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무덤)

1 개요

王陵

천자(天子) 및 그 정실 배우자가 죽으면 묻히는 무덤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능(陵)이라고 한다.[1]

진나라 때는 천자의 무덤을 산(山)이라 했고[2] 한나라 때는 능(陵)이라 했기 때문에 합쳐서 산릉(山陵)이라고도 부른다.[3] 왕의 칭호를 썼으면 왕릉(王陵), 황제의 칭호를 썼으면 황릉(皇陵) 등으로 구분해서 부른다.

대한민국의 경우 조선 역대 임금들의 능들이 2009년에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으로 유명하다.[4] 단지 관리가 안 돼서 엉망진창이란 게 문제. 그런데 사실 조선왕릉뿐만 아니라 고구려,[5] 신라,[6] 백제[7], 고려[8] 왕릉들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이 많다. 더불어 가야 고분군도 세계유산 우선등재 추진대상에 선정되었다.

조선 왕들의 왕릉은 태조가 즉위하기 전에 죽어 사후 추존된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과 정종 부부의 능인 후릉(개성)[9]을 제외하고 전부 남한 지역[10]에 남아있는 데 비해, 고려 왕들의 왕릉은 대부분 개성시 인근에 있으며 단 3곳만이 남한에 남아있다. 희종석릉, 고종홍릉, 그리고 공양왕릉이 그 3곳. [11] 이 외의 나머지 고려 왕릉은 북한 개성 주변에 남아 있는데 현재 보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북한에 있기 때문이다 (...) 특히 성종(고려)의 능은 밭 한복판에 덩그러니 위치해 있을 정도. 그나마 고려 왕릉 중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왕릉은 태조 왕건의 현릉과 공민왕 부부의 현정릉 정도. 개경의 고려 왕릉은 # 이곳에서 몇 기를 볼 수 있다.

신라의 왕릉들은 경순왕릉을 제외하면 모두 경주시에 있다.

이는 전통 예법에서 무덤은 도성에서 100리 안에 위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12] 개성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원비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과 정종의 후릉,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이 예외사항.[13] 더불어 경순왕릉이 경주가 아닌 경기도에 있는 이유 또한 신라가 망하고 고려 왕조가 들어선 후였기 때문에, 고려 수도인 개경에 가까운 곳에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는 고려 정부의 꼼수란 해석도 있는데 경순왕 항목 참조.

신라의 왕릉들은 고구려, 백제와 달리 입구를 따로 만들지 않았고 구조가 견고하여 도굴이 어려운 특징이 있으며,[14] 삼국통일에 성공해 왕조가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 미리 고려에 항복을 했기에 후대 고려왕조 시대에도 박해를 덜 받으면서 신라왕릉들도 좀 더 관리를 받아올 수 있었다. 덕분에 같은 삼국시대고구려 ·백제의 왕릉이 거의 확인되지 않거나 현존하지 않는 것에 비해 56명의 왕 중 37명의 능묘가 확인되었거나 추정되며 19왕의 능묘만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 경주에 남아있는 왕릉들도 적어도 시가지 주변에 분포한 대형 돌무지덧널무덤 양식 무덤의 경우 대부분 도굴된 적이 없었고 부장품도 그대로 남아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규모가 작은 고분이나 경주 외곽 산지에 위치한 고분은 일부 도굴 사례가 있으나, 대체로 다른 왕조의 고분에 비하면 매우 상태가 양호한 편이며,[15] 고고학계에서는 희망과 동시에 큰 과제로 남아있다.

2 고대

2.1 고조선

  • 단군릉[16] : 평양 강동군 문흥리에 위치한 단군의 능이다. 장군총이 7단으로 축조된 것보다 더 규모가 큰 9단으로 조성된 것이 특징. 북한에서는 1993년 단군릉을 발굴해 연대추정기법으로 5천여 년전의 단군 무덤이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한의 발표라는 점에서 대체적인 시각은 여전히 (...)

2.2 고구려

  • 동명왕릉
  • 장군총 : 중국 지린성 지안 퉁구에 위치한 고구려 왕릉. 주변에 광개토대왕릉비가 위치한 점과 축조 기술 등을 토대로 현재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 태왕릉 :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위치한 고구려의 왕릉급 무덤. 무덤 구조와 출토 유물로 미루어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 천추총 :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위치한 고구려 왕릉으로 공식적인 명칭은 마선구 100호묘. 출토된 명문기와 등을 토대로 현재 미천왕,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등 중에 하나가 무덤의 주인일 것으로 추정.
  • 무용총 : 중국 지린성 퉁구에 위치한 고구려 왕릉. 무용도와 수렵도로 유명한 무덤이며 4~5세기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
  • 각저총 : 중국 지린성 우산에 위치한 고구려 왕릉. 씨름을 묘사한 벽화에서 이름이 유래했으며 4~5세기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
  • 안악 3호분 : 북한 황해남도 안악군에 위치한 대형 무덤, 북한 학계 및 한국의 소장파 학자들이 고국원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2.3 백제

  • 무령왕릉 : 공주시에 위치한 백제의 왕릉. 발굴을 통해 백제 25대 무령왕의 무덤임이 확인됐다. 현재 백제 왕릉 및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무덤.
  • 송산리 고분군 : 공주시에 위치한 백제 왕릉군. 총 7개의 고분이 위치해 있는데 그 중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는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불명.
  • 석촌동 고분군 :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위치한 백제 시대의 무덤 집단으로 당대 지배 계층의 무덤들이 한데 모여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중 3호분은 규모 등으로 미루어 근초고왕릉으로 추정.
  • 능산리 고분군 : 부여군에 위치한 백제 왕릉군. 총 7개의 고분이 위치해 있으며 주변에 절터가 발견되어 무덤들이 왕릉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17] 다만 각각의 주인은 현재까지 미스테리.
  • 익산 쌍릉 : 익산시에 위치한 백제 시대의 왕릉 추정 무덤. 무덤 2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어서 이름이 명명됐으며 무덤 주인으로는 현재 마한의 무강왕 부부, 또는 무왕(백제)과 부인 선화공주로 추정하고 있다.

2.4 가야

3 신라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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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아름다운 경주 서악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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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크기가 크다보니 '단일장소 최다인원 벌초' 타이틀도 땄다고 한다(...) 1천 212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신라 왕릉은 도굴이 어려운 구조, 최후의 승자라는 점 덕분에 다른 한반도 고대 왕조에 비해 지금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지만 왕릉의 주인이 누구인지 100% 밝혀진 경우는 태종 무열왕, 흥덕왕 등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망국의 왕 경순왕릉을 제외한 모든 왕릉이 경상북도 경주시 행정구역 내에 다 들어있어서 아래의 고려 왕릉이나 조선 왕릉이 그래도 이곳저곳 퍼져 있는 것에 비해 훨씬 밀도가 높은 편이다.

자세한건 신라왕릉문서참조

4 고려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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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공민왕의 현릉과 비 노국대장공주의 정릉의 모습

고려왕릉 문서 참조.

5 조선왕릉

항목 참조
  1. 단 한국의 역대 왕조들은 제후(諸侯)를 칭한 시기에도 능이라고 했다.
  2. 진시황제의 무덤이 여산(驪山)이었다.
  3. 조선 시대에 국상이 났을 때 왕과 왕비의 무덤을 수축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기구인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산릉이 바로 이것이다.
  4. 500여년의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진 왕조의 능이 꾸준히 보존되어 왔다는 점과 대규모 왕릉군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5. 평양·남포 고구려 고분군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무덤군. 다만 전자는 북한의, 후자는 현재 위치가 위치다보니 중국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6. 경주역사유적지구오릉, 내물왕릉 등이 포함되어있다.
  7. 백제역사유적지구무령왕릉이 포함되어 있다.
  8. 북한의 개성역사유적지구왕건릉, 명릉, 공민왕릉 등이 포함되어 있다.
  9. 단, 1945~1953년까지는 개성도 남한 관할이었다.
  10. 수도권서울특별시고양시, 구리시, 남양주시 등에 몰려있다. 서울엔 선릉, 의릉, 정릉 등이 있으며, 고양엔 서오릉, 서삼릉, 구리엔 동구릉, 남양주엔 홍릉, 유릉, 광릉이 있다.
  11. 희종과 고종의 능은 모두 강화도에 있다. 대몽항쟁 중 임시수도인 강화도(강도)에서 승하했기 때문. 그리고 공양왕은 조선 건국 후 폐위되어 삼척에서 유배 중 죽임을 당했기 때문인데, 독특한 점은 후에 고양시로 이장되어 현재 고양의 공양왕릉삼척의 공양왕릉(이건 사사된 후 처음으로 묻혔던 자리) 2개가 존재하고 있다.
  12. 유교 예법의 관례로 행해지다가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국조오례의를 통해 공식적인 규정으로 정해졌다.
  13. 독특한 점은 여주에 있는 세종과 효종의 영녕릉 또한 도성으로부터 100리 밖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원래 세종의 영릉은 현재 헌인릉 옆에 위치했었는데, 세조가 풍수지리상 이유와 "뱃길로는 100리 이내"라는 논리를 들어 여주로 이장했기 때문. 덕분에 여흥은 주(州)로 승격하면서 현재의 여주란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14. 엄청난 양의 돌이 쌓여있기 때문에 현대 이전에는 사실상 불가능이었으며, 현대에는 폭탄이나 중장비를 동원하면 무덤을 열 수 있겠지만 도굴은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밤중에 은밀하게 하는 것이므로, 결국 불가능하다.
  15. 예를 들면 백제는 멀쩡히 현대까지 남았던 왕릉은 무령왕릉 딱 하나뿐이었다. 말 그대로 기적적.
  16. 단군릉을 북한이 지어낸 무덤이라고 아는 사람도 많은데, 어쨌든 일단 거짓 유적은 아니다. 항목 참조
  17. 조선시대까지 절(사찰)은 왕궁, 왕릉 등을 수호하는 역할을 위해 인근에 함께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