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서울 성북)

貞陵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1]가 안장된 능.

본래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었던 능이었다. 그러나, 1409년 태종의 명령에 따라 안암동으로 능지를 이전할 계획이었으나 묘역을 조성할 때 물이 솟아나자, 현재의 자리인 정릉동으로 이장하게 되었고 능을 이장하면서 능 주변에 있던 비석 및 석상을 모두 제거하고 능을 묘로 격하, 사실상 주인없는 가묘(假墓)로 전락되었다. 세종때는 영정마저 불살랐다. 그러다가 1669년 우암 송시열현종(조선)에게 제창하면서 종묘에 모셔지고 이 때 들어서 정릉으로 봉안되었다.

태종은 왕자시절 이성계와 그의 왕후인 한씨[2]의 5남으로 계모이자 이복동생인 7남 방번과 8남 방석을 편애하고 부왕을 꼬드겨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한 강씨를 싫어하였으며, 강씨 역시 방원을 경계하고 있었다. 강씨 사후 결국 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통해서 정도전을 잡아두고 강씨의 아들 7남 방번과 세자로 책봉된 8남 방석을 붙잡아 죽이게 되었고, 이후 방원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강씨(를 비롯한 외척에 대한) 경계심을 버리지 못해 결국 정동에 있던 능을 지금의 정릉동으로 강제이장시키고 능에서 묘로 격하하며 심지어 정릉에 있던 석물들을 청계천 다리 공사에 쓰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청계천 광통교 밑을 지나가다 보면 광통교 돌다리나 벽돌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돌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정동 정릉에 있던 석물들이다. 그리고 이 돌들을 보면 제대로 놓은 게 아니라 아예 뒤집힌 채 끼워진 돌들도 볼 수 있다. 조선이 사라진 후인 오늘날까지도 신덕왕후와 태종의 악연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축물.[3]

서울 중구정동은 정릉이 처음 조성된 곳이었기 때문에 동네 이름을 그대로 정릉의 '정'에서 가져왔으며, 이후 정릉을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그곳의 마을 이름 역시 능 이름을 다시 가져와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이 되었다.

그리고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또 하나의 정릉이 있는데 이 곳은 별개로 조선 11대 왕 중종이 단독으로 안장된 능이다. 상세내용은 정릉(서울 강남)으로.

정종도 정조의 능도 아니다. 정약용의 묘는 더더욱 아니다.
  1. 태종 이방원이 혐오하였던 그 강씨이자 바로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던 이성계의 7남과 8남을 키워낸 그 생모이다.
  2. 현재 한씨의 능은 개성에 있다. 조선 개국 직전에 한씨가 사망했기 때문.
  3. 여담으로 이 광통교 정릉 석물들은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 복원되기 전에는 청계고가차도 밑에 묻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