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징

능연각 24 공신
장손무기이효공두여회위징
방현령울지경덕고사렴이정
소우단지현유홍기굴돌통
은개산시소장손순덕장량
후군집장공근정지절우세남
유정회당검이세적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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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徵
(580 ~ 643)

당나라의 명재상

거록 사람으로 무양군의 군승 원보장의 전서기로 있다가 원보장에게 투항하는 편지를 써줘서 이밀에게 귀순했으며, 이밀 휘하에서 문한을 관장했고 우문화급과 싸운 후에는 장사 정정에게 왕세충은 먹을 것이 부족하니 뒤쫓아서 공격하면 승리할 것이라 진언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밀이 왕세충에게 패하자 이밀을 따라서 당나라에 투항했고 위징은 비서승에 임명되어 이세적에게 편지를 보내 당나라에 투항시켰다.

619년에 원보장을 설득해 당나라에 투항시켰으며, 두건덕이 여양을 공격하자 붙잡히고 두건덕으로부터 기거사인에 임명되었다가 도망갔으며, 622년에 선마를 지냈고 유흑달의 무리들을 붙잡자 그들을 사면하면 유흑달의 무리들이 흩어질 것이라 진언해 그의 말대로 해서 그 말처럼 되었다.

위징은 이건성에게 항상 이세민을 제거하라고 했지만 이건성이 626년에 현무문의 변으로 살해되고 이세민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형제 사이를 이간질한 것에 대해 묻자 먼저 돌아가신 태자가 자신의 말을 쫓았다면 반드시 오늘 같은 일을 없었을 것이라 했으며, 위징은 첨사주부에 임명되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을 죽이라고 형에게 꼬신 자에게 벼슬주는 당태종의 대범함을 엿볼수 있다.[1]

이건성, 이원길의 죽음에 관한 일의 수습을 위해 가을 7월 11일에 산동에 파견되어 위로하고 다녔으며, 이건성, 이원길을 장사지내면서 묘소까지 배웅해 호송했다. 위징은 당태종이 다스리는 도에 대해 찾자 잘한 것과 잘못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고 봉덕이가 16살의 장정을 살펴보아 군사로 쓰는 것을 상주하면서 당태종이 이를 쫓으려다가 간의대부를 지내던 위징은 반대하면서 칙령에 서명하지 않게 했다.

627년에는 영남의 추장, 담전 등이 조정에 들어오지 않은 일에 대해 군사를 동원하려는 것을 반대했으며, 믿을만한 신하를 파견해 정성을 보여주면 이들을 복종시킬 것이라 했고 우승을 지내던 위징은 비단 500필을 하사받았다. 위징은 여러 차례로 당태종에게 간언해서 그 간언한 내용이 기록으로 많이 남을 정도이며, 이에 대한 일화로는 당태종이 좋은 새 한 마리를 얻어 어깨에 올려놓고 멀리서 위징을 보자 품 속에 감췄다가 위징이 사건을 상주하는 것이 길어져 그치지 않자 새는 끝내 품속에서 죽은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2]

628년에 방현령과 함께 신례 138편을 제정해 올렸고 629년에는 상서우승에서 수비서감으로 임명되었으며, 당태종은 위징이 자신을 욕한다고 해서 화내는 일이 많았지만 장손황후가 조복을 갖추어 절을 하면서 군주가 밝으면 신하가 곧다고 해서 축하한다고 했다. 636년에 눈병이 나서 산관이 되기를 청구했다가 특진에 임명되었고 642년에 위징이 병에 걸리자 위징의 집에 마루가 없는 것을 보고 당태종이 이를 짓게 하면서도 궤안, 지팡이 등을 하사했다.

위징은 태자태사에 임명되었고 병이 조금 나아지자 이를 사양했지만 당태종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643년 정월 17일에 사망했다. 그가 죽자 당태종이 백관 중에서 9품 이상은 모두 장례에 참석하게 했고 새의 깃털로 장식한 의장, 의식용 악대 등을 제공하면서 소릉에 배장했는데, 그의 처인 배씨가 위징이 평생 검소하게 산 것을 이야기해 일품의 우보를 갖춘 의식을 치르는 것은 죽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고 하면서 모두 받지 않고 포를 친 수레에 영주를 싣고 가서 장례를 치뤘다.

당태종은 위징에 대해서 상당히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던 듯 하다. 위징은 평소에 당 태종의 행실 하나하나까지 지적하며 간언하기를 서슴지 않았기에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상당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위징의 사후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당 태종은 위징이 죽은 후에 그가 자신에게 올릴 상소문을 미리 사관에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동안 위징이 역사에 명성을 남기기 위해 자신에게 그토록 간언을 하며 자신을 괴롭힌 것이라 생각하고는 격노하였다.

때문에 당 태종은 위징의 장남인 위숙옥에게 자신의 딸인 형산공주를 시집보내겠다는 약속을 파기했을 뿐 아니라, 위징이 죽은 후에 그를 위해 세운 묘비를 쓰러뜨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 태종은 후에 위징의 충고를 어기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가 안시성 전투에서 참패를 맛보고 씁쓸히 후퇴할 적에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원정을 말렸을 텐데......"라며 후회하는 말을 남겼고, 결국 위징의 묘비를 다시 세워주었다.

뒷날 조선시대의 신숙주가 이 사람에 비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조가 "한명회는 나의 장량이요, 신숙주는 나의 위징이다"라고 말했으며, 말년의 신숙주가 영의정에서 물러나려 하자 정희왕후가 "세조대왕께서 경을 위징에 비견하셨거늘 어찌 이리 나오시오?"라고 만류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 당태종에게 강직한 간언을 서슴지 않았던 위징과 세조에게 예스맨스러운 처신으로 일관한 신숙주는 인물상이 사뭇 다르지만, 위징이 당태종 치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처럼 신숙주 역시 세조 치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의미로 이렇게 비견된 것.[3] 한편으로는 자기 신하들을 이렇게 띄우면 세조 스스로가 당태종 같은 군주가 된다는 자뻑스러운 목적도 있을 수도 있겠다.[4] 실제로 세조는 자기 신하들을 이렇게 중국의 옛 신하들에 비유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봐야 의심받으면 역신되지만

고전소설 서유기에서는 하늘의 부름을 받아 비를 내리는 용왕의 목을 치는(!)모습을 보여주는데[5] 이것이 문제되어(경하의 용왕이 당태종에게 위징이 목을 치게 하지 말라고 부탁해서 위징의 발을 묶어두기 위해 바둑을 두었는데 위징이 잠들어 버렸다. 당태종은 멋도 모르고 깨우지 않았는데 위징이 꿈속에서(!) 목을 쳤다.) 당태종은 한번 저승으로 가게되고 다시 살아나 불법에 관심을 가지게되니 천축행의 시작이라고 할수있다.
  1. 세조가 당태종을 존경했지만 이 점에서 많이 다르다. 태종은 능력이 좋으면 기분 나쁘게 한 사람은 살려줬지만 세조 치하에서 세종때의 브레인들은 거의 다 죽어나가서 정인지,신숙주등 몇몇만 살아남았다.
  2. 다른 판본에는 위징이 품 속에 새를 감춘 것을 눈치채고 일부러 상주를 길게 했고, 이로 인해 새가 죽자 태종이 화를 낸 것을 장손황후가 조복을 갖추어 절을 하면서 군주가 밝으면 신하가 곧다고 해서 축하한다고 했다.라고 하는 얘기가 전해온다.
  3. 실제로 세조 치하의 인재 중에서 그나마 브레인급이다.
  4. 실제로 세조가 존경하는 황제는 당태종이었다.
  5. 전생에 하늘의 신 중 하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