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이름한글수원화성(水原華城)
영어Hwaseong Fortress
프랑스어Forteresse de Hwaseong
국가·위치대한민국 경기도 수원

등재유형문화유산
등재연도1997년
등재기준(ii)[1], (iii)[2]
지정번호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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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정조가 지은 수원의 성.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록되었으며 치밀한 사전 계획 하에 만들어진 계획 도시다. 수원 하면 떠올리는 수원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3]

수원성(水原城), 또는 간단히 화성(華城)이라고도 부르며 화성시의 '화성'도 바로 여기에서 따온 명칭. 현재의 화성시(화성군)는 원래 수원군에 속했는데, 1949년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부(수원시)로 분리 승격되면서, 수원군의 잔여지역을 이 화성의 이름을 따 화성군으로 개칭한 것인데, 그때도 수원화성은 수원읍에 있었음에도, 분리 승격될 수원부 지역과 잔여 지역의 동질성을 부각하기 위해 이름만 따와서 이렇게 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수원시화성시 항목 참조.

또한 수원화성 축조 전까지 수원부의 원래 읍치(邑治, 고을 소재지)는 현재의 화성시 화산동 안녕동 일대로, 바로 이 곳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원을 조성하면서(현륭원, 현재의 융릉) 기존 읍치와 시가지를 밀어버리고(...)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읍치와 시가지를 이전한 것이다.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요새로서의 군사적인 기능이 매우 잘 적용되어져있다. 먼거리에서 성벽의 작은 간이 출입구[4]가 보이지 않게 시각적으로 숨겨져있는 점과 같은 요새로서의 과학적인 장점을 많이 지니고 있다.[5] 보기에는 안그래보이지만, 대포에 대한 대비도 어느정도 되어 있었다.[6] 실제로 이러한 요새적 측면은 건축 당시의 동북아시아의 요새 건축의 표본으로서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띠며,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중 하나다.

특이점으로,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정문이 아니다. 정문은 남문인 팔달문이 아니라 북문인 장안문[7]이다. 정조가 한성에서 수원화성으로 올 때 북쪽에서 들어오기 때문에 임금이 들어오는 문을 정문으로 한 것이다.

간혹 팔달문을 화성으로 아는 사람이 있는데, 팔달문은 화성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런데 한양도성숭례문/남대문과 마찬가지로 교통을 이유로 좌 우의 성벽이 헐린 상태라서 독립적인 건축으로 보일 뿐이다. 사실 유네스코 세계유산임에도 이런 취급을 하는 것은 좀 안습이다.

2011년 현재는 팔달문 좌우 및 남수문 일대를 제외한 성곽 전 노선이 연결되어 팔달문을 기/종점으로 삼아 화성일주가 가능하다. 화성일주는 성인 기준으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팔달문과 같은 이유로 성벽 좌우측이 절단된 장안문 및 성벽 일부가 헐린 창룡문의 경우 육교로 연결되어 있는데[8], 팔달문 인근이 이렇게 연결이 어려운 것은 이미 지동시장, 영동시장 등을 비롯한 재래시장 및 상가들이 밀집한 상태라 이걸 다 헐어내고 성곽을 연결시킨다는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

2012년 6월 9일 1922년 대홍수 때 파괴된 남수문의 복원공사가 완료되었다. 수원천 복개구간 철거공사와 맞물려 이루어진 공사인데, 상부의 여장은 화성성역의궤에 근거하여 복원되었으나 하부의 수문은 9개의 수문은 유지하되 홍수 대비를 위해 세부는 상당히 다르게 복원되었다. 원래의 수문은 오각형 기둥이 이중으로 배열되고, 전/후열의 기둥 사이가 비어있었으나 복원된 남수문은 일자형 기둥으로 건설되었다. 이는 문화재청 사적분과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진행되었지만 향후 학계에서 논란의 소지는 남아있다.

여하튼 현재는 팔달문 좌/우의 성벽을 제외한 전 성벽이 연결된 상태.

걸어서 관람도 가능하고, 성벽을 따라 산책로가 매우 잘 조성되어 있고 길을 따라 걸으면서 보이는 경치나 소소한 볼거리도 훌륭한 편이다.[9] 특히 화서문-장안문-화홍문-방화수류정-활터까지 이르는 성벽길은 조명도 꽤 괜찮게 해놓아서 해진 저녁에 연인과 분위기를 잡고 싶다면 추천하는 코스다. 더불어 팁을 주자면 화홍문 옆의 호수인 용연 옆 언덕위에 있는 방화수류정은 수원에서 숨겨진 데이트 핫플레이스. 방화수류정에서 보이는 화성 전체의 경관도 좋고, 용연에 조성된 공원에서 올려다보는 방화수류정도 아름답다. 관광열차[10]를 사용하여 관람도 가능하다. 화성관람시 관람료는 성인기준 천원이며 중간중간 매표소에서 직원이 표를 검사하는 방식이다. 수원시민은 주소가 기재된 신분증을 제시하면 관람료가 면제된다.또한 화성 활터 근처 수원화성을 한눈에볼수있는 열기구가 생겼다. 다만 좀 비싸다

또한, 화성 내에 화성행궁이 있다. 근데 시내 한복판이라 성곽안에 있다는 느낌은 잘 안든다

2 수원 화성의 건축 이유

화성을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혹자는 정조가 화성으로 천도까지 하려 했다고 말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정조는 자신의 꿈꾸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철저하게 계획하고 실천하였으며 동양 최대의 정교한 석축술을 보여준 것이 이 화성이다.

또한,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죽은 아버지인 장헌 세자(사도세자)[11]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지었으며, 정약용에게 궁중비서인 '기기도설'을 하사하여 거중기를 제작하게 하여 정약용이 거중기를 사용하여 만들었다.[12] 또한, 화성 축조를 통해 수도의 북쪽(평양, 개성), 서쪽(강화), 동쪽(광주)와 더불어 남쪽에 군사권을 마련하여 왕권 강화에 힘쓰고자 하였다.[13]

일설에 따르면 최종적으로는 말년에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혜경궁 홍씨와 같이 노후를 보내려고 했다고 하는데, 병으로 정조가 일찍 사망해서 실현되지 못했다. 하여튼 왕릉[14]을 옮기고, 왕의 직속 군사인 장용영의 외영을 이 곳에 두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성 하나 공들여 쌓았다고 볼 수 없는 지역이었다. 평지에 있는 교통의 요지인 수원에 굳이 성을 쌓았다는 점에서는, 상인들의 유통을 활발하게 하려는 정조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다만 세간에서 흔히 회자되는 천도설은 말 그대로 에 불과하다. 수도인 한성에 비하면 화성은 1/16 수준에 불과하며 행궁의 규모는 말할 것도 없다. 즉 수원이 수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화성을 내성으로 삼아 행궁을 확장한 후 별도의 외성을 추가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 정도의 구상이 있었다면 화성성역의궤를 비롯해 어딘가에 사료로서 논의가 남아야 하지만 현재로서 딱히 발견되는 근거는 없다. 게다가 지형적 제약으로 인해 수운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이[15] 한강이라는 거대한 내륙수로를 버리고 수원으로 수도를 옮겨서 얻을 수 있는 이익 자체가 지극히 적다.[16]

3 역사

성벽 자체가 외벽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벽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하여 만든 점을 들어 동양 성곽건축의 백미를 보여준다고 한다. 하단은 돌로 쌓고 상단을 벽돌로 쌓았으며, 망루간의 간격이 화포의 사거리 이내로 서로 엄호가 가능하며, 이전 조선의 성들과는 다르게 망루가 성 내부에 있다. 이전에 지어진 성에는 외부에 독립된 형식으로 있었으나,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남한산성에서 독립된 망루를 점령하고 홍이포를 배치하여 쏘는 등 부작용이 있었다. 또한 화공을 위한 장치와 화재를 방어하기 위한 방책도 마련되어 있으며 약식이나마 대포에 대한 대비도 되어있어서 방어에 상당히 신경을 쓴 형태다.

읍성(邑城)이 행정적 형식에 그쳐 방어 시 읍성을 포기하고 산성에서 농성했던 조선의 성들을 고려한다면, 수원화성은 이전 읍성의 방어 시 문제점을 상당히 극복한 형태다. 이런 형태는 수원화성이 축조된 지 20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양권에서 보기 힘든 형태이기 때문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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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의 장안문의 모습.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느껴지는 파괴적인 모습이다. 크게 훼손 되어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This is Suwon[17]

화성성역의궤가 온전히 남아있어 성이 완전히 무너져도 다시 복원할 수 있다. 현재 화성은 복원물이나 철저히 기록에 의거하여 복원했기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18]이론상으로는 완전 복원이 가능한 성. 일제강점기에 거의 반 해체된 상태였고, 한국전쟁 당시에 미군, 북한군 등의 공습으로 파괴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거의 복원이 됐다.

그러나 복원 이후 현대에도 은근히 수난을 겪고 있다. 예전에 화성 서장대에서 노숙자 20대 청년이 술을 마시고 서장대 안에서 자다가 술김에 서장대안에 있는 의복을 보고는 귀신이 씌여있다며 불을 붙였던 것... 추워서 입고있던 자켓을 벗어서 불을 질러 태워먹었다. 이 바람에 정조가 친히 쓴 글씨였던 서장대 현판까지 전부 다 불타버렸다. 지금 있는 서장대는 새로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미 불타버린 서장대도 1990년대에 복원한 것이었다. 숭례문 방화 사건 이후 누군가가 불을 지르려 시도하질 않나[19] 성벽에다 불을 지르질 않나. 참고로 불을 지른 용의자는 중딩이라고 한다. 이유는 핸드폰을 찾으려고 했다고. 엄밀히 말해서는 성벽 자체에 불을 지른 것이 아닌 성벽 주변 갈대밭에다 불을 질렀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핸드폰 찾겠다고 갈대밭에 불 지르면 그 안에 핸드폰도 통구이 될거 뻔히 알면서 정신줄 놓고 불 지르진 않았을테고, 갈대밭 속에 짱박혀서 담배 피우시다 실수로 불냈다는 설이 더 설득력 있다.

4 이야깃거리

  • 사실 화성 건축이 완전히 정조의 기획안만은 아니었고, 정조보다 100년도 훨씬 전에 실학자로 익히 알려진 유형원이 철저한 계산 하에 현재 화성 부지에 성을 건축하면 적절할 것이라는 안을 낸 바 있었다. 이 안건의 적절성이 후에 정조와 당시 노론 대신들 사이에서 검토, 수용되고 실제로도 그에 걸맞은 성과를 거두게 되자, 화성 건축 시에 유형원은 죽은 뒤에나마 이조 참판을 제수받는 등 크게 찬탄받았다. 실제로 실록에 유형원을 검색하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때가 바로 정조 때인데, 유형원의 생애(1622~1673)와는 100년이 넘는 간극이 있다. 유형원이 처음 정계에 언급된 것도 죽은 뒤인 숙종 때인데 말 그대로 무시당했고, 영조 대에 들어서야 겨우 '반계수록'의 종합적 시각이 주목받으면서 일종의 고전과 같이 주목받게 된다. 그것이 절정에 달했던 것이 정조 때. 근래 학계에서는 '실학'의 실체에 대한 회의가 많이 일고 있지만, 유형원의 삶은 말 그대로 교과서적인 '실학'의 언급과 빼닮아 있다. 물론 자세히 살펴보면 실학의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면도 많지만, '뛰어난 저술 → 그러나 생전에는 무시당함 → 영·정조 시기 발굴되어 전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러하다.
  • 화성에서 보이는 시설 중 하나인 포루(砲樓)역시 정조나 정약용의 독창적인 기획안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포루를 기획한 사람은 서애 류성룡으로, <징비록>에 따르면 1592년 중양절(음력 9월 9일) 포루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 것과 구조를 적고 있는데, 수원 화성의 포루와 비슷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대에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징비록>에 따르면 1596년 모형을 만들다 중단하였으며 지인 김사순에게 편지를 통해 설계를 보내자 김사순이 포루 설치를 시도하였으나, 지역 주민들이 '전에는 이런 거 없어도 적을 잘 막았는데 왜 이런 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가'하며 반발했고, 김사순은 강행하였으나 병으로 눕자 작업이 중단되어 버렸다. 그리고 터진 게 제2차 진주성 전투... 이외에도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훗날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나 같은 사람의 말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한번 활용해보라'고 하거나, <설책지법>[20]에서 총포를 설치하는 형태의 목책도니 성을 고안하는 등 총포로 아군을 방어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유형원처럼 정조대에 재조명받거나 하진 못했지만.
  • 화성 건축 들어갔을 때 정조는 측근들에게 화성을 이름 그대로 아름답게 지으라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 성이 완공된 뒤 정조가 친히 와서 여기저기 구경하는데, 대동했던 신하들 중 한 사람이 정조에게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성을 굳이 아름답게 만들 필요가 있냐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정조의 대답. "크고아름다움이 적을 이기느니라!" 호옹이? 마치 누구같다[21]....메인보드 회로 디자인에 집착한 누구 같기도 하다... 확실히, 수원화성은 유달리 미적인 측면에도 많은 신경을 쓴 건축물인 것은 사실이다.
  •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 달리 정약용은 다른 업무들이 많아 수원화성 건축을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다. 정약용은 수원화성 공사가 끝난 이후에야 수원성을 돌아볼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성이 지어지지 않았음을 한탄했다. 하지만 만일 정약용의 주장대로 수원성을 지었다면 수원화성은 오래가지 못햇을 것이라는 게 중론. 당시 정약용은 수원화성 전체를 중국식으로 벽돌성으로 지을 것을 주장했지만 정조와 다른 대신들은 당시 조선이 벽돌 제작/건축기술이 부족하고[22], 근처에 석재광산이 발견되었으니 기존 방식대로 쌓기로 결정하고 진행했다. 그러다 수원화성 공사 후반부부터 벽돌건축 노하우가 쌓이면서 옹성이나 포루, 공심돈 등 부가적인 구조물에 한해 벽돌 위주로 지은 구조물들이 나타났는데, 이렇게 지은 곳들은 횡력에 약한 벽돌의 특성 때문에 후대에 무너져서 다시 쌓은 기록이 심심찮게 실록에 나온다.
  • 수원화성을 소개하는 곳에 보면 성문의 화공을 막기 위해 설치한 일종의 소화전인 오성지(五星池)를 비중있게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실제 중국의 오성지를 살펴봤던 정약용이 건설에 참여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이 적당히 만들다 보니 실제 오성지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한다.[23] 벽돌 사용과는 반대되는 케이스.
  • 수원화성 이후에 축성된 성은 강화도 돈대 정도인데 훼손 정도가 심해서 성곽사 연구에 화성이 결국 그 끝을 장식하고 있다. 조선시대 산성[24]에선 남한산성, 북한산성에 이은 완성형으로 보아 비교연구하거나, 성곽 축조양식의 마지막 단계로 연구하고 있다.
  • 지금의 팔달문은 1975년 복원을 한 것인데 이것이 잘못되어있었다고 한다. 당시 책임을 맡은 대목장 신응수의 말로는 기둥의 굵기가 미묘하게 가늘어 문화재청 측에 계속해서 두께를 도탑게 해야한다고 건의했지만 높으신 분들들과 공무원의 콤비네이션으로 묻혔다고 버틸 수가 없다! 극강수비수전설.txt. 결국 얇은 기둥대로 복원하던 중 화성성역의궤가 발견되고 기둥의 치수를 확인하니 대목장의 말이 옳았다고 망했어요 결국 후손들에게 '나는 능력이 이것밖에 안되니 너희가 지혜롭게 해결해 달라.'고 기둥에 먹칼로 새겼다고 한다. 그리고 2009년 문화재청 정밀 진단 조사결과 들보 등에 심한 균열과 뒤틀림이 생겨 2011년부터 완전 해체 보수 공사를 시작해서 2013년 초에 완공되었다.
  • 한국전쟁 이후 4대문의 파손 정도에 따라 수원에는 "남문은 남아있고 북문은 부서지고 서문은 서있고 동문은 도망갔다" 라는 말이 전해진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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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년, 수원시에서 수원화성 축조 220주년을 기념하여 2016년을 수원화성 방문의 해로 지정하였다. 지정과 동시에 약간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동문인 창룡문을 비롯하여 성곽을 전반적으로 보수하는 한편 장안문 근처의 건물들의 벽을 정조와 화성을 상징하는 그림들로 채워넣고 있다. 팔달문도 그런지는 확인 요망.
  • 대전노은고등학교가 수원화성을 모티브로 하여 지어졌다. 아름다운 학교 건물상도 받았다.

6 함께 보기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3. 수원시 로고도 수원화성을 형상화했다.
  4. 일반적으로 암문暗門이라고 한다. 성 외부로의 은밀한 출입을 위한 출입구이자 수원화성이나 한양성곽처럼 성문이 많지 않은 성에서는 서소문처럼 시신이 나가는 시구문의 역할도 하기도 했다.
  5. 2중구조와 계단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입구가 가려져있는데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간혹 볼수 있다, 성벽이 가지고 있는 효율적인 망보기를 위한 구조 위 사진에서도 보여지듯이, 성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뚫려있는 구멍이 바로 망보기용 구멍이다. 간격과 구멍이 뚫린 각도가 다양해 다양한 거리의 접근을 발견할 수 있는데, 특히 그 구멍을 통해 성벽에 가까이 붙은 적도 관찰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성벽 위에서는 시야확보가 되지만, 성벽 아래에서는 그 구멍을 올려다보아도 절대 관찰자를 볼수 없게 설계 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성벽에 뚫려있으므로 실제로 방문시 유심히 볼 것을 추천하다. 진짜 신기하다.
  6. 보방 요새로 대표되는 서양식 요새가 성벽을 경사지게 하고 별모양으로 설계해 포탄을 빗겨나가게 설계했다면 수원성은 성벽 뒷쪽에 성벽과 거의 같은 높이의 흙동산을 쌓아올려 포탄이 성벽을 관통해도 뒤의 동산이 지탱해줘서 성벽 자체가 붕괴되는일은 없도록 했다.
  7. 그래서 장안문은 숭례문보다 크다고 한다.
  8. 도로 위로 육교를 만든 뒤 성벽을 육교로 연결시킨 구조로 만들어놨다.
  9. 특히 한양도성의 구조를 생각하면 여러가지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종로라든가, 종로 옆의 수원천이라든가. 한양도성으로 치면 종로청계천이 나란히 가는 모습과 흡사하다.
  10. 노면전차는 아니고, 서울대공원의 코끼리 열차와 같은 형식이다.
  11. 추존왕 장조. 사실 정조아버지를 높이긴 했지만 왕으로까지 추존하진 못했다. 왕(장종)으로 추존된 건 대한제국 고종 때인 1899년의 일. 1901년에는 다시 황제(장조 의황제)로 추존된다.
  12. 이때 사용된 거중기에 대해서는, 사용된 거중기가 총 11대여서 작업능률이 4~5배로 높아졌다는 입장과 거중기가 단 한 대밖에 없었고 대신 당시 조선의 모든 기술을 종합한 도구들을 이용하여 축성기간과 비용을 상당히 아꼈다는 입장 두 가지가 존재한다.
  13. 조선 후기에 개성, 강화, 광주, 수원을 유수부로 둔 것이 바로 이들 지역이 군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이다.
  14. 사도세자가 사후 추증이 됐긴 하지만, 어쨌든 정조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 정도 대우였다.
  15. 딱히 조선만 그런 게 아니다. 일부 조선까들이 과도하게 떠받드는 고려 역시 수운으로 먹고 살았던 건 매한가지다. 고려가 전국적인 수운수송망을 깔아놓지 않았다면 여몽전쟁기 시절 강화도가 근 40년 간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
  16. 이 시기에는 화성 야목리 일대까지가 해안선이기는 했지만 (마포)광흥창-서소문을 통해 한성으로 접근하는 경로와 야목 일대에서 수원 화성으로 접근하는 경로는 거리가 4배 차이다.
  17. 수원시 경계 표지판이 장안문 앞에 있는 이유는, 한국전쟁 당시에는 아직 장안구 중북부 지역(정자동, 송죽동, 조원동 등)이 수원시에 편입되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당시 화성군 일왕면). 이 지역은 1963년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18. 사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 복원물, 혹은 최근에 건축된 건물은 극히 적은데 수원 화성이 지정된 이유는 원래 설계도면과 건축방법이 완벽하게 남아 있어서 과거 건축방법을 그대로 재연해서 복원했다라는 점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19. 문에 불을 질렀는데, 다행히 서장대 사고 이후 방화 창호지를 썼기 때문에 큰 화재는 일어나지 않았다.
  20. 만기요람에 실려 있다.
  21. 링크가 좀 이상하지만(...), 실제 정조가 한 주장은 성을 웅장하고 아름답게 만들면 보는 사람의 기를 꺾으므로 성을 지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정도의 주장이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17년(1793년) 12월 8일(정묘) 1번째기사
  22. 한반도의 토질은 전반적으로 중국 벽돌건축의 중심이 된 북중국 지역의 것에 비해 습기가 많아 벽돌 제작뿐만 아니라 전축성 건축에도 별로 적합하지 않다. 대신 단단한 화강암이 풍부해 돌을 통짜로 이용해 만든 건축물이 많다. 이는 '중국은 전탑, 한국은 석탑, 일본은 목탑'이라는 개략적 비교로도 알 수 있다.
  23. 정약용 본인이 공사 이후 성을 둘러보며 남긴 한탄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위에서 말한 벽돌 사용.
  24. 성이 산에 걸치고 있어서 평산성으로 구분한다. 다른 동네에서는 그냥 평범한 동네 언덕밖에 안 되어 보이는 팔달산도 산은 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