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영

壯勇營

1 개요

정조는 국왕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임시로 숙위소(宿衛所)라는 기구를 만들었고 홍국영(洪國榮)을 숙위대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1779년에 홍국영이 쫓겨나자 숙위소도 폐지되었다. 이후 몇 년 뒤에 정조가 새롭게 조직한 친위대가 바로 장용영이다.

2 상세

정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1782년에 명하여 무예출신(武藝出身)과 무예별감(武藝別監) 중 장교를 지낸 사람 30명을 뽑았다. 1785년에 추가로 20명을 뽑아 장용위(壯勇衛)가 발족되었고 이것이 장용영이 설치된 시초이다.장용청 설치 연혁. 50명으로 시작한 장용위는 이때부터 꾸준히 해마다 인원을 늘려 왔는데 나중에는 그 수가 무려 2만여명에 달하였다.[1]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장용영은 오군영에서 군사를 흡수하여 못지않은 규모의 강력한 군사조직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수어청총융청이 큰 타격을 입었다.[2] 장용영은 내·외영으로 구성되었는데 내영은 국왕 경호, 수도 방어 등의 임무를 위해 도성에 주둔하고 외영은 수원화성에 주둔하였다.

장용영의 지휘는 처음에 장용영 병방(壯勇營兵房)이 맡았다가 1788년에 군영이 된 이후 대장을 장용사(壯勇使)라 하고 장용영의 문서들에는 대장이라고 호칭하였다. 그래서 장용대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장용외영의 사령관인 장용외사(壯勇外使)는 수원유수(화성유수)가 겸직하였다. 당시 무반 중 유망주들이 장용영의 파총(把摠), 초관(哨官) 등 지휘보직에 발탁되었고 장용영 출신 인사들이 19세기에 군영대장으로 발탁된 사례가 제법 있다.[3]

정조 자신이 직접 설립한 조직인 만큼 각별히 대했는데 훈련도 자주 참관하였고 활쏘기 시험도 자주 열었다. 복리후생도 빵빵했다. 장용영 군병 중에 부모의 상을 당한 자에게는 휴가 1백 일을 주고, 빈궁한 자들에게는 3기분의 보포(保布)를 미리 주어 구휼하라고 명한 기록이 있다. [4] 하지만 장용영은 대규모 조직으로 운영에 많은 자금이 필요하였다. 이를 위하여 환곡둔전이 대규모로 조성되었는데 특히 환곡이 야기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요구는 정조 말년부터 비등하였다.

장용영을 강력하게 지지했던 정조가 승하하자 사태는 급변하였다. 순조의 장인이 될 김조순[5], 순조의 외조부 박준원[6]이 장용대장을 맡기도 했지만 장용영을 해체하고 그 막대한 재정을 활용하자는 논의는 대세가 되었다. 사실 장용영 자체가 정조가 양위한 뒤에 화성으로 내려가고 난 다음에 호위를 맡게 할 군대이기 때문에 없앤다 한들 이상할게 없었다. 해체를 주장한 심환지도 "그거 선왕이 필요해서 하신건데 이젠 없애죠?" 라고 했다. 이후로도 장용영은 영구히 복구되지 않은걸로 보아 시파정권이나 그 이후의 이들도 장용영 해체는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남인인 정약용조차 장용영의 폐단이 적지 않음을 목민심서와 다산시문집에서 지적하고 있다. 결국 1802년에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 김씨의 명에 따라 장용영은 폐지되었다. 수원화성의 방어를 위해 수원에 주둔하였던 장용외영은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고 총리영(摠理營)으로 개편된다. 수원화성 역시 정조 시절에 비해 위상이 약화되었다.

3 출신인물

  • 김지묵(金持默, 1725~1799)
조선 후기의 문신. 금위대장, 장용대장 역임. 정조의 처숙부.
  • 이한풍(李漢豊, 1733~1803)
조선 후기의 무신. 장용영 병방, 평안도 병마절도사, 장용대장, 훈련대장 역임. 이순신의 후손.
  • 유효원(柳孝源, 1751~1813)
조선 후기의 무신. 장용영 병방, 평안도 병마절도사, 금군별장 역임.
  1. 단, 조선시대 군영의 총원을 전력과 등치하는 것은 곤란하다. 훈련도감을 제외한 군영들의 인원 중 상당수는 복무를 군포 납부로 대체하는 인원이었기 때문이다.
  2. 수어청과 총융청은 각각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수비를 관장하는 군영이었지만 본청을 서울에 두고 있었다. 1795년에 수어청은 장용영에 인원을 대거 이전하고 서울에 있던 본청을 매각한 뒤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3. 하지만 세도정치기의 군영대장 임용은 세도정권 인사들이 대거 발탁되어 이전과 의미가 달라졌다.
  4. 정조 25권, 12년(1788 무신) 2월 10일(계묘) 1번째기사출처
  5. 이때까지 정식으로 순조의 혼인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정조가 생전에 김조순 집안을 사실상 낙점하다시피 한 상황이었고 정순왕후 김씨도 김조순을 사실상 국구로 대우하고 있었다.
  6.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아버지. 그 유명한 연암 박지원과는 먼 친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