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廷馣
1541~1600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당시에는 의병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2 활약
1558년 진사가 되고 156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했다.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쳤으며 특히 외직으로는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경상도 등 안가본 곳이 없을 정도. 백성들을 수탈하던 탐관오리들과는 달리 백성들을 보살피고, 폐단을 근절[1]하여 민심을 얻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는 이조참의로 있었는데, 전란 발발 후, 평안도로 몽진하던 선조를 호종하려 했으나 미치지 못하고, 전란을 막지 못하여 명목상 체직(직위해제)되었다. 임무가 없어지자 그는 개성으로 가서 당시 개성유수로 있던 동생 이정형과 합세하여 개성을 수비했으나, 임진강 방어선이 함락되고 개성 또한 적의 수중에 떨어지자 동생과 함께 개성을 탈출, 황해도 초토사로 임명되어 의병장이 되었다.
의병장으로서 이정암이 세운 최대의 전공은 바로 연안성 전투. 전란 발발 후 4개월이 지난 8월 28일에 일본 제3군 사령관 구로다 나가마사가 직속 병력 5,000여명을 이끌고 연안성을 공격해오자, 의병 1,400여명의 병력을 규합해 연안성을 수비, 사흘 밤낮으로 싸우던 끝에 격퇴했다.
이런 혈전을 끝내고 이정암이 올린 장계가 대단한데,
以二十八日圍城 以二日解去(이이십팔일위성, 이이일해거)28일에 성을 포위했다가 2일에 포위를 풀고 물러갔습니다.
라는 한 줄 짜리 장계를 올려 조정을 심히 당황케 했다. 쿨가이?
물론 나중에 그 상세한 내막이 전해지면서 조정에서 '적을 물리치는 일은 쉽지만 이를 자랑하지 않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치하했고, 선조 또한 정2품의 벼슬을 제수하고 황해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임명했다.
이후로도 전라도, 충청도 등을 오가며 관찰사를 지냈는데 특히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 데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때 죄수를 임의로 처벌한 것이 논란이 되어 잠시 파직을 당했다가 다시 황해도 관찰사로 돌아왔다.
정유재란 때에도 초토사로서 황해도 일대를 수비했으며, 전란 평정 후에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얼마 안가 죽었다. 사후 전란 당시의 공적이 인정되어 김시민, 이억기 등과 함께 선무 공신 2등에 이름을 올렸다.
3 창작물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에서는 의외로 등장이 빠른데 동래부사를 맡던 시절부터 등장한다. 일본 사절단으로 꾸민 쓰시마의 다치바나 야스히로의 행동에 수상함을 느끼고 전운을 직감한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