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량(당나라)

능연각 24 공신
장손무기이효공두여회위징
방현령울지경덕고사렴이정
소우단지현유홍기굴돌통
은개산시소장손순덕장량
후군집장공근정지절우세남
유정회당검이세적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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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亮
(? ~ 646)

형양 사람으로 농부 출신이고 이밀의 부하로 지내다가 당나라에 투항해 거기장군이 되었으며, 626년에 현무문의 변이 일어나기 전에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낙양으로 가서 몰래 산동의 호걸들을 받아들여 관계를 맺으면서 사건이 일어나길 기다려 금을 많이 내서 쓸 곳을 마음대로 하게 했다.

이 때문에 이원길이 불궤한 짓을 한다고 고발하면서 조사받았다가 장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풀려났으며, 이세민이 황제로 즉위하자 우위장군에 임명되면서 장평군공에 봉해졌다가 어사대부로 임명되어 우국공에 봉해졌다.

빈주, 하주, 부주 등에서 도독, 상주에서 장사를 지내다가 운국공에 옮겨졌으며, 공부상서가 되었다가 636년에는 금자광록대부가 되어 도독의 업무를 수행했다.

643년에 태자첨사를 지내다가 낙주도독이 되었고 643년 8월에는 형부상서가 되었으며, 644년 11월 24일에는 고구려 원정을 위해 평양도행군대총관에 임명되면서 고구려 원정에서 수군을 인솔해 동래에서부터 바다를 건너 비사성을 함락해 건안성까지 이르렀다.

건안성에 있을 때 성벽이나 보루가 아직 단단하지 못했고 사졸들이 대부분 나가서 풀을 뜯어 말먹이를 준비하면서 고구려의 군사의 공격을 받아 군대 안에서 놀라고 소란스러웠는데, 장량은 평소에 겁이 많아 호상에 걸터앉아서 곧게 앞을 보면서 말하지 않았고 장사들은 이를 보고 용감한 것이라 여겼다.

고구려 원정이 실패해 귀국했지만 646년에 상덕현이 형부상서 장량이 양자 500명을 기르고 술사 공손상과 더불어 말해 이름이 도참에 맞아 떨어진다고 해서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고발을 했는데, 당태종은 이 사건을 조사했고 장량은 이를 부인했다.

모두가 장량을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오로지 이도유만은 죽이는 것에 반대했는데, 결국 2월 27일에 서쪽의 저잣거리에서 참수되었고 그 집안도 적몰되었다. 그가 죽은 지 1년이 지나서 형부상서의 자리가 비우자 적당한 사람을 뽑으려고 했지만 없었는데, 이 때의 일을 들어 이도유가 적당하다고 여겨 형부시랑에 임명하고 당태종은 이 때의 일을 후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