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 시대 독일에 존재했던 민간무장단체로서의 준군사조직. 독일어로는 Freikorps(Free Corps)라고 한다.
1 기원
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에서는 제정 붕괴에 따른 충격과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기대로 인해 국기단을 포함한 좌파단체의 무장투쟁이 줄을 지었고 국경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나 폴란드와 같은 신생 독립국과의 국경 조정 문제로 인해 무력충돌이 빚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독일 바이마르 정부의 정규 무력인 정규군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그 규모가 10만으로 제한되었으므로 제대로 국경을 방어하거나 국내 치안을 유지할 능력이 부족했고, 정규군의 무력화를 틈타 우파 계열의 퇴역 군인들은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에게 비협조적이고 군사주의적이었던 융커들의 군부의 묵인 아래 스스로 준군사조직을 결성, 현역 시절 사용하던 군복과 무기를 착용하고 직접 나서서 좌파 무장세력과 시가전을 벌이거나 독일의 패배를 틈타 자신들의 조국을 되찾으려는 폴란드, 체코 독립운동가들과 국경분쟁을 벌였다.
자유군단은 국가가 조장하고 묵인하기는 했을지언정 제대로 국가에서 편성해서 관리하고 유지하는 예비군과 같은 조직이 아니다. 자유군단의 조직원들은 전쟁 이후 베르사유 조약과 대공황 이후로 붕괴된 사회에서 제자리를 찾지못하여 분노하는 퇴역군인들이 많았다.
2 활약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를 저지시키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비롯한 독일 공산당 지도부를 초법적으로 사살한 것도 자유군단이며 1919년에 성립한 바이에른 소비에트 정부는 바이마르 정부의 군경과 자유군단에게 진압되었다. 신생 폴란드 공화국에 합병되려는 슐레지엔 및 동프로이센의 폴란드 민족주의 운동을 진압한 것도 자유군단의 활약이었다.
3 소멸
전후의 혼란이 가라앉고 국경이 확정되며 정부 쪽에서 보는 자유군단의 존재가치도 사라졌으며, 이들은 또 다른 사회불안요소에 불과해졌다 이에 1920년 바이마르 정부는 자유군단에 대한 해산령을 발했으나 극우 성향이 강한 자유군단 대원들은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카프 폭동에 가담하여 바이마르 정부를 뒤엎으려고 시도했고, 실패한 뒤에는 각자 지지하는 정당의 무장세력으로서 활동하여 다른 정치 세력과의 무력투쟁에 동원되게 되었다. 이후 나치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자유군단의 뒤를 이은 우파 성향의 모든 정치폭력단은 당시 가장 성공적이고 규모가 컸던 나치당 휘하의 돌격대로 흡수, 사라진다. 이후 장검의 밤에서 에른스트 룀과 돌격대가 토사구팽 당하면서 일부는 다시 하인리히 힘러의 슈츠슈타펠로 편입되었다.
4 얘깃거리
- 돌격대 지도자 에른스트 룀, 게슈타포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를 비롯한 나치당 관계자 상당수도 자유군단 출신들이다.
- 자유군단이 비교적 자유롭게 무장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뜻밖이지만 연합군이 관용을 베푼 덕이었다. 군함, 전차, 전투기, 대포, 기관총 등 독일이 보유한 대부분의 중장비를 압수한 연합군이었지만 이들은 "병사들은 용감히 싸웠다. 그들의 소총에는 손을 대지 말자"는 관념으로 소화기에 대한 규제는 하지않았다. 전쟁이 끝난 이후, 징집이 끝난 이들은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초기 군부는 이들의 무장을 해제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