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

조선의 역대 왕세자
태종 이방원양녕대군 이제세종 이도
군호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
후백(厚伯)
시호강정(剛靖)
세자책봉1404년(태종 4년)
폐세자1418년(태종 18년)
생몰년1394년 ~ 1462년 9월 7일

1 개요

조선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의 맏아들이자 세종의 큰 형. 엄밀히 따지면 태종과 원경왕후 부부의 넷째 아들이다. 태종은 양녕 위로 아들 3명을 더 두었지만, 이들은 모두 어린 시절[1]에 죽었기 때문.

아동용 역사만화, 교과서 등에선 최대한 건전하게, 본인이 능력이 모자라고 동생인 세종의 능력이 더 뛰어남을 알게 되어, 일부러 놀고 날뛰면서 폐세자가 된 뒤, 세종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한 대인배… 정도로 미화되어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동생 세종의 장손인 단종을 몰아낸 수양대군을 지지하는 소인배에 불과한 인간이다. 후술하겠지만, 세종이 자신의 비행을 끝까지 눈감아준 것을 감안하면(…) 그나마 이성계의 열혈(?) 유전자를 너무 많이 가지고 태어난 왕족… 수준이 미화의 한계다. 혹은 너무나 개망나니였던 나머지, 동생이 즉위할 건덕지를 준 게 업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참고로 세자 시절에는 양녕대군으로 불리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 대군(大君)은 '세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의 적자들에게 내려지는 작위이므로. 양녕대군은 폐세자되면서 봉해진 존호(尊號)이다.[2] 존호에 있는 '양(讓)'도 세자 자리를 양보·양도했다는 의미에서 쓰인 것이다.

2 생애

2.1 세자 시절

세자가 되기 전부터 양녕은 태종과 원경왕후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었다. 사실상 그들의 전체 자식 중 부부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일반적인 부부의 맏아들에 대한 애정을 초월하는 깊은 사랑으로 길렀던 자식으로 추정된다. 양녕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세 아들들이 줄줄이 요절하여 상심이 크던 중 겨우 다시 얻은 넷째아들(겸 7번째 자식)이었으므로, 그가 형들처럼 요절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며 끔찍이도 아꼈다고 한다.

태종은 원경왕후와 사이에서 7남4녀를 얻었지만, 그 아들 중에서 요절하지 않은 것은 4남 양녕대군, 5남 효령대군, 6남 충녕대군 뿐이다. 대신 양녕의 누나 3명을 포함한 딸들은 최소한 시집가고 나서도 살아 있었다[3] 장남과 차남과 삼남은 이름에 대한 기록도 없이, 겨우 태종의 회고기록 정도에서 그 존재가 확인될 정도인 것으로 보아, 그들은 상당히 어린 나이[4]에 요절한 것으로 여겨지고, 7남 성녕대군도 겨우 14살의 나이에 죽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아들 3명을 뺀 4남 4녀로 기록되어 있다. 태조 2년에 양녕의 셋째 누나가 태어났고, 태조 3년에 양녕이 출생하였으니, 양녕의 형들은 모두 조선 건국 전에 태어나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단 실록은 조선 건국 이후의 왕가 가족들의 출생과 사망사실은 무조건 다 기록하게 되어 있다.

그 뒤의 아들들도 나름 상태가 좋아 어릴 때부터 태종이 예뻐하긴[5] 했으나, 아들 다 잃고 하나 살아 있던 상황부터 길렀던 양녕에 대한 사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심지어 양녕의 요절한 형들을 공식 기록에 넣지도 않았을 정도니(…) 그 이후에는 갓난아기 때 요절한 왕자, 공주들도 전부 다 실록에 넣는다. 흔히 사도세자의 첫째아들로 알려진 정조도, 사실 아기일 때 죽은 형이 있어서 둘째아들이다. 아무튼 《조선왕조실록》 공식 기록은 양녕이 첫째아들로 되어 있다. 그 전 아들 3명에 대해서는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냥 태종이 그 전에 아들 3명을 잃었었다는 말을 한 기록만 있다. 양녕이 세자로 책봉되고 이리저리 깽판치고 다닐 때도, 태종이 바로 세자 자리에서 자르지 못한 건, 본인이 젊을 때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에 대한 죄의식으로, 장자상속에 집착한 것도 있지만, 사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너무 사랑했던 것 때문인 게 더 크다. 태종이 양녕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깊게 속상해 했던 모습을 보인 기록은 실록에도 꽤 많이 나온다.

조선시대의 대부분 왕과 왕자의 관계는, 보통은 왕자가 태어날 때부터 다른 궁에서 기르고, 왕의 업무가 항상 바쁘기 때문에 그리 자주 보지 못해, 보통 특별하게 가까울 수는 없는데, 양녕은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기 전에, 그러니까 궁궐에 살지 않을 때 태어난 자식인데다가, 형들의 요절로 가장 특별한 자식이기까지 하니, 자식에 대한 사랑이 다른 조선시대 왕이 대를 이을 귀한 아들로 생각하는 감정보다 오히려 더 깊었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태종에게 양녕은 항상 '왕자'가 아니라, '아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때 태종은 양녕대군을 명나라 영락제의 딸과 결혼시키기 위해, 조선에 단골 사신으로 오던 황엄에게 이야기하여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명나라에 가서는 김한로의 딸을 생각하여 이를 거절한다. 월탄 박종화의 《양녕대군》을 읽어보면, 당시 양녕의 재능을 영락제가 칭찬하였다는 표현이 있다.[6]

양녕은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장자승계의 원칙에 의해 세자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공부에 신경 쓰지 않고 노는 것을 좋아해서 태종의 골치를 썩였지만, 태종은 세자를 함부로 교체할 수 없었던 터라 얼마 동안은 타이르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자가 계속해서 말썽을 부리자, 세자궁을 대궐 가까이에 지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자주 살피라는 우빈객 이래의 말에도, 다 큰 부자지간에 그렇게 간섭하면 반드시 서로의 사이가 나빠진다며 듣지 않았을 정도. 태조가 왕위 서열을 무시하고, 형제 중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의 피를 보고 권좌에 오른 이였던 만큼, 태종으로서는 장자인 양녕에게 피를 보지 않고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양녕은 이오방, 구종수와 궐을 나가 논 것을 비롯하여, 전 중추부사 곽선의 첩, 어리를 납치해 궐로 데려온 큰 사건 이전에도 숱하게 말썽을 부리고 공부를 게을리 해, 태종과 원경왕후의 속을 시꺼멓게 태웠다. 실록에 보면, 태종이 지신사(知申事) 조말생을 은밀히 불러 세자가 공부를 않고 놀기만 좋아하며 황음(荒淫: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하는 것이 심하니 어쩌면 좋으냐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한탄을 했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이다.[7]

태종이 양녕이 저지른 사고들을 마무리 짓고자, 그와 어울리던 패거리를 벌주고, 그 중 몇은 파직시키자 양녕이 곡기를 끊은 적이 있었는데, 이를 보다 못한 원경왕후가, 너는 어리지도 않은데 지금 어째서 부왕(父王)께 이와 같이 노여움을 끼치느냐? 이제부터는 조심하여 효도를 드리고 또 밥을 들도록 하라[8]며 꾸지람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상술(上述)했다시피, 양녕은 어리라는 여인과 나누던 밀회가 발각되어 태종으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듣고, 장인인 김한로가 태종으로부터 문책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를 장인의 집에 숨겨두고[9] 아이까지 갖게 한 일(…)이 드러나 태종이 대노하여 질책하자, 양녕은 "아바마마도 첩 많으면서 왜 내가 축첩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까?" 라며 반박하는 내용의 수서(手書)를 올려 태종을 당황케 한 일도 있다. 태종은 답답했는지,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에게 수서를 보여주며, "얘를 어쩌면 좋냐"며 한탄했다. 그 외에도 양녕은 기생들과 놀고, 매사냥을 즐기며, 꾀병을 부려 서연(書筵)[10]을 피하는 등 온갖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렸다.

'세자양보설'과 반대로, 충녕대군이 인격과 학문 양쪽 모두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이자, 세자 자리에 있었음에도 아우에게 경계심을 가졌던 듯하다. 여러 대군들과 함께 부마 이백강의 연회에 가서 기생과 놀다가,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사 여기까지만 봐도, 양녕대군의 행적만 보면 그간 태종화병이 안 생긴 것이 신기한 걸 넘어 이상할 따름이다. 양녕대군이 이 분의 아들이었다면, 폐세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됐어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었다.

2.2 폐세자

그가 계속해서 큰 사고를 치자 그는 결국 폐세자가 되었고, 그를 대신하여 훗날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종은 훗날 태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세종이 되었다. 그러나 양녕은 태종이 상왕이 된 후에도 계속 사고를 쳐서, 견디다 못한 상왕 태종이 그를 가두다시피하고 철저히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삼아 태종이 양녕을 미워했다고 여겨서는 안 되는 연유는, 태종은 왕자의 난 당시 보여주던 눈물도 없을 거 같은 이미지와 달리, 자식에게는 상당히 관대하였는데, 그는 양녕을 폐위한 뒤에도 늘상 그를 걱정했다. 아마도 아들 셋을 연이어 잃은 뒤에 겨우 얻은 아들이라 그 정이 무척 각별했던 것 같다. 《세종실록》을 보면, 태종은 정도전의 위세에 눌려 하릴없이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 그때 원경왕후와 함께 업어주고 안아주며 무릎에서 떼어놓은 적이 없다보니, 자애하는 마음과 정이 다른 자식들과 달랐다고 술회하고 있다. 폐세자 이후에도 밤에 담을 넘어 도망가고, 태종에게 병든 매를 바치고, 남의 첩을 빼앗으려하는 등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과 고기, 베를 자주 내리고 강화에 백 칸짜리 집을 지어주었다. 더불어 신하들이 그를 궐로 부르는 것을 반대하자, 태종은 양녕을 밤에 몰래 불러서 그의 얼굴을 보기도 하고, 그에게 매까지 하사하면서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게 했다. 이쯤 되면 아들바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상술(上述)된 대로 왕과 왕자의 관계가 아니었을 때부터 부모자식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 태종이 왕도 유력한 세자도 무엇도 아닌, 그냥 왕자 중 1명 시절에 유일한 아들이라고 허구한 날 금지옥엽보다 더하게 걱정하며, 그야말로 가장 사랑했던 자식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상술된 대로 태종에게 양녕이 단순히 피를 이어받은 왕자가 아니라, 앞서 태어난 아이들 셋이 먼저 죽고, 나이 30 다 되어[11] 하나 건진 아들이었기에 가능했던 일.

폐위시켜 광주로 보낼 때도, 신하들이 원지로 보내라고 청했지만 당시 사이가 안 좋던 원경왕후 핑계를 대면서까지, 도성과 가까운 광주로 보냈다. 양녕대군이 종묘사직에 누를 끼친 죄인이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궁전에서 쓰던 기물들도 모두 딸려 보내고, 수발을 들 노비들, 생활비까지 줘가며 사는 데 부족함이 없게 해주었으며, 신하들이 참수하라고 닦달했던 어리까지 광주로 같이 보내주었다. 결국 왕권에 위험요소가 될 만한 인물은 형제이든 외척이든 뭐든 가차 없이 제거했던 태종도, 자식에겐 한없이 무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태종이 왕권 강화과정에서, 부부 사이가 최악으로 벌어진 중전의 핑계를 대면서 자기 곁에 두고자 한 것도, 자신이 한 짓이 있다 보니, 자기 자식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게 아닐까, 그리고 권력에서 밀려난 양녕이 사사(賜死)당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폐세자 시킨 후, 태종이 통곡하며 흐느끼다 목이 멨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12]

2.2.1 폐세자의 원인에 대해서

왕위를 사이좋게 양보했다는 야사(野史)가 있긴 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 세자시절 양녕이 기행과 방탕함으로 입지가 약화되어 가고 있을 때에 맞추어, 충녕이 공적인 자리에서 총명함을 드러낸다거나, 양녕의 행태에 직언으로 간하는 모습 등이 실록에 자주 나타난다. 양녕대군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다는 주장들은, 실록에 버젓이 기록되어 있는 양녕의 충녕에 대한 각종 비방과 폄하[13]를 보면 더더욱 헛소리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양녕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태종의 정치적 선택에 따른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는 설이 있다. 태종이 사저에 있던 시절, 양녕대군은 외가인 민씨 집에서 자랐으며,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이 민씨 집안을 멸문시켰고, 왕실의 안정을 위해 외가와 비교적 친밀도가 낮았던 충녕을 선택한 것이라는 이야기. 하지만 이 역시도 각종 사서에 남아있는 양녕의 망나니짓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양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던 태종의 행동을 보면 근거가 부족한 설이다. 태종도 양녕보다 충녕이 훨씬 영특하고 어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양녕을 폐세자 시키기 전, 그러니까 장자계승원칙을 밀어붙이던 시점에도, 실록을 비롯한 각종 기록에, 태종이 당시 세자였던 양녕을 까면서 충녕을 본받으라고 말했다는 구절이 여러 차례 나온다. 태종이 양녕의 수많은 망나니짓을 끝끝내 참고 참다 그를 폐한 것은, 그만큼 양녕의 행동이 죽어도 못 봐줄 만큼 도를 너무 많이 넘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명재상으로 유명한 황희가 태종이 그를 폐세자하려 할 때 혼자 반대해서, 몇 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세자시절 양녕의 행동에 대하여 황희는, 뭐, 젊을 때 그럴 수 있지 정도로 평가. 양녕의 능력과는 별개로 개국초기의 선례로서, 장자가 아닌 셋째가 왕위를 이어받는 사례를 남길 수 없다는, 지극히 정치적 입장의 충돌이었던 셈이다.

2.3 폐세자 이후

세종은 형제간의 우애 때문이었는지[14] 나름대로 미안해서였는지, 폐세자가 된 후에도 계속 문제를 일으키던 양녕대군을 감싸줬지만, 양녕대군은 그 후로도 끝없이 사고를 쳤다. 선왕의 적장자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현 국왕의 정통성이 시비에 오르거나, 그를 중심으로 반역의 무리가 일어날 수 있으므로, 이런 경우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 일찌감치 숙청해버리는 게 상식이고, 게다가 세종 초기까지만 해도, 조선은 아직 완전히 안정된 왕조가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양녕이 조종(祖宗)에 죄를 끼쳤으니 벌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상소를 끝까지 물리쳤다. 나중에는 아예, "울 형이 좀 놀고 다니긴 해도 조종에 죄라고 할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 자꾸 형 못살게 굴면, 그런 말 한 놈부터 족칠 테다!" 라며 성을 내기까지 했다.

양녕대군은 세종이 자신을 타이르려고 보낸 편지에, "계속 막으려 하신다면, 다시는 주상을 보지 않겠다"는 식의 답장을 보낸 적도 있었다. 참고로, 일단 양녕은 세종의 세 살 많은 큰 형님이었고, 비록 세종이 동생이고, 이 편지도 명령은 아니고 부탁에 가까운 편지라고는 하지만, 그 이전에 세종은 이라, 왕의 아버지고 어머니고 형이고 삼촌이고 할아버지고 뭐건 간에, 죄다 왕의 신하에 불과한 존재라 가족관계에서 윗사람이라고 해봤자, 왕에게 개개대는 건 절대 허용 안 되는 일이었다. 막말로, 저 편지로 군주의 권위를 해쳤다는 핑계를 대서 역모죄로 죽여 버려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세종은 조선의 왕이고 양녕은 종친이므로, 최소한 왕의 말을 들으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왕의 편지에 대놓고, "내 말 안 들어주면 너랑 안 놀 거임"이라 답한 것.

이외에도 뭔가 또 말썽을 저질러 추궁을 당하자,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안 그랬다고 하늘에 대고 맹세한다!'고 왕인 세종에게 말했는데, 알고 보니 사실 저질렀다. 이는 원칙대로라면, 사형에 해당하는 기군망상죄(欺君罔上罪)다.[15] 조정대신들은 이걸 알고서 역모를 꾀한다느니 엄히 다스려야 한다느니 하면서 난리가 났었는데[16] 세종이 형제간의 사사로운 일이라며 진정시켰다. 이렇듯 세종 즉위 후에도 정말 생양아치가 따로 없었다.

양녕의 계속되는 또라이짓은 그가 살아남기 위한 보신책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세종 즉위 후, 일각에서는 양녕대군을 사사(賜死)해야 한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되었다. 그래서 사고를 치되 적당히 수위를 조절하여, 적어도 임해군이나 순화군처럼 인간 쓰레기 수준으로 막나가는 않았다. 사실 왕위계승에 위협이 되는 왕족의 처신은 그냥 신중하고 겸손한 걸로는 안 된다. 월산대군처럼 왕족이 아니라 거의 수도승에 가깝게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지 못할 바에는[17] 제안대군처럼 악독하지 않은 사고 좀 치면서, 처신이 못나고 남들에게 바보 같아 보이고 평판이 나쁠수록 목숨 보전과 만수무강에 이로운 것이다. 흥선대원군 역시 야사에 전해져 오는 수준의 파락호 건달급은 아니더라도, 중인이나 상인계급들과 어울리며 돈 꾸러 다니는 등의 구차하고 좀스러운 처신으로 연막을 쳤을 정도다. 이러한 행동은 동생 세종대왕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 의도한 행동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한편으로는 세종의 정치적 무능함을 가리는 위험성이 있다. 거기에 세종 사후에서의 행적을 보더라도 한마디로 망상일 뿐이다.

2.4 세종 사후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문종 사후엔 수양대군 편을 들어서, 문종의 아들인 단종을 폐하는 걸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앞장서서 상소를 올려 단종을 죽이라고까지 했다는 것. 세조가 단종을 죽이는 데 주저하자, "내 너 같은 놈을 조카로 두고 있다니!" 라며 격분했다는 야사(野史)의 기록도 있다. 당시 양녕은 왕실의 어른으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왕위를 빼앗긴 복수라는 시각도 있지만, 세종이 양녕을 감싸던 모습이나, 양녕이 지지한 수양대군이 세종의 차남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럴 가능성은 낮다.

사실 실록에 남은 양녕의 진면목을 보면, 왕실지상주의자였다고 볼 수도 있다. 태종이 외척인 민씨 일가를 숙청할 때의 기록들을 보면, 양녕은 자신의 외가를 말 그대로 풍비박산내 버리는 데 단단히 한 몫을 해냈다. 민무구, 민무질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원경왕후가 앓아누웠는데, 살아남은 외삼촌 민무휼, 민무회가 병문안을 온 김에 양녕대군에게, "우리 형들은 죄가 없는데도 죽었습니다. 부디 우릴 가엾게 여겨 주십시오" 라고 했는데, 양녕대군이 코웃음을 치며, 민씨 집안은 교만방자하여 화를 입어도 쌉니다이라며 받아쳤고, 이에 민무회가 폭발하여, 세자 저하께서는 어릴 적 어느 집안에서 자라셨습니까 하며 울부짖었다. 이를 들은 민무휼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이놈이 뭘 잘못 먹은 모양입니다, 라고 사과했으나 분위기는 이미 이상해져 버렸고, 양녕대군은 몇 년 뒤, 민무휼과 민무회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 일을 죄다 일러바치면서 외삼촌들을 죽일 것을 청했다. 태종이 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여기서 뭐하냐고 면박을 주었지만, 신하들이 종사에 관한 일에 어찌 세자가 관심이 없을 수 있겠냐고 양녕대군을 추켜올려 주었다. 결국 그게 결정타가 되어, 민무회, 민무휼도 자결해야만 했다.[18] 즉 양녕으로서는 어린 탓에 대신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 단종이 눈에 안 찼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는 세조를 더 좋게 본 것일 수도 있다. 역시 태종의 아들다운 면모라고나 할까? 다만 외숙인 민무구 형제들 문제의 경우, 자신의 비행이 문제가 되자 외숙들을 희생해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는 시각도 있으며, 세조 지지의 경우, 왕좌(王座)를 빼앗은 동생 세종이 익애(溺愛)하던 장손을 내몰아 한을 풀고, 한편으로는 수양에 붙어 자신과 친인척들의 이익을 얻고자 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 여기에서 지능형 소시오패스에 가깝다는 수식어 등극이 되어버린 것도 덤이다.

또한 양녕대군은 세조가 왕자 시절일 때부터 꽤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양녕대군이 종친들을 초대해서 술자리를 가졌는데 손님들이 모두 꽐라가 되었으나, 자신과 수양대군만 멀쩡한 것을 보고, "수양이야말로 진짜 호걸이다" 라고 칭찬했다고 하며, 수양도 이 큰아버지 양녕대군을 평소부터 잘 따랐다고 한다.

죽기 전까지 사고를 치고 다녔던 것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세조 8년인 1462년에 죽었고, 시호(諡號)를 강정(剛靖)이라고 했다.

3 후손

효령대군 다음으로 자손이 제법 번성하였는데 임진왜란 발발 당시, 충무공 이순신 수하에 있던 무의공 이순신[19]이 있었다[20].

먼 훗날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독립운동할 때 명함에 prince라고 파서 다녔다고 한다[21][22]. 참고로 제1공화국 시절의 정치인인 이기붕효령대군의 후손이다[23]. 그래서 이승만이 대한제국 황실 일가를 괄시했다는 말이 있다.

이외에 전 해군참모총장 이맹기가 있고 연예계에는 가수 이홍기와 가수 겸 배우 이승기, 그리고 배우 이준기와 아이돌 가수 샤이니의 이진기[24]가 있으며 시인 이외수와 야구선수 이대수도 양녕대군의 후손이다[25].

양녕대군파 종회는 상도동에 땅과 빌딩을 보유하고 있으며, 시세는 약 1,600억에 달한다.

4 명필

양녕의 글씨는 조선조에 나온 명필들 중에서도 최고봉이라 친다. 옛날 붓글씨나 그림 등 거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그 전의 것은 무진장 비싼데, 그것도 양녕대군 글씨쯤 되면 억 단위를 가볍게 호가할 수 있다. 아니, 그 전에 애당초 물건이 없다. 숭례문의 현판도 양녕대군의 작품. 숭례문 현판을 써서 옮길 때, 개와 소도 하례하고, 마소가 머리를 숙였다는 전설도 있을 정도로 조선 시대 최고 명필 중 하나. 임진왜란 이후에 현판이 없어진 적이 있는데, 남지(南池)에서 밤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나서 파봤더니, 현판이 있어서 명필의 글씨는 땅에 묻혀도 빛이 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2008년 2월 10일에 벌어진 숭례문 화재 당시에는 현판의 크기가 워낙 크고, 바깥쪽에서 접근해 안전하게 떼어낼 방법이 없어서, 불에 상하기 전에 소방공무원이 일부러 떨어뜨렸다. 떨어지면서 약간 부서지긴 했지만 타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소방대원이 긴급히 옮겼다.

5 일화

"나는 살아서는 왕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王兄佛兄)"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가 처음 나온 것은 《세종실록》이다.

세종 112권, 28년(1446 병인 / 명 정통(正統) 11년) 4월 23일(경신) 3번째 기사
효령 대군이 회암사에서 불사를 짓다
처음에 효령 대군(孝寧大君)이 회암사(檜岩寺)에서 불사(佛事)를 짓는데, 양녕 대군(讓寧大君)이 역시 들에 가서 사냥하여 잡은 새와 짐승을 절 안에서 구웠다. 효령이 말하기를,
“지금 불공(佛供)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소.”
하니, 양녕이 말하기를,
“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다면 자네의 오뉴월 이엄(耳掩)은 왜 벗기지 못하는가.[26] 나는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또한 불자(佛者)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하매, 효령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또한 《성종실록》의 효령대군의 졸기에도 비슷한 일화가 등장한다.

(효령대군) 이보(李補)가 일찍이 절에 예불(禮佛)하러 나아갔는데,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가 개를 끌고 팔에는 매를 받치고는, 희첩(姬妾)을 싣고 가서 절의 뜰에다 여우와 토끼를 낭자하게 여기저기 흩어 놓으니, 이보(李補)가 마음에 언짢게 여겨, 이에 말하기를,
“형님은 지옥이 두렵지도 않습니까?”
하니, 이제(李禔)가 말하기를,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고 죽어서는 보살의 형이 될 것이니, 내 어찌 지옥에 떨어질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 성종 17년 병오(1486,성화 22) 5월11일 (을묘)

당시에 이미 이런 일화가 널리 퍼져 있었던 듯하다.

《용재총화》에도 몇 가지 기록이 있다.

일찍이 뜰에 새 잡는 틀을 만들어 놓았는데, 서연(書筵)에서 빈객과 마주앉아 있으면서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학문에 뜻이 없고, 새가 틀에 걸리면 달려가서 잡았다. 계성군(雞城君) 이래(李來)가 빈객이 되어, 하루는 궁문 밖에 이르렀다가, 안에서 매 부르는 소리를 듣고 마음속으로 세자가 하는 짓인 줄로 알았다. 세자가 서연에 앉아 있거늘 이래가, “전하께서 매 부르는 소리를 하시는데 이는 차마 하실 바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뜻을 학문에 두시고 다시는 이런 소리를 하지 마시옵소서” 하니, 세자는 거짓으로 놀라면서 말하기를, “평생에 매를 보지 못했거늘 어찌 매 소리를 할 수 있겠느뇨” 하였다. 이래가 말하기를, “사냥할 때에 팔뚝에 올려놓고 토끼를 쫓게 하는 것이 매이온데, 전하께서 어찌 보지 못했나이까” 하였다. 무릇 과실이 있으면 이래는 반드시 반복하여 극간(極諫)하니, 세자가 이래를 보기를 원수와 같이 하여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계성을 보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괴로워지며, 꿈속에라도 보면 그날에는 반드시 오한(惡寒)이 난다” 하였다.
태종(太宗)께서 궁중에 감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무척 사랑하였는데, 새가 쪼아 먹으므로 태종께서 활 잘 쏘는 사람을 구하여 새를 쏘게 하자, 좌우에 모신 사람들이 모두, “조정 가운데 무사로서는 합당한 자가 없고, 오직 세자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태종이 곧 세자에게 명하니, 번번이 맞혔다. 좌우 사람들이 모두 경하하고 태종도 항상 세자의 행실을 미워하여 오래 보지 않다가 이날 비로소 마음이 흐뭇해 웃었다.

6 평가

폐세자 되기 전까지의 양녕의 기록은 대개 천박한 무리들과 어울려 시장바닥을 헤매고 다닌다거나, 이런저런 여자와 스캔들을 만드는 경우로 까이는 게 많았다.

폐세자 시절의 행동을 가지고 인륜을 벗어난 막장이니 뭐니 하지만, 막상 세자 시절엔 인륜을 벗어났다고 할 정도의 막장행각은 의외로 별로 없었다. 단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어리와의 간통사건도 개념 없음을 인증한 것이라면 모르되, 인륜을 무시한 사건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백부인 정종이 아끼던 기생과 관계를 갖기도 했지만, 일단 이건 모르고 한 일이기에 무마되었다.

하지만 이걸로 옹호가 될까? 세종의 한결같은 은혜를, 세종 후손들의 골육상쟁을 부추기는 것으로 갚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역덕후들에게는 인간말종으로 여겨져 까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동생의 피붙이를 죽인 것도 모자라, 자기 아들의 첩까지 빼앗았다.[27] 이 일로 인해, 그 아들이 반쯤 미쳐서 아버지보다 더한 인간말종의 길을 걷다가, 유배지에서 자결 시도를 한 후 후유증으로 사망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는데, 양녕대군의 적자 중 3남인 서산군 이혜가 그 주인공.

이혜는 아버지 양녕대군보다 더한 막장짓이 많았다. 단오절(端午節)에 금지된 석전(石戰)을 하다가 탄핵받고 충청도 진천군으로 추방당했다든지, 한 기생을 차지하겠다고 다른 사람과 싸움을 벌여 또 탄핵을 받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벌이고 남의 첩을 빼앗기도 했으며, 사람을 때려죽이라고 시켰다.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가 사람을 다치게 한 일도 있었다. 결국 세종 29년(1447년) 10월 3일, 술주정을 하다가 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종부시(宗簿寺)[28]에서 그 죄를 청하자, 세종은 '직첩(職牒)[29]을 거두어 고성현에 안치하고, 그 도의 감사에게 일러 밭과 집을 주게 하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사냥을 나가지 못하게 하며, 또 바깥사람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세종실록》 세종 32년(1450년)의 기사에서는, 이러한 명령을 내린 데에, '혜는 양녕대군 이제의 아들인데, 사랑하는 첩을 아비한테 빼앗기고 울화병이 생겨, 술김에 사람을 자꾸 죽여 이러한 명령을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왕자의 아들인 군(君)의 칭호를 몰수당하고, 서산윤(尹)으로 강등 당한다. 세종이 승하한 직후 유배지에서 도망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양녕대군이 사람을 시켜 찾게 했으나 소득은 없었다. 그 동안에 금강산에 입산해 지내다가 돌아왔으며, 문종 2년(1451년)에 유배지에서 자결을 시도하여, 그 후유증으로 같은 해 4월 10일, 사망했다.

사실 양녕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 어머니, 동생 복을 타고났다(…)는 시각도 있다. 그 냉혈한 군주인 부왕 태종은 자식들에게, 특히 장자인 양녕에게 한없이 물렀고, 모후 원경왕후는 양녕이 폐세자 되기 직전까지도 양녕을 두둔했으며, 그가 폐세자 되고 대신 세자 자리와 왕위에 오른 동생 세종대왕은, 양녕의 비행을 끝까지 눈감아 주었다. 만약에 아버지가 태종 이방원이 아닌 영조고려 광종이었다고 생각해보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6.1 성인으로 추숭되다

6.1.1 조선 초, 부정적인 여론이 대세였으나

이렇게 생전에는 망나니였던 양녕대군은 사후에는 도리어 평가가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심지어 폐세자 된 사연이, 아우가 성인(聖人)인 것을 알고 세자 자리를 양보했다는 이야기로 둔갑하게 된다. 사실 조선 전기의 기록에서는 양녕의 세자 양보설을 찾아볼 수 없다.

양녕이 사망한 해에 급제해서 조정에 들어와 세조 시대에 벼슬을 지낸 성현의 《용재총화》에서만 해도,

"양녕이 세자로 있을 때에, 노래와 여자에게만 빠져서 학업에 힘쓰지 않았다."

라고 하면서 대놓고 까고 있다.(…) 다만 《용재총화》에서는 또,

"양녕이 비록 실덕(失德)하여 세자의 위는 폐함을 당했지만, 만년에는 때를 따라서 스스로를 숨겼다."

라고 세조와 농담을 주고받은 것도 기록하면서, 미약하게나마 실드(…)를 쳐주고 있다. 또 선조시대에 써진 《동각잡기》에도 양녕대군을 상당히 까고 있어서, 이 시기까지만 해도 양녕대군에게 긍정적인 여론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조 자신도 《선조실록》의 기록에서…

옛날에 양녕대군(讓寧大君)이 매우 광패(狂悖)하였으므로 외방에 두었으나 제어하지 못하였다. ㅡ 선조 34년 신축(1601) 2월 10일(기묘) 기사 중

고 언급하여, 양녕대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6.1.2 조선 중기, 갑작스럽게 긍정적인 평가가 등장

그런데 《선조실록》에서 양녕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옛날 태종조(太宗朝)에 양녕 대군 이제(讓寧大君李禔)는 세종(世宗)이 응부(應符)한 것을 알고는 즉시 미친 체하였다. 그리하여 강관(講官)이 진달하는 글은 모두 읽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언문(諺文)으로 번역한 연후에야 진달하도록 허락하였다. 어느 날 야반(夜半)에 효령대군 이보(孝寧大君李補)의 집에 뛰어 들어가자, 효령 일가가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양녕은 곧장 침실로 들어가 효령의 귀에 대고 몇 마디 말을 하고는 돌아왔다. 동틀 녘에 효령 역시 가사(袈裟)를 걸치고 불문(佛門)에 몸을 의탁하고 말았다. 양녕은 또 복중(服中)에 궁성(宮城)을 넘어서 양주(楊州)의 기사(妓舍)로 가거나, 혹 사냥꾼들과 함께 응견(鷹犬)을 싣고 산골짜기로 출입하거나 하였으므로, 태종이 대노한 나머지 주청(奏請)하여 폐위(廢位)시키고, 세종을 세자로 세웠다. 대개 효령은 차서가 세종 위에 있었으므로, 양녕 자신이 폐위당하여도 효령에게 죄가 없으면 세종이 설 수 없을까 염려한 나머지 귀엣말을 한 것으로, 실은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세종이 즉위하여서는 우애가 지극히 돈독하였다. ㅡ 선조 36년 계묘(1603, 만력 31) 3월 9일(을축) 사관의 논(論) 중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뭔가 이 사관은 좀 당황스럽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게 언제인데(1443년 12월) 양녕대군이 세자 시절(1400~1418)에 언문(諺文)을 읽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게다가 효령대군이 아예 출가를 했다는 황당한 이야기까지 쓰고 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이 완전히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은, 인조시대의 문신 김시양이 쓴 《자해필담》이다.

양녕대군은 세자가 되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체하고 사양하니, 태종이 결국 폐하고 세종을 세웠다. 양녕이 능히 때에 따라 자기의 재주를 감추어 드러내지 않고 이럭저럭 지냈기 때문에, 내외(內外)ㆍ상하(上下)에 모두 환심을 얻었고, 세종도 양녕을 높이고 사랑하여, 매양 대궐로 맞아들여 술을 대접하고 거의 매일 서로 즐겼다. 여러 번 잔치하는 기구를 주셨고, 양녕이 사냥을 좋아하므로 세종이 여러 번 성 밖으로 나가 청하니, 지극한 정의가 무간(無間)하였다. 세조(世祖)가 임금이 된 뒤에 왕자와 대신이 많이 죽음을 당하였지만, 양녕은 능히 지혜로써 스스로를 보전하였고, 세조도 혐의 없이 높이 대우하니, 사람들은 그가 임금 자리를 사양하여 어진 이에게 밀어 준 것을 어려운 일이라 하지 않고, 끝까지 몸을 잘 보전한 것을 더욱 어렵다 하였다.

이렇게 세자 양보설을 주장하였고, 또한 양녕대군의 문재(文才)를 칭찬하기도 했다.

양녕은 젊어서부터 문장을 잘 하였으나, 세종에게 성덕(聖德)이 있음을 보고 짐짓 글을 모르는 체하고 미친 체하여 방자히 놀았기 때문에, 태종도 글하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중간에 양녕의 시를 기술) 비록 문인(文人)이라고 하는 사람도, 필시 이보다 훨씬 낫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연대 미상의 조선말기 이야기책인 《축수편》에서는,

양녕이 비록 실덕(失德)을 하여 폐함을 당하였지만, 미친 체하고 방랑하는 것이 실로 태백(泰伯)과 같다고 하였다. 지금 남대문 현판인 숭례문(崇禮門) 석 자는 그가 쓴 글씨로서, 웅장하고 뛰어남은 그의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라고 하여, 그를 옛날 주나라(周)의 태백(泰伯)[30]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실학자라고 하는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양녕에 대한 평가는,

양녕은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였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척했다. 스스로 미친 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여, 아무도 양녕의 진심을 아는 이가 없었다.

즉, 세자 양보설이 생겨난 것은 조선시대에서도 상당히 후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후로는 많은 기록에서 양녕대군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세자 양보설 때문에, 단순한 난봉꾼이던 양녕대군의 이미지는, '권력을 버리고 쾌락을 택한 호남아' 정도로 향상되게 된다.

6.1.3 결국, 세자 양보설이 국가의 공식 입장이 되다

그리고 결국…. 숙종 원년인 1675년, 양녕대군의 외손계열인 허목의 주청으로, 세자 양보설은 완전히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되어, 양녕대군은 태백과 같이, 덕이 있는 아우에게 왕위를 양보한 현인이라는 명분으로 사당에 모셔지게 된다(…).[31] 덤으로 효령대군도 같이 모셔졌다. 이후 1789년에는 정조의 친필 편액까지 내려왔다. 이 지덕사는 원래 숭례문 밖인 도동에 있었으나, 1912년, 일제에 의해서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로써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양녕이 왕위를 양보했다는 출처불명의 낭설이 돌기 시작했으며, 서서히 이것이 국가의 공식적인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조선왕실 입장에서는 이런 "와전된 사실"이 나도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세자였던 인물인데, 개망나니 짓을 하다 폐위 당했다 보다는 동생이 어진 것을 알고 일부러 왕위를 양보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왕실의 체통을 위해서라도 더 낫지 않은가. 조선 전기에야 세종이나, 그로부터 이어진 왕계의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양녕대군의 비행을 비판할 필요도 있었지만, 후기에 이르면, 양녕대군은 더 이상 왕가의 정통성에 위협도 되지 않는, 한참 전에 죽은 사람이고 하니, 기왕이면 좋게 포장해주는 게 왕실 입장에서도 좋았으리라.

6.1.4 근현대: 예술가적 해석

어린이용 위인전에서도 이런 시각이 굳어지게 된다. 근대기에 이르러서는, 월탄 박종화의 역사소설 《세종대왕》, 《양녕대군》에서 이 설이 차용되면서, 완전히 평판이 굳어지게 된다.

월탄 박종화는 양녕대군에 대해서 왕조시대와는 또 다른 해석을 하나 했다. 기존의 '양보설'과 양녕대군의 방탕한 모습을 조합한 정신적 해석으로서, 바로 양녕대군은 태조, 태종 시기의 살육에 혐오감을 느꼈고, 권력을 버리고 인간적인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했다는 '예술가적 해석'이다. 이 때문에 양녕대군의 행동은 단순한 위악적인 모습을 넘어서, 호탕하고 인간적이고 통쾌하고 뭐 그런 "현대적인" 수식어까지 얻게 된다. 뭐 《세종대왕》 머리말에서는, 아예 대놓고 '부정적 인간형' 양녕대군과, '긍정적 인간형' 세종대왕을 대비하여 탐구해보겠다고 밝히고 있으니까.

방송, 드라마 업계에서는 특히 이러한 관점이 널리 받아들여졌는데, 90년대의 드라마 《용의 눈물》 역시 이런 관점에서 써진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이 드라마는 월탄의 《세종대왕》을 원작으로 삼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사실 현대인들의 뇌리에 박혀있는 '머리 좋고 재능 있지만, 놀기 좋아하고 인간적인' 이미지의 양녕대군은, 9할 이상이 이 드라마의 이민우의 본좌연기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2014년 2월 9일에 KBS 교양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 양녕대군에 관해 다루었는데, 참석한 이해영 영화감독은, 자꾸만 양녕대군을 세속의 부와 권력을 초월한 호탕하고 통쾌한 인물(…)로 해석하여, 같이 있던 역사학자의 안색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 역사학자가 "그 양반 단종 죽이는 데도 한몫 했을 정도로 권력에 기웃거린 양반입니다만?"이라고 지적해줘도, "그냥 살고 싶어서 세자 자리를 그만둔, 조선사에 통쾌함을 남긴 남자" 라고 결론을 짓는 등 요지부동에 마이동풍이었다(…).

심지어 그 옆에 있던 인문사회학자 남경태는, "태종은 양녕대군을 보면서 참 나를 닮았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시인 류근도 여기에 동조하였다. 태종이 집권 과정에서 피를 많이 뿌렸고, 왕이 된 후에 여색을 밝힌 것을 보아, 패륜아적인 면모(…)와 풍류를 좋아한 면모를 닮았다고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일단 태종은 공사 구분도 못하고 띵가띵가 놀기만 하던 무책임하고 한심한 인간이 결코 아니었다.

6.2 그 외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임진왜란 시기에 양녕대군과 유사한 사례가 하나 더 나타난다는 것. 바로 광해군의 형 임해군이다.

야사에서는 암행어사를 했다는 식의 이야기도 있다.

7 미디어에서의 모습

  • 월탄 박종화는 《세종대왕》 소설을 쓰면서 양녕대군을 상당히 부각시켰고, 소설 《양녕대군》을 따로 쓸 정도로 권력을 스스로 버린 호남아 이미지를 널리 퍼트렸다.
  • 태종이 주인공이었던 사극 《용의 눈물[32]세종이 주인공인 《대왕 세종》에서 나오는 세종과 양녕대군의 모습은 차이가 많아서 말이 많았다고 한다. 《용의 눈물》은 거의 《연려실기술[33]의 서술에 가깝게 진행되었지만, 《대왕 세종》은 이 둘이 정치적인 생각 등에서 대립했었다는 쪽을 택했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 이민우가 맡은 본편의 양녕대군은, 왕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외숙부들조차 가차 없이 죽여 없애는 태종의 모습에서 권력의 무상함과 무서움을 알고, 일부러 이렇게 반미치광이 식으로 기행을 했다는 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극 중 등장하는 태종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태종을 닮은 아들이 아버지를 거부하면서 아버지의 속을 썩이는 장면은, 태종이 즉위 전 아버지인 태조의 속을 썩인 것과 오버랩(overlap) 되면서 극의 긴장감을 올리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 왕과 비》에선 신구가 노년의 양녕대군을 맡아, 그야말로 천하의 개쌍놈 연기를 훌륭히 보여주었다. 아버지 태종을 원망하진 않지만, 자신의 자리를 대신해 오른 세종과 문종, 단종을 상당히 원망하였고, 결국 수양대군을 부추겨서 조선의 왕실이 다시 한 번 콩가루 집안이 되는 데 일조하였다. 1회에서부터 세종대왕(송재호)과 왕실 관련 키배를 떴다.(…) 세종이 적자 승계원칙을 이야기하자, "야, 아부지가 32년 전에 나 버로우 태우고 너 뽑은 거 기억 안남?" 이러면서 엄청 돌려 깠다.[34]
3회에서, 문종의 시신을 수양과 같이 친견한 뒤엔, "어째서 (내관들에게) 묻지 않으시는가? 전하의 고명이 있었을 것이 아닌가" 라며, 방금 전에 형 죽은 사람에다가 지 큰조카에게까지 po패드립wer. 16회에서는, 단종을 말로 조지면서 수양을 비호하다, 혜빈 양씨한테 쳐발렸다. 덕택에 내관들에게 끌려갈 뻔 하질 않나… 그래서인지 최후가 은근 안습한데, 89회에서 90회로 넘어가는 사이 9년이 지나, 양녕대군 사망은 바로 버로우 타고, 권람이 죽는 것만 나왔다. 근데 마지막 화까지 단종을 죽이라며 완전 깽판이다(…). 하지만 이 모습이, 한국 사극 사상 가장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에 충실하게 양녕을 묘사한 것이라는 게 무서울 따름.
  • 공주의 남자》에선 이상하게 칼질을 당했으나[35], 《왕과 비》의 리메이크 격인 《인수대비》에서는 역시 행패남. 하지만 "할 줄 아는 건 효도밖에 없다"고 문종을 까도 생각보다 행패가 덜하다. 되레 김종서가 사망 직전의 문종을 보려는 걸 막자 분통 터져 쓰러지는 수준. 다만 계유정난 이후, 어서 단종을 폐위시켜야한다고 꼬장을 부리다가[36] 이번엔 명나라의 녹을 받는다며 인수대비 친정아버지의 뺨을 친다(…). # 그래서 친정아버지 한확은, 이런 치욕을 다시 당하지 않도록 좋은 왕비가 되어달라는 식으로 인수대비(함은정 분)에게 말한다… 안습.
  • 김진명의 소설, 《하늘이여 땅이여》에서는, 《태조실록》의 고증성과 고사성어 함흥차사(咸興差使)의 속뜻을 연결시켜, 양녕대군의 존재를 아버지의 쿠데타를 괴로워하다 일생을 마친 유교적 의인(義人)으로 묘사하여 풀어내고 있다.
  1. 다들 조선건국 이전에 태어나고 죽은 걸로 추정된다. 그래서 조선왕조 공식기록에는 그 3명이 없다. 태종의 언급만 있을 뿐. 태종이 양녕의 장자 정통성을 강화하려고 일부러 기록하게 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사관(史官)의 꼬장꼬장함을 감안한면 가능성은 낮은 편.
  2. "세자(世子)에게 관교(官敎)를 내려주고, 심씨(沈氏)를 봉(封)하여 경빈(敬嬪)으로 삼고, 제(禔, 양녕대군의 본명)를 강봉(降封)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삼고…(후략)", 《태종대왕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5일 기사
  3. 그래도 셋째 딸과 막내딸은 시집간 지 10년도 안 되어 20대에 요절.
  4. 그것도 사실상 아기일 때
  5. 양녕은 어릴 때 외가에서 자라기는 했다.
  6. 비록 무산되긴 했으나, 영락제의 딸이든 조카든 간에 명나라 황실과의 통혼이 성사되었다면 양녕대군의 폐위는 어렵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후일 세종이 영락제에게 누이를 진헌한 한확의 간통사건을 두고 '저 사람은 내가 죄 줄 수 있는 이가 아니다'라고 했는데, 하물며 영락제의 사위 혹은 조카사위가 된 세자를 건드리는 것은 그 이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7. 태종 35권, 18년(1418 무술/ 명 영락 16년) 3월 6일 병진.
  8. 현대식: 네가 어린애니? 나잇값 좀 하고 가서 먹어!
  9. 그러니까 자신의 정부(情婦)를 정실부인의 친가에다 숨겼다는 얘기다. 아무리 축첩이 당연시되던 시대라지만, 기함(氣陷)할 행동임은 분명하다.
  10. 왕세자에게 경전을 강론하는 자리
  11. 물론 누구나 첫째 아들을 낳을 수 있겠으나, 앞에 3명이 죽고 낳았다는 건 평범한 경우는 아니니, 첫째 아들에 대한 마음이 남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12. 태종 35권, 18년(1418 무술 / 명 영락(永樂) 16년) 6월 3일(임오).
  13. 간단히 말해, 양녕이 태종한테 충녕을 까는(?) 소리를 꽤 많이 했다. "제가 볼 때 충녕은 소심한 것 같습니다" 라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나쁜 말들을 했다.
  14. 아버지 태종이 고려 → 조선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피비린내 나는 시기를 겪은 반면, 양녕과 형제들은 어릴 때부터 안정된 궁궐생활을 했기 때문에,(어린 아기일 때는 궐 밖에 살았었다.) 형제들 간에 큰 마찰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위에서 보이듯, 태생적으로 정치적 인물일 수밖에 없는 대군들이니, 서로를 견제하기도 하고 썩 훈훈하기만 한 사이는 아니었던 듯하지만, 적어도 형제들끼리 사생결단을 벌였던 태종 대(代)보다는 훨씬 온건했다.
  15. 임금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는 죄에 대한 처벌은 앞서 말했듯 사형. 사극에서, 가끔 신료들이 왕에게 "소신이 어찌 거짓을 아뢰겠나이까" 라고 하는 것은 기군망상죄 때문이다.
  16. 조선의 역모는 현대의 내란반란처럼 실제로 들고 일어날 것을 요구하지 않고, 그냥 "왕에게 진심어린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만 입증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저것도 충분한 역모죄였다. 연산군《조의제문》 등과 관련하여 분노하고, 이전까지 연산군에게 뻗대던 대간들과 신료들이 납작 엎드렸던 것도 이 때문.
  17. 부리는 노비들도 시비에 휘말리지 않게 철저히 관리했으며, 이 스트레스 때문인지 30대에 단명했다
  18. 태종은 양녕대군이 외가에 휘둘릴 것 같다고 예상했고, 이 탓에 처가를 박살낸 건데, 정작 양녕은 아버지를 닮아서 외숙부들을 토사구팽.
  19. 양녕대군의 다섯 번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의 4대손.
  20. 예전에는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였던 이억기가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적혀 있었으나 사실은 덕천군의 후손이다.
  21. 장평도정(長平都正)의 장남 부림령(富林令) 이순(李順)의 14대손이었다. 임진왜란 때에 활약한 무의공 이순신의 9대손이었다.
  22. 예전에는 직계 9대조로 적혀 있었으나 사실은 방계 9대조이다.
  23.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다가 임오군란에 연루되어 처형된 이회정의 증손이었다.
  24. 5명 모두 전주 이씨 양녕대군 19세손, 시조 43세손 基자 항렬이다.
  25. 2명 모두 전주 이씨 양녕대군 17세손, 시조 41세손 秀자 항렬이다.
  26. 이엄이란 귀를 가리는 방한구로, 지금의 귀마개 같은 물건. 효령대군은 귓병을 앓고 있어서, 양녕대군 말대로 초여름에도 이엄을 쓰고 다니고 있었다. 고로 '부처님이 그렇게 잘났다면, 왜 니 귓병은 못 고쳐주냐?' 라는 뜻이다.
  27. 폐세자 시절의 행위와 달리, 이건 어떤 변론의 여지도 없는 인간말종의 행위다. 이 덕분에 양녕은 인간말종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28. 오타가 아니다. 관청 시(寺)라고도 하며, 왕실의 계보를 찬록(撰錄)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官衙)였다.
  29.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
  30. 주(周) 나라 태왕(太王)의 장자(長子). 태왕이 그의 아우 계력(季歷)의 아들인 문왕(文王)에게 성덕(聖德)이 있음을 알고는 왕위를 계력에게 전하려 하자, 왕위를 아우 계력에게 양보하고서, 형월(荊越)지방으로 피하여 은둔하였음.
  31. 단적으로 양녕대군이 모셔진 사당의 이름은 지덕사至德祠인데, 지덕至德이란 표현 자체가 공자가 태백을 일컫는 말이다.
  32. 상술했듯, 원작이 박종화의 소설 《세종대왕》이다. 소설 자체가 위화도회군과 조선 건국부터 다루고 있다. 이방원이나 정도전의 묘사는 원작과 많이 다르지만, 양녕대군의 묘사는 원작과 거의 비슷하다.
  33. 숙종까지 조선 국왕의 일대기와 관련된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연대나 인물이 아닌, 사건에 중점을 두어, 사건의 인과관계를 연차순으로 기술해 알아보기가 쉬운 편) 사서(史書). 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야사와 임금의 계보가 정리되어 있기에, 실록이 보편화되기 이전에는 많은 사극이 이 책을 참조했다. 실록이 완전히 보급된 현재에는 사료적 가치는 사실상 없다. 교수님들이 이 책을 보신다면, 수업 시간에 재밌는 얘기를 해주기 위해서일 듯. 이에 따르면, 세종은 야심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34. 우연히도 《왕과 비》의 양녕대군이 이 말을 하기 4주 전에 방영된 《용의 눈물》에서는 세자에서 폐위되어 쫓겨났다. 동회에서 (당시는 왕비가 아니었지만) 인수대비에게, 어느 종년이 주인 말을 엿들어? 운운하다 수양 앞에서 개쪽만 당하질 않나…
  35. 다만 실제 역사에서 양녕대군의 포지션은 온녕군이 대신한다. 다만 온녕군은 계유정난 얼마 후에 사망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각색을 가해서, 김승유에게 살해당한다.
  36. 그래도 나름 "주상이 나이 어리다고 얕보지 마시게. 조금이라도 힘이 생기면 자네 목을 내놓으라고 하게 되어 있어. 김종서가 관 뚜껑을 열고 나오게 된다" 라고 제법 그럴 듯하게 말한다.(…)
  37. 기생들과 어울리며 찍은 사진을 태종이 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