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Kapp Putsch
한국의 그 카프는 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이다.
1920년 3월, 베를린에서 우익 세력이 신생 공화국을 전복시키고자 기도한 쿠데타. 주도자인 볼프강 카프(Wolfgang Kapp)의 이름을 따서 보통 카프 폭동이라고 부르며, 또다른 주도자인 발터 폰 뤼트비츠(Walther von Lüttwitz)의 이름까지 더해 카프-뤼트비츠 폭동[1]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배경
1918년 독일 11월 혁명의 발발과 동시에 빌헬름 2세는 퇴위했고, 독일제국은 붕괴된다. 독일 제국의 뒤를 계승한 것은 중도좌익 계열인 사회민주당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주도하는 바이마르 공화국. 그렇지만 혼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정권 수립을 주장하면서 끊임없이 공산 혁명을 시도했으며, 정부 측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참전 용사들로 구성된 준군사조직 철모단과 자유군단을 동원하면서 독일 전역은 사실상 내전 상태에 빠진다.
그렇다고 해서 우익세력이 신생 공화국에 우호적이었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우익세력 가운데서도 핵심이었으며, 1차대전 발발 이후로 사실상 국가의 모든 실권을 장악했던 군부의 입장에서 보기에 새 정부는 빨갱이들의 천국이었던 것.[2] 이러한 우파의 분노는 배후중상설이라는 희대의 정신승리로 더더욱 강화된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독일 전역에서 극좌 세력들의 봉기가 일어나고 있는 판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우익 세력들의 비위를 맞춰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여기서 뜬금없는 핵폭탄이 외부에서 터진다. 바로 독일의 정규군을 10만 명 규모까지 축소하며 철모단을 비롯한 모든 준군사조직의 해산을 명령한 베르사유 조약.
군부와 준군사조직의 수뇌부들은 당연히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에 반발한다. 하지만 국제 사회의 압력을 이길수 없었던 총리 구스타프 바우어와 국방장관 구스타프 노스케는 1920년 2월 29일 대표적인 준군사조직이었던 자유군단의 해산을 명령한다. 다음날인 3월 1일 자유군단은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퍼레이드를 베를린 근교에서 펼치면서 정부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여기에 정규군 장성이자 자유군단의 지휘를 겸하고 있던 발터 폰 뤼트비츠가 퍼레이드 직후 행한 연설에서 "나는 이렇게 폭풍전야인 상황에서 주력 부대를 잃는 것을 결코 참지 않을 것이다.(Ich werde nicht dulden, dass mir eine solche Kerntruppe in einer so gewitterschwülen Zeit zerschlagen wird)"라는 발언을 남기면서 타오르는 불에 제대로 기름을 끼얹는다. 당국의 지시를 대놓고 거부한 폰 뤼트비츠의 발언에 모두가 경악했고, 실력 행사로 군부를 제압할 수 없었던 정부는 부랴부랴 정부 각료들과 폰 뤼트비츠 사이의 협상 자리를 마련한다.
대통령 에르하르트와 국방장관 노스케가 참가한 협상 자리에서 폰 뤼트비츠는 즉각적인 의회 해산과 새로운 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 실시, 자신을 정규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할 것과 같은 무리하기 짝이 없는 요구 조건을 내걸었고 격분한 에르하르트는 단칼에 그 조건을 거부하는 한편으로 폰 뤼트비츠에게 정규군 장성에서 사퇴할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한번 폭주하기 시작한 폰 뤼트비츠에게 그런 말이 먹힐 리가 없었고(...) 협상 결렬과 동시에 폰 뤼트비츠는 반란을 계획한다. 자유군단 내에서 가장 정예 병력 중 하나였던 에어하르트 해병여단(Marinebrigade Ehrhardt)이 적극적으로 동조했으며, 프로이센 출신의 극우 왕당파 볼프강 카프가 명목상 반란의 주도자 자리를 맡는다. 여기에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비롯해 군부 인사 중 상당수가 침묵이라는 형태로 반란 계획에 암묵적인 동의를 표한다. 마침내 3월 12일 에어하르트 해병여단의 지휘자인 헤르만 에어하르트(Hermann Ehrhardt)가 자신의 해병여단에게 베를린으로 진군할 것을 명령하면서 카프 폭동은 시작된다.
3 진행
"제국군은 제국군을 향해 총을 쏘지 않습니다.(Reichswehr schießt nicht auf Reichswehr)"- 한스 폰 젝트, 국방장관 노스케의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반란군이 베를린으로 진격해왔지만 정부는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국방장관 노스케가 군부들에게 진압을 '요청'[3]했지만 군부는 '같은 독일군끼리 피를 흘리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이를 거부했다. 다음날인 13일 새벽, 반군이 베를린 시내로 돌입하기 시작했고, 내각 구성원들은 황급히 베를린 밖으로 대피해야만 했다. 13일 아침에 반군은 마침내 베를린 전역을 장악했고, 카프는 스스로 수상(Reichskanzler)직에 올랐음을 선포한다. 실질적으로 반란을 주도한 폰 뤼트비츠에게는 국방부 장관직이 주어진다.
군부가 새로 수립된 내각에 지지를 표했고, 바이에른에서도 반란에 지지를 표명한다.[4] 에베르트가 이끄는 기존 내각은 반군을 피해 드레스덴을 거쳐 멀리 슈투트가르트로 피신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독일 전역의 노동자들에게 반란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실시할 것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 그리고 그것이 기적처럼 효과를 발휘한다!
군부보다는 사민당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노조는 정부의 호소를 듣자마자 곧바로 파업에 들어갔고 심지어 사민당과 앙숙의 관계였던 독립 사민당[5]과 독일 공산당까지도 파업에 동조하는 위 아 더 월드의 상황 속에서 1200만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실시했고[6] 3월 15일이 되면 사실상 독일 전역이 올 스탑의 상황이 된다. 반군 측은 당황해서 노동자들을 달래기도 하고, 위협해보기도 했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고 결국 3월 17일 쿠데타는 사실상 실패로 끝난다. 사일천하 하지만 정부 역시 반군 측을 결정적으로 몰아낼 힘은 없었고 결국 다시 한 번 협상이 열린다. 사민당, 중앙당, 독일인민당과 같은 주요 정당 및 군부가 참여한 협상에서, 카프와 폰 뤼트비츠가 수립한 내각을 붕괴시키는 대신 폰 젝트 장군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 /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재선거의 실시 등을 골자로 하는 절충안이 결정되면서 마침내 반란은 끝나게 된다.
4 여파
- 안그래도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기가 바닥을 기고 있던 사민당 정권은 3개월 뒤인 6월 실시된 총선거에서 장렬하게 폭망한다.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고질적인 정국 불안정은 심화된다.
- 이 사건으로 군부는 사실상 정부의 통제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독자세력화된 군부는 후일 프란츠 폰 파펜의 프로이센 혁명[7]과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을 묵인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숨통을 끊는다.
- 반란의 주도자인 카프와 폰 뤼트비츠는 극우세력과 군부의 봐주기 속에 별다른 법적 제재 없이 스웨덴과 헝가리로 망명을 떠난다.
- 루르 공업 지대에서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반란 종결 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져서 공산 혁명을 하려는 시도로까지 이어진다. 결국 자유군단까지 동원한 끝에 무력으로 진압해야만 했다.
- ↑ 뒤의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사실 카프 본인은 바지 사장에 가까웠다. 실질적인 주도자는 발터 폰 뤼트비츠.
- ↑ 일단 내각 내의 핵심 장관직은 모두 사민당이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 에베르트, 총리 구스타프 바우어, 국방장관 구스타프 노스케.
- ↑ 명령이 아니라 요청이었다. 즉 이 시기 독일에서 문민통제 따위는 개나 줘버렸다는 의미...
- ↑ 다른 지역은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고 일단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간잽이 - ↑ 1차대전을 적극 지지한 사민당 주류에 반발하여 새로 성립된 정당이다.
- ↑ 그리고 이 규모는 지금까지도 독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으로 남아있다.
- ↑ 친위쿠데타를 통해 연방정부가 프로이센 지방정부의 사민당 정권을 붕괴시켜버린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