莊陵
1 개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위치해 있는 왕릉. 이전에는 노산군 묘(墓)로 불려왔다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이 추존복위됨에 따라 노산군 묘에서 장릉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왕조 재위 임금 중에서는 유일하게 경기도가 아닌 곳에 있는 능이다.[1] 이는 아래의 복잡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숙부이자 수양대군으로 있었던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단종이 영월에서 죽게 되고 시신이 영월 동강에 버려지면서 지역 호장(戶長)인 엄흥도가 동강에서 그의 시신을 운구하여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暗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슬퍼런 세조의 눈을 피해 암장했던만큼 단종의 무덤은 아무도 그 소재지를 몰랐다. 그 후 1541년 중종 때, 노산군의 무덤을 찾으라는 명을 받고 수소문했으나 찾을 수 없어 난감해하던 차에 영월군수 박충원이 처음 발견하여 묘소를 정비하게 되었고, 1580년 주변에 비석들이 세워지기는 했으나 이 당시까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상태여서 묘(墓)라는 칭호를 유지해왔다가 1698년 숙종이 단종을 복위시킴에 따라 무덤도 능으로 격상되고 장릉이라 이름하였다. 이 때, 단종의 시신을 모셨던 엄흥도에게는 공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왕릉 공사를 담당하는 부서가 공조였던 것을 감안한 셈.
2009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55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 주변시설
주변에는 상석과 망주석이 있으며 문인석, 석마(石馬) 등도 갖추었고 능 아래쪽에는 엄흥도의 장려비와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여러 비석들이 있으며, 장릉 입구에 단종의 행적을 기리는 단종역사관이 있다. 특이점으로는 무인석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단종이 무신 세력을 등에 업은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했기 때문이라 한다.
장릉 주변 동강에 단종이 유배되어 지냈던 청령포가 있다. 대부분 장릉과 청령포를 묶어서 관람한다.
3 일화
단종이 죽고 동네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밤중에 몰래 아들들을 데리고 가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인근 산에 올랐다.[2] 그러나 급하게 일어난 일인데다가 날씨조차도 눈보라가 쳐서 맨 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산 속에 앉아있던 노루 한 마리가 일행을 보고 놀라서 달아났는데 노루가 앉았던 그 자리에는 눈이 녹아서 맨 땅이 드러나있었다. 이를 보고 엄흥도 일행은 천우신조라 여겨 그곳에 단종의 시신을 매장한 후, 식솔을 거느리고 자취를 감추었다. 후에 단종이 정식으로 복권되어 왕릉을 이장하기 위해 지관을 조정에서 내려보냈는데 그들이 살펴보니 단종이 묻힌 그 자리가 이미 천하의 명당이었기에 이장하지 않고 묘제만 고쳤다고 한다.
단종이 복권되지 않은 시절, 장릉은 봉분도 없어 그냥 평평한 맨땅이었기에 다른 땅과 구분이 가지 않았고 풀도 무성한 자리였다. 그러나 그 지역 사람들 중에 그 자리를 밟거나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심지어는 어린아이들도 그 주변에서 놀 때, 그 자리를 향해서 돌을 던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소재지가 알려지지 않았다고는 해도 인근 백성들은 암암리에 알았고 이를 관에 고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 비슷한 이야기로 단종의 시신과 엄흥도의 식솔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관에서 엄흥도 일가의 행방을 수색했는데 사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숨은 곳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관에 고하지 않아서 찾지 못했다고 전한다.
엄흥도 본인은 중인 정도의 신분에 속하는 이렇다할 것 없는 인물이었지만 세조의 눈을 피해 단종의 장사를 지낸 일로 후대에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단종이 복위되기 전인 선조 때 이미 그 자손은 노산군의 묘역을 관리하는 대신 병역을 면제받는 특권을 누렸고 후에 정조가 단종의 충신들을 정리하여 등급을 결정할 때,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하여 죽은 이들 바로 다음으로 엄흥도를 놓았는데 아무리 절의를 다했다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단종과 관련되어 죽은 것이 아닌 이상은 사육신들과 동급으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원칙에서 유일하게 예외였으며 심지어는 생육신들보다도 더 위였으며 고종 때에는 아예 정승급의 관직을 추증한다. 죽은 이의 장례를 매우 중히 여겼던 조선시대에 누구나 억울함을 알지만 감히 장사지낼 생각을 못했던 단종의 시신을 목숨걸고 수습한 공을 높이 산 것이다.
이 외에도 다른 왕릉과 달리 장릉에는 관련된 일화가 상당히 많은 편인데 아무래도 비극적인 단종의 생애와 수도에서도 먼 곳에 방치되어 민간층에서 관리되었던 점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담으로 조선왕조의 다른 장릉들과는 달리 가장 존재감이 큰 장릉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