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임진왜란(1592년) 당시의 전투.
조선군이 임진왜란에서 거둔 사실상 최초의 수성전에서의 승리[1]로, 뒤에 일어난 진주 대첩이나 행주 대첩의 효시격인 전투라 할 수 있다.
2 배경
전란 발발 후 1개월만인 5월 18일 임진강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일본군이 군을 나누어 개성과 강원도로 각각 쳐들어갔는데, 당시 개성유수였던 이정형과 그의 형 이정암은 개성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일가를 데리고 개성을 탈출, 함경도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2]했다. 한편 일본군은 일단 개성을 점령하고 난 뒤에는 곧바로 평양을 치기 위해 대동강 전선으로 전진했기에 황해도 대부분 지역이 진격로에서 살짝 벗어나 적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일단은 피하게 된다.
북부 전선이 이렇게 무너지고 있을 때, 남부 전선에서 각지의 의병이 봉기하여 유격전이 진행되는 한편 이순신의 수군의 활약으로 수륙병진책이 묵사발이 되면서 일본군의 예봉은 평양성에서 꺾여버린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일본군은 주변으로 세력을 넓힐 필요성이 생겼으며, 이중 황해도를 공략하는 임무는 11,000여명의 규모를 자랑했던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이 맡는 것으로 결정됐다.
한편, 황해도는 당시 평안도, 함경도와 함께 평소 관원들의 탐학(…)이 심해 민심이 영 좋지 않은 곳이었는데, 권토중래를 노리고 황해도로 들어왔던 이정암은 다행히도 과거 연안도호부, 평산도호부 등의 부사를 지내며 공평무사한 일처리로 민심을 얻었던 목민관이었다. 그는 분조를 지휘하던 광해군에게 황해도 초토사의 직함을 받고 의병 500명을 모집, 황해도의 주요 거점인 연안성[3]으로 향한다.
3 전투 전개
3.1 전투 전야
과거 연안부사로 명성이 높았던 이정암이 연안성에 입성하자, 당시 적의 주력군을 피해 섬에 주둔하던 연안부사 김대정이 합류했고, 백천의 유력자 김덕성과 박춘영, 황해도의 의병장 주덕윤, 장응기, 이대춘 등이 저마다 의병을 이끌고 합세하여 입성 3일차에 1000명, 4일차에는 1400명으로 그 군세를 확충했다. 또한 전임 연안부사 신각이 전쟁 준비론자였던 조헌의 권고를 받아들여 성곽을 보수하고, 우물을 파놓고, 물자를 비축하는 등 수성전에 대비한 물밑작업을 잘해둔 상태였다는 점은 의병대가 가진 또 하나의 강점이었다.
한편 황해도 진격의 소임을 맡은 구로다 나가마사는 평양에서 출발해 평산, 백천 등을 점령하고 해주로 향하고 있었는데, 황해도의 주요 곡창지대인 연백평야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연안을 함락시킬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연안성을 직접 함락시키기 위해 직속 병력 5천여명을 이끌고 연안성으로 향하게 된다.
이윽고 전란 발발 4개월째인 8월 28일, 제3군의 선봉대 1000명을 필두로 일본군이 연안성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3.2 8월 28일
막상 적들이 성문 앞에 당도하자 성 안의 사람들은 당연히 동요할 수밖에 없었고, 일부는 성을 버리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장을 했으나 이정암은 "백성들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했으니 죽음이 두려우면 떠나라"라고 말했고, 종사관(종6품의 부관 직책) 우준민이 이 뜻을 널리 알리며 군사들을 다독였다. 곧이어 일본군이 성을 포위하고 항복 사자를 보냈으나 "너희는 병(兵)으로 싸우지만 우리는 의(義)로써 싸운다"라는 답장을 보내 이 역시 일축해버린다.
공격을 가하기 직전, 일본군의 한 장수가 백마를 타고 연안성 동문 앞을 돌아다니며 시위하는 도발성 심리전을 걸었으나, 수문장 장응기의 화살에 맞고 사망하면서 의병대의 기세만 올려준 꼴이 되었다(..) 이날 밤 일본군은 공성탑을 이용해 불화살로 화공을 가했으나 역풍이 불어 불이 쉽게 진화되면서 이 역시 효과를 보지 못했다.
3.3 8월 29일
마침내 일본군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조총을 난사하며 사다리와 넓은 판자를 이용해 성문을 기어오르는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이정암은 침착하게 성벽을 오르는 군사만 쏠것을 지시하며 화살의 낭비를 막았는데, 이는 장기전에 대비한 일이었다.
3.4 8월 30일
이날 역시 적의 공세가 거셌으나 역시 의병대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서문의 수비를 맡은 이대춘이 철전을 쏘아맞춰 판자를 떨어뜨리자 일본군이 압사당했다는 대목이 있으며, 화살로는 적을 저지하는 것이 부족하자 솥에서 물을 끓여 뜨거운 물을 붓거나, 건초에 불을 붙여 적에게 던지는 등 화공도 사용되었다.
3.5 9월 1일
마침내 일본군의 본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로다 나가마사가 대장기를 꽂고 북쪽 산에서 치고들어오면서 적의 규모는 5천여명으로 늘어난다. 본진이 합세하여 총력전을 벌이는 일본군의 기세에 연안성은 위기에 처했고, 군사들이 다시 동요하기 시작하는데..
결국 지휘관 이정암은 군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마른 장작을 쌓은 뒤 그 위로 지휘석을 옮겼다. 그리고 아들 이준에게 이 성이 함락되면 여기에 불을 질러라. 내가 적에게 모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을 것이다라는 또 하나의 명언을 남긴다.오오...
또한 치열한 전황 속에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있던 역관[4]이 적진에서 탈출해 연안성으로 도주해오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는 '내일 아침까지만 버티면 적이 철수할 것이다'라는 전언를 가져온다.
이렇게 지휘관의 독려, 그리고 적진에서 탈출한 아군 포로의 전언으로 군사들의 사기는 다시 충천해졌다. 이날 밤 일본군은 최후의 공격을 가했으나 때마침 역풍이 불자 의병대가 대대적으로 화공을 가하여 일본군은 오히려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시작과 끝이 모두 역관광 크리
3.6 9월 2일
아침이 밝자 일본군은 결국 연안성 함락을 포기하고 퇴각하게 된다. 이정암은 이대춘을 선봉으로 한 추격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의 후방을 기습했으며, 여기에서 마소 90여필과 군량미 130여석을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거둠으로서 연안성 전투의 그 막이 내린다.
4 결과 및 의의
연안성 전투에서 일본 제3군의 주력군을 패퇴시키면서 연안성을 뒤로한 황해도는 전화에 휩싸이지 않게 되었고, 이는 곧 황해도의 곡창지대가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지 않게 된 것을 의미했다. 이후 연안성은 일본군이 평양성에서 패주하여 전면 퇴각할 때까지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삼남과 의주의 피난 조정을 연계하는 중계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한편 이정암은 이 전투가 끝나고 그 유명한 1줄짜리 장계(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를 올렸으며, 후일 각지의 관찰사 등을 역임하며 선무 2등 공신의 작위를 받게된다. 이정암의 부장으로 활약했던 자들도 모두 저마다 포상을 받았는데, 이중 장응기는 후일 곽재우의 부장으로 화왕산성에서 활약했다. 서문의 수문장으로 맹활약했던 이대춘은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가 병자호란 때 아흔살(…)의 노구로 의병이 되어 다시 전장에 나가 이때 전사했는데, 암행어사가 이를 조정에 알려 뒤늦게나마 관직에 제수되는 등 포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에서 꽤 중요한 전투지만 정작 널리 알려지진 않은 전투다.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 3권후반부~4권초반부에 연안성 전투 에피소드가 나온다.
- ↑ 이 이전에 거둔 승전은 한천 전투, 해유령, 정암진 전투 등의 유격전이거나 상주성 탈환전 등 점령지의 수비가 약한 틈을 노린 공성전이었다. 이치 전투가 수비전이긴 했지만 성이 아닌 거점을 근거로 싸운 것이 아니므로 수성전은 아니다.
- ↑ 이정형은 후일 황해도 성거산을 거점으로 의병을 지휘하여 유격전을 벌이는 등의 활약을 하여 그 공으로 경기도관찰사 겸 병마사에 임명된다.
- ↑ 이때 고을의 유력자였던 송덕윤, 조광정 등이 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합세하며 그를 연안성 수비 지휘관으로 추대하는데, 이때 그는 내가 드디어 죽을 곳을 찾았다라는
사망 플래그간지폭풍 발언을 남기고 이를 흔쾌히 수락한다. - ↑ 이 역관의 이름은 김효순으로 선조를 호종하던 와중에 파주에서 적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다고. 참고로 김효순은 나중에 전란이 끝나고 1604년, 1607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남녀포로 수만명을 환송받아와, 그 공로로 한성판윤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