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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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국왕
3대 태종 이방원4대 세종 이도5대 문종 이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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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1976년[1]
묘호세종(世宗)
시호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장헌(莊憲)
능묘영릉(英陵)
본관전주(全州)
막동(莫同)(아명)/이도(李祹)
원정(元正)
출생지한성 준수방 정안군 사저[2]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부근)
사망지한성 영응대군저 동별궁
배우자소헌왕후(昭憲王后)
아버지조선 태종
어머니원경왕후(元敬王后)
생몰
기간
음력1397년(태조 6년) 4월 10일 ~ 1450년 2월 17일
양력1397년 5월 7일 ~ 1450년 3월 30일
(52년 10개월 23일, 1만 9319일.)
재위
기간
음력1418년 8월 10일 ~ 1450년 2월 17일
양력1418년 9월 9일 ~ 1450년 3월 30일
(31년 6개월 21일, 1만 1525일.)
조선의 역대 왕세자
양녕대군 이제세종 이도문종 이향 (왕세자)
단종 이홍위 (왕세손)

1 개요

훈민정음의 창시자이며,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실천해 민족의 역사를 뒤바꾼 한국사 최고의 성군.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태종 이방원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이며,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 존시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아명은 막동(莫同)이었다고 한다. 물론 막내라는 뜻. 막내 동생인 성녕대군 종이 한참 터울을 두고 태어났기 때문에 꽤 오랜 기간 동안 막내였다.

고려 왕조에서 신하로 일하다가 왕위에 오른 세 선왕과 달리, 조선시대에 조선사람으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최초의 임금이다. 양력 생일 1397년 5월 7일(율리우스력), 그레고리력으로는 5월 15일이다. 스승의 날이 생신인 셈인데, 실은 스승의 날이 세종대왕의 탄신일에서 따 만들어졌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인물로 광개토대왕,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힌다.

2 진정한 군왕이 되기까지

1408년에 충녕군으로, 1413년에 충녕대군으로 승격되었다. 왕자 시절부터 이미 될 성 부른 떡잎을 보여, 한번 잡은 책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한다. 원래, 왕자는 종친일 뿐 과거를 봐서 벼슬길에 오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뛰어난 재주가 안쓰러웠던 태종은 아들의 취미생활들을 전적으로 지원해줬다고 한다. 덕분에 학문은 물론 미술, 음악, 수석까지 다양한 부분을 섭렵했고 오히려 대군이었기 때문에 제한받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였으므로 다양한 분야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대군으로서의 생활이 다재다능한 왕으로서의 실력을 키워주는 데 복이 된 셈.

셋째 왕자이기 때문에 본래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첫째 왕자(폐세자 양녕대군)가 평소의 망나니, 개차반 짓 때문에 끝내 폐세자가 되고, 그전부터 영특하고 어질기로 유명했던 충녕대군이 왕통을 잇게 되었다. 일부에선 세자가 일부러 양보했다고 하나, 실상은 지나친 말종 짓 때문에 끝내 태종이 그를 비호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양녕대군은 제 버릇 못 고치고 여전히 망나니짓을 하며 세종의 속을 긁었고, 긁은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왕족의 위신을 떨어뜨려서 재위기간 초기에 세종의 약점이 되기까지 했다.[3] 그러나 세종의 힘이 점점 강해지면서 도리어 양녕대군의 처우도 점점 좋아졌다(!)

아버지였던 이방원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으로 왕위를 차지하며 왕통을 세우려고 했으나, 결국 자식농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장자계승의 원칙을 버려야 했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 한국사 최고의 성군이 나왔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그도 그럴것이 선왕이 외척이고 삼촌들이고 나발이고 싹 다 조져놨으니 그 카리스마에 나댈 수가 있나. 개기는 놈이 없으니 좋은 정책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종이 상왕으로서 왕위에서만 물러나 세종의 보디가드 역할을 해준 것도 신의 한수.

한편, 둘째인 효령대군은 평생 부처를 받드는 선비가 되었다.[4] 효령대군이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위계승에서 세종에게 밀린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을 못 마셔서. 태종에 따르면, "술은 너무 많이 마셔도 안 되지만, 못 마셔도 문제가 되는데 전에 사신들이 왔을 때 보니까, 효령대군이 술을 잘 못 하는데 충녕대군은 마신다"는 이유였다. 원래부터 불가에 뜻이 있기 때문에 계승권에 관심이 없었다는 해석도 일리가 있다.[5]

보통 위인전에서는 세종대왕이 왕자 시절 사심 없이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해서 태종의 눈에 들어 왕이 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어느 정도 왕자들 간 암암리에 경쟁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크게 세 가지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로 세자가 기행과 방탕함으로 입지가 약화되어 가고 있을 때에 맞추어, 충녕이 공적인 자리에서 총명함을 드러내었다. 이때마다 어김없이 태종이 칭찬하고 신하들이 칭찬하는 분위기로 흘렀고, 이는 세자의 심기를 많이 건드렸다.

둘째로 세자의 망동에 대놓고 직언으로 간하기도 했다. 세자가 매형인 이백강이 거느린 기생을 데려가려 하자, 한 집안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꾸짖으며 "할머니(신의왕후 한씨)의 제삿날에 소인배들하고 어울려서 놀다니 이건 또 뭐하는 짓인가?"하고 디스한 것이 대표적. 또 한 번은 "나 새 옷 장만했다." 라고 자랑하는 세자에게 먼저 마음을 갈고 닦으라고 충고했으며, 옆에 있는 신하들도 대군의 말이 맞는다며 모두 세자를 까는 등 속을 있는 대로 다 긁었다. 열받은 세자가 태종에게 "그래봐야 말만 번지르르하지, 충녕은 심약한 놈이 틀림없다"고 헐뜯자 태종이 "충녕, 그 아이가 겉으론 유약해도 결단력에서 있어서 당할 자가 없다!" 라고 오히려 두둔. 대충 보면 알겠지만 누구라도 욕할 짓만 세자가 골라했다. 이런 일은 실록에 자주 나타난다.

셋째가 아주 결정적이다. 충녕은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살해된 남은의 형이자 태종이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남재가 충녕에게 "왕의 아들이라면 누구든 왕 되지 말란 법이 있는가? 태종을 생각해보라. 대군께서 열심히 공부하니 기쁘다"고 말하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상적인 케이스라면 "헐,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하고 꾸짖어야 했지만, 충녕은 태종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끝냈고 태종은 "그 늙은이 과감하구나!" 하고 껄껄 웃을 뿐이었다. 만일 충녕이 꾸짖었다면 남재는 당연히 사형감이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왕실에선 사석이든 공석이든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는 것이 정치판이다. 하물며 왕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꼬드겼으니... 조금만 삐끗했어도 충녕까지 싸잡아서 역모죄를 의심받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이상의 크게 세 일화를 살펴볼 때, 충녕은 흔히 알려진 대로 처음부터 세자 자리에 욕심이 전혀 없었던 게 아니라 세자 이제가 망나니스러운 행동으로 점차 부왕의 신임을 잃어가자 본인도 세자 자리, 멀리 봐서 왕위에 대한 생각을 은연 중에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6]

따지고 보면, 건국 초기 시절이라 아직 적장자가 왕위에 오른 사례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능력이 만렙이거나 야심만 있으면 누구든지 왕위계승자로 지목되거나 왕위에 오를 수도 있던 시대였다. 조선 건국자인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고려 왕실의 옥새를 빼앗아 조선의 초대 국왕으로 등극한 바 있고, 또한 아버지 태종 이방원도 다섯째 왕자로 왕위계승 자리에 불리한 위치에 있다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결국 국왕으로 등극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7]

그러나 '적장자 계승'을 명분으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국왕에 오른 부왕 태종[8]은 자신부터는 왕위 적장자 승계 원칙을 누구보다 철저히 확립시켜 왕권 다툼에 대한 예방과 왕권 안정을 도모하고 싶었고[9], 그래서 장남인 세자의 계속된 비행에도 누구보다 세자가 정신 차리고 제대로 왕위를 물려받길 바랐다. 덤으로 원경왕후 민씨 역시 형제 간의 골육상쟁이 두려웠는지 세자를 폐하고 충녕을 새로운 국본으로 삼는 일에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자는 계속 부왕 태종에 눈 밖에 어긋나는 짓을 일삼다는 게 문제(...)

이런 와중에 셋째 충녕은 부왕 태종에게 세자의 행동을 고자질을 하는 등 세자를 압박하면서 견제하는 동시에, 자신의 모범생다운 행실을 보여주면서 태종과 신하들에게 점수를 땄다. 세종대왕의 즉위 뒤 쓰여졌다는 문제점은 있지만, 후에 양녕대군으로 폐해지는 세자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자신의 총명함을 드러낸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10]

능력만이 아니라 인성 면에서도 두 왕자가 대조를 이루었던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막내아우 성녕대군의 죽음이었다. 성녕대군이 큰 병에 걸려 죽게 될 때, 충녕대군은 의원과 함께 어린 동생 곁을 지키면서 의서를 탐독하고 열심히 간호를 하여 궁궐의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던 반면에, 세자는 이때 활쏘기나 하면서 놀고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렇게 세자를 감싸던 태종마저도 이 사실을 알고는 "하는 짓이 사람의 마음을 가진 것 같지 않다"라며 깊은 실망을 드러냈다.

사실 세자(후의 양녕)에게는 태생적인 결점이 있었다. 태종은 세자를 위해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서 평생 원경왕후의 원망을 들어가면서까지 처가인 민씨 집안을 멸문했다. 그런데 바로 세자는 태종이 사저에 있던 시절 외가에서 자라 숙청된 외삼촌들과 매우 가까웠다. '혹시 그래서 폐세자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폐세자의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작 세자는 자기네 외삼촌들이 궁지에 몰리자 헌신짝인 양 내던졌다. 심지어 민무휼 등이 원경왕후의 병문안을 왔다가 세자에게 "우리 형들이 죄 없는데 죽었으니, 우리 만큼은 보전시켜 주소서."라고 했는데 세자는 "삼촌들은 죽어도 싸다." 하고 비웃었고 제대로 빡친 민무회가 "마마는 어느 집안에서 자랐나요?" [11]하고 폭발해 버렸다. 같이 있던 민무휼이 수습하긴 했지만, 결국 각종 개차반짓으로 입지가 좁아진 세자는 점수를 벌어보겠다고 얼마 안 있어 그 일을 죄다 윗전(=태종)에 고변해서 민무휼, 민무회도 죽여버렸다. 비록 토사구팽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자기의 마지막 뒷배가 되어줄 수 있는 민씨 숙청에 가담한 세자는 현명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생각이 짧았던 것일까...

1418년 6월 3일, 태종은 세자를 폐하고 충녕을 새 세자로 책봉한다. 폐세자 직후에는 양녕의 장남, 순성군을 세우겠다고 했으나 박은 등 대신들이 반발해 뜻을 거둔다. 다음으로는 점을 쳐서 세자를 정하겠다고 했으나 다시 이 의견을 바꾸고 어진 사람을 골라야 한다는 이유로 충녕을 세자로 지명한다. 별 다른 이유 없이 앞선 두 의견을 물린 것으로 보아 형식적인 절차로 보인다. 이후 태종은 세자 책봉 두 달여 만에 전격적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는 불안정한 셋째 아들의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태종 자신의 남은 여생을 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1422년 죽을 때까지 4년간 실권을 쥐고 있었으며 세종은 태종이 죽은 뒤에야 진정한 조선의 국왕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완전히 잡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 첫 작업은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어찌보면 그로테스크했다. 세종의 처가인 심씨마저 멸문했던 것이다. 태종은 선위 직후 상왕으로 심온을 영의정 + 명나라 사신으로 임명하며 힘을 실어주는 척 안심시켰다가, 시답잖은 사건을 근거로[12] 귀국길의 심온을 붙잡아 고문 후[13] 다음날 바로 사약을 마셔버렸으며[14], 세종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어머니를 노비로 강등시킨다(...).[15]

1, 2차 왕자의 난까지 고려하면 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3대가 멸족을 당한 셈이다. 세종대왕은 태종 사후 황희 등의 주청을 받아들여 태종과 원경왕후의 유훈이라는 핑계로 장모와 처제들을 노비에서 풀어주고 직첩도 돌려주었으나, 그의 장인 심온의 사면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아들 문종대에 가서야 사면이 되었다. 이는 선왕의 결정을 바꾸는 것은 선왕의 결정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나와 선왕에게 불효가 된다는 유교사상에 의한 것이었지만[16], 세종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효 이전에 심온 본인에 대해서는 그렇게 중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심온 옥사 재수사는 세종이 물갈이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일이었고, 명분도 분명했던 정치보복이었으나 세종은 일체의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다. 선왕 대의 단호한 폐비 결정으로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 연산군, 광해군, 경종 등은 어머니들을 조금이라도 복권하려고 했다. 이들은 피바람이라는 무리수를 써서라도 목적을 이뤄냈던 반면, 세종은 그러지 않았다. 정조 또한 사도세자의 복권을 관철하기 위해 애를 썼으며, 작게나마 복수도 행했는데 말이다. 30년간에 걸친 세종의 숙청 없는 정치란 조선 역사를 통틀어서도 참 특이한 일이다.[17]

3 세종대왕의 업적

임금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매,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롭고,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합(閤)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달 동안 편치 않았는데도 글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태종(太宗)이 근심하여 명하여 서적(書籍)을 거두어 감추게 하였는데, 사이에 한 책이 남아 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마지 않으니,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 즉위함에 미쳐, 매일 사야(四夜) 면 옷을 입고,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보고, 다음에는 윤대(輪對)를 행하고, 다음 경연(經筵)에 나아가기를 한 번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또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고문(顧問)으로 하고, 경서와 역사를 열람할 때는 즐거워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고, 희귀한 문적이나 옛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않으며 증빙(證憑)과 원용(援用)을 살펴 조사하여서, 힘써 정신차려 다스리기를 도모하기를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아, 문(文)과 무(武)의 정치가 빠짐 없이 잘 되었고, 예악(禮樂)의 문(文)을 모두 일으켰으매, 종률(鍾律)과 역상(曆象)의 법 같은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에는 알지도 못하던 것인데, 모두 임금이 발명한 것이고, 구족(九族)과 도탑게 화목하였으며, 두 형에게 우애하니, 사람이 이간질하는 말을 못 하였다. 신하를 부리기를 예도로써 하고, 간(諫)하는 말을 어기지 않았으며, 대국을 섬기기를 정성으로써 하였고, 이웃나라를 사귀기를 신의로써 하였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 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 늦으막에 비록 불사(佛事)로써 혹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한번도 향을 올리거나 부처에게 절한 적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하였다.

세종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2월 17일(임진) 1번째기사. 임금이 영응 대군 집 동별궁에서 훙하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성인으로서 제도와 시설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정인지, 《훈민정음》 서문 중에서.

여기서 '하늘이 내리신 성인'의 원문은 天縱之聖(천종지성). 이 말은 공자나 제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관용구이다. 딱히 세종에게만 쓰인 독특한 표현은 아니지만 정인지는 물론 당시 신하들이 세종에 대해 가졌던 공통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당대 모든 분야, 즉 언어학, 음악, 법학, 공학, 철학, 경제학, 천문학은 물론 군사적인 측면과 농업에도 신경 쓴 임금. 간단히 요약해서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의 수준을 한 번에 몇 단계씩 끌어올렸다. 극단적인 견해로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실상 세종대왕 집권 대에 다 만들었으며, 이후 수백 년간 그 틀을 거의 바꾸지 않고 약간씩 보수만 하면서 흘러갔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 중에서, 전세제도의 확립 과정에서 토지 질이나 풍흉에 관계없이 똑같이 세금을 내는 세법인 '공법'을 제정하려 할 때에는 관리와 백성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행하기도 했다. 1430년 전국의 17만 여 가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반 년 남짓 소요되었는데 공법 찬성은 9만 8천여 표, 반대는 7만 4천여 표였다. 또 추가로 반대표가 더 많았던 지방에 대해 어떤 점에서 반대했는지를 자세히 조사하도록 했다고 한다.

백성들을 사랑하고 신하를 존중하며, 학문을 장려하고 재사를 등용하는 이상적인 유교적 성군으로 꼽히며 당대에 이미 고대 중국의 성군에 비견되어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부르며 칭송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태조 시절은 신권이 강하고, 태종 시절은 왕권이 강하며, 세종 시절은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때로 여겨진다.

다만, 세종대왕 집권 후기에는 왕권 강화-종친에게 적극적으로 정책을 맡기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사실 왕권/신권 대립 문제가 애초에 존재 자체부터 문제시 되는 떡밥 중 하나. 예컨대 신권의 대표자였던 정도전은 막상 태조가 없으면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고, 태종의 방식은 정도전 방식보다 특권층의 권한을 확장시켜주는 식이었다. 세종 중기를 거치며 특권층이 짝짓기를 시작하면서 세종의 정책에 반발할 세력을 키웠기에 세종도 맞불을 놓은 것이다.

이렇듯 많은 업적을 열거하지만, 세종대왕의 대표적인 업적은 바로 《훈민정음》의 창제. 일부에서 가림토신대문자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환빠일빠의 드립이고, 학계에서는 전혀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종에서 세(世)자는 '영토를 넓히는 등, 군사적 업적이 뛰어났던 임금'에게 주는 묘호라고 한다. 이것은 4군 6진을 개척한 업적을 반영하여 올린 것이다. 원래는 정인지 등이 문종(文宗)으로 묘호를 정하자 하였으나 뒤를 이은 아들이 반대하면서 "4군 6진의 업적이 있으므로 세종으로 묘호를 정해야 해야한다"의 주장했고, 세종은 그렇게 세종이 되었다. 그건 제 겁니다

4 먼치킨

어쩌다 왕의 운명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마치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집권할 때의 상황 또한 정말로 하늘이 내린 군주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세종이 선정을 펼치기에 좋았다. 당시 조선은 건국 후 혼란기에서 안정기로 접어들었으며, 선대 왕이던 태종의 엄청난 왕권 강화로 무리 없이 정책을 집행하며 정치를 할 수 있었던 점, 신생국가답게 진보적인 인재들이 재야에 많았던 점, 젊은 세대들 또한 고려 때 태어나 자라난 세대들에서 조선 건국 이후 태어나 자란 세대들로 교체되어서 백성들이 사실상 조선으로 동화되었다는 점, 대외적/대내적으로는 국가급 스케일의 큰 위협이 될만한 요소가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4.1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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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위엄

참고로 조선 세종 때 경작면적은 약 150~170만 헥타르인데 이 수치를 최초로 뛰어넘은 것은 1910~1918년 동안 진행된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조사사업 때로, 이때 조사된 토지조사량이 약 200만 헥타르 가량 된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면 교과서에서 조선의 농업을 다시 한 번 보자. 조선 세종 때는 조선 후기에 등장한 농업개혁들과 이앙법이 없는 상당히 뒤떨어지던 시대였는데도 저런 수치가 나온 것이다.[18] 쉽게 말해서 조선 세종 대의 농업량을 이기는 데 걸린 시간은 약 500년이다!

다만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세종 시기의 생산량이나 토지 결수가 조선 중후기보다 많았던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 생산량은 분명히 조선 후기가 조선 초기 세종대왕 치세보다 높을 수밖에 없다. 실제 역사에서 나타난 인구/토지의 경우 진짜 인구 수가 아니라 국가 권력에 의해 파악된 것이다. 즉 세종처럼 이렇게 파악된 것은 그만큼 세종 대의 호적과 세수가 제대로 파악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세금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세금을 많이 확보하면 당연히 국가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즉, 세종대왕의 진정한 업적은 생산량의 증가가 아닌 철저한 토지 관리로 인한 세수의 증가인 것. 특히 숨겨놓은 토지인 은결을 세종시기에는 전수조사를 해서 제대로 장부에 표기해 놓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양안에 표시되지 않는 결수가 많아지게 된다. 또한 실제 수세 결수와 전체 결수가 차이나는 것은 내수사나 지방 관아, 그리고 서원 소유의 토지 때문으로, 이들은 중앙정부에서 수세대상 토지가 아니었다. 지방재정 운용을 위해서 지방 수령들이 운용하는 토지들이 필요했기 때문. 특히 대동법이 시행된 인조~정조시기의 수세결수가 늘어나지 않은 건 그 때문이다.

물론 농사직설 등의 편찬과 더불어 긴 평화기였음을 감안하면 농업 생산량이 어느 정도 증가세를 그렸음은 추론할 수 있다.

4.2 희대의 책벌레!

유명한 일화 중 하나.

어느날 세종대왕이 밤늦게까지 글을 읽고 있었는데 멀리 집현전에 불이 켜져 있었다. 궁금하게 여긴 세종대왕은 내관에게 어떤 학사가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알아오게 하였다. 내관이 말하기를, "집현전 학사 신숙주가 공부를 하고 있사옵니다." 감격한 세종은 자신도 계속 글을 읽었다. 닭이 두 홰를 운 뒤에야 집현전의 불이 꺼졌고, 세종대왕이 거동하여 보니 신숙주가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세종대왕은 손수 자신의 곤룡포신숙주의 등에 덮어 주었다.[19]

세종의 자상함을 설명할 때 주로 드는 '훈훈한' 일화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때까지 공부를 하고 있었던 세종대왕의 학구열을 증명하는 일화라고도 할 수 있다. 또 입장을 바꾸어 신숙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는 오싹한 이야기다. 물론 일하다 일하다 결국 정신 놓고 자 버릴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기특해서 그랬겠지만...

저런 공부벌레다 보니, 세종대왕은 경학에도 뛰어나서, 본래는 왕이 신하들에게 학문을 배우는 경연을 되레 신하들이 왕에게서 학문을 배우는 자리로 만들어버렸던 초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여태껏 일단 과거에 붙어서 관리가 되면 당연하게 관리들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됐지만, 세종 때에는 왕의 높은 학구열 때문에 계속하여 공부를 했어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관리들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본인들은 물론 국가를 위한 노력이었다. 한 국가를 이끄는 관리들이 감히 나태해서야 되겠는가?

이렇게 나라 최상부에 면학의, 면학에 의한, 면학을 위한 분위기가 조성된 결과 불꽃 튀는 경연이 툭하면 벌어졌다. 당시 경연은 정책토론장의 역할도 겸했는데, 세종대왕의 정책수립 방식은 대단히 복잡했다. 예시를 들자면, 간식으로 롯데리아와 맥도날드 중 하나를 선택을 하려면 두 업소의 메뉴판을 늘어놓고 각 메뉴의 칼로리를 계산하고 영양학적 분석, 맛, 포만감, 가격대 성능비, 재료의 산지, 소화 불량 가능성, 먹어본 사람의 의견, 법적 근거 등의 생각해 낼 수 있는 관련된 사안들을 다 검토한다. 그리고 길고 복잡한 검토를 마치고 간식을 선택하면 때는 이미 저녁식사 시간이다. 이런 식으로 대단히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정책을 시행하다 보니 금방 시행되는 국정은 지극히 드물었고, 의심가는 고칠 점이 보일 때마다 재검토 하다 보니 국정을 완성하고 시행하는 데 연 단위로 시간이 걸리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결과를 거쳐 나온 정책들의 완성도는 매우 높아서 세종 대 입안된 거의 모든 정책이 세종 후의 조선을 지탱하는 제도가 되었다. 예를 들어, 농지개혁의 경우 입안에서 시행까지 13년이 걸렸지만 대한제국이 근대 양전 사업을 시행하기 전까지 400년 넘게 조선의 기본 정책이 되었다. 오히려 18~19세기에 가서 수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성리학자(+실학자)들이 '도대체 이거 어떻게 만든 거지?'라고 경탄했을 정도였다. 이런 신중함과 철저함은 현대보다도 더 나은 부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격무를 전부 도맡아서 했으니 당연히 몸이 안 아프고 배길 리가 없었다.

이 뿐만 아니라, 왕자 시절 하루종일 책만 읽어서 건강을 해칠까봐 우려한 아버지 태종이 충녕대군 방의 책들을 모두 치우게 했는데, 우연히 딱 하나 남은 <구소수간(歐蘇手簡) : 구양수와 소식 사이에 오갔던 편지를 묶은 책)>을 주야장천 읽어댔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며, 밥을 먹으면서까지 손에서 책을 뗄 줄을 몰랐다고 한다. 또한 명이나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신하가 있으면 가기 전에 꼭 이들을 불러들여 "일본에 뭔 책이 있다는데 오는 김에 좀 구해보시오.", "명나라에 국내에 없는 뭔 책이 있다는데 갔다 오는 김에 겸사겸사 좀 알아보시오." 이런 식으로 구매대행을 시켰을 정도였다. 사실은 신숙주책을 읽고 싶어서 당직을 다른 사람과 바꿔 자기가 대신 근무를 서 가면서 독서를 하고 아무리 을 퍼먹고 놀았어도 조금만 이 깨면 다시 일어나서 책을 읽을 정도로 지독한 책벌레였지만, 세종대왕은 더 심했으니 신숙주가 먼저 뻗어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세종대왕 본인도 "내가 궁궐에 있으면서 손을 놓고 가만히 있을 시간은 없다."라고까지 말하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4.3 음악

영조 : 선조 때 그렇게 인재가 많았는데 왜 사람들은 세종대왕 시절만 못하다고 하냐?

원경하 : 영묘조(英廟朝)[20] 땐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시절이었기 때문에 최고의 선비들만 배출한 게 아니라 예법과 음악을 만들고 정비하던 시대였습니다. 비상한 재능을 가진 박연같은 기술인재들도 이 시대에 태어나 경쇠[21]도 그때에 나왔고, 법율을 만드는 기장도 그 시대를 타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원경하, 《영조실록》 영조 26년(1750년) 1월 9일 원문

이날 기록을 보면 원경하가 선조 때의 인재들(이순신, 류성룡, 이원익 등)을 열거했는데 이 말을 들은 영조가 "선조 때 그렇게 인재가 많았는데 왜 사람들은 세종대왕 시절만 못하다고 하냐?"고 물었다. 영조의 물음에 대한 원경하의 대답.

개인적으로 음악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음악적 소양은 꽤 되었고 악기도 나름대로 잘 다룰 줄 알았는지 양녕대군에게 악기 다루는 법을 알려줬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절대음감에 가까운 음감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박연이 만든 편경을 시험할 때의 모습을 보면,

"중국의 경(磬)은 과연 화하고 합하지 아니하며, 지금 만든 경(磬)이 옳게 된 것 같다. 경석(磬石)을 얻는 것이 이미 하나의 다행인데, 지금 소리를 들으니 또한 매우 맑고 아름다우며, 율(律)을 만들어 음(音)을 비교한 것은 뜻하지 아니한 데서 나왔으니, 내가 매우 기뻐하노라. 다만 이칙(夷則) 1매(枚)의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연이 즉시 살펴보고 아뢰기를, "가늠한 먹이 아직 남아 있으니 다 갈지 아니한 것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1월 1일 원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KBS <한국사 전>에서 실험을 한 결과 편경 음의 차이는 지극히 미세해서 일반인이 그냥 귀로 듣고 음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알기가 어렵다. 이런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후덜덜. 어쩌면 표음문자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이 음감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세종 본인의 이런 음악적 감각은 정간보 간행이나 조선의 음악 정리에도 큰 도움이 되었으며, 아예 종묘제례악 중 몇 곡과 여민락 등은 세종이 주장막대를 땅바닥에 두드려 박자를 맞추며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은 쟝 바티스트 륄리가 서양 바로크 음악에서 처음 지휘봉을 도입했을 때의 사용법과 유사하다. 흠좀무. 아무튼 인류 고금을 통틀어 흔치 않은 군주이자 작곡가. 한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이자 작곡가인 다른 사례를 굳이 들자면 프리드리히 대왕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이분도 출중한 음악적 지식과 국가 지도 능력을 갖춘, 독일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이다.

4.4 언어학

"읽고 쓰지 못하는 백성을 위해 이 글자를 만들었다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우매한 백성이 다스리기 편할 텐데, 깨우칠 수단을 일부러 준 겁니다.
단소리든 쓴소리든 귀를 여는 지도자가 자기 편을 더 많이 얻는다는 걸 세종대왕님은 아셨나 봅니다."


- 2013년 10월 9일, SBS 8시 뉴스 김성준 앵커 클로징 멘트
길어봐야 30년 남짓한 재위기간 만에 그 이후 600년이 넘도록 쓰이고, 앞으로도 계속 쓰일 실용적인 문자를 만들어낸 군주, 지배자가 자발적으로 피지배들과 권력을 나누고자 한 역사의 기념비적인 사례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정도니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언어와 음운학에도 관심이 많아 이 부분을 심층적으로 공부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전, 중국어 어학책을 자꾸 들여다 봤는데 신하들이 "그런 거 왜 자꾸 보십니까?"라고 물어보자 '새로운 글자를 만든다'라고 말하기가 힘들었던지 "중국어 공부 좀 해놔야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질문을 했을 때 미리 답변을 생각해 놓지 않겠는가." 라며 핑계를 대기도 했다.

이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는지 최만리, 하위지, 정창손 등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 뜻이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하는 것 아니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22]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세종26년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학자 최만리의 상소를 보고 난 뒤. 원문

이처럼 반대하는 신하들을 처절하게 면박줬고, "내가 그냥 상소 몇 가지 좀 물어보려고 불렀는데 너님들 꼴을 보니 도저히 안 되겠다."며 정창손을 제외한 모두를 하루 동안 의금부에 투옥. 그리고 정창손은 파직.

  • 참고로 정창손만 파직된 이유는, 《삼강행실도》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성인군자는 타고나는 것이라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번역씩이나 해주면서 교육시켜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23]"는 요지의 말을 했기 때문인데, 이런 말은 현대는 물론이고 당대의 유학자라도, 아니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었다. 유학의 핵심은 한마디로 "수양을 열심히 한다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 만약 정창손의 말대로라면 빈민이던 안회나 양아치 출신의 자로를 제자로 삼아 가르친 공자는 헛짓거리 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때 세종대왕은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그야말로 쓸데없는 용속한 선비"라며 정창손을 강하게 비판했다.[24] 여담으로 정창손은 후에 김질과 함께 사육신을 고변했다. 세종의 선견지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담으로 대왕 세종에서도 이 장면이 묘사되는데, 원래 잘 화도 안 내는 세종은 정창손의 발언에 작중 최고 수준으로 대노해서 일갈한다.

정창손 : 지금껏 백성들이 문자를 모르고 교육을 받지 못해서 비루한 짓거리들을 해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천품은 교육으로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종 : 감히 어디서 과인의 백성을 능멸하고 나와! 백성의 천품이 교화될 수 없다면 네놈이 정치는 왜 해? 단지 백성 위에 군림하면서 권세를 누리기 위해선가!

그리고 격노한 세종에 의해 실제 역사와 같이 파직.

다만 신하들의 반대도 이해가 될 수도 있는 점은,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학문적으로는 대단한 일이지만 외교적으로는 엄청나게 부담되는 일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제체제, 즉, 화이체제에서는 중국은 곧 '문명', 나머지는 오랑캐로 여겨졌고, 조선도 역시 그 '문명'의 기준에 충족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고, 정치적으로도 그 문명세계의 일원이라는 것으로 나라의 권위를 강화했다. 따라서, 중국의 한자가 아닌 다른 글자를 쓴다는 것은 문명세계를 벗어난 오랑캐의 문화로 비쳐질 수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사실, 《훈민정음》 반포와 관련된 일에서 세종은 이전보다 훨씬 신하들에게 강경한 모습을 보이는데, 신하가 반대한다고 감옥에 가두거나 파직까지 시키는 과격한 대응을 한 것은 다른 사안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유교 군주로서 유교적 명분론을 완전히 어길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강경하게 나가서 입을 틀어막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고집스럽게 강하게 나간 것으로 보이며, 또한 오랫동안 연구를 한 끝에 문자를 새롭게 만들어낸 학자로서의 자존심이 발현된 결과로도 보인다. 오랫동안 연구해서 시간과 노력 심지어 목숨까지[25] 걸어가며 한 끝에 훌륭한 문자를 만들어서 반포하려 하는데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서면 당연히 화가 났을 것이다.

아버지 태종도 신랄한 독설가였는데, 세종대왕 또한 이런 아버지의 습성을 잘 물려받은 듯 하다. 실제로 이때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토론달인으로 천부적인 방대한 자신의 지식과 매우 논리적인 화술로 논쟁에서 신하들을 꼼짝 못 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신하들이 경연이나 정책회의 등에서 준비도 안 하고 대충 참석했다간 《훈민정음》을 반대한 신하들이 먹은 갈굼처럼 처절하게 논박을 당해야만 했다.

또한, 세종대왕의 저 꾸짖음에 가까운 논박은 그의 화술 능력을 나타내는데, 원래부터 세종대왕 본인은 경연, 즉, 토론의 달인이었다. 거기다가 본래 세종대왕은 한 번 적재적소에 썼던 인물이라면 그대로 데리고 쓰는 이른바 종신고용에 가까운 인재사용을 보여주는데, 황희 정승의 사위사건이나 박연의 부정축재 등 생각보다 규모가 큰 사건이라도 적당히 덮어주거나 하는 등의 사례를 세종대왕이 집권하던 시기에 더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세종이 신하를 다룰 때 웬만큼의 상소문 같은 건 오히려 논쟁을 즐기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훈민정음에 대한 논박은 열린 마음으로 대하던 것에 반하는 것이다. 세종대왕의 평소 화법은 신하들의 의견에 제대로 경청을 하였다가 유교경전이나 고사 등을 인용하여 학문적 우위로 가르침을 주는 것이라면, 저 논박은 대단히 권위주의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다. 흔히 권위주의라고 하면 민주적인 현대적 사고방식으로는 매우 찝찝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나, 조선시대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위엄과 위협 모두를 드러내는 제왕식 화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평소 세종대왕의 화법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점이 특이한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만리의 상소문 6개항 중 4개항이 모두 중국에 사대를 해야 된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잘 보면 세종대왕의 반박에는 전혀 중국에 대한 사대를 건드리지 않고 군주의 위엄과 자신의 언해능력을 자랑하는 화법을 보인다. 즉 중국에 대한 사대를 건드리면 최만리를 비롯한 상소문을 올린 자들을 처벌하더라도 다른 선비들의 반감을 사고, 이는 한글을 반포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함을 알고 있는 세종대왕이 일부러 평소와는 다른 화법을 구사한 걸로 추정 할 수 있다. 화도 잘 안내는 사람이 화를 내면 정말 무섭듯이 세종대왕이 평소와는 다른 화법을 써서 압도적으로 찍어누르는 것을 본 신하들은 어떻게 느꼈겠는가? 이는 사대주의를 절대미덕으로 내세우던 사대부들을 통제할 만한 좋은 화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흔히 상식적으로는 세종대왕이 집현전에다가 "너희들, 새로운 문자를 좀 만들어 봐라." 라고 명령을 해서 집현전에서 뚝딱뚝딱 한글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집현전의 높은 학자들 중에서도 한글을 창제해서 반포하기 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던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사람들 중에는 집현전 출신도 많았다.[26] 또한 신숙주 등 젊은 집현전 학자들 몇명과 함께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때문에 젊은 집현전 학자들조차 한글창제에선 한 일이 없다. 흔히들 신숙주가 세종의 어명을 받아 중국의 유명한 언어학자를 만나러 중국에 건너갔다는 기록을 보면서 신숙주가 《훈민정음》 창제에 도움을 줬다고들 하는데 사실 신숙주가 중국에 건너간 것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 1년 6개월 뒤이고 언어학자를 만난 이유도 중국어 음운론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간 것이다. 그렇다면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하면, 세종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에 집현전 학자들에게 "내가 한글 28자를 만들어 놨으니 그것의 쓰임새와 해설을 좀 달아봐라." 라고 명령한 것이고 그 결과물이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즉 《훈민정음》의 해설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을 만들었을 뿐이지. 한글 자체는 세종대왕이 직접 만든 것이 맞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거쳐서 만들어진 한글은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우수한 문자 중의 하나로 손꼽히며 저명한 과학잡지 디스커버리는 94년 6월호에서 한글을 소개하면서 여러 장을 할애했을 뿐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the world's most rational alphabet)" 이라고 극찬하였다.

세종대왕이 언제부터 한글을 창제하고자 마음을 먹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자기자신이 문자를 만들어낸 것은 애민정신은 물론 한반도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결단 중 하나로 남아있다.

4.5 역사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9년(1427년) 3월 13일

역사에도 조예가 깊어, "우리의 문물이 신라를 계승했으니 신라 시조에게만 제사지내죠."라는 편협된 역사관을 주청한 상소에 대해 세종 본인이 몸소 삼국이 나란히 서서 서로 막상막하였는데 어떤 버리고 어떤 것만 신경을 쓸 수는 없음을 언급하였는데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모두를 조선의 옛 조상으로 인식했던 세종의 균형잡힌 역사감각과 혜안을 보여주는 대목. 또한 재위기간 내내 《고려사》 편찬에 직접 개입하여 퇴짜와 수정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결국 죽을 때까지 《고려사》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 《고려사》는 세종 사후 문종 1년(1451년)에야 완성할 수 있었다.

4.6 과학

과학기술 발전에도 힘썼는데 이순지,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해 대간의, 소간의, 혼천의 등 천문 과학 기구를 만들었고 자격루옥루를 만들어 흠경각을 만들어 그곳에 설치하였다.

또한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수표교 등을 만들어 설치를 담당하게 했다. 의학에도 관심이 많아 집현전 학자였던 김예몽, 유성원 등에게 명해 의방유취 초본을 만들게 하였고 이후 김문, 신석조, 이예, 교리 김수온에게 명해 의관을 모아 편찬케 하였으며 세종 27년인 1445년에 365권으로 이루어진 조선 최대의 의학백과사전 '의방유취'를 편찬케 했다. 이게 얼마나 자료가 많았냐면 성종 8년 때 30부가 편찬되었다.

금속활자도 새로이 만들어 이전 이천에게 명해 불편하던 활자를 개량하여 '경자자'를 만들었으며 이후 하루에 30부씩 찍어 낼수 있는 '갑인자'와 세계 최초의 납 활자인 병진자를 새로이 만들었다.

또한 천문, 역법을 연구하기 위해 세종대왕은 직접 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세종실록》의 세종 12년 10월 23일 기사를 보면 계몽산이라는 중국의 옛 수학 서적을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정인지가 세종이 산학계몽을 공부하는 자리에 대기하고 있다가 세종이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그에 대한 질의를 받았다고 한다. 정인지가 세종의 특별 과외선생이었던 셈이다. 정인지의 주요 업무는 역법 등의 계산이였고 이 분야에서 정인지의 역할은 독보적이였기 때문에 수학 실력은 상당했을 것이다.

“上, 學 <啓蒙算>, 副提學鄭麟趾入侍待問, 上曰: “算數在人主無所用, 然此亦聖人所制, 予欲知之.”

“임금이 계몽산(啓蒙算)을 배우는데, 부제학 정인지(鄭麟趾)가 들어와서 모시고 질문을 기다리고 있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수(算數)를 배우는 것이 임금에게는 필요가 없을 듯하나, 이것도 성인이 제정한 것이므로 나는 이것을 알고자 한다.’”


세종실록 12년(1430년) 10월 23일

실제로 당시 34세였던 정인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적 역법서 ‘칠정산 내편’에 참여했던 탄탄한 실력의 수학자였다. 정인지는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역법을 개정하였으며 삼남지방의 모든 토지를 심사하여 토지의 등급을 정한 사람이기도 하다.

세종 25년 11월 17일 기사를 보면 신하들에게도 수학 공부를 시키려고 승정원에게 "산학을 예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집현전에 상고해 보도록 하라"고 명하기도 했으며, 결국 세종 30년 1월 23일 기록을 보면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커리큘럼과 이들의 관리 서용 기준까지 직접 짜서 승정원에 전교한 기록이 있다.

결국, 세종 26년 이순지에게 명해 정인지 등과 함께 칠정산 내편과 외편이라는 역법서를 편찬시킨다. 이게 《세종실록》 부록에 내편, 외편 두 개 다 실려 있다. 덕분에 《세종실록》 두께는 대단히 두꺼워지게 된다. 그 오차는 1년에 -1초. 거의 140년 뒤에 나와 현재까지 쓰이는 그레고리력의 오차가 1년에 +26초다. 참고로 이 칠정산 내편과 외편의 역법서의 역법대신 태양력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레고리력의 날수가 매우 규칙적이고 일정하기 때문이다.

4.7 화약 무기

사실, 세종대왕 시기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 중 하나가 최해산등을 기용해 화약무기에 지대한 관심을 쏟은 것이다. 다만 정작 최해산은 전쟁에 대한 수행능력이 매우 부족했는데, 아버지인 최무선이 여러 전투에서 직접 활약한 것과 비교하면 참담한 수준. 후일 북방으로 가고 싶지 않아서 꾀를 피우다가 세종에게 걸려 오히려 최북단으로 유배를 가게된다.

이미 태종대에 일발 다전법에 대한 연구가 있었으나 기술이 부족해서 이뤄지지 못했는데, 이 당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병사들의 훈련을 높여 연사력을 높이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을 때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독자적으로 기술력을 확보해 일발다전법을 1433년에 완성한다. 초기 화약무기의 발사체는 1발의 화살이었으나, 세종대왕 시기의 독자적인 기술 개발로 1445년에는 이총통, 삼총통, 잘전총통, 사전총통, 사전장총통 등 구경이 8.1mm~ 29mm의 소형화기가 독자적으로 발전되었고, 세총통을 직접 시험해 그 위력을 확인 한 후 평안도 일대에 보낸다. 이때 세종이 직접 사용해보고 평가를 내린 뒤에 북방에 보낸다. 동시에 일발 다전법이 수립되어 1개의 발사체가 2~12개로 증가했다. 여기서 발사체는 화살 즉 피령목전으로써 철환이 아니다. 초기의 화약무기들은 강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중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화살대와 화살 깃을 이용해 안정적인 궤적을 그리면서 날아가도록 하였다. 철환이 본격적으로 탄환으로 이용된 것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 화포의 개량과 체계적인 생산체계가 충분히 이뤄지는 단계에 도달했을 때다.

또한, 세종대왕은 화기운용부대를 증편하고 화기사격술을 개량했는데, 1441년 6월에 세종은 사수는 사격만 맡고, 다른 사람이 많은 화살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수에게 연속적으로 보급하는 방법을 도입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전투원의 수요를 폭증시켜, 세종은 다시 1447년 11월에 총통군을 오단위로 편성, 사수와 장전수를 분리해 운영하는 사격술 개혁을 실시한다.

즉, 화기 사격수인 총통군은 5명을 1오로 편성, 4명은 사격을 담당. 나머지 1명은 장전만을 전담하게했고, 오 내에서 화약의 양, 발사체, 격목의 크기를 착각하지 않도록 병과별로 선정하고, 사수는 총통 외에 궁시와 도검을 들고 다니게 함으로써 전투력을 극대화시켰고,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나 1448년에 총통등록을 저술해 화약무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표준화, 규격화 했으며 매화법 등 지뢰를 매설하는 법을 본격적으로 적용했다. 매화법은 지뢰를 매설한다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일반적인 매설지뢰와는 다른 클레이모어와 유사하다. 개중에는 화학물질을 이용해 생화학 공격을 하는 방법도 있다.

이때 개발된 화기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화살을 대신하여 철환을 발사하기 시작했고, 세종대왕이 개척한 일발다전법은 신기비결이 저술된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다음과 같이 사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포신 안쪽부터 화약 - 종이 - 격목 - 탄환 수십발 - 흙 - 탄환 수십발 - 흙 - 탄환 수십발 - 포탄의 구조로 대략 입구까지 꽉꽉 채우고 발사한다.

대체적으로, 세종대왕 집권 시기의 화약무기를 문종화차로 압축해보는 경향이 있으나, 세종대왕이 이뤄낸 진정한 화약무기의 의의는 세계 최초로 화약무기의 규격화, 일반화 시켰으며, 사격술과 부대 편성에 있어서 화약을 운영하는 부대를 수립하고, 그 부대의 운용 방법을 법제화시켰다는 것이다. 사실상 포병이라는 새로운 병종을 탄생시킨 것이다.

다만 이런 중세 화약무기들은 근현대처럼 화학대량제조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화약이 매우 비싼 상태에서 많은 화약을 요구했고, 때문에 야인들과의 실전에서 화력덕후의 기상을 보여주기 어려웠다는 단점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화력전을 표방하기 시작한 사례는 임진왜란. 그 외에도 유황이나 초석은 조선에서 생산이 거의 되지 않아 수입에 의존하는 등의 문제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비중있게 쓰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막강한 과학의 힘은 매우 잘 구현되어 현대에도 남아있다.

4.8 애민

세종대왕의 아이덴티티. 똑똑한 왕은 많았어도 백성을 지극히 아껴준 왕은 꽤 많지 않다.

국조보감》의 기록에 의하면, 왕자 시절부터 가난하고 굶주린 자가 있다는 사정을 알면 반드시 태종에게 아뢰었다고 한다. 조회에서 태종은 이미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여 굶주림이 없도록 벼슬자리를 두었는데, 죽게 된 백성이 왕자를 보아야만 먹을 것을 얻는다면 도리가 아니고 관리들의 일처리가 잘못되었다면서 주관하는 자에게 벌을 주었다.

당시, 관청에서 일하는 여자 노비(즉 관비)들이 출산을 할 때 산후 휴가가 1주일이었는데, 세종대왕은 출산이 예정된 달을 포함해 출산 후 100일을 쉴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고 (1426년 4월 17일) 출산 1개월 전부터 산모의 복무를 면제시켜 주는 조치를 취했으며(1430년 10월 19일), 또 산모만 쉬게 하면 누가 산모를 돌보겠느냐며 그 관비의 남편에게도 산후 1개월간 쉬게 해 주었다.(1434년 4월 26일)는 사실은 매우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자 사대부들이 "우리에겐 출산휴가도 제대로 안 주시는데 천것들에겐 왜 주십니까?"라고 불평을 늘어놓자 "니들은 집에 마누라랑 애 돌봐줄 사람들 있잖은가?"라며 철저하게 면박을 주기도 했다. 요즘 사회보다도 출산휴가에 대해서는 관대한 셈이다.

또한, 어린이와 노인이 죄를 범했을 때 얼굴이나 팔에 죄명을 표시하는 문신 '자자'형(얼굴이나 몸에 죄목을 새기는 형벌)을 금지했다. 세종대왕은 "어린아이는 뒤에 허물을 고칠 수 있고, 늙은이는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자이므로 자자는 옳지 않다."고 의견을 말했고 형조 참판 유계문이 "자자는 그 죄를 표기하는 것이니 노인이나 어린아이라도 면제할 수 없다."고 반론을 펼쳤지만 허조가 "노인과 어린아이는 장형도 안 받고 속전을 받는 것인데, 자자의 고통은 태형, 장형보다도 더하니 어찌 자자를 할 수 있겠느냐?"고 세종대왕의 의견에 찬동했다고 한다(1429년 7월 30일).

세종은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궁궐로 초청하는 연회인 양로연도 자주 베풀었다. 《세종실록》의 1432년 8월 17일 기사를 보면 승정원에서 "노인으로서 출신이 천한 자들은 양로연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상소를 올렸는데, 이에 대한 세종대왕의 답변이다.

"양로하는 까닭은 그 늙은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 높고 낮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니, 비록 지천한 사람이라도 모두 들어와서 참예하게 하고, 그 장죄(贓罪: 뇌물죄)를 범하여 죄를 입어 자자(刺字)한 자는 참예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100세가 넘은 노인에게는 나라에서 쌀과 옷을 내려 주었다. 한번은 강원도 감사가 경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100세가 된 김씨 노인에게 주는 쌀 10석을 5석으로 줄이자고 청하자 세종은 "100세가 넘은 노인은 세상에 항상 있지 않으므로 의리상 당연히 후한 구휼이 필요하다"며 이 요청을 기각하고 그냥 종전대로 쌀 10석을 주도록 했다.(1436년 7월 27일) 그리고 고봉현의 107세 된 노인에게도 옷과 양식을 하사했는데, 이 노인은 당시 병석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옷과 양식이 도착하자 감격해서 세종이 하사한 옷을 몸 위에 덮고 눕더니 곧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1420년 4월 26일). 나랏님도 어른대접을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다만 노비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의 아쉬운 점이 남아있긴 하다. 노비가 자식을 낳으면 일천즉천(一賤則賤)[27]에 따라 한쪽이 양인이라 할 지라도 노비가 되었다. 태종이 이를 폐지하고 "양민과 천민이 아이를 낳으면 아비의 계급에 따른다"는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을 시행하려 했다. 그러나 세종대에 종부법은 무산되고 다시 일천즉천으로 돌아갔는데, 애민정신으로 유명한 세종대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이러니하다.[28] 특히 임진왜란 이후 개판이 된 신분기록과 더불어 너도나도 군공을 내세우거나 양반 자리를 구매하는 등 이런저런 사건들로 인해 양반만 엄청나게 많아지자 이로 인해 조선 후기에는 국가운영에 큰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당시에는 신분을 변경할 수 있는 소송 제도가 존재했었다. 일천즉천은 이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를 예방하는 측면도 있었다. [29]. 지금의 인권 시각에서는 일천즉천은 부당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계급과 그 역할이 구별되어 있던 시대상, 무조건 양인이 늘어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양인의 수만큼 세수가 그대로 확보되는 것도 아니고, 특히 이 시기 사노비가 아닌 공노비는 관청에 고용된 계급으로 잡무를 처리하는 인력이었기에 무작정 그 수를 줄일 수는 없었다.

4.9 기타 잡기에 대해

현재 세종대왕의 어필로 전해지는 글씨인 '가전충효 세수인경'. 세종이 친히 전의 이씨 이정간에게 하사한 가훈이라고 한다. '가정에서는 충효의 법도를 전승하고 사회에서는 인자하고 공경하는 기풍을 지키도록 하라'는 뜻이다. 다른 어필로는 2005년 10월 9일 서지학자인 천혜봉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공개한 '세종대왕 어사 희우정 효령대군 방문(世宗大王御賜喜雨亭孝寧大君訪問)'이란 제목의 친필 고문서첩이 있다. 세종 즉위 7년인 1425년 4월 가뭄이 극심해 기우제를 지낸뒤 형 효령대군이 있던 합강정을 방문했을 때 쓴 글이라고.

독서토론, 공부는 광적으로 좋아한 임금이었지만, 의외로 시 짓기나 서예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30] 그래서인지 조선 왕들의 어필이 많이 남아 있지만 세종대왕의 어필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세종실록》에서도 '예기(藝技)에 정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원래 왕자들은 동물을 키우는 것이나 화초 가꾸기, 바둑과 같은 잡기에 흥미를 갖도록 교육받기 마련이었는데도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는게 신기하다. 《세종실록》 곳곳에는 '사슴이나 화초 기르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난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라고 언급하거나, '두시(당나라 두보의 시)와 같은 것은 풍월을 읊조리는 것이니 유자의 정식 학문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러 기록으로 보면 이런 '잡기'들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고는 있었으나 취미로 삼지는 않았던 듯하다.

덧붙여 뛰어난 추리력을 자랑했다.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 맹사성이 관리 여럿과 짜고 황희의 사위가 저지른 살인사건을 은폐, 조작한 말도 안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조작되어 올라온 상주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사건 정황에 의심을 느끼고 의금부에 명하여 진상을 규명해냈다.

4.10 과로

그러나, 지나치게 강한 학구열과 과로로 인해 젊은 시절부터 시력이 많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결정적인 타격은 자치통감훈의 편찬 때문이다. 세종 스스로가 이 일에 대해 굉장한 열의를 가지고 임했는데 자치통감을 읽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책의 양이 정말 장난이 아니다. 그런 책의 해설서를 만들어 냈으니까 말이다. 거기다가 완벽주의자 세종대왕은 조금의 문제점도 내버려 두지 않아 결국 거의 모든 업무를 본인의 관할 아래 추진했다. 결국 책의 편집과 자신의 안과질환을 맞바꾸게 되었고, 말년에는 거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완성한것은 세종이죽고 이어 즉위한 문종2년에서야 겨우 완성이된다.

세종실록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대왕이 소갈증(당뇨병)을 앓고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합병증 중 하나인 당뇨성 망막증등이 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결국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세자에게 섭정을 하게 했으며, 실제로 세종대왕 말년의 업적 대부분은 문종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신병주교수는 조선의 황금시대를 세종과 문종이 함께 만들었다고 본다. 때문에 세종대왕의 죽음의 원인도 과로사라고 생각된다. 할 수 있는 한 자기가 할 일은 모두 자기가 다 했기 때문. 심지어 죽음을 맞기 3일 전까지 거의다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직접 정무를 봤을 정도였는데 이때 "물 흐르듯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아파서 누워있는 동안 밀린 정무를 깨끗이 처리하고 다시 병석에 누웠다."고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괜히 과로사한 것이 아니다.

《세종실록》해당부분 솔직히 이 정도라면 성군 소리 들을 만 하다. 그 즈음 문종이 종기로 매우 위험한 상황이기도 했다. 《세종실록》기사

한편 세종은 하루 5시간의 수면을 제외하고는 업무를 쉬지 않았다고 한다.

5 특이한 기록들

5.1 세자빈 문제

안타깝게도 (맏)며느리 복이 별로 없었다.

1번째 세자빈 휘빈 김씨는 용모가 별로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때문인지 세자(문종)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했다. 이에 휘빈 김씨는 이상한 짓을 하다 쫓겨났다. 세자가 자신을 찾지 않으니까 남편의 신발을 태워 그 재를 자기 방 앞에 뿌리는 비방을 썼다. 미신을 억제하고 유교를 장려하던 나라의 궁중에서 그랬다는 것은 폐위감이었다. 거기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액체(…)를 닦은 손수건을 간직한다는 등 망칙한 짓들을 저질렀다.

2번째 세자빈인 순빈 봉씨의 경우에는 성격이 좋지 않아서 세자와 사이가 나빴고[31], 세자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러다가 후궁 권씨임신하자 위기감을 느껴 거짓 임신 소동을 일으켰다. 또한 외간 남자를 엿보고, 술을 마시고 폭언을 일삼기도 했다. 그리고 순빈 봉씨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유일한 레즈비언으로서, "시녀를 불러 남녀의 관계를 흉내내었다" 하여 발각되어 폐위되었다.

3번째인 세자빈 권씨는 잘못된 길을 가진 않았지만, 세손을 낳고 그 후유증으로 단명했고 결국은 며느리 복이 없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문종에게 남녀관계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지만,세자의 후궁으로 들어왔다가 다음 세자빈이 된 현덕왕후 때는 무난했다. 휘빈 김씨는 매우 잘생긴 세자[32]와 달리 박색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문종은 효동과 덕금이라는 궁녀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외모를 보고 뽑은 순빈 봉씨의 경우는 세자가 가장 싫어하는 성격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세자빈 간택과 거의 동시에 후궁을 세명이나 뽑았던 바람에 세자 부부가 친해질 시간이 없어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더군다나 미색이 빼어났다고 전해지는 후궁 승휘 홍씨를 사랑했던 탓에 순빈 봉씨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5.2 건강관리 부재

어진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인자하고 늘씬한 체형이 아니다!
고기를 무척 좋아한 데다가 공부를 심하게 즐기는 성정상 운동량이 부족했던 관계로 비만이었다. 20대 세자 시절부터 이미 당뇨병을 앓았던 기록이 있는 만큼 건강 상태는 젊었을 때부터 육류 위주의 식단과 부족한 운동량에서 비롯된 당뇨고혈압, 고지혈증 등 각종 성인병의 전조 증상을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말년에 시력을 잃은 이유도 당뇨병 합병증으로 추정되는 가히 종합병원. 수랏상에 고기반찬이 없으면 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라는 얘기가 나올정도로 고기 마니아. 오죽하면 태종의 유언도 '충녕이 고기를 좋아하니, 내 상을 치를 때는 고기를 먹게 할 것'이었다. 당시 3년상을 치를 때의 예법에 따라 상주에게 육식은 금지되었다.

임금이 허손병(虛損病)을 앓은 지 여러 달이 되매, 정부(政府)와 육조(六曹)에서 육찬(肉饌) 자시기를 청하여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듣지 아니하고, 병세는 점점 깊어 약이 효험이 없으니, 유정현 · 이원 · 정탁 등이 육조 당상(六曹堂上)과 대간(臺諫)과 더불어 청하기를, “평인(平人)들이 만사를 제폐(除廢)하고 상제(喪制)를 지켜 행하여도 3년 안에 병에 걸림을 오히려 면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전하께서 지존(至尊)하신 몸으로 소찬(素饌)만 진어(進御)하시고 만기(萬機)를 보살피시면서 3년의 상제(喪制)를 마치고자 하신다면, 병이 깊어 치료하기 어렵게 되시리니, 옛 사람이 말하기를, ‘죽은 이를 위하여 산 사람을 상해(傷害)하지 말라. ’고 하였으며, 또 ‘육즙(肉汁)으로서 구미(口味)를 돕는다. ’는 말도 있습니다. 이제 세자(世子)가 어린데, 전하께서 상경(常經)만 굳이 지키어, 병환이 깊어져서 정사(政事)를 보지 못하시게 된다면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의 복이 되지 않습니다. 태종 의 유교(遺敎)에도 또한 말씀하시기를, "주상은 고기가 아니면 진지를 들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 권도를 좇아 상제(喪制)를 마치라."[33]고 하셨으니, 이는 곧 전하께서 예법을 지키시고 지나치게 슬퍼하시므로, 앞으로 건강을 해하실까 미리 아시고 염려하셨사오니, 어찌 위로 조종(祖宗)의 영(靈)을 위로하시고, 아래로 신민(臣民)의 바람에 좇지 아니하십니까.”

세종 4년(1422) 11월 1일(갑인)

하지만 애초에 이 유언이 알려진게 세종이 3년상을 치르던 도중 고기를 안 먹어서 신하들이 건강을 해친다며 상소를 올릴때 인용한 거라, 안 먹을 땐 안 먹었다. 물론 아예 밥 자체를 먹지 않아 영양실조로 죽은 인종을 제외하면 3년상 중에 임금이 고기 안 먹는다고 신하들이 기겁하며 말리지는 않았다.

고기를 워낙 좋아했기에 임금이 초가집에서 살고 고기반찬을 금함으로써 하늘에 속죄해야 하는 가뭄 때에도 고기반찬을 거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라에 가뭄이 들었을 때 백성들이 굶주리는데 어찌 자기만 고기를 먹겠냐고 말했다는 위인전의 내용은 페이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설렁탕도 세종대왕이 선농단 제사를 올릴 때, 배가 고파서 제사 행사 중 하나인 친경[34]에 쓰인 밭가는 소를 보고 그 자리에서 잡아 만든 음식이라는 야사가 있을 정도.[35]

심지어, 큰아버지인 정종(당시는 공정왕)이 죽었을 때 상중이라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태종이 이를 보고 한 말은 압권. "주상이 젊었을 때부터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하였으니, 이제 초상을 당하여 소찬(素饌)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내가 어찌 어엿비(가엾게) 보지 않겠는가!" 《세종실록》 세종 2년(1420) 8월 29일 기록이다. 하지만, 상중에 차마 고기를 먹을 수 없었던 세종대왕은 고기를 끊은지 두달이 지나자, 몸에 진기가 빠져 허약해지는 병에 걸려서 신하들도 이제는 고기를 드시라고 주청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졸곡(卒哭) 뒤에도 오히려 소선(素膳)을 하시어, 성체(聖體)가 파리하고 검게 되어, 여러 신하들이 바라보고 놀랍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전하께서 평일에 육식이 아니시면 수라를 드시지 못하시는 터인데, 이제 소선(素膳)한 지도 이미 오래되어, 병환이 나실까 염려되나이다. 옛날 원경왕후(元敬王后) 초상에 태종 께서 육선(고기반찬)을 권하시면서 이르기를, ‘주상의 한 몸이 종사(宗社)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것이니,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 하셨나이다. 신 등의 오늘날 청하는 것도 또한 종사와 생민(生民)을 위하는 것입니다.”

세종 4년(1422) 9월 21일(을해)

(현대어 번역본) "애도 후에도 오히려 드시지 않아 몸이 여위시고 검게 된 모습을 보고 신하들 가운데 뵙고 놀라지 않은 사람들이 없으며 또 평소에도 고기없이는 식사를 하지 못하시는 분인데 드시지 않은 지가 오래되어 건강이 심히 염려됩니다. 옛적 원경왕후께서 돌아가신 날 태종께서 고기반찬을 권하시며 말씀하시길 '왕의 몸은 왕조의 평안과 관계되는 일이니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오늘 저희들의 청하는 이유 역시 왕조와 백성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종이 직접 세종대왕의 비만 체형을 지적한 적도 있었다.

"주상사냥을 좋아하지 않지만, 몸이 비중하니(=비만이니)가끔 밖에서 놀기도 해야 하므로 사냥을 함께 하면서 무사(武事)를 강습하려 한다."

세종 1년 10월 9일 기사.

다만 여기에는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의 생활이 심심하니 아들 핑계를 대면서 사냥을 즐기고 싶은 태종의 꼼수도 있기는 하다. 세종대왕의 이와 같은 고기 사랑은 본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었으나, 역사적인 성군이 고기만 먹는 편식의 대표주자였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들려서인지 오늘날에는 세종 하면 연상되는 단어가 훈민정음 다음에 고기가 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의외로 세종대왕은 그렇게 고도비만 수준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대왕이 김종서에게 이런 말을 한다.

"30살 전에 매던 띠(帶, 허리띠)가 모두 헐거워졌으니 이것으로 허리둘레가 줄어진 것을 알겠다. 과인의 나이가 33세인데 살쩍의 터럭 두 오리가 갑자기 세었으므로, 곁에 모시는 아이들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뽑고자 하기에, 내가 말리며 말하기를, '병이 많은 탓이니 뽑지 말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13년(1431년) 8월 18일.

젊었을 때 매던 허리띠가 헐거워져서 허리둘레가 줄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데다가 살쩍에 흰 터럭이 나 있다고 말하는 장면. 이걸 보면 재위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젊었을 때보다 살이 빠져 버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당뇨병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당뇨병의 진행에 따라 지방저장이 어려워지면서 체중의 감소가 나타날 수 있다. 또한 털 색깔의 변화, 손발이 건조하여 온천행을 자주 하게 된 기록 등을 볼 때 당뇨병의 심화를 의심할 수 있다.

게다가 식욕 뿐만 아니라 성욕도 왕성해서, 후궁 포함 7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보았다. 문제는 태어난 왕자들도 죄다 아버지를 닮아 능력이 매우 뛰어나 그들에게 국사를 맡기는 바람에 문종이 승하한 이후, 조선의 정치에 큰 파란을 부르게 됐단 거다.

그래서인지, 세종은 임질에도 걸렸었다. 이 임질이 성병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많은 말이 오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실록을 검토한 한의사들은 성병이 아니라고 한다. 다만 한의학에서 말하는 임(淋)은 현대 의학 기준으로는 요로결석, 혈뇨 등을 포함한 배뇨장애의 총칭이며, 크게 다섯가지의 오림(五淋)으로 나뉜다. 육식을 즐기고 비만했던 세종의 기록을 보면 고림(膏淋 : 소변이 쌀뜨물 같고 기름기가 많아 점성이 높은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임질에 대한 기록을 찾아봐도 증상이 요도에 발생할 질환에 가깝게 설명되고, 심지어 아버지의 그곳을 빨아 임질을 낫게 했다는 효자 이야기도 있다. 현대의학용어로 보면, 신경성 방광염일 가능성이 높다.

건강의학 교수와 박사들도 평가를 하면, 세종대왕은 육식 위주로 과식을 많이 하는 탓에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해 고생을 하였고, 옛날에는 적당한 진단처방도 없이 54세까지 살았던 것이 더 대단하다고 평가를 했을 정도로 건강관리에 신경을 안 썼다고 평가를 한다. 또한 왕들이 하던 운동이나 몸 단련을 싫어했고 앉아서 오랫동안 생활을 하니 무릎이나 다리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했으며, 젊을 적에 허리디스크도 있었을 거라고 추측하였고,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한 비뇨장애 또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스트레스 또한 한 몫도 했다. 세종대왕 또한 조선의 역대 국왕들처럼 스트레스에 자유로울 수는 없었고 꽤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이 된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맛있는 고기 음식만을 찾아도 전혀 이상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러한 '세종대왕은 사실 고기매니아'에 반대 의견도 나온다. 세종이 살찌고 대식가였던 것과 여러 병을 앓았던 것은 맞지만, 고기 마니아는 아니었다는 것. 자세한 것은 이곳을 참고[36].

5.3 평생직장

세종 13년 9월 10일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세종 25년 12월 4일 영의정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나 듣지 않다.

사실, 개요에서는 굉장히 점잖게 썼지만, 청 세종이나 세종대왕이나 둘 다 현대사회 기준으로 치면 손꼽히는 악덕 고용주였다!

황희, 조말생, 김종서 등 세종대왕 집권시기의 신하들은 중죄를 지은것이 아닌 이상, 은퇴도 마음대로 못 했던 듯 하다. 황희만 봐도 노환 등을 이유로(실제로 황희 정승은 매우 장수했다.) 사직을 여러번 요청했으나 세종대왕은 언제나 거부했다. 이징옥 등 다른 신하들도 여러 번 이런 저런 이유로 사직을 하겠다고 요청을 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그래서 황희는 세종 치세 내내 80이 넘은 나이에도 정승직을 계속 맡아야만 했다.

물론 세종 치세 때는 신하들이 세종을 따라 강도높은 업무를 계속 해야 했으므로 후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은퇴하려는 걸 세종이 알고 막은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게다가 후대를 위해 막상 당시대에 과거로 뽑은 신하들은 집현전에서 뺑뺑이를 돌리는 바람에 나이많은 중신들이 생고생을 해야 했다. 일이 힘들기는 힘들었는지 3년상 치른다고 사직서 내는 게 3년상 핑계로 도망치려고 그러는 걸로 밖에 안 보인다. 참고로 3년상 치르다 줄초상 치르는 사례도 꽤 많았다.

신하들도 세종이 세자에게 업무를 이관하는 것을 막으면서 받은만큼 보답했다.# 물론 태종의 예처럼 조선왕조에서 임금이 대리청정이나 양위를 하는 척 쇼하며 왕권의 재확인을 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기 전에는 대리나 양위를 하겠다고 하면 신하들이 "아니되옵니다! 전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하면서 거둬달라고 고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특이한 경우는 아니였다. 그런데 이렇게 아픈 시기에 세종대왕이 직접 만든 것이 바로 훈민정음이다.

그리고 역대 조선시대 조정을 통틀어 세종 때만큼 개성이 강하고 튀는 신하들이 많았던 시절도 드물다. 고위관료들부터 보면, 온화한 듯 공사 구분 못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대국을 보는 능력도 뛰어났으며 자기주장 강한 무서운 정승이었던 황희, 유들유들한 성격으로 황희같은 무서운 영감님들 진정시키고 조율하던 맹사성, 꼬장꼬장하고 뭐 하나 꼬투리 잡아서 아랫사람들 신랄하게 갈궈대는 허조, 부패한 신하였지만 정무처리만큼은 뛰어났던 조말생, 평생 군인으로 살았지만 아랫사람들을 잘 보듬었던 덕장 최윤덕 등이 있다.

또 과학기술관련 업무처리는 독보적이었으나 정작 일반행정능력은 미숙했던 정인지, 허조의 뒤를 이을 만한 인물이었던 최만리, 키가 작고 무예는 서툴렀지만 담력과 강단이 뛰어나 북방 개척에서 맹활약한 김종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열혈한 이징옥, 음악 분야에서는 독보적이었으나 자기관리능력은 부족했던 박연이나 관노에서 출세한 장영실, 이공계 군인이었던 이천이 있었으며 세종 후반기의 집현전 학사들도 의외로 장난꾸러기였던 성삼문, 지독한 기회주의자였으나 학자로서의 능력만큼은 탁월했던 신숙주, 시험관에게 막말을 할 정도로 패기가 흘러넘쳤던 최항 등. 세종 때의 인사들을 보면 다 굉장히 개성이 강한 인물들이 많다. 이렇게 캐릭터가 분명하고 자기주장이 강한(개중에는 자기와 코드가 맞지 않는) 신하들을 데리고 국정을 운영하여 조선을 발전시킨 세종대왕의 인재발탁 감각과 용인술은 오늘날에 봐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5.4 자손

세종이 수립한 기록에서 또 다른 특이한 부분은 조선왕조 역사상 정실 왕비과 후궁 소생을 막론하고 아들을 많이 낳은 기록(18남)(덧붙이자면 자녀복 많은 조선왕조 군주 랭킹 5위다.)과 정실과의 사이에서 두번째로 자식을 많이 낳았던 기록(10명, 8남 2녀)이다. 중전 소생이 많은 기록으로는 태조와 태종이 공동 1위(11명)지만, 사실 태조는 신의왕후 한씨 소생 8명(6남 2녀)과,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3명(2남 1녀)을 합친 것이므로, 정실부인 한 사람만 놓고 보면 세종과 소헌왕후가 2위다. 1위는 아버지인 태종. 사이 안좋은 원경왕후와 7남4녀를 낳았다. 다만 양녕대군 위의 세 아들이 요절해서...

특히 소헌왕후와의 금슬이 좋았는데, 소헌왕후의 사후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을 시켜서 편찬한 것이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불경 언해서 석보상절(釋譜詳節)이다. 그리고 세종대왕이 그 석보상절을 읽고나서 감명받아 직접 쓴 것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다.[37]

또한 금슬이 좋았기 때문에, 후궁들을 들이기 시작한 시기가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고 한다. 아마 앞에서 말한 태종이 상왕일 때 장인 심온을 사사했던 과거가 미안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세종에 관한 후궁기록은 세종 4년에 태종이 간택령을 내리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 후 태종의 죽음으로 인한 장례 등으로 실제 후궁이 들어온 것은 세종 6년이니 상당히 늦은 편이긴 하다. 게다가 후궁소생의 첫 아들은 세종 7년에 태어났다. 2008년에 방영된 사극 대왕 세종의 인기와 관련해서 나오기 시작한 세종 관련 역사소설들은 대부분 이 기록에 따르고 있다.

그 외 자세한 사항은 세종대왕/가족관계 문서를 참조.

5.5 쿠데타와의 악연

재미있는 것은 세종대왕의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모두 쿠데타의 주동자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종대왕은 자신의 선조들이 일으킨 쿠데타의 수혜자인 동시에, 자기 아들이 일으킨 쿠데타의 피해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쿠데타를 기반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장손을 잃었으니... 특히나 장손을 엄청나게 아껴서 5살 때 스승을 두고 공부를 시켰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할 정도.

6 사건

6.1 한성 대화재

세종 8년 2월(1426년)에 한성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세종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훌륭하게 후속 대책을 시행하긴 했지만 이 화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조선 왕조 500여년 동안,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이 아닌 평시에 발생한 재해 중 한성을 가장 큰 규모로 파괴한 재난이었다.

시작은 1426년 2월 15일의 화재였다. 이날 경시서(京市署 한성의 시전을 관리하는 관청)와 북쪽의 행랑 106간, 한성부 중부(中部)의 인가 1630호, 남부의 350호, 동부의 190호가 불에 탔다. 당시 세종과 세자 문종은 군사 훈련인 강무를 위해 강원도 횡성에 있었으므로 중전인 소헌왕후가 대응을 맡았는데, 그것도 금성대군[38]을 임신한 상태로 화재 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했다. 또한 다음날인 16일에는 전옥서(감옥과 죄수들을 관리하는 관청)와 행랑 8간, 민가 200여 호가 불에 탔으며 보신각 종루까지 불에 탈 뻔했으나 간신히 진압했다. 세종은 16일에 급보를 접하고19일에 한성에 돌아와서 대응을 지휘했다. 큰 화재는 잡혔지만 소소한 화재가 계속 발생하고 이를 틈타 도적들이 기승을 부리는 등 재난이 끝나지 않자 세종은 계속해서 대책을 수립했다. 부상자의 치료와 이재민에 대한 식량의 배급 등 1차적인 대책을 수립한 한편, 화재 예방을 담당하는 금화도감을 설치하고 가옥의 개량 및 지나치게 좁은 도로들을 정비해 큰 화재가 더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7 해동요순, 그에 대한 비판?

세종의 업적도 정말 찬란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그 업적 뒤에는 어두운 면도 있기 마련인 것은 사실이다.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역사적 사실들을 가지고 합당한 비판을 해도 분탕종자라며 비난당했던과는 달리 요즘은 다소 자유롭게 비판이 가능해진 편이다. 다만 "성군으로 포장된 세종이 아닌 인간 세종을 찾는다"는 명분 아래 부당한 비판이 존재하니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성군에 가장 가까운 것은 맞다., 포장이 아니다. 오히려 업적으로보면 광개토대왕보다 더 다양한 업적을 남긴 군주이다.

사실 세종에 대한 비판점으로 제기되는 정책들은 세종이 15세기, 전근대 왕정 시대의 군주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요소가 많다.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성군'이라는 이미지에 안 맞는 몇몇 행적 때문에 확 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행적도 조선 초기 당시의 상식과 관점에서는 별로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잊은 채 세종을 다룬 각종 미디어매체에서 세종을 15세기 왕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 필요한 이상적인 지도자를 투영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정작 세종의 진면목을 제대로 묘사한 미디어매체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처럼 조선왕조에 현대 사회를 투영한 채로 바라보다 보면 아래와 같은 반발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세종이 15세기 군주의 모습이라기엔 부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혁신적 면모나 시대를 앞서나간 발상의 정책을 실시한 것도 사실이지만, 세종은 근본적으로 현대 민주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15세기 조선의 왕이었고 그 시대의 요구과 당시 조선에 필요했던 정책들을 입안, 실행하는 데에 충실했던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대나 지금이나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다만 어떤 의미에서는 '성군'이라는 수식어가 세종의 진정한 장점과 리더십을 파악하고 그를 제대로 평가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 셈.

7.1 왕자들의 활동

세종은 집권 중반부부터 세자인 문종 외에도 수양대군안평대군, 금성대군, 광평대군 등 왕자들이 대외 활동을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고, 각종 연구 및 정책 수행을 맡겼다. 위에 언급된 세종대왕의 업적에는 왕자들의 이런 조력도 상당히 들어간 편이다. 아버지인 세종처럼 모두들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세종대왕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왕자들의 정치적 입지도 비정상적으로 커지기 시작했으며 왕자들 간의 대립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왕자들 간의 대립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고 각종 안전장치를 마련한 아버지 태종과는 달리, 세종은 이런 위험성에 대해 둔감한 편이었고, 신하들이 이 점을 지적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경계하지 않았다. 세자 문종과 세손인 단종의 정통성[39]이 워낙 확실했기 때문에 안심한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세종의 생각과는 달리 문종이 너무 과로한 나머지 요절해버렸고, 세자빈문제로 단종의 나이도 어린 것 등이 방아쇠가 되어 화를 불러왔다. 다른 왕자들, 특히 수양대군의 야심은 그 도를 넘었고 그 결과가 바로 계유정난.

7.2 대명사대외교

세종대왕은 지금에 와서야 훈민정음 덕분에 자주적인 왕으로 그려지지만, 시대가 시대다 보니 세종대왕 역시 사대주의를 표방했다. 심지어 사신 접대에 과중한 비용이 들어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상소에 대국을 섬기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백성의 곤궁함은 가벼운 일이다라고 답한 사례가 있긴 하다. 그의 통치기간 중 몇몇 법들이 "중국이 하니깐"이라는 이유로 통과된 경우도 있곤 했었다.

당시의 명나라는 활발한 정복전쟁 중이었고, 명은 당연하게도 조선에 대해 엄청난 공물을 요구했다. 태종 때부터 쇄도한 공물은 세종 때도 이어졌고, 세종은 그 많은 군수품과 공물을 대기 위해서는 당연히 백성들의 고혈을 짜낼 수밖에는 없었다. 명은 공물 뿐 아니라 말이나 환관, 심지어는 처녀까지 요구했고, 그 때문에 딸 있는 집안은 딸을 숨기거나 나이를 속이기에 바빠서 매우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 처녀들은 명나라 황실에 들어가기 위해서 선발되었는데도 기록들을 뒤져보면 당연히 기피했던 것 같다. 기록에 명 사신 앞에서 대놓고 병신 흉내를 내기까지 해서 명 사신이 벙쪘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왕이 고려에 들어가기 싫다면서 왕위를 서슴없이 내던지거나 뭇 사람들이 원나라 황실에 줄을 못대어 안달이었던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40] 사냥을 좋아하던 명의 선덕제는 조선의 해동청과 큰 개, 스라소니를 원했고, 조선의 모든 지방관들의 1차목표는 바로 해동청, 큰 개, 스라소니의 포획이었다. 당시 조선 8도가 선덕제의 요구로 인해 이리저리 들쑤시고 시끄러웠다고 하니, 백성들의 사정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명 사신접대에 대한 과도한 지출도 대단한 문제였다. 일단 사신이 북경에서 출발하는 의주에서 한번 잔치를 베풀고, 평양에 도착하면 또 잔치, 황주에 도착하면 또 잔치,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영접사를 보내 잔치를 베풀고, 한양에 도달하면 문무백관과 왕이 한 데 모여 접견한 후, 태평관에서 하마연이라고 잔치, 그 다음날도 익일연이라 잔치, 왕의 특별잔치, 종친의 잔치, 의정부가 마련한 잔치 등...그리고 돌아가는 길에도 송별연을 벌여 잔치, 길목인 개성-황주-안주-의주 이렇게 또 잔치를 베풀었다. 당연히 그 잔치비용은 모두 백성들에게서 나왔다. 때문에 길목인 황해도 지방은 후유증이 상당했고, 도적떼가 창궐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등장한다.

그러나 세종 시대는 명나라와의 조공무역이 정상화 되는 시대이기도 했다. 일단 명에 보내는 공물이나 예물 중에서 금과 은을 제외하게 된 것이 세종대왕 때부터 였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금이나 은은 화폐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이를 공물로 보내는 것은 경제에 심한 부담을 미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비록 로비를 통해 조선출신 환관들의 도움을 받기는 했으나, "옛날에는 조금 나왔는데 이미 고갈이 되었다"고 뻥을 쳐서 조공 항목에서 금은을 삭제한 것은 큰 공적으로 보는 것이 옳다.[41] 더욱이 세종 후기에는 명나라 사신에 대한 개인 선물(=로비) 역시 황제의 명으로 금지되었고, 환관 출신 사신도 급격히 줄어들게 되어 여러모로 문제가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대명 사대외교는 태조 이래 조선의 국가 이념이자 국가 전략이었고, 특히 태종 이후로는 더 굳어졌다. 영락제조공 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세종 조선의 조공 정책은 조선에게 엄청난 무역흑자를 가져다 주었다. 물론 당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지 않은게 아쉬운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세종대의 명나라 황제는 바로 그 영락제. 고비사막을 넘어 친정하고 몽골베트남까지 원정을 했으며, 이전까지 원나라 때를 제외하면 중국에게 '바다 멀리 골치아픈 놈들이 있었지' 수준이었던 일본에까지 손을 뻗쳤고, 정화를 파견해 인도양까지 진출한 먼치킨급 인물이었다. 따라서 주변국이 개기면 바로 짓밟아버리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조선이 뻘짓을 했다가는 명나라가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 《태종실록》을 보면 명나라의 남월(베트남) 정벌을 보고 식겁한 장면이 나오고 세종 대에 들어서 결국 독립한 베트남을 보고 기뻐하면서 대놓고 황제를 신하들과 디스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까짓거 한판 붙었으면 좋았겠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또한 이러한 세종의 지성사대론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상국'인 명에 대한 지극한 사대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신료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이다. 즉, "내가 이렇게 명나라를 잘 섬기니 니들도 이를 본받아 나를 극진히 섬겨라"라는 식의 메시지라는 것. 이런 모습은 조선왕조 대대로 이어진다.

흥미롭게도 명나라에서도 태평성대였던 조선을 어느 정도 경계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다. 명나라 영락제 시절에 일어난 어여의 난과 관련하여 "조선의 왕이 어진 이로 번창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알려지는 것은 좋지 않다."하여 관련자들의 출국을 금한 사실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사실 여말선초에는 명나라와 사이가 험악하기도 했었고, "혹시, 조선이 쳐들어오지 않을까?"하고 주원장이 경계했던 것을 보면...

무엇보다 세종은 지극히 현실주의자였으며, 실용주의자임과 동시에 조선주의자였다. 정말 열렬한 사대주의자였으면 《훈민정음》이나 《칠정산》을 만들 생각도 없었을 터, 비록 당대 명나라가 그 영락제 치세의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때라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내해야 했을 뿐[42],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 내내 조선의 정체성과 실리주의를 지속히 강조했으며, 이 태도는 문종과 세조(조선)에게도 이어진다.[43]

또한 당시 사대부들도 명나라에 아직까지 남아 있던 순장 풍습을 "아무리 중국의 풍습이라지만 이뭐병이네"라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면도 있다. 당시 원칙주의자로 유명한 꼬장의 대가 허조가 대표적이었다. 영락제가 죽고 그의 아들 홍희제 즉위하자 영락제를 위해 영락제가 총애하던 조선인 궁녀 한씨를 비롯한 궁녀 15인을 순장했단 말을 듣고는 "허수아비라도 순장하면 자손이 끊어진다는[44] 말은 어린아이라도 다 아는데 황제의 무덤에 궁녀 15인을 순장했다니 중국의 일이라도 본받을 것이 못되옵니다."라고 강력히 비판했다.[45] 따지고 보면 실제로 명나라엔 원나라의 "오랑캐"스러운 풍습이 많이 남아있기도 했고 말이다.

분명한 것은 세종 후기 이후 조선은 조공무역을 통해서 엄청난 무역흑자라는 실리를 취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초중기 백성들의 고통도 분명 있었지만 결국 조선은 이러한 조공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냈고, 그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 바로 세종대왕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7.3 사민 정책

4군 6진 개척 당시, 삼남 이남 지방의 백성들을 강제 이주 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했고, 강제로 징발된 백성들은 북쪽으로 가는걸 회피하기 위해 심지어 자해까지 벌였지만, 세종은 자해한 백성들까지 강제로 북쪽으로 올려보냈고, 그 과정에서 돈있는 사람들은 자동으로 빠지게 되었다.

이주한 백성들은 그 날로 수천 명이 죽었다. 추운 날씨도 날씨고, 야인들도 야인들이지만, 중국사신들에 대한 접대비용으로 수탈당했고, 흉년이 겹치고 역병까지 돌아 또 수천명이 죽었다. 세종이 개척한 4군은 세조 이래 포기되어 폐4군이라 불릴 지경이었다. 당시 그 때문에 세종대왕에 대한 원성이 아주 높았다고 한다.

그런데 원성은 높았지만, 당시 변방의 사정상 사실 어쩔 수 없었다. 세종대왕은 북방 개척을 위해 고려시대 동북 9성과 관련한 역사를 깊이 연구했고, '산맥'을 방어선으로 삼으려 했던 동북 9성의 한계를 꿰뚫어 보았다. 세종은 안정된 영토 확보를 위해서는 압록강두만강 유역까지 치고 올라가 그 지역의 인구를 늘려 야인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그만큼 북방 안정이 시급했기에, 세종대왕 본인도 백성들의 원망을 감수한 것이다. 당시 사민정책이 지나치다는 신하들의 진언에 본인이 직접 "임금이 백성의 원망을 피해서야 되겠느냐!" 라고 버럭했을 정도로 그 집념은 대단했다. 실제로 4군은 비록 실패했지만 6진은 세종대에 성공했다.[46] 비록, 엄청난 고생과 희생을 들여서 얻어낸, 넓이도 작고 생산성도 떨어지는 땅이기는 하지만, 세종대왕은 한반도를 완전하게 조선의 영토로 만들었다.

7.4 부민고소금지법(수령 고소 금지법)

태종 재위기간인 1410년에 실시되었다가 반발이 심해 일시 폐지되었던 수령고소금지법은 세종 때 다시 시행된다.

이 법을 제안한 사람은 허조로 태종~세종대 최고의 예론 전문가로 태종 대부터 중용된 인물이다. 청렴강직한 인물로 조선의 예학 정립에 큰 공을 세웠으나 당시 신하들의 '군기반장' 역할을 수행하여 젊은 신하들은 모두 그를 싫어했다고 한다. 대중들에게 퍼진 이야기는 허조가 눈물 탄식하면서 "종이 상전을 고발하면 무조건 교형에 처하고 백성이 수령을 고발하면, 종사에 관계된 일이나 살인한 일이 아닐 경우 곤장 100대, 유형 3000리에 처하도록 하라."라고 청하자 세종이 들어 주었고 세조가 폐지할 때까지 줄곧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47]에 자세히 나오는데,

예조판서 허조 등이 상계했다.

'......전조(고려)의 풍속은 이 뜻을 받아들여, 백성으로 수령을 능멸하거나 반항하면 반드시 이를 몰아냈고, 심지어는 그 집까지 물웅덩이로 만들고야 만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이제부터는 속관이나 아전의 무리로서, 그 관의 관리와 품관들을 고발하거나, 아전이나 백성으로 그 고을의 수령과 감사를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비록 죄의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종사의 안위에 관한 것이거나, 불법으로 살인한 것이 아니라면, 위에 있는 사람은 논할 것도 없고, 만약에 사실이 아니라면, 아래에 있는 자의 받는 죄는 보통 사람의 죄보다 더 중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현대에선 이 법안을 들어서 '세종은 흔히 말하는 애민군주가 아니었다'라는 비판도 있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피해주는걸 용납치 않은 전근대 유교 이데올로기의 소산이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조선은 모든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한 최초의 정권이다. 고려까지도 지방은 그 지역의 토호와 향리가 대를 이어서 계속 통치를 하고 있었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현은 물론이고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도 향리가 군사, 행정실무를 수행하는 읍사(邑司)가 따로 있을 정도로 지방세력의 권한이 강했다. 고려가 안정적일때는 적은 비용으로 쉽게 지역여론을 장악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었지만 무신정권이후 중앙정계가 흔들리자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했다. 처음부터 국왕 대리인인 지방관의 권한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정책이 지방에 일률적으로 적용되기 힘들었다. 지역마다 제도가 다르니 조세는 형평성을 잃었으며 권문세족의 침탈에도 취약했다. 급기야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가의 노비가 수령을 깔아보고 심지어 폭행하는 사례가 벌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향리와 토호들은 어디까지나 해당 지역안에서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이 대부분이라 몽골과 왜구와 침입으로 유민이 급격히 늘어난 고려 후기에는 한계를 여실히 나타내며 쇠락해갔다.

조선은 이러한 전 왕조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중앙집권화와 수령의 권한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가 이 법이었다.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에게 불복하고 중앙정부의 시책에 반하는 행동은 용납치 않겠다는게 그 진짜 뜻 이었다. 물론 부작용이 없을 순 없겠지만 조선 정부는 무신정권 이후 2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지방행정 확보가 무력화된 상황을 극복하려면 이 정도 법안이 필요하며, 그로인한 효과가 폐단보다 크다고 보았다. 강화된 권위를 가지고 지방에 파견된 수령들은 중앙정부에서 부여받은 행정력을 바탕으로 각 지역에 대한 갖가지 정보를 축적했다. 이는 공법을 비롯한 세종대의 여러 국가시책에 고스란히 반영되었고 조선의 재정을 충실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괜히 세종실록에만 세종실록지리지가 붙어있는게 아니다.

무엇보다 이 법이 있다고 고소를 안한게 아니다. 법이 있건말건 무시하고 고소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1429년에는 고소가 끊이지 않는 수령은 장100대에 처하는 법을 제정했다. 부민고소금지법을 폐지했던 세조조차 별것 아닌 일이나 허위로 신고하는 폐단이 너무 심해져서 도로 부활시켜야 했다. 세조 때 잠시 폐지된 원인도 이 법이 원래 폐단이 심한 법이어서가 아니라 쿠데타 과정에서 막강한 특권층을 형성시키고 이들을 쳐내지도 않은 세조의 통치탓에 특권층과 결탁한 이들이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수령고소금지법의 폐단을 심화시켰기 때문이었다.[48]

또 조선에서 수령의 수탈이 심해진건 어디까지다 매관매직이 일상화되고 모든 견제 수단이 사라져 수령권이 크게 강력해진 조선 후기의 일이다.[49] 이렇게 중앙집권화와 지방통제를 지속적으로 실시한 결과 임진왜란 때 수도가 점령당하는 초유의 사태 때도 버텨준 막강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반격을 꾀할수 있었다.

7.5 화폐개혁

비판받아야 할 시책이라면, 이미 자기 아버지인 태종이 하려다가 처참히 발렸던 화폐개혁 시도였다. 세종은 중국의(특히 당나라) 화폐제도를 모방하여 조선에도 화폐제도를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이미 건국 초기 개혁주의자들에 의해 고려 말에 쓰이던 화폐인 저화(지금의 지폐와 비슷한 것) 가 재도입되어 사용되고 있었지만 널리 통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태종이 열심히 통용하려고 빡세게 나갔지만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에 새로운 대책으로 중국에서 사용하듯이 금속을 이용한 동전형식의 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하였다. 그리고 모든 상거래에 더 이상 물물교환을 금하고 화폐를 통한 거래만을 할 것을 명령하게 되었다.

세종대왕은 열악한 조선의 화폐경제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화폐정책을 수립하고 동전과 저화를 대대적으로 발행하는데, 공업과 상업을 천시하는 농본주의 조선에서 화폐경제체제가 그리 쉽게 정착될리가 없었다. 백성들은 늘 물물교환이나 다른 교환수단을 사용했고, 정부는 강제성을 띄며 탄압하기 시작했다. 물물교환을 하는 백성들은 가산을 몰수당하고 거기에 벌금형을 때리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며, 벌금을 때우기 위해 사채를 쓰거나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윗사람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갔으나, 당연히 백성들이 재수 없으면 골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조선은 상황이 달라 화폐개혁은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첫번째는 화폐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의 역량부족이었다. 조선은 전 왕조에 걸쳐 고질적인 재정부족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50] 이는 국가 자체의 영세적인 측면도 있지만 조선왕조가 왕도정치를 표방하면서 정부 재정확충에 그다지 열을 올리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게다가 육로교통의 미발달로 거둔 세미를 전부 조운선을 통해 강이나 바다로 운반했는데, 종종 배가 침몰하여 애써 모은 세미가 홀랑 날아가버리는 경우도 많았으며 기껏 운반해온 쌀도 습기에 젖어 불어버리거나 썩어버리기 일수였다. 이러니 충분한 화폐를 제조할만한 비용이 마련 될 리가 없었다. 비용뿐만 아니라 동전제조에 사용할 재료 마련도 힘들었다. 전국의 금속이란 금속을 모아도 모아도 모자라 일본에 구리를 수입해오고, 그것도 모자라 결국 동네북인 을 또 두들겨 까지 다 뺏어와 녹여야 했다. 이 정도면 말 다한셈.

두번째는 조선의 교역경제 미발달이었다. 당나라 때를 비롯해 중국은 막대한 물자를 생산하고 유통했으며 주변국과 활발한 교류를 벌였다. 때문에 시중에 돌아다니는 상품의 양이 엄청났으므로 자연스럽게 화폐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도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협소한 영토와 그나마도 산지가 많은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풍부한 물자가 양성되지도, 그리고 그 물자가 유통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많은 물자를 먼 거리로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화폐의 필요성도 별달리 생기지 않았다. 다만 조선후기에 오면서 상업과공업이 발전하면서 상평통보같은 화폐가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운반수단은 딱히 크게 발달되지는 못할 듯 하다. 박제가북학의에서도 운반수단대해 기록하고 있던 수레같은 경우 쓰지 못하고 있고, 배에 대한 것도 낙후 되었있다고 한다.(몰론 조선은 배 만든 기술이 많이 발전된 나라이지만 주로 군사적으로 집중되었지 운반수단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국내 교역이 미약한 상태에서 해외와의 교역이라도 활발하면 또 모르겠는데, 한반도의 국가들은 시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대외교역이 꾸준히 쇠퇴하는 국가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물론 이 주장도 논란의 여지는 분명히 있다) 고려시대부터 사상들의 교역이 쇠퇴하고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해상무역 자체가 아예 소멸하고 육로무역도 중국으로 파견되는 사신단을 통한 제한적인 무역이나 국경에 설치된 작은 교역소를 통한 교역에 불과했는데, 이것도 물물교환의 형식이었다. 중국과의 조공무역은 조선이 가져간 물건을 진상하고 중국 황제가 이에 대한 답례물건을 하사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여진족이나 일본과의 교역은 무역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활동에 가까워 제대로 된 거래가 형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의 화폐 역시 별달리 유입되지 않았다. 다만 당시의 교역구조가 지금의 세계시장과 같은 구조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명나라 역시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으며, 명나라의 구리화폐 역시 부침을 거듭했다. 결국 문제는 구리화폐라는 속성이었다.

세번째는 조선이 가지고 있는 농업위주의 자급자족 경제구조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사농공상의 사고방식이 조선에 널리 퍼져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법적으로 양인과 천민의 구별만 있었으므로 이런 신분구별이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고려시대때부터 도입된 유교에 의해 위의 신분구별은 어느정도 구체화 되어 있었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이러한 신분구별은 조선 중기 무렵 절정을 이루었으며 조선 후기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때문에 모든 경제구조가 농업을 위주로 돌아갔다. 이러다보니 쌀이 자연스럽게 화폐의 위치를 대행하게 되었고 상업이나 공업이 위축되어 '필요한 물건은 알아서 만들고 정 모자라는 물건은 쌀이랑 좀 교환해서 사오자'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사실, 화폐경제가 상당히 정착된 조선 후기나 구한말, 일제시대, 심지어는 한국전쟁 이전까지도 농촌에서는 '쌀 팔아서 돈 사온다'는 표현이 사용되고, 쌀의 양이나 쌀을 수확할 수 있는 논의 면적이 재산과 상품의 교환가치를 표현하는 척도로 사용될 정도였다.

이처럼 화폐개혁이 지지부진해지자, 마음이 급해진 세종대왕과 신하들은 점차 강력한 법규를 제정하여 동전의 유통을 강제하려 들었고 때문에 관아와 민중들간의 충돌이 점차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전국 곳곳에서 물물교환식으로 물건을 사고팔던 민중들이 적발되어 처벌받는 일이 발생했고 이에 대해 민중들의 반발역시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쌀 한 됫박으로 물물교환을 하던 사람이 관리에게 적발되어 곤장 100대를 맞고 수군으로 끌려가다 자결하고 아내는 목을 메는 일이 발생했으며 종로 시전일대가 방화로 쑥대밭이 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마침내, 한양 성안이 폭동전야로까지 흉흉해지자 세종대왕은 더 이상의 화폐개혁을 포기하였고, 결국 이전의 물물교환 경제로 회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물론이다. 애초에 전국을 다 털어도 한양을 제외하면 변변한 시장조차 없는 나라에서 무리한 화폐도입이 잘 될리가 없었다. 조선은 명종조부터 장시가 등장, 활발해진 이후에 은화가 들어오면서 시장이 활성화 되고, 전국에 장시가 들어서고 나서야 화폐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은 시대를 한 200년 정도 앞지른 개혁을 시도하려다 실패한 셈이다. 아무리 이상이 크고 높아도 현실의 벽은 엄연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 다만 이 화폐개혁의 실패이후 방치 한것으로 인해 선조때 전쟁이 발생하자 동맹으로 참전한 명나라 군대가 화폐를 사용하지못하자 조선을 약탈하는 개판을 쳐놓는 결과를 불러오긴했다.

광해군수미법을 시작으로 공행의 등장, 장시, 보부상과 상설시장, 객주여각등의 발달들이 계속되어 영조, 정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경제가 가능했다. 물론 그 사이에 최악의 대기근이었던 경신대기근과 같은 퇴보기도 있었다.[51]

7.6 부정관료를 비호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점으로, 세종대왕은 이순몽(李順蒙 1386~1449)이라는 관리를 감싸고 돌았다. 태종 시절에 병조 판서를 지낸 이응의 아들 이순몽은 뇌물 수수와 하급 관리 구타, 남의 첩과 몰래 간통, 기생과 냇물에서 검열삭제하며 고성방가, 술에 취해서 왕의 거동길에 호상(胡床)에 걸터앉는 국왕 모독죄 등을 범했는데, 그 때마다 세종은 감싸고 돌면서 용서하거나 파직 정도로 무마했다가 다시 벼슬을 주어 불러들였다. 실록을 그대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순몽의 사람 됨이 재물을 탐내고 여색을 좋아하며, 자산(資産)이 아주 많아서 권문(權門)·요로(要路)에 뇌물을 주곤 하여 세상에서 중시(重視)를 받게 되니, 군현(郡縣)의 수령들과 연변(沿邊)의 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이 그의 문객(門客) 중에서 많이 나왔다. 수령과 만호가 장차 부임할 때에는 반드시 물품을 증여하였으며, 임소(任所)에 부임하게 되면 순몽이 사람을 보내어 곧 그 주선해 준 댓가를 받는 것이 상인(商人)의 장사하듯 하니, 당시의 여론이 그를 더럽게 여기었다. 또 영응 대군(永膺大君)에게 연줄을 대어 수양(收養)되었으므로, 영흥(永興)의 생신(生辰)을 당할 때마다 진기한 보물을 많이 올리니, 임금이 영흥을 매우 사랑하기 때문에 순몽을 총우(寵遇)하여 조정의 신하가 그에 미치는 이가 없었다. 총애를 믿고 교만하고 횡포하여 비록 여러번 죄악을 범하였으나, 임금이 번번이 관후하게 용서하니 더욱 꺼리는 데가 없었다. 사람들이 다 한스럽게 여기었다.

세종 105권, 26년(1444 갑자 / 명 정통(正統) 9년) 8월 22일(무진) 2번째 기사

세종대왕이 모든 일을 공명정대하게 완벽한 정치를 했다고 믿는 사람에겐 충격적인 기록이다.

이것은 세종의 정치론과 관련된 것으로, 도덕이나 비리등에 연연하지 않고 능력 위주로 선발하는 그의 인사철학때문이었다. 만일 요즘같은 때였다면 정부의 최고 권력자라 해도 인사청문에 문제가 있는 경우 대놓고 비호하는 일은 상상도 못하지만, 그때는 태종 이후 왕의 권력이 최고인 시기니까 뭐....

7.7 노비종모법

세종 14년(1432년)에 제정된 법. 양인(양반+상민) 아버지와 천인(천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면, 설사 아버지가 양반이라 해도 노비가 된다는 법. [52]

세종이 만든 이 법 때문에 조선의 노비 인구가 50% 전후로 늘어났게 되었고, 이는 세종의 과실이라는 얘기도 있으나, 이는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것이다. 미국 한국학의 대부로 평가받는 제임스 팔레의 저서, Confucian Statecraft and Korean Institutions에 따르면 노비인구 증가의 이유는 종모법 때문만이 아닌 납세와 군역, 기타 잡역을 피해 16세기쯤부터 양인 농민들이 양반 가문에 자발적으로 몸을 예속[53]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노비 인구가 증가하는 현상을 불러왔다.[54] 또한, 16세기 이후부터 여러차례 치룬 전쟁과 생활 수준 하락의 이유로, 양인들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가족을 노비로 파는 경우가 빈번해져 노비 인구를 키우는데 일조했다. 즉 세종의 노비 종모법은 노비 인구를 유지하는데에 있었지 폭발적으로 늘리는데 있던 법이 아니기 때문에 세종이 노비 인구의 흑막이라는 투의 소리는 심한 과장이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조선시대때 여성의 지위는 아주 낮았기 때문에, 여자 노비의 경우 양반 주인의 손쉬운 성적대상이었으며, 굳이 피임을 하지도 않았기에, 이렇게 태어나게 되는 자식은 노비가 되는고로, 노비 종모법상 노비의 인구는 필연적으로 이전보다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이 주장의 문제는 객관적인 자료로 뒷받침하지 못하고 단순히 감성적으로 노비 종모법을 바라보기 때문에 나온 시각이다.

애초에 위의 반박에서 주장하는것처럼 조선 여성의 지위가 낮았다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데, 조선시대 여성의 지위는 동시대 타국가들에 비해 특별히 낮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의 역사가 500년이란 긴 역사이다보니 여성의 지위는 시대별로 변화한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이 항목이 다루는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만 해도 조선 여성의 지위는 결코 낮지 않았다. 정지영 교수가 박사논문에서 밝히길, 조선 중기 시대별(1678년, 1717년, 1759년, 1789년) 단성의 호적대장을 연구한 결과 1678년까지만 해도 11.1%가 여성호주(戶主)[55]였고 남편이 죽으면 장성한 아들이 있더라도 여성이 호주가 되는 경우가 절대다수(96%)였다. 더욱이 가부장적 질서가 완전히 정착한 18세기 후반까지도 여성호주가 6.7% 씩이나 될 정도였다. 또 17세기 중반까지 신분별 수절과부 비율 연구한 결과, 양반이 30%, 양인이 17%, 천인이 7%로 나타났다. 현대인들이 흔히들 조선의 과부는 무조건 강제적으로 수절해야 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는 단순히 고정관념으로, 실은 자손의 벼슬길을 막지 않기 위해 수절을 택하는 경우가 많던 양반층에 비해 자손이 벼슬길에 나갈 일도 없고, 여자 혼자서 먹고 살기도 어려운 양인이하 계층은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는 뜻이다. 먼저 떠난 남편을 못잊어 그런다면 모를까...

더욱이 15세기에 만들어진 법을 21세기의 현대적 가치관으로 보면서 인권을 따지기엔 의미가 없기도 하고 어떠한 주장을 반박 하고 싶으면 자료를 제시하며 반박해야 하는것이 옳다. 더욱이 이 문서가 다루는 세종과 문종의 치세때 노비의 삶은 그렇게 비참하진 않았는데, 공노비들의 경우 양친 모두에게 출산휴가도 주어졌고, 노비가 노비를 부리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에 가끔 예외적으로 주인의 권세를 믿고 양반을 구타하는 노비도 있었으니 말 다했다.

또, 중국이라고 해서 노비 세습제가 없었던게 아니다. 시대에 따라, 왕조에 따라 정책이 바뀌었기 때문인데, 이는 조선도 마찬가지다. 그 예로, 당나라의 노비들은 그들의 신분이 자식들에게 세습되지 않았다고 해도 당나라보다 몇백년 뒤에 세워진 원나라의 경우 노비 세습제를 정책으로 삼았고 노비들은 면천되기 어려웠다.[56] 또한, 조선 초기 동시대의 중국이라면 명나라인데, 명나라엔 노비 세습제가 없었냐 한다면 그 또한 아니다. 홍무제의 치세때 사노비 소유가 금지되자 기존부터 노비를 소유했던 가문들은 노비들을 가문에 입적시켜 법적으로는 노비가 아닌것처럼 눈속임을 하였으며, 이 노비들의 자식들 또한 신분이 세습되었다.[57] 더욱이 타민족 노비들은 아예 논외로 친다.[58][59] 중국의 노비 세습제[60]는 명나라때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고, 명이 망한 후 세워진 청나라 또한 초기까지 노비 세습제를 유지했다. 그리고 1685년 강희제의 치세때 다시 한번 중국에선 노비 세습제가 폐지되었다. 유형원(柳馨遠)이나 이익(李瀷)은 이러한 당시 중국의 실정을 모른 채 중국에 노비 세습제가 없다고 단정지어 말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1669년(현종 10년), 조선에서도 양인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종부법을 도입했다. 다만 남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서인과 남인의 정권 교체기마다 번복되어 오다 1731년 영조대에 이러서야 비로소 종부법이 확실히 정착되게 되었다.[61] 영조가 종부법을 허가할때 한 “마땅히 전의 하교에 의해서 거행하고, 만약 폐단이 있으면 다시 변통해야 한다,” 라는 발언처럼, 종모법, 종부법등 노비에 대한 정책은 단순히 국가의 이익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 실제로도 종부법은 이미 태종대에 시행했지만 계속 나타나던 폐단으로 인해 세종대에 와서 종모법으로 정책을 되돌린것일 뿐, 그 시작은 노비 인구를 늘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정착시킨것이 아니였다.[62] 더욱이 세종대의 종모법은 종친과 관료들의 자손에게는 예외규정으로 적용되었음으로, 노비 인구가 급속도로 늘지 않게끔 당시로서는 어느정도 제재 장치를 걸어놓은 셈이다.

또한 조선의 노비가 양인의 신분을 얻는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는데, 국가가 혼란에 빠졌을때 큰 공을 세워 면천을 받거나[63] 1594년에 창설된 속오군에서의 군복무를 통해 면천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전자의 경우 전쟁등이 없던 시대에 살던 노비라면 불가능한 방법이였고, 후자의 경우 또한 엄청나게 힘들었던게 사실이다. 면천을 받기 위해선 2대에 걸쳐 평생 속오군에서 군복무를 해야 3대째 자손이 양인으로 신분이 상승되었기 때문이다.

7.8 계속된 왕씨 학살과 고려시대 문화재 파괴 행위

고려국성이었던 개성 왕씨들에 대한 사냥은 공식적으로는 1413년 태종 때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왕씨를 숨겨 준 사람들은 엄하게 처벌되고 대간이 찾아낸 왕씨를 죽일 것을 주청하는 등 세종 치세에도 왕씨의 안전은 계속 위협받았고, 왕씨들은 모계의 성씨로 바꾸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수였고 벼슬길도 막혀 있었다. 개성왕씨에 대한 차별이 그나마 철폐된 건 이후 문종 때의 일이었다.[64]

그러나 조선이 이전 왕조와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고구려백제의 지배층들은 신라에서 귀족 대우는 해줬다지만 경주 중심으로 돌아간 신라의 중앙 정계에서는 배제되었고 결국 이는 신라인이란 인식을 만들어주지 못한 채 후삼국시대에 후백제와 후고구려(이후 고려)를 탄생시킨다. 신라는 이미 완전히 국운이 기운 상황에서 고려에 스스로 편입되었다. 조선은 고려 내부에서 쿠데타로 일으킨 왕조다. 외부에서 온 정복자에 가까웠던 다른 왕조들과는 상황이 180도 다르다.

한편 고려 임금의 어진, 동상들을 색출하는 족족 묻어버리거나 불에 태우기도 했다. 고려 임금 불태운 세종 1426년(세종 8년) 도화원에 간수된 전조(前朝) 왕씨(王氏)의 역대 군왕과 비주의 영자초도(影子草圖)를 불태웠고, 1428년(세종 10년) 충청도 천안군이 소장한 고려 태조의 진영, 문의현(충청북도 청주시)이 소장한 태조의 진영과 쇠로 만든 주물상 및 공신들의 영정, 전라도 나주가 소장한 고려 2대 왕 혜종의 진영과 조각상, 전라도 광주에 있던 태조 왕건의 진영을 개성으로 옮겨 묻었다. 여담으로 개성 현릉에서 실제로 이 때 묻었던 것으로 보이는 왕건의 동상이 1992년출토되기도 했다.

이게 지금에 와서야 문화재 파괴지 조선시대 사람중에 누가 그렇게 생각했을지 의문이다. 총통만들 구리가 부족해지자 절간의 동종 다 떼다가 녹여버리던 시절이다.[65]

8 세종대왕의 용안?

항목 최상단에 올려져 있는 세종의 어진은 1973년 운보 김기창이 그린 정부지정 표준영정이다. 충무공 이순신에 이은 표준영정 2호며, 당연하지만 이 그림이 세종의 진짜 어진일 수는 없다. 한국전쟁 기간에 부산으로 옮겨서 보관하던 중 1954년 12월 불의의 화재로 인해 창고에 보관중이던 조선왕조 어진들의 대부분이 불에 타 절반에서 전체가 소실되었고, 이때 소실을 면한 것은 단 3점(태조, 영조, 철종) 뿐이다. 단, 1935년에 일제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이미 그때에도 세종의 어진은 없었다고 한다.# 역사의식 함양을 위해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는 표준영정 지정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때 세종의 어진을 그리게 된 이가 바로 김기창 화백이었다. 하지만 당시부터 어진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과 흡사하게 그렸다고 하여 논란이 많았다. #

실제로는 더 후덕하고 수염이 그닥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상상해보고 싶다면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나(외모가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으므로) 형 효령대군, 차남 세조의 초상 자료가 남아 있으니 참조해 보자. 특히 실록에는 양녕대군, 효령대군, 세종대왕 3형제의 얼굴이 무척 닮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아버지 태종은 먼저 죽은 세종의 동생 성녕대군에 대해 회상을 하며 "성녕은 내 아들 중 유일하게 얼굴이 다른 녀석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아마 효령대군과 가장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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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진은 청강문화산업대학 안태성 교수가 그린 세종대왕 어진이다. 참고로 과거에는 안태성 교수가 현재 남아있는 세조의 어진과 효령대군의 초상화로 복원한 심히 충공깽스러운 어진을 그렸지만, 다시 태조 어진과 왕족들의 초상화를 참고하여 안태성 교수가 다시 복원한 세종대왕 어진을 복원을 하였다. 복원 과정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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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에 세워진 동상.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뒷편에 있다. 이 동상은 위의 표준영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제작자인 홍익대 김영원 교수는 "표준영정을 참고했지만, 애민정신을 담아내기에 부족했습니다. 제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라고 평했다. 역시나 그럴 줄 알았는데...

2014년 9월 6일 KBS 여유만만에 출연한 고종의 손자인 이석의 말에 따르면 광화문 동상의 경우 현재까지 남아있는 효녕대군의 초상화와 자신의 얼굴을 섞어서 만들었다고 말을 하였다.#

이순신 장군 동상에 비해 상당히 큰데다가 시선이 장군의 뒤통수를 바라보는터라 묘하게 세종대왕 앞에서 경비를 서는 느낌이 난다.

김학수 화백이 그린 어진

김학수 화백이 세종대왕의 얼굴을 상상하여 그린 어진이다.

9 오늘날의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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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에서 가장 자주 접할 수 있는 세종대왕. 그래서 만원짜리 화폐를 달리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존경하는 역사적인 인물로 설문조사를 하면 대부분의 경우 이순신 장군 아니면 세종대왕이 1위를 하며 한국사의 군주들 중에서도 고구려광개토대왕과 더불어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또한,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한국에서 제일 많이 동상이 세워진 사람이다. 서울에만 해도 덕수궁, 여의도, 그리고 윗 사진의 광화문광장까지 3개의 큰 동상이 있으며 하다못해 전국 각지의 초등학교에 세워진 동상 삼대장 중 하나가 세종대왕의 동상이다. (나머지 둘은 이순신 장군 동상, 그리고 단군할아버지 동상)

광화문광장의 동상의 밑에는 세종대왕 관련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여기에는 세종대왕의 개인 프로필도 적혀 있는데 여기에 세종의 취미가 공부라고 적혀 있다. 사실이다.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지금까지도 먼치킨급으로 존경받고 있고, '세종대로', '세종과학기지',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대학교' 세종과학고등학교 등 세종대왕이 들어간 명칭도 많다. 10,000원권 지폐에 실린 인물도 세종대왕이니 거의 매일 이 분의 얼굴을 보고 살고 있는 셈. 인천국제공항의 원래 이름도 '세종국제공항'으로 계획되었으나 인천시의 극렬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이 분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자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이지스함에도 명명되었다. 함명은 세종대왕함. 솔직히 이지스함이나 항공모함 정도의 함정에 이분 아니면 충무공 이순신 밖에 어울릴 만한 이름이 또 없기도 하고.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 각국의 문맹 퇴치에 공로가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 주는 상'이 바로 '세종대왕상'. 폴란드에는 '세종대왕 고등학교'가 있었다. 세종대왕상은 한국 정부가 출연한 기금[66]으로 운영되는 상이고, 2014년 현재, 세종대왕 고등학교는 재정 문제로 폐교되었다고 한다.

스승의 날인 5월 15일은 바로 세종대왕의 탄신일이다. 한민족의 큰 스승이라는 의미로 이날로 정한 것. 대만도 비슷하게 공자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하고 있다.

2012학년도 연세대학교 창의에세이 시험에서는 난데없이 2040년에 나타나 외계인과 면담을 하여 1818명의 창의에세이 응시자를 당혹케했다. 이하는 2012학년도 창의에세이 2번문제 전문.관련기사

2040년에 세종대왕이 외계인과 만나는 상황을 가정하고,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을 지 그 내용을 서술하시오.

외계인 이전에, 이미 옛날에 사망한 세종대왕이 무려 2040년에 나타나는 것도 문제여서, 시간여행, 영혼과의 면담, 홀로그램, 부활, 평행세계 등등, 세종대왕을 살려내기 위한 각종 바리에이션이 난무했다고. 더불어 시험시간은 120분인데 1번 문제도 쉽게 쓸 수 있는 내용은 아니어서, 1번문제에서 시간을 다 쓰는 바람에 이 문제를 제대로 못쓴 수험생도 많다고 카더라.

Europa Universalis 3에서는 6.4.3이라는 안습 그 자체인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지못미. 참고로 평균이 5.5.5이고 만렙이 9.9.9이다. 영락제도 4.4.5이기는 하지만. 만약 이 게임의 이름이 유로파가 아니라 아시아 였으면 세종은 9/9/6에 영락제는 7/7/9 정도 되었을 것이고, 명과 조선은 화포를 기본 유닛으로 가지고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속작인 Europa Universalis 4에서는 6.6.6이 만점으로 뒤바뀐 상황에서 6.6.5으로 능력치가 대폭 향상되었다. 전작의 능력치로 치환하면 9.9.8인 셈. 참고로 영락제도 5.6.6으로 대폭 향상되었지만 시작 시간대가 좀 뒤로 옮겨져서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첫 시나리오에서 게임을 시작하면 의외로 AI 조선이 커서 만주와 일본을 집어삼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대부분 세종이 오래 살면 기술 차이로 이렇게 된다. 사실 조선이 세종과 이순신에 모든 스탯을 몰아 받았기 때문에 이후 모든 시나리오에서 왕의 능력치가 좋지않다.[67]

9.1 영릉

  • 해당 문서 참조.

9.1.1 익선관 발견 해프닝

관련기사

2013년 2월, 세종의 것으로 추정되는 익선관이 발견되어 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으나, 결국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자세한 내용은 익선관 #s-3.1 항목 참조.

9.1.2 사극

워낙 '성군'이란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정치암투나 전쟁이 좋은 소재가 되곤 하는 사극에서 중심인물로 등장한 적은 많지않다. 15세기 조선군주가 아니라 백성을 우주로 여기는 고금에 없는 초월적인 군주상으로 그려지는게 특징이다. 보통 나오면 완벽초인에 백성과 나라 걱정에 여념이 없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뭐 실제 역사에서도 그렇긴 했다만...

용의 눈물에서 안재모가 연기하여 호평받았다.

대왕 세종에서도 김상경이 배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줬고, 이 사극 자체에도 제법 주목할 만한 면도 있었지만 흥행이란 면에서는 그렇게 잘 나간 편은 아니었다. 다만 대왕 세종의 경우, 아내인 소헌왕후와의 관계와 적장녀 정소공주와의 이야기와 세자와의 갈등 등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점도 많았다.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젊은 시절에는 송중기, 성인 배역은 한석규가 맡았는데, 이제까지의 세종대왕의 모습과는 달리 이 드라마에서는 성질 급한 욕쟁이. 한석규가 처음 등장하자마자 "하례는 지랄!", "지랄하고 자빠졌네!" 라는 충격적인 말을 구사하면서 등장했으며, 젠장이나 우라질 등의 욕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왕으로 등장한다. 역사적인 면모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의 이미지와는 달리 개성적인 캐릭터를 잘 구축해냈다. 자세한 것은 세종(뿌리깊은 나무) 참고.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는 주지훈이 맡았다. 이 작품에서의 세종대왕은 그저 고기를 좋아하고 책에만 파묻혀 살았으나, 성격이 소심하여 왕위를 양도받는 것을 꺼려하는 캐릭터로 나오고, 자신을 닮은 거지와 역할을 바꿔서 살아가게 되나, 거지로 다니면서 백성들의 고뇌와 고난을 함께하면서 결국은 성군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9.1.2.1 세종대왕을 연기한 배우들

9.1.3 문명 5에서의 세종

세종대왕(문명 5) 항목 참조. 혹시 게임상에서의 성능을 찾는다면 문명 5/등장 문명/한국 항목 참조.

9.2 이모저모

한국 역사에서 으뜸가는 성군으로 추앙받아서인지, 현대에 다른 왕을 높여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유독 세종대왕을 칭할 때는 높임법을 쓰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세종께서"라고 검색하면 현대인이 현대인에게 쓴 글도 많이 보이지만 저 자리에 다른 왕을 집어넣으면 왕조실록 풍으로 쓰는 글이 대다수인 편.

세종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세종이라는 이름을 붙인 고유명사가 매우 많다. 세종시, 세종과학기지, 세종로 등등... 이름 자체가 갖는 이미지가 너무 엄청나서 그런 듯하다.

조선 시대에 태어난 최초의 왕이기도 하다.(1397년생) 초대 할아버지, 2대 큰아버지, 3대 아버지 모두 고려시대에 태어났다.

세종의 뛰어난 업적 때문인지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종 재위 시기인 1446년에는 대성산에서 도적떼가 나타나자 이를 진압했다.

9.2.1 세종에 대한 어록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언해》 서문
"그는 족보로 된 임금이 아니다. 전주 이씨의 임금이 아니라 하늘이 낸 임금이었다. 그가 정음을 짓고 모든 책의 언해를 만든 것은 모두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정말 민족 걱정을 한 이요, 정말 인생 걱정을 한 이다. 어쩌면 그런 어진 마음이 이 역사에도 났을까? 공자관중의 역사적 공로를 칭찬하여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야!" 하였다지만, 오늘 우리야말로 이 사람이 아니고 그냥 짜 먹자는 그 놈들만이 있었다면 정말 짐승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함석헌
  1. 상상도이며 실제 어진은 소실되었다.
  2. 역대 조선 임금들 중 최초로 한양에서 태어난 임금이다.
  3. 참고로 세종 집권 당시의 여러가지 망나니짓은 백성들 사이에서 양녕대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위기에 처하지 않기 위한(역모에 엮인다든가 하는) 나름의 처신이라는 설이 있다.
  4. 일반적으로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불교를 멀리하려는 조선의 왕족인 만큼 그러지는 못했다.
  5. 그러나 사실 세종도 술을 잘 못 마셨다. 소주도 겨우 한 두 잔 마실까 말까 할 정도
  6. 당장에 아버지인 태종부터가 왕위를 쟁취해서 딴 것이니...
  7. 이방원은 개국에 가장 공이 컸고 군왕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기에, 개국 초에 신료들이 적장자 아니면 공이 큰 왕자를 세자를 책봉하는 옳다고 의견을 낸 만큼 가장 유력한 세자 후보가 바로 이방원이었다. 문제는 계모이자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가 자기 소생의 자식들을 세자 자리에 앉히려고 무리수를 두었고, 이성계와 정도전도 동의한 바람에 엉뚱하게도 개국 과정에서 가장 공이 없고 나이도 어린 이방석이 떡하니 세자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에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 특히 이방원은 가장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고, 이는 왕자의 난으로 이어진다.
  8. 태종은 사실 정종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정종에게는 서자들만 있었을 뿐 적자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안군 이방원은 정종의 후계자로 지명될 때 세제가 아닌 세자책봉을 받았다. 신하들은 정안군이 정종의 양자이기에 앞서 아우이기 때문에 세제로 책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정안군은 세자로서 책봉받는 안을 고집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는 정안군 자신이 적장자로서 왕위를 잇겠다는 의지의 발로로 해석된다.
  9. 참고로 이 점은 세종과도 비슷해서 세종도 아들인 문종을 좋은 임금 만들려고 노력을 엄청 기울였다. 태종과 다른 점이라면 태종은 실패했고 세종은 성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손자다른 아들의 손에 의해 끌어내려진다.
  10. 그래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권 태종실록 후기에서도 충녕(세종)이 알고보면 야심가였을지도 모른다는 평이 수록되어 있다.
  11. 어린 시절 세자가 민씨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의미로 한 말이다.
  12. 이른바 강상인 사건으로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 부분의 일을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태종이 이미 왕이 서른이 될 때까지는 내가 맡겠다고 했었다.) 세종에게 보고하자 그를 국문해 함경도 관노로 보냈는데(그가 태종을 아주 오랫동안 모셔온 공신임을 감안하면 매우 큰 형벌이다) 한 달 뒤, 심온이 명나라 간 사이에 재조사해 박습(단 이 인간은 이미 이 사건으로 경상도로 유배 가 있었는데 이유는 그가 병조판서이었기 때문), 이조판서 심정, 동부총재 이관, 심온과 논의했다는 답을 얻어내 엮어냈다. 그러고는 강상인은 거열형, 이관과 심정은 참수형에 처해버려 잽싸게 죽였다.
  13. 이때 그는 하루에 곤장을 두 번 맞고 압슬형을 다섯 번이나 받고도 자복하지 않았다가 유정현이 "이보시오 심공 당신 지위가 뭔지 알면 이게 뭐 하는 건지 알 텐데 왜 자복 안 하시오?" 라고 해 결국 자복한다.
  14. 야사에는 "앞으로 박씨와는 혼인하지 말라" 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박은을 두고 한 말 같은데 실제로 박은도 이 일에 유정현처럼 연루되어 있어서 애초에 심온을 경계했고 소헌왕후를 폐비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15. 사실 이건 명나라에게도 불경한 짓이었는데, 태종은 애써 몸이 안 좋아 시골로 내려갔다며 거짓말까지 하라고 지시했다. 사실 중종반정 직후 연산군이 죽었는지도 몰랐던 걸 보면 홍무제 이후로는 명나라의 정보력도 생각보다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이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은 안 하지만 상황은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초기의 청나라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16. 효를 행하는 것 중 하나가 선친(혹은 선왕) 사후 3년간(3년상 기간)은 생전의 처분을 바꾸지 않는 것이 있을 정도였다.
  17. 다만 그 때문에 소헌왕후는 고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자기 아버지 심온이 죽을 당시에 왕후 본인은 임산부였다.
  18. 참고로 조선 세종 때 저 수치는 실제 측정량보다 낮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종 때 토지의 등급을 1~6등급으로 매겼는데 이 6등급 이하 토지는 농지로 취급을 안 했기 때문이다.
  19. 다른 이야기로는 내관이 신숙주가 공부 중이라고 얘기하자 세종이 "그럼 지켜보다가 그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를 알아보고 오라."고 한 뒤 자신도 글을 읽고 있다가 닭이 두 홰를 운 뒤 내관이 들어와 지금에야 잠이 들었다고 하자 자신의 곤룡포를 내관에게 건내주며 "이것을 가져다가 신숙주에게 덮어주라."고 했다는 것도 있다.
  20. '영묘조(英廟朝)'란 세종의 능호인 '영릉(英陵)'에서 따서 부르는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는 선대 왕 치세를 가리키는 말로 이런 식의 표현을 쓰기도 했다. 가령 세조 시대는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에서 따 '광묘조(光廟朝)'라고 불렀다.
  21. 편경를 만드는 옥
  22. 모든 한자들을 분류해서 묶은 발음자전.
  23. 서구권에서도 귀족이 출신 성분의 차이를 들먹이면서 백성을 무시하는 근거로 잘못 쓰이기도 했다
  24.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를 소재로 한 픽션사극 <뿌리깊은 나무>에 이 장면이 재현된다. "사람의 천성은 타고나서 바뀌지 않는 것인데 글자까지 새로 만들어가며 백성들을 교육시키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이론에 대해 한석규가 연기한 세종대왕은 "네놈이 (그러고도)선비냐?"며 매우 강하게 비난한다.
  25. 당시 세종은 건강이 악화되어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겨야 했었고 눈은 거의 멀어있던 상태였다
  26.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최만리는 집현전 부제학이었다!
  27. "한쪽이 천하면 당연히 천하다."라는 뜻. 양인과 노비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양인이 아니라 노비가 되는 것.
  28. 이외에도 실록 통합검색으로 "양민"과 "천인"을 같이 검색하여 세종실록과 태종실록 등으로 다 참고할 수 있다. 즉, 교차검색이 필요하다.
  29. 공비나 사비였던 여성이 양민 남성 명의를 끌어다가 호적상 남편으로 삼고, 실질적으로 조사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증언만으로 자식을 양인으로 올려달라는 경우가 있었다
  30. 조선 초기 대표 명필은 아들인 문종과 안평대군이다.
  31. 포악하거나 이런 건 아닌데 색욕이 어마어마했다. 특히 휘빈 김씨의 체격이 장대해서 이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해서 일부러 체격이 작은 순빈 봉씨를 선택한 세종대왕이었는데 결론은 휘빈 김씨보다 훨씬 독종이었다.
  32. 어린 시절부터 보는 사람들마다 감탄할 정도로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였으며, 명나라에까지 소문날정도로 절세미남이었다.
  33. '권도(權道)'란 '수단은 옳지 않으나 결과로 보아 정도(正道)에 맞는 처리 방도. 목적을 이루기 위한 편의상의 수단'을 뜻한다. 대충 "그 애는 고기 아니면 밥 못 먹으니, 나 죽고 나서도 (장례 기간에 육식은 안 된다고) 너무 따지고 들지 말고 유도리를 발휘해서 장례 기간 마쳐라"라는 뜻.
  34. 親耕. 왕이 직접 땅을 갈며 농사를 권장하는 행사.
  35. 사실 설렁탕은 몽골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음식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설렁탕과 같은 형태의 요리 자체가 몽골의 영향으로 생겨나기는 했으나 설렁탕이라는 이름과 구체적 형태에 대해서는 선농단에 어원이 있다는 의견이 있으니 설렁탕을 무조건적으로 몽골 음식이라고만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36. 다만 프레시안은 신뢰도가 높지 않으니 걸러서 들을 것.
  37. 후일 수양대군은 즉위 이후 두 책을 하나로 합쳐 월인석보(月印釋譜)로 펴냈다. 초창기 훈민정음으로 쓰인 것 뿐만 아니라 권1에 훈민정음 언해본까지 실려있는 국문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책이다.
  38. 금성대군은 같은 해 3월 28일에 태어났으므로 이 때 소헌왕후는 말 그대로 만삭이었다.
  39. 적장자 계승이라는 정통성을 놓고 볼 때 단종보다 더 정통성이 확실한 국왕은 조선 시대 내내 존재하지 않았다.
  40. 이런 공녀제도가 폐지된 건 성종 때이다.
  41.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금과 은이 산출되는 것을 알게 된 명은 본격적으로 금과 은을, 특히 당시의 기축화폐이던 은을 바칠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심지어 광해군 대는 조공물품인 10만냥의 은을 마련하기 위해 만주지역의 군벌 모문룡에게 은 8만냥을 빌려오기까지 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의 원군 파병이나 자신의 약한 정통성 문제로 약점을 잡힌 처지라서 내놓으라는 대로 내놓아야 할 처지이기도 했다.
  42. 다만 영락제 사후 선덕제도 전술했듯이 영락제만큼은 아니었지만 조선에게 꽤 많은 것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에선 해동청 잡아올리느라, 공녀 뽑기, 사신 접대하기 등으로 전국이 들썩거렸다. 사대외교가 순전히 실익 정책으로만 자리잡은 것은 선덕제 사후다.
  43. 특히 세조 시기에는 야인들과의 교류 문제로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고, 명 사신의 요구를 함경도 관찰사가 알아서 무시하는, 일부 양반계층의 지성 사대론이나 현대의 조선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으론 상상하기 힘든 일도 일어났을 정도로 발전했다. 임진왜란 이후론 광해군의 정통성 문제 등으로 다시 안습해지지만...
  44. 공자가 한 말의 변주다. 공자는 무덤에 넣는 사람 모양의 흙인형인 용(俑)을 두고 "이 따위 것을 발명한 놈은 자손이 끊어질 것이다!(始作俑者 其無後呼)"라고 저주했다고 한다.(출처: 《맹자》 양혜왕편 상4장)
  45. 세종 30권,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10월 9일(갑술) 8번째기사
  46. 후일 '니탕개의 난 같은 대변란이 함경도의 중심지역인 함흥평야까지 미치지 못한 데는 6진의 역할이 지대했다.
  47. 세종 9권, 2년(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9월 13일(무인) 4번째기사
  48. 세조 시기 지나치게 비대해진 특권층과 지방세력의 충돌은 재위 말년 이시애의 난이란 사단을 불러온다.
  49. 굳이 따지면 조선 명종~선조 전반기도 각종 군역과 공물 부패가 심각했던 시기이긴 했다.
  50. 태종이 먼치킨 취급 받는 것은 재정 흑자를 달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51. 오히려 경신대기근이 화폐 사용을 더 촉진시킨 점도 있다. 조선시대 상업 활동의 대표적인 장시의 시발점이 명종조 때 있었던 기근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으니. 자세한 건 경신대기근 항목 참조.
  52. 그래도 노비 아버지와 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경우는 노비가 아니네? 라는 생각을 할수도 있겠지만 이게 조선시대에 노비 남자와 양인 여자가 결혼하거나 노비 남자가 양인을 첩으로 삼는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53. 이를 협호(挾戶)라 한다.
  54. 225 페이지
  55. 가문의 대표
  56. Kenneth Pletcher. “The History of China”. p.176
  57. Gang Zhao. “Man and Land in Chinese History: An Economic Analysis”. p.138
  58. 사노비는 금지하였지만 군 소속 노비는 해방시키지 않았으며, 외국에서 팔려오거나 조공받은 노비들은 그대로 유지했다.
  59. Nicole Hallet. "China and Antislavery: Encyclopedia of Antislavery and Abolition Vol. 1” p. 154 – 156
  60. 표면상 법적으로는 폐지
  61. 비변사등록 89책 영조 7년 1731년 03월29일(음) 기사 - 大司成 宋眞明 등이 입시하여 奴良妻 소생이 從父法을 따를 경우 폐단이 우려되므로 시행에 어려움이 있다는 문제에 대해 논의함
  62. 애초에 노비 인구가 늘어날수록 국가적 손해로 이어진이다.
  63. 정충신이 대표적이다.
  64. 문종 대에 제씨로 성을 바꾸고 숨어 살던 왕씨의 후손 왕우지와 다툼이 생긴 사람이 그를 해코지할 목적으로 '저놈 사실 왕씨래요!'하고 관가에 일러 바쳤는데 문종은 바뀐 방침을 내세우기 위해 왕우지에게 벼슬을 주었다.
  65. 가장 대표적인 외국의 사례가 대북방전쟁 당시의 표트르 1세. 이 사람은 러시아 전역에 있는 교회의 종 중 3분지 1을 녹여다가 대포로 만들었고, 그것도 모자라 상인과 수도원들에게서 무거운 세금을 거둬들여 서유럽제 신형 머스킷 총 수만 정을 사들이는 등 칼 12세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았다.
  66. 대부분의 유네스코상은 국가나 기업의 지원으로 운영된다.
  67. 참고로 작중 이 것보다 능력치가 높은 지도자는 앙리 4세, 루이 14세, 악바르 대제, 프리드리히 대왕, 표트르 대제,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조지 워싱턴 밖에 없다.
  68. 태종역을 맡은 사람도 두 드라마 다 김영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