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장영실(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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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6년 1월 2일부터 방영하는 드라마 장영실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창작을 비교하는 문서이다. 장영실에 대한 사료가 상당히 부족하므로 상당 부분이 창작으로 이루어질 듯하다. 또한 2014년에 방영된 드라마 정도전과 2015년에 방영된 드라마 징비록의 전례에 따라 문서 이름은 역사적 사실과의 비교로 명명되었다.
2 제1회
- 태종이 개성 수창궁에 기거하는 것으로 나온다. 극 중 연도(1401년, 태종 1년)를 생각하면 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상왕이 1394년 10월에 한양으로 천도 후 5년만인 1399년 3월에 둘째 형이 개성으로 환도했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재천도는 극중 시점으로부터 4년 후인 1405년 10월에 이루어진다.
- 양녕대군이 아직 왕세자가 아닌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것도 맞는 것이다. 양녕대군은 1404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 충녕대군이 막동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실제 세종대왕의 아명이다.
- 장영실의 출신은 정확히 알수 없다. 아산장씨의 주장은 장성휘가 고려 멸망때 집안이 화를 당해 장영실 모친과 장영실이 관노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족보 특성상 진위를 파악하기 힘들며 장성휘의 아들이라는 정보만 유지한체 조선왕조실록에 기생의 소생이란 기록을 바탕으로 관기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얼자출신으로 각색했다.[1]
- 장영실의 숙부가 상류계급을 양반이라 부르는데 조선의 상류계급이 양반이라 일반적으로 불리게 된 건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서고 본디 양반은 문반, 무반을 통틀은 관료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사대부란 단어가 나오는게 옳다.
3 제2회
- 노비이자 관노인 장영실의 어머니에 해당하는 은월을 동래관아에 소속된 군관인 김학주가 추노를 하는 과정에서 사사로이 죽인다. 하지만 현실의 조선에서는 그렇게 할수가 없었다. 공노비는 명백하게 국가재산이기 때문에 재산손실등으로 규정될경우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신분제에서 노비는 사유재산이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입장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조선 시대는 대중 인식과 달리 인권에 있어서 동시대 국가들 중에서도 상위 급에 속하는 국가다.[2]
4 제3회
- 장영실이 부친에게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는 표현을 쓰는데 장영실은 얼자라는 점에서 당시에는 기본적으로 정실소생이 아니면 아버지라는 호칭을 할 수 없었다. 홍길동 이야기는 그냥 나오는것이 아니며 조선시대 서얼에 대한 차별문제는 조선건국부터 끝까지 제대로 해결된적이 없다. 다만 서얼에 대한 차별이 본격적으로 심해진 건 조선 건국 이후, 그것도 태종대부터라 아직 조선초 태종 재위기간이 배경인 장영실에선 딱히 지킬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또한 적서차별은 가풍과 지역(도시냐 지방이냐)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집안마다 차이가 있었다. 라고 하지만 실제 조선은 법적으로 서자의 호부를 막은 적이 없다. 홍길동의 경우는 얼자인데다.. 워낙 홍길동이 걸물이어서 기를 죽일 목적도 있었다.
- 양녕대군이 귀양을 가서 무단으로 귀양지를 이탈했다는 전개는 사실에 가깝다. 양녕이 유배지[3]인 경기도 광주에서 편지 한통 남기고 무단도주한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 양녕의 유모 등이 이 일을 두고 기생 어리 때문에 양녕이 저리 되었다며 어리를 심하게 모욕하자 그녀는 억울한 나머지 목을 메어 자살해 버렸고, 태종이 수색령을 내리자 양녕은 이틀 후에 발견되었다. 태종이 궁으로 불러들여 무단도주 및 어리의 자살에 대해 나무랐는데, 양녕이 처음에는 사죄하는 척했으나 실제론 죄책감을 느끼기는 커녕 악기를 연주하면서 뻔뻔하게 굴어서 태종과 주변의 어이를 털어놓은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 1년 1월 30일~ 2월3일 기사에 나오는 사건인데 3회의 양녕대군의 행각은 그를 각색한듯 하다. 다만 태종이 양녕을 개인적으로 매우 아꼈으며 자기가 죽은 후 양녕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세종에게 신신당부했던 것이 사실이다.
5 제4회
6 제5회
- 이천이 장영실에게 개인사(일가족이 몰살당하고 자신이 임진강에 버려졌다는 등)를 들려주는데 이것은 모두 사실이다! 정확히는 이천의 외삼촌이 염흥방이고 이 염흥방이 이성계와 최영에 의해 몰락할때 이천집안도 같이 몰락했고 승려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