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후기의 문신
金祖淳[1]
1765 ~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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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순 초상. 노회한 정객의 포스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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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대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조선 후기의 문신. 세도정치의 문을 연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인격, 능력 면에서 뛰어난 인물인데 후손들의 잘못으로 욕을 먹게 되었다는 평가와, 그런 것은 겉보기일 뿐 김조순 본인 스스로가 막후 정치를 통해 본격적으로 세도정치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1.1 알고보면 괜찮은 인물?
1765년(영조 41년) 태어나서 1785년(정조 9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규장각대교를 지냈고, 이조 참의, 이조 판서, 선혜청제조 등 순탄한 관직살이를 했다.
그의 증조부는 영의정까지 오른 적이 있는 김창집(노론 4대신 중 한 명)이고, 가문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인 척화파로 최명길과 대립했던 김상헌과 송시열의 애재자였던 김수항이 있다. 한마디로 엄청난 명문가 출신.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집권 여당 집안의 자손으로 직계 조상 중에 이름 높은 국무총리, 김구 수준의 독립운동가[2][3], 이휘소 박사 같은 대학자가 있다는 것.
거기에다 본인의 개인적인 능력도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으며, 남인이나 벽파와 달리 자기 이념이 없는 비당파적 당파인 노론 시파이었기 때문에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서인, 남인 양쪽에서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문장이 뛰어나[4] 많은 저술을 남겼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죽화도 잘 그렸다. 말년에 정조가 건강이 나빠지자 왕세자 책봉[5]을 하면서 동시에 간택을 추진했는데, 이때를 전후해서 정조가 직접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가면서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감으로 추천, 간택되게 하고 이를 마음대로 바꾸지 말 것을 우회적으로 강요할 정도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어 정치적 역량이 떨어져 신하들에게 휘둘릴지도 모를 순조의 후원자로 김조순을 염두에 둔 듯 한데, 정작 정조 본인도 홍국영의 세도정치로 골머리를 앓았던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영조의 계비로, 순조가 즉위할 당시 왕실의 큰어른이었던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할 때에는 낮은 처신으로 좋은 평가를 벽파로부터 받아 큰 견제를 받지 않았다(김조순은 시파다.). 한때 장용영의 대장에 오르기도 했지만, 얼마 안 돼서 장용영 자체가 폐쇄되었다. 본격 약주고 병주기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중단하고 사망한 후 벽파가 몰락하자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 하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전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높은 관직을 선점한 안동 김씨의 수장인데 정작 본인은 판서급 자리 이상의 벼슬에 오른 적이 없었던 것.
게다가 이 사람이 순조의 친정 이후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처음 한 일은 바로 신유박해를 저지른 노론 벽파에 대한 치죄. 심환지, 김종수 등을 정조의 유지를 거스른 역적으로 정하여 관직과 작위를 박탈하는 등 정순왕후 김씨의 세력을 대거 정리했는데, 김조순이 전면에 나섰다기보다는 측근들이 대신 수행하였다.
사실 일반적인 세도정치에 대한 서술을 생각하면 세도정치의 전반 30년을 담당한 김조순이 이렇게 차라리 명신에 가까운 평을 받는 것이 아이러니해 보이며, 이 때문에 '김조순 이후로 진짜 막장 세도정치가 열렸다'라는 평을 하기도 한다.
더욱이 안동 김씨는 척화파의 상징 김상헌,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전 영상 김수항, 김수항의 아들이자 역시 영상을 지낸 김창집, 그리고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그의 두 동생 김창협, 김창흡 등 쟁쟁한 후손들로 인해 조선 후반기 최고 명문가였다. 김조순 개인이 어떤 인물이었든간에 안동 김씨 일문이 세도가가 되는 것은 결국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1.2 알고보면 음모가?
그러나 김조순이 섭정이 된 이후 안동 김씨의 세력이 크게 확대됐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것이 소위 말하는 세도정치로서 조선 후반기의 막장 상황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세도정치의 효시인 김조순은, 그 개인이야 착하건 나쁘건 어쨌건, 후대의 막장스러운 정치 상황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비록 김조순이 정순왕후 김씨의 세력, 노론 벽파를 정리했다지만, 정작 이들의 빈자리를 채운 인물들은 안동 김씨에 노론 시파들이었다. 그의 빈 자리 내가 채워줄게 남인? 정약용의 복귀? 그딴 거 없었다. [6]
게다가 높은 벼슬을 받지 않았다고 하지만[7], 이는 김조순이 겸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여건상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왕의 장인이 영의정까지 겸임한다면? 역적 토벌이라는 명분으로 반란 일으키기 딱 좋다.[8]
실제로 김조순이 제수받거나 역임했던 관직들을 살펴보면 부제학(副提學)·행호군(行護軍)·병조판서·이조판서·선혜청제조(宣惠廳提調), 훈련대장, 호위대장, 장용영 사령관 같은 하나같이 핵심 요직들로, 문무관의 인사권, 국가 재정, 군 최고 통수권자, 최고위 언관 같은 실세 중에 실세 자리들이다.[9]
무엇보다도 조선 후기에 국정전반을 총괄하는 핵심 정치기구는 의정부가 아니라 비변사였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특히 김조순이 죽을 때까지 유지하던 직위가 바로 비변사 제조라는 점은 의미가 크다. 제조는 명목상 도제조에 이은 비변사의 2인자 자리이긴 하지만, 어차피 비변사의 최고위직인 도제조는 전,현직 삼의정들이 겸직하는 자리였다. 전직 영의정, 좌우의정 도제조는 전직이니 사실상 별다른 실권이 없었고, 현직 영의정, 좌우의정 도제조는 현직에서 물러나면 전직이 되어 실권이 사라진다(..). 따라서 겸직인 도제조보다 명목상 2인자이긴 하지만 상시직인 제조가 실권은 더 강했던 경우도 있다. 나, 김조순! 얼굴마담 영의정 자리는 필요 없다!. 실제로 김조순 이후의 세도 정권들은 비변사를 통해 국정을 장악하고,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김조순이 어떤 벼슬에 입문하여 어떤 활약했다더라'는 식의 표면적 기록들은 큰 의미가 없다. 김조순이 죽었을 때 그에 대한 실록의 평가(졸기)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김조순이 이미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 되어 안으로는 국가의 "기밀 업무"를 돕고 밖으로는 백관(百官)을 총찰(摠察)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安危)를 책임졌던 것이 30여 년..
즉, 명목상 높은 벼슬은 하지 않았더라도, 비변사의 핵심 요직을 장악하여 막후에서 정국을 운영했다는 것이다.
1.3 어쨌거나 세도정치를 열다
김조순 본인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모나지 않게 살아가려 했던 것은 분명하다. 위에서 언급된 요직들도 대부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10] 말년에는 왕의 장인인 국구에게는 당연직이었던 영돈령부사(정1품)와 제조직 외에 다른 관직은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11] 물론 위에서 설명했듯이 비변사 제조 자체가 정권 운영의 핵심 요직이었다(..)
그밖에 개인 품성면에서도 별로 거만을 떨거나 부정축재 등으로 지탄을 받는 기록도 없다. 누가 간 크게 지탄하겠냐고요 왕이 높은 관직을 제수하거나 상을 내릴 때도 극구 사양해서 받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과거제의 문란으로 출세길이 막힌 젊은 인재를 등용하고, 현시창 상황의 민생을 왕에게 알리는 것에도 힘을 썼다고. 실록의 기록이나 당시의 역사서에서도 후한 평가를 받았으며, 당장 다른 전문인들의 언급을 참고해도 '그의 혈족과 친목질 측근이 권력을 독점하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된 인물' 정도의 언급만 나오고 간신이라는 묘사는 없다.
다만 홍경래의 난 당시 반남 박씨 박종경과 더불어 국정을 농단한다고 비판받은 사실이 있어, 이미 당대에도 권신이라는 점은 충분히 알려진 듯 하다.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선 그냥 이름 높은 세도가들은 닥치고 거론된 감도 있는 게 민란들이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선 처음부터 김조순이 고도의 처세술을 꾸몄다고 보고 있다. 김조순 자신은 명신이란 평을 들을 정도로 실질적인 권력욕을 보이지 않는 척 하면서, 가문 전체의 세도 확대를 꾀했다는 것. 이후 김조순의 자식들이 주요 벼슬자리에 제수된 것으로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김조순이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등과도 연합하고 다투지 않으면서 최고가문의 지위를 지켰다고 보고 있다. 그러니까 박시백 작가의 김조순에 대한 평가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위선자. 하라구로 속성인가
덧붙이자면, 세도정치기의 각종 문제는 정조 시기에도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대표적으로 수령권의 강화와 그로 인한 환곡 폐해와 탐학의 발생). 세도정치의 기반 또한 규장각, 주교사 등 정조가 설치한 각종 기관들에서 나왔다. 소수 가문들에 의한 과거의 독점 또한 18세기 후반(영조 말)부터 이미 널리 확산된 경향이었으며, 서울 양반과 지방 양반의 분화 또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울러 18세기 말부터 대외 교역이나 농경지의 확대 등도 정체 혹은 침체에 머물렀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조선의 쇠퇴를 단순히 세도정치, 나아가 김조순 개인에게 돌릴 수만은 없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그러한 쇠퇴 경향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당시의 집권층이 잘했다는 건 더욱 아니지만.
요약하자면 단순히 '명신'과 '간신'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평가하기에는 참 난감한 인물. 개인의 입장으로는 뛰어난 능력, 인품을 갖춰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정국을 운영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는 세도정치가 대폭발, 결국 안동김씨라는 혈연이라는 측면과, 비변사를 통한 소수 인물들의 정권 독식이라는 정국운영방식이라는 두가지 측면에서 세도정치를 낳은 직접적인 선조가 되어버린 인물이다.
어찌보면 당나라 현종 대의 이림보보다도 더 철저하게 무서운 인물. 딸인 순원왕후와 보면 더욱 흥미롭다.
1.4 기타
오대검협전이라는 무협소설(...)을 쓴 적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무협소설을 봐왔다고 한다. 지금 와서 보면 전형적인 클리셰의 남발에 손발이 오그라든다. 정조의 문체반정은 사돈의 흑역사를 감취 위한 것이였나.
근데 실제로 젊은 시절 예문관에서 숙직할 때 후배와 연애소설을 나눠보다 정조에게 걸렸다(...) 정조는 반성문을 쓰게 하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했다(...)
비슷한 사람으로 이자겸이 있다.
2 한국의 양궁 선수
김조순(양궁) 문서로.- ↑ 본래 이름은 낙순(洛淳)이었다고 한다.
- ↑ 조선시대에 김상헌의 이름값이 이 정도 위상이었다.
- ↑ 하지만 정작 김구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나라 팔아먹으려 한 김자점의 후손이니, 재미있는 비유가 되겠다.
- ↑ 소설에 심취해서 '오대검협전'이란 소설을 짓기도 했다. 정조에게 반성문을 요구받았는데, 이 반성문으로 오히려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니…
- ↑ 이때 책봉된 세자가 후일 순조가 된다.
- ↑ 다만 정약용이 장기간 귀양을 가게 된 까닭은 당시 좌의정인 서용보 탓이었다. 정약용이 암행어사 시절 연천현감인 서용보를 탐관오리로 지목하고 파면하였고, 이후 정약용과 서용보는 철천지 원수가 된다. 실제 김조순이나 정순왕후는 정약용과 사이가 나쁘지 않아 정약용의 귀양을 풀어주려고 적극 노력하였으나 서용보가 극렬히 반대하였고, 정약용은 서용보가 은퇴하고 난 이후에서 귀양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믿기 어렵지만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할 때 주도적으로 정약용의 복권을 추진하였으나 서용보를 주축으로 한 신하의 반대로 결국 실패하였고, 막상 정약용을 귀양에서 풀어준 것은 또 김조순이다.
- ↑ 국구로서 마땅히 받아야하는 영돈녕 부사를 제외한 모든 관직을 사양했다.
- ↑ 이해가 안 된다면 황제의 장인이자 승상이었던 중국 고대의 어떤 조씨 건달을 떠올려보자.
- ↑ 지금 일반인들의 인식으로 훈련대장과 호위대장은 별볼일 없는 자리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군 통수권을 갖는 정권의 핵심 요직이다.
- ↑ 하지만 병권의 핵심 요직인 병조판서, 훈련대장, 호위대장 직은 받아들였다.
- ↑ 다만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