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이름한글종묘(宗廟)
영어Jongmyo Shrine
프랑스어Sanctuaire de Jongmyo
국가·위치대한민국 서울

등재유형문화유산
등재연도1995년
등재기준(iv)[1]
지정번호738
종묘 조감도

宗廟 / Jongmyo Shrine

550px
종묘 정전 전경

1 소개

문화재청 종묘관리소 홈페이지

유교파르테논 신전.[2]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3] 1-2번지에 위치한 조선 시대 역대 왕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실의 사당. 면적은 186,786㎡.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였다. 종로3가역과 가깝다.

1박 2일2012년 2월 5일, 13일 방영분인 당일치기 2탄서울 역사기행의 2주차 방영분에서 1박 2일 일행이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4]

원래 종묘 제도 자체는 고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현재 중국 자금성 앞에 위치한 , 시대의 태묘는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지배하기 시작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노동인민문화궁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공원화되고 황실의 제사가 중단되는 바람에 제 기능을 상실했다. 이게 다 모택동 그놈의 문화대혁명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고장에서 말살된 전통의 명맥을 대한민국의 종묘가 잇는 셈. 물론 이와는 별개로 조상숭배신앙 자체는 예전부터 존재했다. 한자도 full character를 대한민국에서 쓰고 중국에서도 일본처럼 정자가 아닌 약자를 쓰는 것처럼 결국 중국의 종묘제도가 개박살 난지라 중국학자들이 이 부분을 연구하기 위해선 한국의 종묘를 연구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5]

2014년 기준 입장료는 1,000원이며, 평일에는 1시간 간격으로 문화재 해설사와 함께 관람하는 단체 입장[6]만 가능하다. 토요일과 명절 당일, 문화가 있는 날은 해설이 없이 자유관람이다. 공휴일에도 인솔자와 함께 관람해야 하니 주의.

2 역사

2.1 기원

최초의 종묘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중국 (은)나라에서 처음 그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하였고, 주나라 대에 이르러 예기에 실린 유교적인 형태의 종묘의 개념이 잡혔다.[7]

이와는 별개로 한국의 전통적인 시조묘(始祖廟)/조상숭배 신앙도 존재하였는데, 고조선 건국신화에서 건국자와 천신을 혈연적 관계로 묶은 것에 기초해 신단수를 천신 제사와 더불어 조상 제사를 지낸 성지로 본다. 그 외에 삼국시대 각 나라의 관련 기록에서 초기부터 시조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근거로 든다.

2.2 고구려

한국의 종묘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가 최초다. 동천왕위나라의 공격으로 환도성이 파괴되자 평양성을 새로 쌓으면서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외에 3세기까지 종묘에 대한 여러 기록이 나와, 종묘의 존재를 확실히 입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의 종묘는 지금처럼 완전한 유교식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시조묘의 연장선상에 있었기에, 왕실이 아닌 유력 귀족 가문에서도 자신들만의 종묘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 다른 근거로는 보장왕 5년에 동명왕묘 소상이 3일이나 피를 흘렸다는 기록인데, 위패가 아닌 신상을 모셨다는 것 역시 중국식 유교의 종묘는 아니다.[8]

2.3 백제

백제의 경우 동명묘와 구태묘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중국 사서인 <책부원귀>, <수서>에서는 구태설을 채택하여 '백제에서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오제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시조 구태묘를 세워 일년에 네 번 제사를 지낸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설을 채택하고 있으며, 온조왕 때 동명성왕과 국모(國母)에게 제사지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또한 백제는 시조신 제사를 지내면서 동시에 천지신 제사를 올렸는데, 백제 법왕 때부터는 천지신 제사나 시조신 제사보다 불교의례가 중시되는 경향을 보이며, 이후 백제 관련 기록에서는 제사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멸망 당시 부여풍이 제사권만을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짤막하게 나오는 것이 전부다.

2.4 신라

다소 늦은 시기 신라에서도 종묘제도를 도입하는데, 기원 후 6세기경 시조인 박혁거세를 모시는 묘를 짓고 4계절마다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외에 신라 자체 토착종교시설인 신궁(神宮)을 지었고 이 신궁은 신라 말기까지 신라왕이 새로 즉위하면 반드시 제사를 크게 지내는 장소였다.[9] 하지만 삼국의 어느 기록이나 유교적인 형태의 종묘는 아니다.

우리나라의 중국식 유교적 형태의 종묘제도의 도입은 상당히 늦어, 통일신라에서 최초로 나타났다. 687년 신문왕태조, 진지왕, 문흥대왕, 태종무열왕, 문무왕의 5위를 모셨다는 기록이 나온다.[10] 혜공왕(765~780) 때 이르러서 미추왕을 김씨 왕가의 시조로 삼고, 태종무열왕문무왕의 2위를 불천위로 정하며, 혜공왕의 조부 성덕왕과 부친 경덕왕의 친묘(親廟) 2위를 합쳐 5묘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일반적인 종묘의 운영과는 다른 신라만의 독특한 방식이다.[11]

신라 하대를 연 선덕왕은 경덕왕의 신위를 내보내고 부친 개성대왕을 부묘했다. 성덕왕의 신위를 그대로 둔 이유는 선덕왕의 어머니 정의태후가 성덕왕의 딸이었기 때문에 외가쪽을 통해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덕왕의 뒤를 이은 원성왕은 성덕왕과 개성대왕의 신위를 내보내고 조부 흥평대왕과 부친 명덕대왕을 부묘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다. 이후 애장왕 때는 별묘(別廟)를 세워 불천위였던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신위를 따로 봉안하고 자신의 직계 4위인 고조부 명덕대왕, 증조부 원성왕, 조부 혜충대왕, 부친 소성왕을 부묘했다. 애장왕 이후의 부묘 상황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기5묘(선정 당시 국왕과의 관계)
신문왕 7년(687)태조진지왕(고조부)문흥대왕(증조부)태종무열왕(조부)문무왕(부)
혜공왕대(765~780)미추왕(시조)태종무열왕(불천위)문무왕(불천위)성덕왕(조부)경덕왕(부)
선덕왕대(780~785)미추왕(시조)태종무열왕(불천위)문무왕(불천위)성덕왕(외조부)개성대왕(부)
원성왕 원년(785)미추왕(시조)태종무열왕(불천위)문무왕(불천위)흥평대왕(조부)명덕대왕(부)
애장왕 2년(801)미추왕(시조)명덕대왕(고조부)원성왕(증조부)혜충대왕(조부)소성왕(부)

2.5 고려

고려 시대에 들어서 최초의 종묘 기록은 성종 7년 처음 오묘제를 정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다음해 4월에 종묘 건설공사를 시작해 3년 뒤 공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종묘제례가 시작되었으며, 이 때는 신라의 1세대당 1위의 신주를 모시는 제도와 달리 5묘 9실제를 채택하여, 종묘에 9실을 설치하고 네 위패는 불천위로, 나머지 다섯 위패는 세대가 지날 때마다 옛 신위를 옮겼다.

이후 무신정권 시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가 몽골 제국의 침략을 겪으면서 제도를 재정비하게 되는데, 충선왕 때는 기존의 5실 외에 동서에 협실을 하니씩 두고 동실에는 문종명종을, 서실에는 혜종현종을 모셨다. 또한 공민왕 시기 이제현의 상소를 보면 강화도에서 나온 후 형식적으로는 1당 5실의 제도지만 실제로는 22개의 신주를 일렬로 모셨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의 종묘 건물을 3개의 실로 나누고, 실은 다시 방으로 나누는 동당이실이방 제도로서 조선의 종묘 제도에 영향을 주었다.

고려의 종묘는 고려 왕조가 멸망한뒤 새로운 왕조의 종묘 부지가 되어 헐리고 태조 이하 고려 국왕들의 위패는 배에 실어서 강에 띄웠는데, 강물에 떠내려가서 도착한 곳에 사당을 짓고 그곳에서 위패를 맡아 보관하게 된 것이 연천 숭의전의 유래라고 알려져 있다. 이 숭의전도 현존하는 것은 6.25 전쟁 때 불타서 다시 지은 것.

2.6 조선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궁궐을 짓는 일보다 먼저 서두른 공사가 바로 종묘와 사직(社稷)의 건설이었다. 한양 천도가 확정되기 전에는 개경에 있던 고려의 태묘를 허물고 그 자리에 조선의 종묘를 세우도록 했으나 태조 3년(1394) 10월에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개경의 종묘는 공사가 중단되었고 한양에 새로운 종묘를 짓기 시작했다. 같은해 12월 4일에 시작한 종묘 공사는 다음 해인 태조 4년(1395년) 9월 29일에 끝났다.

창건 당시의 종묘는 담 안쪽에 대실 7칸, 대실 좌우의 익랑 각 2칸, 공신당 5칸, 신문 3칸, 동문 3칸, 서문 1칸이 있었고 담 바깥에는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 5칸, 남행랑 9칸, 재궁 5칸 규모였다.

태종은 종묘 앞에 인공으로 가산을 만들어 땅의 기운을 보한 뒤 一자 형식의 종묘 정전에 양 끝에서 직각으로 꺾여진 월랑을 잇대어 건축해 가운데가 길쭉한 ㄷ자 형식으로 바꾸었다. 월랑을 대는 것은 옛 제도(중국식)에 어긋나며 중국 사신들이 보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비웃을지 모른다고 대언 김여지가 간언하자 태종은 "중국 사신이 우리 나라 종묘까지 뭐하러 들어 오겠냐. 와서 보더라도 그냥 '아 이게 조선 방식인가보다' 하고 말지 비웃긴 왜 비웃냐!"하고는 그대로 월랑을 짓게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종묘에는 정전만 있었으나 세종 원년(1419)에 정종이 세상을 떠나 신위를 모셔야 할 상황에서 기존의 정전 5실이 만원[12]이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2년 뒤 정전 서쪽 곁에 별묘인 영녕전을 세웠다. 창건 당시의 영녕전은 대실 4칸, 대실 좌우의 익실 각 1칸 총 6칸이었다. 이로써 조선왕조 종묘 제도의 기본적인 형태가 정립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왕들은 늘어나고 신위를 모실 종묘의 방은 점점 모자라자 명종 때 정전을 4칸 더 증축해 11칸으로 규모가 커졌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선조는 황급히 북쪽으로 몽진하면서도 종묘의 모든 신주를 챙겨갔고, 이어 한성으로 들어온 일본군들 중 우키다 히데이에의 부대는 종묘에 주둔했다. 그런데 밤만 되면 괴성이 들리고 병졸이 급사하는 등 괴변이 속출하자폴터가이스트? 종묘에 신령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우키다는 남별궁으로 옮겼다. 물론 이 와중에 종묘는 불에 타서 잿더미로 변했다.

소실된 종묘에 대한 중건 사업은 선조 41년(1608) 1월에 시작해 5개월 뒤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 끝났는데, 이때 정전을 임진왜란 전의 조선의 제도로 할 것인지 아니면 중국 주나라의 제도[13]를 따를지를 놓고 논란이 있었지만 전자로 하기로 결정하고 11칸 규모의 건물로 다시 지었다.

이후에도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정전에서 영원히 제사지내는 불천위(不遷位)가 계속 늘어나면서 정전의 감실이 또 부족해지자 영조 2년(1726)에 4칸을, 헌종 2년(1836)에 다시 4칸을 증축해 지금과 같은 19칸의 매우 길다란 건물이 되었다.

신위명단 중 폭군으로 낙인되어 축출된 연산군광해군은 종묘 신위명단에서 사실상 제외되어 신위가 모셔지지 않았다

한때 어린 나이에 왕좌에 올랐다가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축출된 단종도 '노산군' 으로 강등되어서 종묘 신위명단에서 제외되어 신위가 모셔지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숙종이 재위시절 단종을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추존복위함에 따라 뒤늦게 단종의 신위가 종묘에 모셔지게 되어서 폭군으로 쫓겨나 폐위처리 되었던 연산군광해군을 제외하고, 태조 이성계를 포함하여 25위의 조선왕조 재위 임금 신위가 모셔지게 되었다.

이 외에도 정식 재위임금은 아니지만 '덕종', '문조' 등 추존 임금들도 신위에 모셔지기도 했다.

2.7 일제강점기

종묘는 원래 창경궁과 연결되어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경성의 교통을 원활히 한다는 미명 아래 창경궁과 종묘를 가르는 도로를 개설했다. 순종이 그것만큼은 안된다며 결사반대해 총독부도 어쩌지 못하다가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바로 공사에 들어가 완성시켜버렸다(...) 이 도로가 바로 지금의 율곡로.[14]

2.8 대한민국

1985년 종묘광장공원이 조성되었다. 당시 서울 올림픽 준비를 위한 정리 사업이었다. 그리고 1991년 민자 유치로 종묘 지하주차장을 건설하면서 임금님이 종묘에 배향 할 때 쓰던 우물인 어정(御井)이 마르고 상당한 지하 유물이 멸실되었다.(...) 당시 관점에는 비는 공간을 실용적으로 쓰자(...)는 목적이었겠지만, 현재 기준에서 보면 세계유산 종묘 권역에 주차장을 건설하거나 세계유산인 태릉에 선수촌을 건설하는 것은 기겁할 노릇이다. 위기의 세계유산 등재 위험

2011년 5월 3일부터 853억원을 들여 2013년 완공을 목표로 율곡로를 지하화하여 종묘와 창경궁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2010년 10월 착공한 율곡로 구조개선 공사 과정에서 문화재인 궁궐담장 기초석이 발견되어 원형 복원을 위해 공사가 연기되어 2014년말 복원 완료 예정이었다가 설계변경과 공사 방식 변경으로 2017년 12월 복원 완료로 연기되었다.

종묘의 정문 바로 앞에는 1985년부터 종묘광장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탑골공원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노인들의 쉼터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각종 집회 장소로도 자주 사용되어서 종묘 방문객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등의 문제가 지적되고 있었다. 1985년 공원 조성 당시 부터 공연장인 국악정, 대형버스 주차장, 무료급식소 등의 시설이 중구난방으로 들어선데다가 이동식 노래방 기계나 각종 노점상들이 등장하면서 각종 소음과 고성방가로 난장판이었다. 종묘가 일종의 성역인 것을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었을 정도. 결국 서울시가 2007년 종묘광장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국악정 및 매점, 자판기등 중구난방으로 들어선 시설을 일부 철거 하고 광장 내부의 버스 주차장과 무료급식소를 외부로 이전했다. 그리고 이동식 노래방 기계나 각종 노점상등의 불법 상행위를 단속하였다. 이어서 성역화 사업으로 어도, 홍살문, 하마비, 어정, 피맛길, 순라길 등의 문화재를 원형복원 예정이며 발굴 조사 중이다. 원래 계획은 2010년경 성역화 사업을 마무리하려 하였으나 종묘 앞 발굴 조사에서 예상 이상으로 유물이 쏟아져 나와 2010년 발굴 조사 지역을 한차례 확대하면서 2014년까지도 계속 발굴 조사 중이다. 유물 발굴로 종묘광장 정비사업은 2016년 12월까지 계획 된 상태로 2015년 2월기준 60% 공정률인 상태다. 노점상이나 각종 시설이 철거되고 발굴 조사로 어수선하면서 광장 상주인구는 격감하고 있다.

2016년 3월말 종묘전교 복원 및 제세동천 복원 및 녹지 정비를 완료한 종묘 서측 광장을 개방했다. 이후 2016년 말까지 종묘 동측 광장을 신성림 조성 및 정비를 진행중이다.

3 건축

3.1 정문 주변

외대문(外大門)
종묘의 정문으로 창엽문(蒼葉門)이라고도 하며 정면 세 칸의 평삼문(平三門)으로 되어 있고 그 좌우로는 종묘 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원래 외대문은 전면 중앙에 난 돌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도로를 조성하면서 노면이 높아져 땅속에 묻히고 지금은 단벌의 장대석 기단만 있다. 2009년 매몰된 외대문의 계단이 발굴되었다.#
망묘루(望廟樓)
왕이 제향시 이곳에 들러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나라와 백성을 돌보고자 마음을 가다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을 가진 건물. 지금은 종묘사무소로 사용중이다.
향대청(香大廳)
제례에 사용하는 향, 축, 폐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
공민왕과 살아 생전 금슬이 좋았던 노국대장공주를 모신 신당으로 망묘루 동쪽에 있다. 하나의 종이에 두 위의 초상화를 같이 그려 놓았다. 태조 이성계가 처음 종묘를 세울 때 명령을 내려 같이 세웠다고 한다. 신당 내부 왼쪽에는 공민왕이 그린 준마도 세 점도 같이 있다. 사진 링크

3.2 어숙실

어숙실(御肅室)
왕이 제례를 올리기 전에 목욕재계하고 제례를 준비하던 곳. 정전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재궁(齋宮)이라고도 한다. 북쪽에 어재실, 동쪽에 세자재실, 서쪽에 어목욕청이 있다.

3.3 정전 주변

상위 문서 : 대한민국의 국보

정전(正殿)
국보 제227호. 종묘의 중심건물로서 태조를 비롯하여 제왕의 신주 19위, 왕후의 신주 30위 총 49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의 남쪽 중앙에는 혼과 향로를 모시는 신문(神門)이, 동쪽에는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東門)이, 서쪽에는 악공, 일무원, 종사원 등이 출입하는 서문(西門)이 있다.

정전의 전면에는 길게 다듬은 돌을 쌓아 만든 동서 109m, 남북 69m의 넓은 월대를 조성하였으며 그 가운데에는 정전의 신실로 통하는 신로(神路)가 남북으로 나 있어 사묘 건축으로서의 품위와 장중함을 나타낸다.

정전 건물은 맞배지붕 형식이며 칸마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매우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단청도 최소화해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우리나라에서 단일 목조 건축으로는 가장 긴 101m. 신주가 모셔지는 왕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계속 방이 증축되어서 이러한 긴 길이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건축물의 조성 방법 중에는 상당히 특이한 것이다. 만약 조선왕조가 현재까지 존속했다면 건물이 더 길게 늘어났을 것이다.[15] 때문에 정전의 기둥을 잘 보면 미묘하게 오래된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쪽이 오래된 것. 신위는 가운데에 태조를 모시고 좌우에 후대 임금을 소(昭)와 목(穆)으로 삼아 배치하는 소목 제도가 아니라 서상(西上)의 원칙에 따라 서쪽부터 태조 이하 후대 임금을 모셨다.

'정전'이라는 이름은 여러 채로 구성된 건물군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을 나타내는 일반명사이지만 종묘의 정전은 특정한 이름 없이 정전이다.

여담이지만 굉장히 큰 건물로, 어지간한 전문가용 렌즈로도 정전의 전체 모습 촬영이 불가능하다. 건물 크기도 크기지만,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거리가 내삼문까지로 한정되어 있어서 그렇다. 위의 사진처럼 건물 전체가 나와 있는 사진들은 따로 찍어서 현상할 때 이은 것들이다.
칠사당(七祀堂)
정전의 남쪽 신문으로 들어가면 서쪽에 위치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 국행지신(國行之神 : 도로를 주관하는 신), 공려지신(公厲之神 : 후사가 없는 제후의 신), 국문지신(國門之神 : 출입을 주관하는 신), 중류지신(中霤之神 : 당실과 거처를 주관하는 신), 사조지신(司竈之神 : 음식의 일을 주관하는 신), 사호지신(司戶之神 : 출입을 주관하는 신), 사명지신(司命之神 : 사람의 선악에 따라 응보하는 신) 일곱 소신의 위패를 모시고 사계절에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계절에 따라 봄에는 사명과 호, 여름에는 조, 가을에는 문과 여, 겨울에는 행과 중류[16]를 모신다. 이들 중 사명과 여를 제외한 다섯 신은 따로 오사(五祀)라고 한다.
공신당(功臣堂)
정전의 남쪽 신문으로 들어가면 동쪽에 위치한 정면 16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 시간이 흐르면서 정전이 증축된 것과 마찬가지로 공신당 또한 증축된 결과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국가와 왕실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왕의 생존시에 공로가 큰 신하들의 신위를 해당 임금의 묘정에 배향했는데, 제1대 태조의 공신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을 시작으로 제27대 순종의 공신 효문공(孝文公) 서정순(徐正淳)까지 모두 19명의 제왕 신위에 83위의 공신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러나, 조선건국#s-1했을때의 1등공신이었다던 삼봉선생께서는 이곳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종묘의 공신당에 모셔지는 공신은 '배향공신'이라 해서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공을 세운 28종류의 공신과 성격이 다르다. 생전에 공적이 많은 사람을 해당 제왕이 세상을 떠난 뒤 선정한 건데, 이완용이 순종 묘정에 배향된 적도 있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배향공신 문서 참조.
정전과는 달리 영녕전에는 공신당이 없다.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는 추존왕이기 때문에 배향공신이 없는데, 영녕전에 모셔지는 후대 왕들이 공신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조상에 대한 예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
수복방(守僕房)
정전 동문의 담에 잇대어 북쪽 방향으로 지어진 4칸짜리 맞배지붕 건물. 수복(守僕)이란 조선시대 종묘서(宗廟署)나 향실을 관장하던 교서관을 비롯해 단(壇), 능(陵), 궁(宮) 등에 소속되어 청소하는 일을 담당한 잡직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수복방이란 제사를 준비하는 관원들과 종묘를 지키고 청소하며 제사를 준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이라는 뜻. 수복방의 앞에는 제사 때 음식 차림을 하기 전에 제물을 심사하던 찬막단이 있다.
전사청(典祀廳)
정전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종묘의 제사에 사용되는 제례음식을 준비하던 곳. 부엌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신주(神廚)라고도 부른다. 마당을 중심으로 주위에 ㅁ자형 건물을 배치했다. 마당에는 제수를 준비하던 돌절구 등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정전에 올릴 제수음식을 미리 검사하던 찬막단이 있다. 주실은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옆 행각에는 온돌과 마루방이 있다.
제정(祭井)
제례 때 사용하는 명수(明水)와 전사청에서 제수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는 물을 긷던 우물. 전사청 동쪽에 위치하며, 네 면을 담장으로 두르고 남쪽에 팔작지붕으로 된 일각문이 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이 차갑다고 한다.

3.4 악공청

악공청(樂工廳)
종묘제례시에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준비, 연습하고 대기하는 곳. 정전과 영녕전 바깥 서남쪽에 각각 있다. 정전에 부속된 악공청은 현재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으며 문짝 없이 기둥만 남아있다. 영녕전에 부속된 악공청은 현재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정전의 악공청보다 규모가 작은 편.

3.5 영녕전 주변

영녕전(永寧殿)
보물 제821호. 정전에서 옮겨진 제왕과 왕후, 그리고 추존된 제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 별묘(別廟)로 정면 16칸, 측면 4칸의 건물. 세종 3년(1421) 5묘제의 관습에 따라 정전에서 나와야 하는 선조들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조금 덜 중요한 왕들"의 위패가 모셔진 곳. 제왕의 신주 16위, 왕후의 신주 18위 총 34위가 모셔져 있다.

영녕전의 부재 처리나 건물 규모는 정전보다 약간 작지만 전반적인 공간 구성은 정전과 비슷하다.
제기고(祭器庫)
제례에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는 곳으로 영녕전 동쪽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4 위패 배치도

4.1 정전

묘실인물부묘(祔廟)
1실제왕태조(太祖)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1410.7.26
왕후승인순성신의고황후(承仁順聖神懿高皇后) 한씨(韓氏)1410.7.26
순원현경신덕고황후(順元顯敬神德高皇后) 강씨(康氏)
배향공신문충공(文忠公)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 1346~1405)
경무공(景武公)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1340~1408)
충경공(忠景公)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 1351~1419)
경무공(景武公)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1398)
양렬공(襄烈公)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 1331~1402)
강무공(剛武公)의령군(宜寧君) 남은(南誾, 1354~1398)
충정공(忠靖公)한산군(漢山君) 조인옥(趙仁沃, 1347~1396)
2실제왕태종(太宗) 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왕후창덕소열원경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 민씨(閔氏)
배향공신문충공(文忠公)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 1347~1416)
충무공(忠武公)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 ?~1414)
익경공(翼景公)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정탁(鄭擢, 1363~1423)
양도공(襄度公)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 ?~1417)[17]
경절공(景節公)계성군(鷄城君) 이래(李來, 1362~1416)
3실제왕세종(世宗)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왕후선인제성소헌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 심씨(沈氏)
배향공신익성공(翼成公)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황희(黃喜, 1363~1452)
정렬공(貞烈公)최윤덕(崔潤德, 1376~1445)
문경공(文敬公)허조(許稠, 1369~1439)
문희공(文僖公)신개(申槩, 1374~1446)
문정공(文靖公)이수(李隨, 1374~1430)
강정공(剛靖公)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褆, 1394~1462)
정효공(靖孝公)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 1396~1486)
4실제왕세조(世祖)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왕후자성흠인경덕선열명순원숙휘신혜의신헌정희왕후(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貞熹王后) 윤씨(尹氏)
배향공신익평공(翼平公)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람(權擥, 1416~1465)
양절공(襄節公)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 1403~1456)
충성공(忠成公)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1415~1487)
5실제왕성종(成宗) 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왕후휘의신숙공혜왕후(徽懿愼肅恭惠王后) 한씨(韓氏)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 윤씨(尹氏)
배향공신문충공(文忠公)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충정공(忠貞公)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 1402~1487)
충정공(忠貞公)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 홍응(洪應, 1428~1492)
6실제왕중종(中宗) 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왕후공소순열단경왕후(恭昭順烈端敬王后) 신씨(愼氏)
선소의숙장경왕후(宣昭懿淑章敬王后) 윤씨(尹氏)
성렬인명문정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 윤씨(尹氏)
배향공신무열공(武烈公)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 박원종(朴元宗, 1467~1510)
충정공(忠定公)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 성희안(成希顔, 1461~1513)
문정공(文定公)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 유순정(柳順汀, 1459~1512)
문익공(文翼公)정광필(鄭光弼, 1462~1538)
7실제왕선조(宣祖) 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왕후장성휘열정헌경목의인왕후(章聖徽烈貞憲敬穆懿仁王后) 박씨(朴氏)
소성정의명렬정숙광숙장정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正肅光淑莊定仁穆王后) 김씨(金氏)
배향공신충정공(忠正公)이준경(李浚慶, 1499~1572)
문순공(文純公)이황(李滉, 1501~1570)
문성공(文成公)이이(李珥, 1536~1584)
8실제왕인조(仁祖) 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왕후정유명덕정순인열왕후(正裕明德貞順仁烈王后) 한씨(韓氏)
자의공신휘헌강인숙목정숙온혜장렬왕후(慈懿恭愼徽獻康仁淑穆貞肅溫惠莊烈王后) 조씨(趙氏)
배향공신문충공(文忠公)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1547~1634)
문정공(文貞公)신흠(申欽, 1566~1628)
문충공(文忠公)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 1571~1648)
충정공(忠定公)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1557~1633)
충익공(忠翼公)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신경진(申景禛, 1575~1643)
충정공(忠正公)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 1580~1637)[18]
정효공(貞孝公)능원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 1592~1656)
9실제왕효종(孝宗) 흠천달도광의홍렬선문장무신성현인명의정덕대왕(欽川達道光毅弘烈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1661.7.7
왕후효숙정범경렬명헌인선왕후(孝肅貞範敬烈明獻仁宣王后) 장씨(張氏)1676.4.9
배향공신문정공(文正公)김상헌(金尙憲, 1570~1652)1661.7.7
문경공(文敬公)김집(金集, 1574~1656)1661.7.7
문정공(文正公)송시열(宋時烈, 1607~1689)
충경공(忠敬公)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 ?, 1622~1658)
문충공(文忠公)민정중(閔鼎重, 1628~1692)
문정공(文貞公)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 1630~1687)
10실제왕현종(顯宗) 소휴연경돈덕수성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昭休衍慶敦德綏成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
왕후현렬희인정헌문덕명성왕후(顯烈禧仁貞獻文德明聖王后) 김씨(金氏)1686.2.10
배향공신충익공(忠翼公)정태화(鄭太和, 1602~1673)
충숙공(忠肅公)청릉부원군(淸陵府院君) 김좌명(金佐明, 1616~1671)
문충공(文忠公)김수항(金壽恒, 1629~1689)
문충공(文忠公)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 1633~1687)
11실제왕숙종(肅宗) 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協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왕후광렬선목혜성순의효장명현인경왕후(光烈宣穆惠聖純懿孝莊明顯仁敬王后) 김씨(金氏)
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元化懿烈貞穆仁顯王后) 민씨(閔氏)
혜순자경헌열광선현익강성정덕수창영복융화휘정정운정의장목인원왕후(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康聖貞德壽昌永福隆化徽靖正運定懿章穆仁元王后) 김씨(金氏)
배향공신문충공(文忠公)남구만(南九萬, 1629~1711)
문순공(文純公)박세채(朴世采, 1631~1695)
충정공(忠正公)윤지완(尹趾完, 1635~1718)
문정공(文貞公)최석정(崔錫鼎, 1646~1715)
문충공(文忠公)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 1634~1684)
문효공(文孝公)김만중(金萬重, 1637~1692)
12실제왕영조(英祖)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왕후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원렬단목장화정성왕후(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元烈端穆章和貞聖王后) 서씨(徐氏)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정현소숙정헌정순왕후(睿順聖哲莊禧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正顯昭肅靖憲貞純王后) 김씨(金氏)
배향공신충헌공(忠獻公)김창집(金昌集, 1648~1722)
충정공(忠貞公)최규서(崔奎瑞, 1650~1735)
문충공(文忠公)민진원(閔鎭遠, 1664~1736)
문충공(文忠公)풍릉부원군(豊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 1680~1732)
충정공(忠靖公)김재로(金在魯, 1682~1759)
13실제왕정조(正祖)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선무열성인장효선황제 (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
왕후장휘예경자수효의선황후(莊徽睿敬慈粹孝懿宣皇后) 김씨(金氏)
배향공신문충공(文忠公)김종수(金鍾秀, 1728~1799)
충문공(忠文公)유언호(兪彦鎬, 1730~1796)
충문공(忠文公)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 1765~1832)
14실제왕순조(純祖) 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

왕후
명경문인광성융희정렬선휘영덕자헌현륜홍화신운수목예성홍정순원숙황후(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顯倫洪化神運粹穆睿成弘定純元肅皇后) 김씨(金氏)
배향공신충정공(忠正公)이시수(李時秀, 1745~1821)
문충공(文忠公)김재찬(金載瓚, 1746~1827)
문정공(文貞公)김이교(金履喬, 1764~1832)
문충공(文充公)조득영(趙得永, 1762~1824)
충정공(忠正公)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 1788~1836)
충경공(忠敬公)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 1776~1846)
15실제왕문조(文祖)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치중달화계력협기강수경목준혜연지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致中達和繼曆協紀剛粹景穆峻惠衍祉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왕후효유헌성선경정인자혜홍덕순화문광원성숙렬명수협천융목수녕희강현정휘안흠륜홍경태운창복희상의모예헌돈장계지경훈철범신정익황후(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懿謨睿憲敦章啓祉景勳哲範神貞翼皇后) 조씨(趙氏)1892.6.10
배향공신문헌공(文獻公)남공철(南公轍, 1760~1840)
문헌공(文獻公)김로(金鏴, 1783~?)
문숙공(文肅公)조병구(趙秉龜, 1801~1845)
16실제왕헌종(憲宗)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
왕후단성수원경혜정순효현성황후(端聖粹元敬惠靖順孝顯成皇后) 김씨(金氏)
명헌숙경예인정목홍성장순정징장소단희수현의헌강수유녕자온공안효정성황후(明憲淑敬睿仁正穆弘聖章純貞徵莊昭端禧粹顯懿獻康粹裕寧慈溫恭安孝定成皇后) 홍씨(洪氏)
배향공신문익공(文翼公)이상황(李相璜, 1763~1841)[19]
문충공(文忠公)조인영(趙寅永, 1782~1850)
17실제왕철종(哲宗) 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
왕후명순휘성정원수녕경헌장목철인장황후(明純徽聖正元粹寧敬獻莊穆哲仁章皇后) 김씨(金氏)1880.7.6
배향공신정문공(正文公)김수근(金洙根, 1798~1854)
충간공(忠簡公)이헌구(李憲球, 1784~1858)
효희공(孝僖公)익평군(益平君) 이희(李曦, 1824~1863)
18실제왕고종(高宗)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1921.3.31
왕후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 민씨(閔氏)1921.3.31
배향공신충정공(忠正公)민영환(閔泳煥, 1861~1905)
문익공(文翼公)박규수(朴珪壽, 1807~1877)
문경공(文敬公)신응조(申應朝, 1804~1899)
문정공(文貞公)이돈우(李敦宇, 1801~1884)[20]
19실제왕순종(純宗) 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1928.7.6
왕후경현성휘순명효황후(敬顯誠徽純明孝皇后) 민씨(閔氏)1928.7.6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懿慈仁純貞孝皇后) 윤씨(尹氏)1968.10.24
배향공신문헌공(文獻公)송근수(宋近洙, 1818~1903)1940.3.11
효문공(孝文公)서정순(徐正淳, 1835~1908)1940.3.13
충문공(忠文公)김병시(金炳始, 1832~1898)[21]
충숙공(忠肅公)이경직(李耕稙, 1841~1895)[22]
(시호 없음)이완용(李完用, 1858~1926)[23]1940.3.12

4.2 영녕전

4.2.1 중앙

묘실인물부묘(祔廟)
1실제왕목조(穆祖) 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
왕후효공왕후(孝恭王后) 이씨(李氏)
2실 제왕익조(翼祖) 강혜성익대왕(康惠聖翼大王)
왕후정숙왕후(貞淑王后) 최씨(崔氏)
3실제왕도조(度祖) 공의성도대왕(恭毅聖度大王)
왕후경순왕후(敬順王后) 박씨(朴氏)
4실제왕환조(桓祖) 연무성환대왕(淵武聖桓大王)
왕후의혜왕후(懿惠王后) 최씨(崔氏)

4.2.2 서쪽 협실

묘실인물부묘(祔廟)
5실제왕정종(定宗) 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1421.12.18
왕후순덕온명장의정안왕후(順德溫明莊懿定安王后) 김씨(金氏)1421.12.18
배향공신안양공(安襄公)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 ?~1404)1421.12.18
6실제왕문종(文宗) 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1454.7.16
왕후인효순혜현덕왕후(仁孝順惠顯德王后) 권씨(權氏)1454.7.16
배향공신문효공(文孝公)하연(河演, 1376~1453)
7실제왕단종(端宗)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莊景敦孝大王)1698.12.27
왕후의덕단량제경정순왕후(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 송씨(宋氏)
8실제왕덕종(德宗) 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
왕후인수휘숙명의소혜왕후(仁粹徽肅明懿昭惠王后) 한씨(韓氏)
9실제왕예종(睿宗) 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
왕후휘인소덕장순왕후(徽仁昭德章順王后) 한씨(韓氏)
인혜소휘제숙안순왕후(仁惠昭徽齊淑安順王后) 한씨(韓氏)
배향공신문헌공(文憲公)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박원형(朴元亨, 1411~1469)
10실제왕인종(仁宗) 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
왕후효순공의인성왕후(孝順恭懿仁聖王后) 박씨(朴氏)
배향공신문희공(文僖公)홍언필(洪彦弼, 1476~1549)
문경공(文敬公)김안국(金安國, 1478~1543)

4.2.3 동쪽 협실

묘실인물부묘(祔廟)
11실제왕명종(明宗) 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1569.8.16
왕후선렬의성인순왕후(宣烈懿聖仁順王后) 심씨(沈氏)
배향공신충혜공(忠惠公)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연원(沈連源, 1491~1558)
문원공(文元公)이언적(李彦迪, 1491~1553)
12실제왕원종(元宗) 공량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恭良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1635.3.20
왕후경의정정인헌왕후(敬懿貞靖仁獻王后) 구씨(具氏)
13실제왕경종(景宗) 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왕후공효정목단의왕후(恭孝定穆端懿王后) 심씨(沈氏)
경순효인혜목선의왕후(敬純孝仁惠穆宣懿王后) 어씨(魚氏)
배향공신혜정공(惠定公)이유(李濡, 1645~1721)
충문공(忠文公)민진후(閔鎭厚, 1659~1720)
14실제왕진종(眞宗) 온량예명철문효장소황제(溫良睿明哲文孝章昭皇帝)
왕후휘정현숙효순소황후(徽貞賢淑孝純昭皇后) 조씨(趙氏)
15실제왕장조(莊祖)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륜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신문환무장헌광효의황제(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範基命彰休贊元憲誠啓祥顯熙神文桓武莊獻廣孝懿皇帝)
왕후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의황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懿皇后) 홍씨(洪氏)
배향공신정헌공(正獻公)민백상(閔百祥, 1711~1761)
문충공(文忠公)이종성(李宗城, 1692~1759)
16실제왕문인무장지효명휘의민황태자(文仁武章至孝明暉懿愍皇太子) 이은(李垠)1973.5.6
왕후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 이방자(李方子)1991

5 종묘제례

5.1 개요

종묘에서 거행하는 제향의식.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는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 2008년에는 세계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통합되었다.

5.2 연혁

종묘제례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 수많은 제사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정기적으로 사계절과 납일(臘日)에 올리는 5대향, 수시로 올리는 천신제(薦新祭), 영녕전과 사직에서 봄, 가을 및 납일에 올리는 3대향이 있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가 1969년부터 종묘제례보존회(전주이씨 대동종약원)가 행사를 주관, 현재는 매년 양력 5월 첫 번째 일요일, 11월 첫번째 토요일에 봉행되고 있다.

제향 행사는 크게 제향을 봉행하기 위해 임금이 종묘에 이르러 재계하는 절차인 어가행렬과 제례봉행(제례악, 일무 포함)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사에 쓰이는 음식(제수)에는 익히지 않은 날 것과 양념하지 않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종묘제례가 열리는 날에는 국왕과 세자가 종묘를 방문하는 행사인 어가 행렬 재연 행사를 열기도 한다. 경복궁에서 세종로, 종로를 거쳐 종묘까지 이어진다. 이 때 어가 행렬의 군졸이나 신하 역 같은 엑스트라는 사전에 신청하면 일반인 참가자도 맡는게 가능하다.

5.3 종묘제례악

문서 링크 참조.

5.4 제관

  • 초헌관(初獻官) : 첫째 잔을 올리는 사람. 왕이 직접 제례를 지내는 친제(親祭)의 경우 조선시대에는 왕이 맡았다. 왕실이 없어진 뒤로는 영친왕의 아들인 이구 황태손이 담당. 이구가 2005년 세상을 떠나자 이구의 후계자로 지명된 이원 황사손이 봉행하고 있다.
  • 아헌관(亞獻官) : 둘째 잔을 올리는 사람. 친제의 경우 세자가 맡음.
  • 종헌관(終獻官) : 셋째 잔을 올리는 사람. 친제의 경우 영의정이 맡음.
  • 집례(執禮) : 의식을 집행하는 사람.
  • 찬례(贊禮) : 초헌관을 모시는 사람.
  • 천조(薦俎) : 조(익힌 고기)를 받치는 사람.
  • 봉조(捧俎) : 조를 받들고 가는 사람.
  • 대축(大祝) : 축문 읽는 사람.
  • 우전(右奠)·묘사(廟司) : 오른쪽에서 작(술잔)을 올리는 사람.
  • 내봉(內奉) : 신실 안에서 작을 전해주는 사람.
  • 외봉(外奉) : 준상에서 내봉에게 작을 전해주는 사람.
  • 사준(執尊) : 작에 술을 따르는 사람.
  • 찬의(贊儀) : 집사와 헌관을 인도하는 사람.
  • 관세위(盥洗位) : 손 씻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

5.5 제수

5.6 제기

  • 천조갑(薦俎匣) : 소와 양의 장, 위, 폐와 돼지껍질(豕膚)을 삶아서 담는 나무 그릇.
  • 폐비(幣篚) : 흰 모시로 만든 폐(幣)를 담는 대나무 그릇.
  • 용찬(龍瓚) : 강신주(降神酒)인 울창주(鬱鬯酒)를 담아 지하의 혼(魂)을 모시는 의식에 쓰이는 놋쇠 그릇
  • 목두(木豆) : 물기 있는 12가지의 젖은 제수를 담는 나무 그릇.
  • 죽변(竹籩) : 생과실과 물기 없는 12가지의 마른 제수를 담는 대나무 그릇.
  • 세뢰(洗罍) : 왕이 손을 씻을 때 사용하는 맑은 물을 담아두는 놋쇠 그릇.
  • 작(爵) : 국가에서 행하는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와 궁중에서 쓰이는 술잔을 한 격 높인 놋쇠 술잔.
  • 희준(犧罇) : 소 모양의 술통으로 봄과 여름 제사에 한 쌍을 사용하며 현주(玄酒)와 예제(醴齊)를 각각 담아서 초헌례에 사용하는 놋쇠 그릇.
  • 상준(象罇) : 코끼리 모양의 술통으로 봄과 여름 제사에 한 쌍을 사용하며 현주(玄酒)와 앙제(盎齊)를 담아 아헌례에 사용하는 놋쇠 그릇.
  • 조이(鳥彝) : 봄에는 울창주(鬱鬯酒)를, 여름에는 명수(明水)를 담는 봉황 모양이 새겨진 놋쇠 술통.
  • 계이(鷄彝) : 봄에는 명수(明水)를, 여름에는 울창주(鬱鬯酒)를 담는 닭 모양이 새겨진 놋쇠 술통.
  • 착준(著罇)·호준(壺罇) : 한 쌍으로 가을과 겨울 제사에 현주(玄酒)와 청주(淸酒)를 담아 사용하는 놋쇠 술통.
  • 전촉기(剪燭器) : 흘러내리는 촛물과 타다남은 심지를 잘라서 넣는 놋쇠 그릇.
  • 전촉자(剪燭子) : 자르고 담을 때 사용하는 놋쇠 가위.
  • 향로(香爐) : 향을 피워 천상의 혼(魂)을 내려 모시는 의식에 사용.
  • 향합(香盒) : 향을 담아 두는데 사용.
  • 멱(冪) : 마포건(麻布巾)으로 만들어 구름무늬를 그려넣은 술통 뚜껑으로 사용.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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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신주는 이렇게 생겼다.

여기에도 연못이 세 개가 있는데 주변에는 향나무와 같은 수목이 식재되어 있는 편이며 후원에는 화계(花階)[24]가 있으나 고궁 화계들이 기본적으로 상당히 화려한 걸 감안하면 수수한 걸 떠나서 상당히 살풍경스러운데, 그 이유는 죽은 자를 추모하는 신성한 공간이므로 그냥 이런 화계는 구색 맞추기 용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북한의 역대 임금을 숭배하는 시설 금수산태양궁전김씨조선판 종묘라고 빗대기도 한다.
  1.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2. 현재 한국 유교에서 종묘가 차지하는 위치를 보면 이게 전혀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3. 종묘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종로3가역 3호선 출구는 종로구 묘동 소재다. 하지만 정작 종묘는 묘동 소재가 아니다.
  4. 1주차 방영분 때에 방문한 곳은 경복궁.
  5. 이는 공자를 제사하는 문묘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6. 반드시 단체 인원을 꾸려야 하는 게 아니라, 해당 시간대에 입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아다가 같이 들어가고 나오는 방식이다. 물론 단체 인원을 꾸려도 관계 없다.
  7. 물론 당시 유교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교의 창시자 공자가 주대의 문화를 기준으로 삼았기에, 유교의 예법은 자연히 주대의 문물을 따르는 것이다.
  8. 유교에서도 소상을 묘시는 예가 없지는 않다. 공자를 묘신 공묘 대성전이 대표적인 사례.
  9. 신라의 신궁에서 모셔지던 신의 위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10. 다만 삼국유사에 이보다 앞서 당나라에서 주도한 백제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 간의 취리산에서의 회맹을 기록한 금서철권을 신라의 종묘에 보관하게 했다고 하는데, 이 회맹은 665년에 있었기 때문에 신문왕 이전에 이미 신라에 종묘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11. 이에 대해서는 천자가 7묘, 제후가 5묘를 두도록 한 기존의 예법과의 절충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형식적으로나마 당의 제후국을 자처하고는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천자로써 행세하면서(외왕내제) 천자국 제도에도 맞고 제후국으로써의 제도에서도 벗어나지 않는 형식(나중에 당에서 제동걸 때를 대비해서도)을 취했다는 것.
  12.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이 당시에는 아직 태종이 생존한 상태였다.
  13. 주나라의 제도에 따르면 천자는 종묘에 방 7칸, 제후는 방 5칸만을 둘수가 있고 방이 다 찬 후에 새 신주가 들어오면 가장 오래된 신주는 종묘에서 꺼내 땅에 묻었다. 만약 주나라 제도를 따른다면 영녕전을 복구하지 않고, 영녕전에 있던 위패를 모두 땅에 묻어야 한다.
  14. 그리고 창경궁과 종묘는 콘크리트 육교로 연결되었는데, 2011년 현재 이 육교는 폐쇄된 상태.
  15. '철종' 등은 영녕전으로 옮겨졌을지도...
  16. 태조의 조카이자 태종의 사촌.
  17. 효령대군의 7대손.
  18. 효령대군의 14대손
  19. 효령대군의 15대손
  20. 1928년 5월 3일 배향공신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동월 9일 이왕직 장관 한창수의 주장에 의해 명단에서 제외됨, 배향의식 거행 여부 불분명
  21. 1928년 5월 3일 배향공신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동월 9일 이왕직 장관 한창수의 주장에 의해 명단에서 제외됨, 배향의식 거행 여부 불분명
  22. 1928년 5월 9일 이왕직 장관 한창수의 주장에 의해 배향공신 명단에 포함됨, 1940년 3월 12일 배향의식 거행, 1945년 해방 후 종묘에서 출향
  23. 돌로 만든 계단으로서 계단 위에다가 수목이나 굴뚝,기암괴석 등을 설치하거나 채소,장독 등을 놔두는 곳으로서 주로 여성들이 거처하는 안채 후원에 설치하고 있으며 민간 양반가 등에서는 1~2단 정도로 이지만 궁궐 같은 경우에는 3단 이상을 많이 쓰며 거기에 사용되는 돌도 잘 다듬은 긴 돌을 의미하는 장대석은 궁궐 등에서 일반 돌을 이용하면 일반 민가식으로 취급하지만 가끔씩 장대석으로 화계를 만드는 집도 있으니 주의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