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이씨 서얼 출신의 이몽학이 일으킨 반란으로 당시 조선 민심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이몽학의 아버지는 이몽학을 집에서 내쫓았다. 집에서 쫓겨나서 떠돌이로 살던 이몽학은 한현의 부하로 들어가 그곳에서 반란 계획을 생각한다. 이후 의병을 모집한다는 명분으로 동갑회라는 조직을 만드나, 실은 이곳에서 오히려 반란을 위해 군사 훈련을 했다.
1596년부터 시작한 반란은 왜적의 침입을 허용한 무능한 정부 대신 왜적을 몰아낸다는 기치를 내세운 덕에 초기에는 홍경래의 난처럼 잘 나갔지만 이후 부하들의 배신으로 목이 잘리면서 끝났다. 무엇보다 홍주성을 지키던 목사 홍가신과 홍주성을 구하러 온 의병들(임득의 같이 가노들을 이끌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선조의 의심병으로 인해 의병장들이 숙청당했다는 인식이 있으며 그 주장으로 아래와 같은 근거가 나온다.
- 송유진의 난 때는 의병장 이산겸이 반란군과 무관함을 뻔히 알면서도 그대로 때려 죽이더니 이몽학의 난 때는 이몽학이 반란군을 결성 당시 했던 "김덕령을 비롯한 몇몇 의병들, 도원수와 수사들이 나와 함께 한다"는 거짓말을 빌미로 김덕령을 모진 고문 끝에 죽게 만들었다.
- 또한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순신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원균을 추켜세우기 시작한다. 그 똑똑한 머리로 두 사람의 차이를 정말 몰랐을 리는 없고 순전히 무장들에 건 견제와 의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끝내 이순신의 파직, 이어서 칠천량 해전, 그리고 선조의 무슨 말을 하리오, 무슨 말을 하리오...[1]
그러나 이러한 세간의 인식과 달리 선조와 조정은 김덕령을 제외한 의병들은 대부분 불문에 붙여 풀어줬다. 김덕령이 죽음을 당한 건 그가 그 이전에 벌어진 송유진의 난에도 이름이 언급된 데다 공적은 없는데 살인 문제로 탄핵을 받던 상황에서 이몽학의 난 때 또 다시 이름이 언급되어 당시 법도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덕령은 당파를 가리지 않고 조정 중신들 다수가 구명을 하지 않았던 것도 선조의 의심병과는 상관없이 이미 운명이 결정되었음을 반증한다. 이는 송유진의 난 때 처형당한 이산겸도 마찬가지인데 이산겸은 군대를 일으키고도 싸움을 거의 벌이지 않아 류성룡을 비롯한 조정 중신들도 이산겸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냐고 강하게 의심하던 상황이어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몽학이 이 난을 일으킨 해가 공교롭게도 1596년, 병신년이었다. 이몽학 丙申의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