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

1 후삼국시대의 인물

張一
생몰년도 미상

후고구려궁예의 휘하 장수 중 한 명.

처음에 궁예는 북원(北原)의 적 양길(梁吉)의 휘하에 있으면서 강원도 일대를 공략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를 근거지로 하여 주천(酒泉)ㆍ나성(奈城 : 지금의 경상북도 봉화) 등을 치고 명주(溟州 : 지금의 강원도 강릉)로 진출하여 갔을 때, 궁예의 무리가 3,500명에 이르게 되자 궁예는 이를 14개의 대(隊)로 나누었다.

이 때 금대(金大)ㆍ검모(黔毛)ㆍ흔장(昕張)ㆍ귀평(貴平)[1] 등과 함께 궁예에 의하여 사상(舍上 : 部長의 직)에 임명되어 궁예를 보좌하였다. 그리고 장일의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

태조 왕건에서는 후고구려의 무장으로 묘사되어 궁예가 집권할 당시 내군부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내군장군이었던 은부 밑에서 여러가지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는데, 궁예가 자신의 아내인 강비와 두 아들을 심문할 때, 당시 나주에 파견나가있던 왕건을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철원에 돌아가봤자 살아남을 방법이 딱히 없는지라, 태평을 비롯한 장수들은 왕건에게 장일을 죽이고 아예 독립해버리라고 건의하는데, 어자피 왕건은 쿠테타를 일으킬 생각도 없고, 당시 같이 있던 형미 대사가 철원에 돌아가라고 조언하는지라, 왕건은 그대로 장일을 따라 철원으로 올라간다. 심문에서 결국 궁예가 강비와 두 아들을 끔찍하게 죽여버리자, 장일은 궁예에 대한 충성심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때 염상이 찾아와 훈련계획을 보고하면서 동시에 쿠테타에 가담할 것을 제의한다. 처음에 장일은 못들은 것으로 하겠다고 말하지만, 결국 쿠테타에 가담한다.

복지겸, 신숭겸 등 반역에 가담하던 장수들은 훈련을 핑계로 지방에 있던 병력들을 철원으로 끌어들여 서서히 철원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마침 불안한 낌새를 느낀 은부는 내군으로 하여금 각 장수들과 부대들을 감시하도록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것을 담당한 자가 장일이었고, 장일은 내군에 별다른 이상조짐이 없다는 거짓 정보만 보낸다. 나중에 쿠테타가 일어나기 직전에서야 은부와 내군측은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상하게도 정보가 들어지 않는다는걸 알아차렸지만, 단순히 장일이 일 제대로 안한건 줄 알았는지, 쿠테타가 벌어지고 나서야 장일이 배신했다는걸 알아차렸다. 쿠테타가 벌어진날 장일은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을 모아 궁예의 탈출로를 막는 역할을 한다.

이후 복지겸을 중심으로 재편된 내군에서 왕건에 반대하는 반역세력들을 척결하는데 활약하지만, 이흔암이 왕건을 죽이려고 모반을 꾀했을 때 왕건을 지키다 그만 독화살을 맞고 전사한다.

2 한국의 농구

출생 1967년 4월 8일
나이 47세 (만45세)
신체 180cm, 84kg

SBS 스타즈(현 안양 KGC인삼공사),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현 울산 모비스 피버스, 최희암 중도퇴진에 따른 감독대행), 중앙대학교에서 농구 지도자를 하였다. 모비스 감독대행 시절 올스타전 OB전에 나온 적이 있는데, 코트 위에 서는 것조차 엄청 힘들어했다(...). 시즌 성적은 영 좋지 않았고, 이에 모비스는 전신 기아산업에서 가드로 활약했던 유재학을 후임 감독으로 모셔오게 된다.
  1. 기존에는 김대검, 모흔, 장귀평이라고 서술되어있었고, 실제로 의견이 분분한 부분이나, 사서에서 이 당시의 인물을 표기할때는 성을 무시하고 2글자로 이름을 표기하는 경우가 잦았으므로 금대, 검모, 흔장, 귀평으로 표현하는 것이 맞을 듯 하다. 자세한 것은 금대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