독한 소모전으로 흘러가면서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중국에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 준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하에 반대파들은 국가가 이런 산업을 국유화하긴 했어도 좋았던 처음의 의도와 초기 성과와는 달리 점차 방만한 운용을 하고 재정낭비를 보충하기 위해 염철주의 생산과정을 제대로 관리하지는 못하면서 국가가 민간에게 돌아가야 할 부를 독점하여 백성들로부터 나오는 이익을 제멋대로 조정하여 챙긴다고 봤다.
염철주의 옹호 입장에선 당시 승상 전천추(田千秋)와 상홍양이 나왔다. 하지만 늙은 전천추보다 전매제도를 입안한 상홍양이 염철주 전매 옹호의 선두에 나섰다. 상홍양을 빼면 현량과 문학[18] 60여명이었다. 여기서 현량이란 재상들이 천거한 사람이고 문학은 지방 관리들이 천거한 사람이다. 이들 현량과 문학은 높은 집안 자제들로서 젊긴 하지만 성홍양과 같은 입장은 아니었다. 회의 구성원부터 상홍양을 누르려는것이 곽광의(정확히는 두연년) 의도였다. 현량과 문학들은 소금과 철, 술 등의 전매를 관리하는 관청과 균수(均輸)를 담당하는 관청을 철폐하여 국가가 천하와 더불어 이익을 다투지 말 것을 청하고, 절약 근검의 모범을 보인 뒤에야 교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상홍양은 이를 반대하면서, 소금과 철, 술 등의 전매와 균수 등은 국가의 큰 사업으로서 사이(四夷)를 제압하여 변방을 안정시키는 데 필요한 재정의 바탕이기 때문에 철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무제의 염철전매는 한나라의 재정부족을 해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그간 염철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던 지방 호족 및 대상인들에게는 불리한 정책이었다. 무제 사후, 이 정책을 실시한 상홍양(桑弘羊)을 비롯한 외조(外朝) 관리와 호족과 대상인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던 곽광 현량(賢良)·문학(文學)간에 이 문제를 둘러싼 염철논쟁은 현량(賢良)·문학(文學)들이 "국가가 염(鹽), 철(鐵), 주(酒)의 이익을 민(民)과 다투고, 독점하려 한다"는 점을 비판하고 지적하면서 개시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현량, 문학이 말하는 '민'이란 실제로는 그때까지 소금과 철, 술의 생산과 판매를 주도해 온 호족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결국 염철 회의라는 역사적 무대에서 현량, 문학이 맡은 역할은 호족의 옹호자일 수밖에 없었다.
상홍양과 현량, 문학은 장안의 궁정에 모여 갑론을박을 했고. 이 자리에서 상홍양은 목소리를 높여 염철주 전매제도를 옹호했다. 엄청난 논쟁이 벌어진 끝에 염철회의는 술의 전매만 중단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그러나 40년 가까이 유지됐던 굳건한 염철주 전매제도가 훼손됐다는 것은 곽광과 상홍양-상관걸과의 권력차가 커지고 있다는 반증이었으며 소금과 철의 전매도 중단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렇게 되자 상홍양-상관걸 진영은 불안에 떨게 된다. 이들은 염철회의가 끝난지 불과 1년도 안돼 곽광을 치는 정변을 일으켜야할 정도로 위치가 불안해진 것이다. 그리고 염철 회의에서 현량, 문학 혹은 그 배후라 할 수 있는 곽광 측이 승리한 것이 호족의 위상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3 권력싸움의 시작
불안해진 상홍양, 상관걸은 곽광을 칠 궁리를 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앞장 선 자는 황후의 할아버지 상관걸이다. 두 사람은 궁중 내부의 조력자가 필요했는데 여기서 발탁된 사람은 상관걸과는 친하고 곽광과는 원수인 개장공주(蓋長公主)[19]였다.
개장공주는 앞서 BC 83년 상관걸의 친손녀이자 곽광의 외손녀를 소제의 황후로 올리는데 앞장섰다. 상관걸은 자신의 친손녀를 황후로 올리려고 눈에 불을 켰지만 곽광이 반대했다. 당시 상관걸의 딸. 향후 상관 황후는 3살로 너무 어리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 속마음은 상관씨를 외척으로 올리지 않겠다는 것이었겠지만. 아무튼 곽광이 반대하자 상관걸과 상관안은 개장공주의 애인 정외인(丁外人)을 포섭해 개장공주를 끌어들였고 개장공주가 적극나선 데 따라 상관 황후는 일단 후궁인 첩여(婕妤)로 들어갔다가 황후로 간택됐다
황후 책봉 이후 개장공주는 자신의 정인인 정외인에게 후작을 줄 것을 곽광에게 부탁했는데 곽광은 공이 없는 사람에게 봉작을 줄 수 없다며 한큐에 거절한다. 이에 개장공주는 광록훈 벼슬이라도 줄 것을 요청했지만 곽광은 이마저도 들어주지 않았다.[20] 비슷한 시기 상홍양도 자기 아들에게 관직을 줄 것을 요구했지만 곽광은 이마저도 거부했다.
이제 상관걸 일당에게 곽광은 권력 싸움의 대척점일 뿐 아니라 개인적인 원수가 돼버렸다. 이들은 자신을 황제가 못된 원인이라고 생각해 곽광을 원망하던 연날왕 유단(燕剌王 劉旦)[21]도 끌어들였다. 이들은 염철회의가 있던 BC 81년 움직인다. 곽광이 황제 친위대인 우림군(羽林軍)을 검열하고 그 과정에서 교위를 하나 불러 새로운 직위를 준 것을 역모로 둔갑시킨 것.
워낙 황제의 총애를 받는 곽광이었기에 상관걸 등은 곽광 모반 상소를 감히 스스로 올리지 못하고 황제의 이복 형인 연날왕에게 올리도록했다. 그리고 상소를 올린 것도 곽광이 휴가로 자리를 비운 날을 선택했다.[22] 연왕 단 이름으로 올린 상소에서는 곽광이 우림군을 사열할 때 황제가 직접 사열할 때처럼 길을 막고 통행을 금지시켰고,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고 멋대로 교위에게 새로운 벼슬을 준 것은 황제의 권한을 침해한 것으로 모반의 징후라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소제는 이 상소문을 가만히 두고 우선 곽광을 찾았다. 상관걸 등은 "곽광이 죄를 두려워해 편전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곽광은 자신에 대한 모반 상소가 올랐다는 말을 듣고 금란전(金鑾殿:황제가 조회를 보는 궁궐)에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편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소제가 곽광을 부르자 곽광은 우선 관을 벗고 자신의 죄를 고했다. 그러나 소제는 곽광에게 먼저 관을 다시 쓰도록한 후 그가 우림군을 사열한 것이나 교위 직위를 내린 것은 모두 최근 열흘 안의 일이며 장안 주변에서 벌어진 일인 것을 감안할 때 장안과 10만리나 떨어진 연경(현 북경)에 있는 연날왕이 알고 상소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 곽광이 모반을 하려했으면 교위를 자신의 부중으로 부르거나 새로 뽑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며 오히려 곽광을 달랜다. 누군가가 연날왕과 짜고 무고한 상소를 올린 것이란게 소제의 의중이었다.
소제는 상소문을 올린 경위를 파악했고, 거짓 상소문을 올린 일당은 도주했다. 그 이후에도 상관걸, 상관안, 상홍양은 끊임없이 곽광을 참소했다. 하지만 소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럼에도 참소가 계속되자 불같이 화를 냈다. 소제는 "곽광은 내 어버이같은 신하이므로 그를 참소하는 건 용서치 않겠다"고 선언했다.
상관걸 일당은 소제가 있는 한 곽광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이 짜낸 계략은 곽광을 죽인 후 소제를 폐위시키고 자기들과 짝궁이 맞는 연날왕을 황제로 올린다는 것이다.[23]
BC 80년 상관걸 등은 개장공주 집에서 연회를 연 뒤 곽광을 초대하고 미리 배치한 자객들로 하여금 곽광을 죽인다는 작전을 세웠다. 곽광만 죽이면 소제 폐위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다. 소제(昭帝)가 소제(少帝)[24]가 될 뻔한 셈이다.
그러나 이들의 야심찬 작전은 내부 고발자로 인해 두연년에게 딱 걸린다. 대로한 소제는 승상 전천추에게 명해 곽광 암살을 기도한 무리를 모두 잡아들이고 삼족을 멸하도록 했다. 이로써 상관걸, 상관안, 상홍양 삼상은 모두 처형당해 기시[25]됐고 황제의 이복 형제인 연날왕과 개장공주는 각각 자결했으며 연나라는 폐지됐다.[26] 상관·상씨 집안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곽광의 외손녀인 상관 황후 뿐이었다.이로서 대장군 곽광은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된다. 그리고 상홍양이 그토록 애썼던 염철주 전매는 모두 폐지된다. 물론 곽광이 아니라 두연년이 한거지만...
4 이곽(伊霍) - 한나라의 이윤
4.1 한나라의 유일 권력자 곽광
곽광의 벼슬은 대장군 대사마 그대로였지만 이젠 거칠 것이 없는 권력자가 됐다. 유일 권력자면서도 공손했던 몸과 마음가짐은 소제의 총애를 누리는데 지장이 없었으며 두연년, 전연년(田延年)이 문무 양쪽에서 곽광을 보좌했다.
또 무제시대 유명한 혹리 장탕의 아들 장안세(張安世)도 거기장군이 되어 곽광 속하에서 지지대 역할을 했다.
최고 권력자에는 반드시 반대파가 생기기 나름인데 이후 곽광은 BC 68년에 죽을 때까지 12년 동안 아무런 태클도 받지 않고 권력을 쥐고 흔든다. 이쯤이면 곽광은 사랑과 존경을 동시에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때 한서에서는 곽광의 위상에 대해 서술하길, 곽광은 모든 일을 자기에게 먼저 관백(關白)하도록 했다는 데, 다시 말해 모든 정사는 자신에게 거친 뒤에야 천자에게 아뢰라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훗날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책인 관백이라는 표현이 여기서 나왔다.
4.2 황제를 갈아 치우다
황제의 절대적 지지 속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곽광에게도 위기가 온다. BC 74년 고작 21세였던 소제가 재위 14년만에 사망한 것이다.
소제와 상관황후는 후사도 없어 결국 다음 황제는 무제의 아들 중에 알아 볼 수 밖에 없었다. 이 중 가장 연장자는 광릉왕 유서였지만 그는 이미 아버지 무제에게도 버림을 받았고 곽광도 이 자에게 황제의 자질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심한 곽광은 순리를 거부할 명분을 찾기 힘들었다. 이때 곽광에게 힘을 실어준 사람은 전연년이었다. 전연년은 은(殷)나라 때 개국공신이자 재상이었던 이윤(伊尹)이 사냥에 미쳐있던 태갑(太甲)[27]을 폐했던 일을 말하며 능력이 없는 자는 황제에 올릴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때 맞춰 무릉(茂陵) 사람이 자질이 없는 사람은 황제가 돼선 안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에 곽광은 이 사람에게 상을 주고 자신의 외손녀인 상관태후에게 고해 광릉왕의 제위 등극을 막았다. 곽광은 다음 순위였던 창읍왕 유하(劉賀)[28]를 제위에 올릴 것을 상관태후로부터 승낙받았다.
유하는 황제즉위 교지를 받고 기뻐하면서 자기 세력을 우루루 이끌고 장안에 도착했다. 이때 유하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한다. 소제의 장례가 진행되는 중간에도 술과 고기를 먹었으며 심지어 죽은 소제가 아끼던 후궁 몽(夢)까지 취했다. 이에 당황한 곽광은 아직 등극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유하를 폐위시킬 궁리를 한다. 곽광이 이렇게 생각을 한 명분은 유하가 폭군 기질이 있었다는 점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창읍왕이 즉위할 경우 자신의 권력이 크게 줄 수밖에 없을 거란 점이었다. 창읍왕은 장안에 들어올 때 창읍에서 자기가 부리던 신하 200명을 데려왔다. 그가 즉위하면 곧바로 이들 200명은 삼공 구경을 독식하게될 것이 뻔하다. 더욱이 이들은 창읍왕이 술먹고 놀고있을 때 이미 점령군 행세를 했으며 이것이 곽광을 자극한 것이다.
이 때도 힘이 되준 것은 전연년이었다. 전연년은 우왕좌왕하고 있는 곽광을 설득해 상관 황태후로부터 황제 폐위 회의를 열 것을 요청하도록 한다. 이에 따라 장안 미앙궁에 한나라 고관대작들이 우루루 모였다. 하지만 곽광은 황제 폐위가 회의 안건임을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에 전연년은 칼을 어루만지며 무도한 유하를 황제에서 폐위시키려 한다며 이에 대한 찬성 의견을 가장 늦게 말하는 자는 칼로 죽이겠다고 협박한 후 칼을 뽑았다. 미앙궁에 모인 신하들은 곽광이 아닌 전연년의 서슬에 놀라 모두 창읍왕 유하의 폐위를 찬성한다. 곽광이 올려준 승상 양창은 창읍왕의 폐위에 대해 아무말도 안하고 있었는데 전연년이 칼을 차고 한마디 하자 벌벌 떨기 시작했으며 부인이 곽광을 말을 들어야 산다고 말해주자 곧바로 폐위에 동의했다.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전연년은 우림군을 풀어 창읍왕 신병확보에 나선다. 창읍왕도 낌새를 눈치챘지만 전연년의 대처는 눈부시게 빨랐다. 일단 거기장군 장안세가 우림군 기병 2000기를 거느리고 창읍왕이 창읍에서 데려온 신하 200명을 모두 구금했다. 이렇게 창읍왕의 세력을 무력화시킨 뒤 상관태후의 명으로 창읍왕을 미앙궁으로 소환했다.
당시 15세였던 상관태후는 옥과 귀금속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뒤 창읍왕을 불렀다. 창읍왕은 발버둥을 쳤지만 수하는 모두 체포되고 홀로 남은 상태라 미앙궁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상관태후 앞에 선 창읍왕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폐위를 인정했고 그날로 창읍으로 돌아갔다. 27일 천하의 끝이었다. [29]
그러나 창읍왕의 부하 200명은 '주군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로 한명도 돌아가지 못하고 장안에서 목이 떨어진다. 당시 창읍왕의 부하들은 "잘라낼 것은 빨리 잘랐어야하는데 시간을 끌다 일을 그르쳤다"고 탄식했다한다. 창읍왕 쪽도 곽광을 잡을 궁리를 한 셈이다.
곽광이 고른 세번째 황제 후보는 비운의 황태자 유거의 손자 유병이(劉病已)이다.[30][31] 유병이를 차기 황제로 올린 것은 곽광에겐 신의 한수 였다. 유병이는 '억울하게' 죽은 여태자 유거의 손자이므로 정통성 문제가 전혀 없다. 게다가 병이는 17살 때까지 평민 신분으로 살았기 때문에 지지세력이 전혀 없었다. 창읍왕이 폐위된 결정적 이유는 그의 무도 음탕함보다 자신의 부하 200명을 장안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또 이복형 곽거병의 이모인 무사황후(武思皇后)[32] 위자부의 증손이란 점도 곽광에겐 참고사항이 됐을 것이다.
외척은 있었다. 유병이는 황제가 되기 전 허광한의 딸(허평군)과 결혼했다. 하지만 장인 허광한[33]도 신분이 미미해 외척 세력으로 득세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병이는 황제가 된 후 허 황후를 데려오는데[34] 곽광이 이를 승인한 이유도 자신에게 적이 될 외척 세력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중에 이 허씨 일가가 외척질을 하지만.
어쨌거나 유병이는 이로써 BC 74년 전한의 제9대 황제 선제(宣帝)로 등극한다.
4.3 망자재배(芒刺在背) - 황제도 무서워하는 권신
이제 곽광의 권력은 무소불위가 되었고 창읍왕의 말로를 본 선제는 절대 곽광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다. 곽광은 선제가 즉위하자 즉시 늙었음을 이유로 모든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했지만 선제가 극구 말려 무산됐다. 결국 곽광은 모든 권력을 차지하고 모든 관직에 곽씨 사람이 가득 넘치게 됐다.
선제는 스스로 곽광의 보정을 인정하고 오히려 본인이 스스로 "무릇 조정의 공무는 우선 대장군 곽광에게 보인 다음 짐에게 다시 청하라는" 어명을 내렸을 정도였다. 이런 곽광이 황제인 선제로선 편할리 없다. 이 때를 가리켜 망자재배(芒刺在背)라고 하는데 즉 가시를 등에 짊어진다는 뜻으로, 등 뒤에 두렵거나 거북한 존재가 있어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의미의 고사성어이다.
선제가 증조부 무제의 능을 참배하는 행사에서 대장군 곽광과 같은 수레를 타고 움직인다. 이 때 선제는 곽광과 동행하는 그 자체가 심히 거북했다. 땀을 뻘뻘 흘리고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던 것. 하지만 이후 거기장군 장안세와 같은 수레를 탔을 때는 오히려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행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날의 일에 대해 선제는 스스로 망자재배라고 일컬었다. 이미 선제는 곽광을 짐처럼 여기고 가능만하다면 제거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제는 성인이 됐어도 감히 친정을 하겠다는 선언을 하지 않고 곽광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곽광은 BC 68년 편안히 집에서 죽었다.
5 곽광 사후, 가문의 멸족
5.1 현부인의 욕심
곽광이 살아있던 BC 71년의 일이었다. 곽광에겐 후처로 현(顯)씨가 있어 곽현(霍顯)이라고 불리는데. 비천한 출신이지만 빼어난 외모로 첩이 되더니 결국 후처 자리까지 올랐다. 그녀는 힘들게 출세한 만큼 욕심이 지나쳐자신의 유일한 딸(곽성군)을 황후로 올리려는 게 야심을 품었다
하지만 선제는 허황후가 있었고 이 허황후를 총애했다. 결국 곽현은 선제의 황후 자리에 자신의 딸을 앉히기 위해 황자 유삭을 낳은 직후 허황후를 독살한다. 독살에 나선 사람은 곽현에게 매수된 황궁 여자 어의 순우연이었다. 곽광은 즉시 허황후의 죽음에 대해 수사에 착수했으나 결국 미제사건으로 남고 만다. 곽광이 곽현이 독살한 것을 알고 고발하려했으나 자칫 가문이 도륙당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사건을 덮었다는 말도 있다.
아무튼 허황후가 죽자 곽성군(霍成君)은 후궁으로 들어갔고 이듬해인 BC 70년 드디어 황후가 된다. 그리고 2년 후 아버지 곽광이 죽었다.
5.2 달도 차면 기우나니
드디어 곽광이 죽었다. 곽광의 장례는 선제가 직접 주관해 제왕의 예로 치뤄질 정도로 성대했다. 이미 성년이 된 선제는 친정을 선언했지만 이는 형식적인 것으로 선제는 곽광의 후손들에게 모두 높은 벼슬을 내렸다.
먼저 곽광의 아들 곽우는 박육후에 올리고 우장군에 봉해 병권과 내조를 모두 장악하도록 했다. 이어 곽광의 조카 곽산(霍山)[35]은 낙평후에 봉하고 봉거도위에 상서를 임명했다. 곽광이 무제가 죽기 전 가졌던 벼슬을 그대로 갖게 한 셈이다. 곽산의 동생 곽운(霍雲)은 관양후에 봉했다. 그리고 곽광의 사위들은 우림군과 궁궐 수비병 지휘권을 모두 차지했다.
곽광의 후손들은 곽광과 달리 매우 교만하고 제멋대로였다. 곽우 등은 황제가 불러도 조정에 거의 나가지 않았고 그 자리에 가노(家奴) 풍자도를 보내 대신 입시케하는 불경을 저질렀다. 선제를 비롯한 신하 모두 그것을 모르진 않았지만 감히 곽우를 탓하지 못했다. 곽현은 딸 곽성군이 황후임을 핑계로 궁궐을 자유로이 드나들었고 곽산, 곽운은 후궁들을 희롱하는 등 신하로서 감히 할 수 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이때 어사대부 위상(魏相)은 선제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의 요지는 공신의 후예라도 공이 없는데 지나치게 높은 관직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선제는 모든 신하들이 다 곽광 편인줄 알았다. 하지만 위상의 이 상소로 곽광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즉시 선제는 위상을 급사중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옆에 두었다. 그리고 장인인 허광한을 중용했고 자신의 할머니(여태자의 빈) 가문인 사(史)씨 집안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기회를 보고 있던 선제는 드디어 칼을 뽑아든다. 허황후의 죽음이 곽현의 사주에 의한 것이란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우선 선제는 위상의 전략에 따라 곽씨들을 조정에서 축출한다.
선제는 곽우를 우장군에서 대사마로 봉했다. 앞서 말했듯 사마(司馬)의 뜻은 국민개병의 대장이다. 대사마는 대장군보다 반수 높은 직위로 우장군보다는 훨씬 높지만 실제 병권을 갖지는 못한다. 즉 곽우에게 우장군 직을 뺏고 대장군이 아닌 대사마를 봉한 것은 병권을 회수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어 곽광의 친족들도 좌천시킨다. 미앙위위(황궁방위대장) 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우림군 통솔권한을 갖고 있던 곽광의 사위 범명우를 광록훈으로 임명하고 도요장군을 반납케 했다. 곽광의 둘째 사위인 우림감 임승은 안정태수로 발령했으며 곽광의 외종질 사위 급사중 광록대부 장삭은 촉군태수, 손녀사위 중랑장 왕한은 무위태수로 장안에서 멀리 날려버렸다. 이어 곽광의 사위들인 장락위위 등광한은 소부로 강등시키고 광록대부이자 산기도위 조평에게선 병권을 갖는 기도위 직위를 빼았다. 이로써 곽씨가 갖고 있던 도성과 황궁의 병권은 모두 허씨와 사씨에게 넘어갔다.
창읍왕 체포의 혁혁한 공을 세웠던 장안세는 사실상 곽광의 속하였지만 선제 즉위 후 득세하기 시작한 장하의 동생이었던 만큼 중용된다.[36]
장안세는 위장군이 돼 궁궐의 모든 수비병과 북군 팔교위를 모두 거느릴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곽씨의 타도의 선봉에 서게 될 위상은 소승상(昭丞相)으로 올렸다. 그리고 허씨와 사씨 집안 사람들을 대거 궁으로 불러들여 동서 양궁의 주둔병과 우림군 병권을 갖게 했다. 병길도 곽광의 속관이지만 그는 선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곽광이 죽은 후엔 더이상 곽광의 사람이 아니었다.
곽광 일족에게 뼈 아픈 일은 곽광의 행동대장 전연년이 죽었다는 것이다. 전연년은 재무장관인 대사농에 있으면서 소제의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수레 대여비 명목으로 돈 3천만전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 사건은 무릉의 부자 초(焦)씨와 가(賈)씨가의 탄핵에 따라 시작됐다. 이들은 소제 장례를 앞두고 장례 물품을 사재기했었다. 이 사실을 안 전연년은 이들이 가진 물품을 몰수했고, 앙심을 품은 이들이 전연년을 탄핵했다. '공평무사'로 이름 높은 곽광은 자기 부하지만 봐주지 않고 전연년을 수사하라고 시킨 것.
이에 전연년은 수사 받기를 거부하고 자살해버린다.(BC 72년) 사실 전연년이 모은 3천만전은 곽광 일당의 돈이지 전연년이 개인적으로 치부한 돈이 아니었다. 기실 곽광 역시 전연년을 버릴 생각은 없었다. 수사하는 척 수선을 떨면서 대충 넘어가려 했는데 대쪽같은 전연년이 혼자 자살해버린 것이다. 이 일 때문에 곽광은 자신의 충복을 버렸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전연년이 살아 있었다면 곽씨가 이렇게 몰락하진 않았을것이다.
5.3 곽씨의 몰락
이렇게 선제는 곽씨 사냥을 시작한다. 곽우는 자기 일족이 병권을 잃거나 지방으로 좌천되기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꼈다. 곽우는 "아직 대장군(곽광)의 무덤을 덮은 흙도 다 마르지 않았는데 황제는 곽씨 집안 사람들을 멀리하시고 허씨, 사씨 집안 사람들만 가까이 하신다. 우리 집안의 모든 관직까지 다 빼앗으셨으니 죽으란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하고 한탄했다.
곽현은 여기서 불을 지르는 행동을 한다. 자기 딸이 황후가 됐지만 태자는 죽은 허 황후의 아들인 유석(劉奭,훗날 원제)이 올랐다. 곽현은 여기에 격분하고 유석을 암살하려 들었는데 허 황후를 죽일 때처럼 음식에 독을 타려 했으나 허 황후가 죽은 뒤 아들 관리에 몹시 신경을 쓰던 선제는 유석의 침실과 음식에 경계를 늘렸고 결국 곽현은 유석을 죽이는데 실패했다. 이 사실을 안게 된 선제는 곽씨 일족에 대한 탄압을 더욱 서둘렀다.
이젠 곽우 등도 곽현이 허 황후를 암살한 사실을 알았으며 이 사실을 선제도 알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다급해진 곽우는 아예 한나라 체제를 타도할 생각을 한다. 이들은 상관 태후가 선제의 외조모인 박평후를 위해 여는 연회에서 위상과 허광한을 주살하는 방법을 고려했다. 범명우와 등광한은 태후의 명이라고 공갈치고 위상과 허광한을 죽이고 곧장 황궁으로 들어가 선제를 폐위한 후 곽우를 황제에 앉힌다는 것이다. [37]
하지만 이 계획이 실현되기 전 곽산은 현토군 태수로 발령났으며 태중대부 임선은 대군 태수로 임명됐다. 이때 곽산이 궁중 기밀 문건을 누설한 죄를 짓는다. 곽현은 곽산의 죄를 사해주면 장안 서쪽에 있는 저택과 1000필의 말을 바치겠다고 선제에게 고했다. 하지만 선제는 아무런 회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때 쯤 곽씨의 모반 음모도 들통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곽산, 범명우는 자살했고 곽현, 곽우, 등광한은 체포됐다. 곽우는 요참형에 처해졌으며 곽현과 그녀의 딸들. 형제 들은 모두 거리에서 목이 잘린다. 이 사건에 연루돼 죽임을 당한 집안은 1000여 가구에 달할 정도였다. 오직 곽 황후만 겨우 살아남아 폐위된채 소대궁에 유폐된다. 천하의 곽광의 가문이 멸족한 것이다. (BC 66년)
6 논란과 평가
6.1 사직을 보존한 충신 또는 황제를 갈아엎은 간신
일각에서는 곽광의 창읍왕 폐위를 한나라 사직을 구한 행위라고 평가한다. 실제 창읍왕은 아버지는 아니지만 선제인 소제의 장례식 기간 동안 술먹고 여자를 끌어들이는 상식 밖에 행동을 했다. 실제로 이런 놈들은 100% 폭군이 된다. 주유왕(周幽王), 연산군 등 그래서 곽광이 창읍왕을 폐위시킨 당대에도 곽광은 '이곽(伊霍)'이라 불리며 이윤이 태갑을 내친 것과 같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 간신이란 지적도 있다. 당대에도 곽광 사후 곽씨 일족이 누리고 있던 권세를 못마땅해하던 어사대부 위상은 곽씨 일족을 춘추시대 노나라 계손씨에 비교하며 권세를 빼앗아야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가 창읍왕 유하를 폐위시킨 것에 대해서도 신하로서 할 짓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6.2 법가에서 무위지치로 회귀
곽광은 10살때부터 궁에 들어가 무제의 시중을 들었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는 것도 없고 특별한 철학이 있지도 않았다. 그의 속관인 두연년은 한무제 시기 상홍양을 중심으로 정치 사상을 자리잡고 있던 법가를 거부했으며 두연년이 숭상했던 것은 문제, 경제 시대의 무위지치(無爲之治) 즉 황제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백성과 민간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무제 시기의 재상인 상홍양은 염철주 전매로 벌어들인 수익을 기반으로 군대를 키웠고 이 것은 한나라 시대 흉노를 토벌하고 고조선을 섬멸할 수 있었던 군사력의 뒷받침이 됐다. 처음엔 이렇게 해서 중앙의 재정수입이 크게 증가하고 국고도 충실해졌다. 무제는 전국을 시찰할 때마다 약 백만 필의 옷감과 엄청난 금전을 상으로 내렸는데, 모두 재정을 관리하는 대농에서 가져갔다. 상홍양은 또 황제의 허락을 받아 전국 각지에 속보관(粟補官)을 활용하여 곡식을 내면 죄를 감해주거나 사면해주는 조치를 취했다. 이렇게 해서 국고는 더욱 충실해져 일 년 사이에 태창·감천창이 가득 찼다. 남는 화물이나 옷감 5백만 필은 전국에 고루 나누어 운송했다. 인민들이 세금을 더 내지 않아도 천하가 풍요로웠다.
하지만 점차 백성들은 방만한 재정낭비와 흉노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전비소모, 군사적 피해로 인해 이를 보충할 필요가 있던 조정에 의해 높은 세금과 부역, 혹정에 시달려야 했고 흉노와의 전쟁을 뒷받침하던 염철주 전매는 이로 인해 국가가 백성을 곤란하게 만드는 제도로 받아들여졌다. 상홍양이 여러가지로 재정 정책안을 내놨건만 무제가 그 이상으로 말아먹고 있던 것. 또 고조 유방부터 무제의 부친인 경제까지 이르는 동안 한나라 통치 방침으로 자리잡은 군국제 대신 황제가 독재하는 군현제를 하려는게 무제의 생각이었는데 이로 인해 한무제 시대는 유교에서 기피하는 혹리가 판을 치던 시대였다. 이에 반대파들은 무제시대의 정책을 전면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 시대의 정책인 철과 소금의 국가전매는 본말이 뒤바뀐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일수 밖에 없었고 그 중심엔 곽광의 심복 두연년이 있었다.
이런 두연년의 영향을 받은 곽광은 여민휴식(與民休息), 즉 백성에게 조세와 노역을 가볍게 하는 무위지치로 회귀했으며 무제시기의 활발한 대외정책을 포기한다. 오늘날로 따지면 자유방임주의인 셈이다. 다만 이렇게 되면 귀족과 지방호족의 힘이 세진다. 하지만 적어도 곽광이 통치하던 시대에는 여민휴식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해 국가로 흐르던 부(富)가 백성에게도 흘렀으며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만큼 백성들의 삶도 윤택해졌다. 곽광이 찬사를 받는 이유는 바로 이 것이다.
여민휴식과 여민쟁리는 양날의 칼이다. 상홍양은 염철주 전매를 통해 얻은 부를 기반으로 국가 방위를 강화했고 이는 곽광이 통치하던 시기를 비롯해 약 100년 이상 한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지 않게 되는 원인이 됐다. 하지만 무제가 통치하던 50년 동안엔 매해 빠지지 않고 엄청난 규모로 전쟁을 벌였고 군사물자의 소모가 매우 심각했으며 인적, 물적으로 엄청난 손해를 보면서 전쟁을 치루어 결국엔 각종 세금과 증세가 이어졌다. 무제가 말년에서야 흉노전을 중단한다는 윤대의 조를 발표했을 때 백성들은 기뻐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제시기 정책인 염철주 전매는 흉노전 전쟁을 속개한다는 의지로 보였기 때문에 당장 재산상 손실을 입는 중앙귀족이나 지방 호족이 아닌 일반 백성들도 반대했던 것이다.
6.3 권력욕의 화신, 제가(齊家)의 실패
곽광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는 권신이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어린 소제가 등극해 재미를 봤던 곽광은 소제 생존시 단 한번도 권력을 양보하지 않았으며 소제 사후에도 가급적 어린 황제를 세우려고 애를 썼다. 계승순위가 앞섰던 광릉왕 유서가 딱지를 맞고 창읍왕 유하가 폐위된 것은 그들에 대한 평판이 옛날부터 좋지 않았던 이유가 가장 크다. 하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책봉 왕으로 있으면서 자기 사람이 있었고 성인이었다는 점에서 황제 등극과 동시에 곽광과 권력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황제와 신하의 권력 싸움에서 대의명분은 황제에게 있다. 이를 모를리 없는 곽광은 아예 파워게임을 걸지 않을 사람을 황제로 선택한 것이다. [38]
더욱이 곽광은 집안 단속에 실패했다. 곽광의 둘째 부인 곽현은 비천한 신분에서 정경부인이 돼서 그런지 권력욕이 많았고 자기 딸 곽성군을 황후로 올리기 위해 선제가 사랑하던 허평군을 독살했으며 허평군의 아들 유석이 황태자가 되자 이번에 그도 독살하려했다. 곽광은 허평군이 아내에게 독살당한 사실을 알았지만 이를 감췄고 결국 이는 그가 우려한 대로 가문이 멸족되는 단초가 된다.
한서의 저자 반고는 "곽광은 강보에 쌓인 어린 황제를 보좌하라는 황제의 유지를 받은 후 한 왕실을 보좌하고 사직을 안정시키며 한소제를 옹립하고 한선제를 세웠다. 주공, 아형도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라고 평가했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도 곽광에 대해 "곽씨 가문의 죄는 멸족되어 마땅하나 곽광의 공은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6.4 기린각 11공신의 우두머리
곽씨를 모두 쳐죽인 후 한참 뒤인 BC 54년 선제도 곽광에게 미안했던지 장안성 기린각에 11명의 공신의 초상화를 걸었다. 11명의 공신의 우두머리는 곽광이다. 나머지는 장안세(張安世), 한증(韓增), 조충국(趙充國), 위상(魏相), 병길(丙吉), 두연년(杜延年)[39], 유덕(劉德), 양구하(梁丘賀), 소망지(蕭望之), 소무(蘇武) 등이다. 선제는 이런 식으로라도 곽광에게 사과하고 아울러 곽씨를 멸망시킨 건 그들의 무도함 때문이지만 곽광의 공은 인정한다는 뜻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로 보인다.
7 곽광의 가계
8 문화속의 곽광
8.1 중국 드라마
파일:곽광9.jpg
중국 TV 드라마 대한정연지운중가에서 곽광은 남주인공 맹각과 대립하는 권신으로 나온다. 배역은 구진해(寇振海)가 맡았다.
8.2 한국드라마
KBS TV에서 방송된 대하사극 '정도전' 제28회(2014.4.16 방영)에서 윤소종이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를 찾아 한서 곽광전을 준다. 즉 무도한 고려 왕을 폐위시켜야한다는 의도다.- ↑ 한서 주석에 문영(文穎)이 말하길 ‘박육은 크고 편하다는 말이니 그 아름다운 이름을 취한 것이고 박육이란 고을이 없으니 곽광이 봉한 곳이 북해와 하동 두 고을이라.’하고 설찬(說繤)이 말하길 ‘어양성에 박육성이 있으니 수경(水經)이란 책을 살펴보면 알 것이다.’하였으니 문영의 말이 잘못된 것이다.
- ↑ 낭중 산하의 벼슬 이름.
- ↑ 궁중에서 상소를 분담하는 벼슬
- ↑ 키가 크지 않았다는 사료도 있지만 한서에는 7척3촌이라 돼 있다. 한나라 시대 1척은 24센티이므로 곽광은 171센티 정도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키였을 걸로 보인다.
- ↑ 어느날 황궁에 변고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곽광은 옥새를 지키는 것이 가장 긴급하다고 생각하고 옥새를 관장하는 상부새랑을 불러 옥새를 내놓게 했다. 상부새랑은 “옥새를 지키는 것이 신의 직책이다. 죽어도 사사로이 옥새를 넘길 수 없다”고 저항했다. 다음날 변고가 없자 그는 상부새랑의 녹봉을 올려주며 “그대가 이처럼 옥새를 지키는데 내가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 ↑ 일설로는 그녀는 두 주먹을 쥔 채로 태어났다는 썰이 있다. 조첩여는 커가면서도 주먹을 풀지 못했는데 어느날 무제가 조 첩여를 만나 손을 만져주니 주먹이 펴졌다고 한다. 훗날 한무제는 조 첩여 소생 황자를 태자로 올리며 그녀를 자결케 했다. 외척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라는 평가가 있으며 위청 가문을 멸족 시킨 것도 바로 외척 전횡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평가가 있다.
여후의 추억 - ↑ 주공 희단(姬旦)은 주나라 시조 주문왕(周文王) 희창(姬昌)의 차남이자 주무왕(周武王)희발(姬發)의 친동생. 무왕의 아들 성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섭정이 됐으며 조카 대신 왕이 될 것이란 주변의 시선을 막기 위해 성왕을 업고 조정 회의에 참석했다. 형제들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주공이 왕위를 찬탈하려한다는 빌미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했고 성왕이 장성하자 권력을 돌려주고 은퇴했다. 한때 주성왕의 의심을 받자 도망간 적이 있었으나 이후 성왕이 병에 걸리자 '차라리 나를 아프게 하고 왕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왕실에 복귀했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사실상 첫번째 성인으로 꼽힌다.
- ↑ 사서에 따라 고명대신이 왔다갔다한다. 한서에서는 곽광과 김일제만 거론됐지만 정황상 상홍양과 상관걸 이렇게 4명이 고명대신에 포함되는 게 맞다.
- ↑ 대사마(大司馬)의 사마는 상비군(常備軍)이 아닌 국민개병(國民皆兵)의 수장으로 모든 군사 조직의 최고 우두머리를 뜻한다. 대장군은 상비군의 수장을 뜻한다. 사마는 아직 상비군 개념이 없던 춘추시대에 있던 관직이다. 이는 중원의 패권국인 진(晋)이 4군을 두어 각각 원수(元帥)를 임명하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대사마는 한무제가 신설된 직위인데 대장군과 표기장군에게 각각 대사마 칭호가 부여된다. 곽거병을 이뻐한 한무제가 위청과 동등한 군부 1인자 자리를 주기 위해 고안해낸 것이다. 따라서 위청은 대장군 대사마에 곽거병은 표기장군 대사마에 각각 올랐다. 하지만 후한말에 이르러서는 대사마는 대장군보다 반직급 높은 벼슬로 쳤다. 다만 대사마가 있으면 대장군은 없었다. 대사마(대장군도)는 말 대로라면 단지 병권을 장악한 사람이지만 승상이 없는 경우 필두 재상 역할을 한다. 물론 곽광은 승상이 있었음에도 계속 최고 집권자였다. 후한말 이각(李隺)이 받은 벼슬이 대사마다.
- ↑ 그러나 김일제의 후손들은 투후를 물려받았다. 삼국지에 나오는 김위가 바로 투후다. 무릉 태수 김선도 김일제의 방계 후예다.
- ↑ 상관안의 아내이자 황후의 어미는 곽광의 딸이다. 이 양대 실력자는 사돈관계를 맺어 서로 뒤통수 치는걸 막으려 한 셈.
- ↑ 領은 겸임의 의미
- ↑ 위청의 자형이자 위 황후의 형부인 공손하는 BC 103년 승상에 오른다. 이 때 공손하는 앞서 이채, 장청적, 조주 세명의 승상이 잇따라 삼족이 사사된 것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어 승상 자리를 고사했다. 하지만 결국 승상이 됐고 역시 가문이 주멸됐다.
- ↑ 참찬관 정유길(鄭惟吉)이 "곽광이 비록 배우지 못해서 무식은 하였으나 후사(後嗣)의 부탁을 받고서 독실히 하고 근신히 해서 행동과 마음가짐이 보통 사람과 달랐습니다"고 왕께 아룄다. (명종실록 22권, 명종 12년 1월 14일) 또 정조실록에서도 정조와 이재성도 곽광은 학문적 소양이 없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 ↑ 지방의 조세 수입으로 중앙정부에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여 중앙으로 운송했던 기관이 균수관, 평준관은 물가가 쌀 때 사 두었다가 비쌀 때 방출해 재정 수입을 증대하고 물가를 조절하는 기관
- ↑ 당시 투입된 병력은 10만, 말이 사람보다 많았다.
- ↑ 당장 곽광의 형 곽거병의 흉노 원정 당시 엄청난 양의 물자를 보급받아 놓고선 정작 병사들은 제대로 보급을 못 받은 상태에서 물자를 얼마 쓰지도 않고 그대로 버리는 일까지 있었다.
- ↑ 현량과 문학은 원래 벼슬을 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 천거되는 사람을 일컫는 말
- ↑ 개장공주는 소제의 이복 누나이자 당초 황태자로 거론됐던 연날왕 단(旦)의 동복누나
- ↑ 평민인 정외인이 개장공주와 결혼하려면 벼슬이나 봉작은 필수적으로 있어야 했다.
- ↑ 연왕 유단은 무제와 그의 후궁 이희(李姬)의 아들로 광릉여왕 유서의 동복형이다. 무제 생전 여태자와 제왕이 죽자 계승순위상 자기가 다음을 이어야한다고 주장하다 무제의 분노를 샀다. 소제 즉위 후 곽광이 돈 3천만전을 주고 1만3천호를 증봉했으나 이에 만족치 않고 황제가 되려했다. 유단은 이후 속하 성진(成軫)의 계략에 따라 소제가 무제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을 내고 소제를 타도하려 했다. 유단은 상관걸을 왕으로 삼기로 하고 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개장공주의 사인 연창(燕倉)이 고발해 들통났다. 소제와 곽광은 우선 도성에 있는 상관걸, 상홍양 등은 잡아 죽인 후 사면령을 내려 유단을 안심시켰지만 곧이어 소제는 유단을 꾸짖는 새서를 내렸다. 이를 본 유단은 결국 목을 매 자결했다. 연왕의 왕후와 첩 20여명도 함께 유단을 따라 자살했다. 이후 소제는 유단의 세자 건을 사면하고 유단의 시호를 날(剌)로 정해줬다. 훗날 선제는 유건을 광양왕으로 봉했다.
- ↑ 모든 정무를 맡았던 곽광은 휴가를 갈 땐 상관걸이 대신 정무를 맡았다
- ↑ 일부 사서에서는 연날왕도 죽이고 상관걸이 황제가 되는 시나리오도 마련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곽광측이 상관걸 일당을 대역무도한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벌인 언론플레이일 수 있다.
- ↑ 한나라때 정통성이 없거나 강제 폐위된 황제를 일컫는 칭호
- ↑ 죽은 뒤 시체를 저자거리에 버려둠.
- ↑ 선제가 기원전 73년에 즉위하면서 연날왕의 아들 유건이 복권돼 광양왕이 된다.
- ↑ 사기에 따르면 태갑이 사냥 나갔을 때 이윤이 빈집털이해 폐위, 이후 3년 동안 동궁에 유폐시킨 후 죄를 뉘우치자 다시 복위시켰다고 한다. 다만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태갑 원년에 이윤이 태갑을 동(桐)으로 내쫓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며, 7년 뒤에 동에서 몰래 빠져나온 태갑이 이윤을 죽였다고 기록됐다
- ↑ 무제의 아들 창읍애왕 유박의 아들로써 무제의 손자다. 유박은 위청 사후 대완전, 흉노전을 책임졌던 이사장군 이광리(李廣利)의 외조카다. 이광리는 무제 말년이었던 당시 승상 유굴리와 함께 유박을 태자로 올리려다 발각됐다. 유굴리는 요참(허리를 짜름)됐고 흉노전 중이던 이광리는 흉노에 투항했다. 이후 외롭게 살던 창읍애왕은 죽고 아들 유하가 봉작을 계승했다.
- ↑ 전연년은 창읍왕을 당시로선 오지인 한중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지만 곽광은 그냥 창읍으로 돌려보낸다. 창읍현은 한 고조 유방이 항우와 함께 진(秦)나라를 토벌할 때 가장 먼저 평정한 곳이며 창읍국의 수도로, 창읍국은 원래 산양군(山陽郡)이었으며 창읍애왕이 봉해지면서 창읍국으로 바뀌었지만 이 사건 이후 도로 산양으로 바뀐다. 그리고 한나라 마지막 황제 헌제가 폐위된 후 쫓겨나는 곳이기도 하다. 또 창읍왕은 창읍으로 돌아갔지만 분봉왕의 지위를 잃었다. 그가 다시 복권되는 것은 곽광이 죽고 황제 선제가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을 때다.
- ↑ 무고의 화 당시 유병이는 갓난 아기였는데 할아버지 태자와 증조모(위황후), 아버지 유진이 죽자 어머니 왕씨도 자살한다. 유병이는 감옥에 들어가는데 정위감 병길(丙吉)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病已라는 이름은 어릴 때 자주 아팠기 때문에 병에서 벗어나라는 의미로 지어졌다. 곽거병의 去病도 같은 의미다. 두 여죄수의 젖동냥으로 목숨을 이어온 유병이는 곧 할아버지 유거의 무고함이 밝혀지자 풀려났다. 유병이는 병길의 추천으로 곽광의 낙점을 받았고. 그 뒤 양무후(陽武侯)에 책봉됐다. 평민신분으로는 황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황제에 등극한다.
- ↑ 병길은 곽광의 꼬붕 장안세의 동생과 친했다. 병길이 유병이를 추천하자 장안세를 통해 곽광에게 올라갔다
- ↑ 선제가 증조모를 위해 추증한 것이다. 위자부는 자결할 때 폐서인 됐다.
- ↑ 허광한은 창읍왕의 가신으로 낭(郎)에 있었는데 무제의 사냥길에 따라 갔다가 다른 낭의 안장을 자기 말에 얹은 적이 있었다. 이 일로 그는 '간 크게 황제 행차 때 도둑질을 한 놈'이 됐고 궁형을 받아 내시가 된다.
- ↑ 소제는 "짐은 옛날에 쓰던 칼을 다시 쓰고 싶다"며 허황후를 불러들인다
- ↑ 가계도 상 곽산, 곽운 형제는 곽거병의 손자로 장자였던 곽선의 친조카가 된다. 하지만 한서에는 곽산 형제가 곽거병의 손자라는 얘기는 없다.
- ↑ 장하는 여태자의 가신이었다. 그는 병길과 함께 유순을 키웠는데 아예 자기 딸을 유순에게 주려고 했다. 하지만 동생 장안세가 반대했다. 형보다 곽광에게 가까웠던 장안세는 종손이 되는 유순은 황위 계승권을 가질 수 있는 만큼 제거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 것. 이래서 장하는 결국 자신의 부하 허광한의 딸을 유순에게 시집보낸다
- ↑ 곽씨가 황제가 되려고 했는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아마도 당시 조정의 수사 결과가 이랬을 거고. 이 것이 사서에 실린 것으로 보인다
- ↑ 곽광이 창읍왕을 폐할 때 가장 우려했던 것은 창읍왕이 자살이라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곽광은 만고의 역적이 된다. 그래서 곽광은 전연년, 장안세 등에게 창읍왕의 신병을 빨리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 ↑ 두연년은 곽씨 몰락 직후 곽씨의 당여로 몰려 유배됐지만 몇년 후 북지 및 서하 태수로 복직됐고 여기서 공을 세워 어사대부로 복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