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당나라)

1 당나라의 공신

능연각 24 공신
장손무기이효공두여회위징
방현령울지경덕고사렴이정
소우단지현유홍기굴돌통
은개산시소장손순덕장량
후군집장공근정지절우세남
유정회당검이세적진경
당 제국 상서우복야
전임 두여회이정
630년~634년

후임 온언박

01300000433174124710777689465.jpg

李靖
(? ~ 649)

당나라의 인물. 능연각 공신 중 한 명. 자는 약사(藥師).

당나라 초기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당태종 휘하에서 돌궐 정벌, 토욕혼 정벌 등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중국 왕조 중 강군을 자랑한 당나라 군제의 기틀을 잡은 인물이다.

경조 삼원 사람으로 어려서 뜻과 기개를 짊어지고 문무의 재주와 책략이 있어 장인 한금호가 장수의 책략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 했으며, 수나라에서 전내직장, 마읍군승을 역임했고 이연이 거병할 때 평소에 그와 틈이 있어서 이연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사사로운 원한으로 사람을 죽이려는 것에 대해 질책하고 이세민이 그를 위해 굳게 청해 진왕부의 막하에 들었다.

천하를 평정하는 과정에서 이정은 등세락, 염조즉, 소선 등을 토벌하는 것에 공을 세웠고 상주국에 임명되면서 영강현공에 봉해졌다가 검교형주자사가 되었다. 또한 풍앙, 이경도 등을 설득해 항복시키고 영남무위대사, 검교계주총관이 되었다가 623년에는 보공석을 진압하는 것에 공을 세웠다.

동남도행대, 행대의 병부상서, 검교양주대독부장사를 지내고 625년에는 동돌궐이 변경을 약탈하다가 내분이 일어나면서 626년에 정양도행군대총관에 임명되어 이세적 등과 함께 동돌궐을 공격했으며, 도중에 정양도총관에 임명되고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그런데 이정은 소위로부터 군대에 기강이 해이해 기이한 보물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탄핵되었지만 혐의가 풀려 좌광록대부에 임명되었다가 상서우복야로 옮겼다. 634년에는 기내도대사가 되어 장안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병에 걸리자 사직했는데, 644년에 토욕혼이 변방을 노략질하자 서해도행군대총관이 되어 토욕혼을 격파했다.

토욕혼 원정에서 돌아온 후에 군대가 늦게 도착한 일로 질책해서 앙심을 품은 고증생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무고당했다가 혐의가 풀렸으며, 637년에 위국공에 봉해졌고 복주자사에 임명되었지만 이를 사양했다. 649년에 사망해 사도, 병주도독에 추증되고 장례에 쓰일 물품들이 내려졌고 소릉에 배장되어 시호를 경무(景武)라 했다.

당태종과 병법에 대하여 나눈 대화를 기록한 이위공문대[1][2]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서유요원전에서는 이름이 같은 탁탑천왕 이정과 합해졌는데... 여자나 밝히는 병신이다.

2 당나라의 황족

李貞
(? ~ 688)

당태종의 8남.

문사에 능통하고 재주가 있지만 비열했다고 하며, 631년 2월 20일에 한왕으로 임명되었다가 636년 1월 22일에 월왕으로 옮겨졌다.

황족 중에서 재주와 덕행으로 훌륭한 명성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많아 이정도 그 중 한 사람이었는데, 예주자사를 지내다가 688년에 측천무후가 이씨들을 제거하려고 하면서 이충이 군대를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이정도 군대를 예주에서 거병해 상채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이충이 진압된 것을 알고 스스로 쇠사슬을 몸에 걸치고 궁궐로 사죄하려다가 자신의 부하가 용사를 모집하자 소속 현들의 병사를 징발하면서 관리를 임명했는데, 그 관리들은 협박을 받아 싸울 의지가 없었다.

또한 이정은 도사, 승려 등에게 경전을 외게 하면서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면서도 병사들에게 벽병부를 허리에 차게 했으며, 군사를 보내 국승유 등과 싸웠지만 패했다.

성 아래에서 국승유가 치욕을 당할 것이냐고 압박하자 음독 자살했다.
  1. 무경칠서의 하나. 당태종이 "연개소문이 존내 개기는데 우짤꼬?"라고 하자 이정이 "내한테 3만명만 주면 아주 아작을 내버리게뜸!"이라고 대답하면서 문답이 시작된다.
  2. 그러나 이위공문대는 이정이 살았을때와 다른 후대의 단어들과 실제 당의 역사, 지명 그리고 실제 이정이라면 틀릴리가 없는 전공(戰功)에 오류가 있어서 후대의 가필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