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의 추존 황제 | |||||
고조 선황제 사마의 | 세종 경황제 사마사 | 태조 문황제 사마소 |
묘호 | 세종(世宗) |
시호 | 경황제(景皇帝) |
성 | 사마(司馬) |
휘 | 사(師) |
자 | 자원(子元) |
생몰기간 | 208년 ~ 255년 |
1 개요
서진의 초대황제는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이지만 실질적으로 서진을 건국한 인물은 사마사다.
사마의와 장춘화의 장자로 사마소의 친형. 진(晉)의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으로 삼국지에 비유하면 오나라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손책이라 할 수 있다.
생전의 지위는 장평향후(長平鄕侯), 시호는 충무후(忠武侯)였으나, 동생 사마소가 진왕이 된 이후에는 사마사를 경왕으로 추존했고 진을 건국한 조카 사마염이 황제가 된 후에는 묘호가 더해져 세종 경황제(景皇帝)로 추존되었다.
2 생애
약관의 나이 때부터 같은 세대 인물이자 처남인 하후현(夏侯玄)과 더불어 이름을 날렸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아버지 사마의와 동생 사마소와 함께 제갈량의 북벌 저지에 참전하였고 아버지가 제갈량에게 당했듯 자신도 호로곡에서 불 타 죽을 뻔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버지를 따라 전장에서 종군한 적은 없었고 동흥 전투로 보건데 정략은 뛰어나나 아버지만한 군재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근대 왕조국가의 사서면 구 왕조를 무너뜨리고 신 왕조를 창건하는 과정을 어떻게든 정당화시키고 윤색하기 마련이건만 사서에서 대놓고 일찍부터 구 왕조에 충심이 없었다고 언급되는 인물이다.[1] 그것도 나라가 기울어 갈때도 아니고 조예가 건강하고 촉오의 북벌을 모두 막아내며 조위의 성세가 공고하던 시절부터 은밀히 야심을 품고 있었다. 사마사의 아내 하후휘는 남편이 위의 충신으로 남지 않을것을 눈치챘고 사마사는 위의 개국공신 하후씨와 조조를 구하고 사직의 기둥이 된 조씨의 피를 이은 그녀를 꺼렸고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이 있었던 234년 아내를 독살한다.
249년, 아버지 사마의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대장군 조상을 제거하려 하자 아버지를 따라 출병, 조상과 그 일족을 제거하였다. 이른바 고평릉 사변이다. 동생 사마소가 거사 직전에야 합류한데 반해 사마사는 처음부터 사병 3천여명을 은밀히 민간에 잠복시켜 치밀하게 준비했고 이로 말미암아 조씨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즉,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권력 찬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51년에 사마의가 죽자, 사마사는 당시 황제인 조방에게 대장군 벼슬을 제수받았다. 이 후 아버지 사마의보다 강력한 권세를 누렸고, 그 정도는 황제 조방을 이미 뛰어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조방이 이풍(李豊), 장집(張緝), 하후현 등과 사마사를 죽이고, 하후현으로 하여금 대장군이 되도록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사마사는 조방을 제왕(齊王)으로 강등 후 폐위시키고 고귀향공 조모를 모셔와 새 황제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에게 저항한 이풍, 장집, 하후현의 삼족을 멸했다.
255년에 관구검이 합비에서 문흠 등과 더불어 사마사의 황제 폐위에 대한 죄를 묻고자 군사를 일으켰다. 사마사는 직접 출병하였다가 자신의 왼쪽 눈에 갑자기 큰 통증이 생겼지만 계속 전장에서 지휘하며 문흠을 추격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자신의 군대를 문흠의 아들인 문앙이 혼자서 거의 전멸에 가깝게 격파했다는 소식에 눈 위의 혹이 악화되었다.
일설에는 문흠의 반란을 진압하기 전에 혹을 도려내는 수술을 했는데 그 후 문앙의 공격에 놀라 눈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이때 사마사는 도포(또는 이불)를 입에 물고 고통을 참으면서 지휘했는데 도포는 이빨 때문에 헤져 있었고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진압 후에 돌아오면서 사망했는데 과다 출혈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덤으로 연의에서는 죽자마자 눈이 튀어나왔다는 다소 호러스러운 모습으로 각색되어 있다.
결국 얼마 뒤 진중에서 48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준평릉에 안장되었다. 사실 그의 혹은 악성종양이라는 추측도 있다.
3 평가
부친 사마의가 조예의 총애를 바탕으로 조휴와 조진이 사라진 군부의 정점으로 올라서고 조상을 실각시켜 사마씨를 위에서 가장 강한 세력으로 대두시켰다면 사마사는 아버지의 권력장악 과정에 손발이 되었으며 부친 사후까지 남아있던 반대 세력을 싸그리 축출하고 사마씨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성공했다.
역사적인 조건같은 걸 일단 배제하고 극적인 요소로서도 따져봐도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구 왕조가 건재하던 젊은 시절부터 야심을 품고 있었고 그 야심을 포기하지 못해 아내를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다. 그리고 십수년간 뱃속에 칼을 품은채 준비하다 칼을 빼들어 저항하는 이들을 모두 죽이고 신 왕조를 세울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5년 남짓에 불과했고 그가 기틀을 다진 왕조는 후한말부터 쌓여온, 상당 부분 그의 일족이 심화시킨 온갖 사회적 모순에 짖눌려 허무하게 멸망했다. 그리고 이어진 혼란은 그의 후손들 뿐 아니라 중국의 백성들에게 비극을 가져왔다. 아내를 죽이는 비극으로 촉발된 젊은이의 야망이 온 대륙을 불태우는 비극으로 끝난 것이다. 굉장히 드라마틱하다. [2]
4 가족 관계
그의 첫부인으로 남편의 야심을 눈치챘던 하후휘는 남편과 점차 사이가 벌어지다 234년 돌연 음독사했다. 정황상 독살로 보는 의견이 많다. 독살설을 긍정할 경우 더욱 소름끼치는게 화목하게 잘 살던 아내를 죽여놓고 그녀의 남매인 하후현을 비롯해 조상, 하안 등 훗날 자기 손으로 죽이는 인사들과 교류하며 괜찮게 지냈다.[3]
자손 복은 없었다. 첫부인 하후휘 사이에서 딸만 다섯을 보았고 두번째 부인인 진북장군 오질의 딸과는 자식없이 금방 이혼, 세번째로 맞아들인 채옹의 외손녀 양휘유와의 사이에서도 자식이 없어 이후 그의 직위는 동생인 사마소가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리고 사마소의 차남 사마유가 양자로 사마사의 계보를 잇게 되었다. 후에 왕에 오른 사마소는 평소
천하는 형님의 천하이다.
라며 형이 다진 기반이니 명목상으로라도 형의 양자인 사마유가 세자책봉시 사마염 대신 뒤를 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비/조식 형제의 사례와 같이 주변인의 만류로 사마염이 뒤를 잇게 된다.
5 미디어 믹스
- 사마사/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 ↑ 진서가 당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서진이나 동진의 기록에서야 당연히 윤색이 들어갔겠지만 남북조의 피비린내 나는 난세를 뚫고 세워진 당으로선 그 모든 난세의 시발점이자 원흉격인 사마씨의 기록에 기름칠 해줄 이유가 전혀 없다.
- ↑ 물론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이후의 중국의 혼란상을 사마사 개인의 탓으로만 돌릴수는 없다
- ↑ 고평릉 사변 시점까지 조상 일파는 사마씨와 조씨의 다툼을 너 죽고 나 살자식 유혈권력 투쟁으로 바라보진 않았다. 사마의를 견제하고 불편한 사이가 되면서도 그 아들이나 측근들에겐 특별히 제약을 가하지 않았고 고평릉 사변 때도 사마의를 믿고 순순히 무장해제 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