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

1 조선 고종의 이름

원래는 재황이라는 이름이었다가 피휘를 위해 고친 이름이다.

2 서진의 인물

李憙
(? ~ 282)

서진의 인물. 자는 계화(季和).

기록에 따라 이희(李喜)이라고도 되어있다.

상당 동제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고상한 품행을 지니면서 예술과 학문을 깊이 연구했다고 하며, 사마의가 상국이 되었을 때 이희를 불렀으나 그는 병을 핑계로 극구 사양했다고 한다. 후에 사마사의 수하에서 종사중랑이 되어 광록대부에 여러 번 올랐으며, 광록대부를 지내고 있을 때 양호가 거기장군이 더해지자 사양하고 이윤, 노지 등과 함께 천거하면서 품덕이 고상하고 직무에 공정하다는 칭찬을 했다.

267년에 사례교위를 지내다가 옛 입진 현령 유우, 전 상서 산도, 상서복야 무해 등과 함께 관청의 도전을 침해했다고 탄핵해 관직이 면직되었다가 사마염이 태자태부로 삼았으며, 278년에 독발수기능이 오랫동안 변방의 근심거리가 되자 군사를 발동해 그들을 토벌하겠다고 청했지만 조정에서 근심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출정하지 못했다.

특진의 칭호를 얻었고 282년에 광록대부를 지내면서 사마준, 양수, 왕제, 진덕 등과 함께 사마유를 봉지인 산동으로 돌려보내라 청하는 것을 반대했다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대면서 자리를 물려주고 집에서 죽었다.

이희는 조정에 있을 때 인친이나 옛 친구들과 입을 것을 나누었고 먹을 것을 같이 했으나 아직 일찍이 왕관을 사사로이 한 일이 없었으니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그를 칭찬했다고 하며, 죽은 후에 태보에 추증되었다.

세설신어에서는 사마사가 관구검의 난을 진압할 때 이희를 불러 종사중랑으로 삼았는데, 지난날 선공(사마의)께서 부를 때 오지 않더니 자신이 부를 때는 어찌 왔냐고 하자 선공께서는 예로써 대우해주셨기 때문에 예로써 나아가고 물러날 수 있었지만 명공(사마사)께서는 법으로써 구속하시기 때문에 법이 무서워 왔을 뿐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