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사


正陽寺

1 개요

금강산에 내금강에 있는 사찰. 금강산 4대 사찰에 들어갈 정도의 규모가 큰 절은 아니었지만, 빼어난 경치로 이름이 높았다. 표훈사와 가깝다. 고양이와 얽힌 일화로 유명했으며, 한국전쟁동안 어떻게 절이 사라졌는지 사진으로 남아있는 몇 안되는 절이다.

2 역사

정양사는 백제 무왕 1년(600)에 백제의 고승 관륵(觀勒)과 강운(降雲)이 창건한 이다. 그러다 세가 기울었는지 661년(신라 문무왕 1년)에 원효(元曉)가 중창하였고, 다시 고려 태조 대에 또 중창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한국전쟁 당시 큰 피해를 입었으며, 지금 남아있는 유일한 목조건물인 반야전과 약사전은 조선 초기에 다시 세워진 것을 조선 후기에 각기 부분적으로 고쳐 지은 건물이다.

2.1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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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정양사와 현재의 모습.

한국전쟁 때 헐성루, 나한전, 영산전 등 많은 건물이 불타버리고, 반야보전과 약사전(藥師殿), 약사전 앞의 삼층 석탑과 석등(북한 보물 제53호)만 남아있다. 금강산 지역의 절들 대부분은 미군폭격에 의해 사라졌다. 그나마 살아남은 약사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처마 밑 기둥들이 없어지고, 문틀이 바뀌고 코끼리벽화가 사라지는 등 원형 훼손이 심해졌다.

사실 주변의 지형들을 보면 일제강점기의 정양사 역시 완전한 모습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정양사를 보고는 과거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 이 사진이 있어 과거를 알 수 있으며, 정양사는 한국의 문화재가 어떻게 사라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되었다.

3 가람

정양사는 내금강의 절 가운데서도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어서 예로부터 금강산 탑승을 하는 이들에게 필수적인 탐방처였다.

정양사의 중심인 반야보전은 정면 3칸(11.13m), 측면 3칸(8.7m)정도의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1] 건물 전면에 걸쳐 화려한 금단청을 장식한 조선 후기 건축양식의 전형이다.

그 앞에는 약사전[2]이 있는데, 약사전은 6각형 건물로, 한국에서는 유일한 것이다. 다각형 전각 자체가 한국에서는 흔하지 않지만, 보통은 일본에는 호류지 몽전처럼 8각형의 형태를 취한다. 아무튼 이 약사전은 6각 평면에 6모 지붕을 얹은 전각형식의 희귀한 건물이다.[3]

약사전 앞에는 3층 석탑과 석등이 있는데, 이 석등은 신계사, 장연사의 탑돌과 모습이 같다.

4 고양이 설화

조선 연산군박상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연산군에게 잘보인 을 등에 업고 나주에서 행패를 부리던 황쇠부리(黃牛夫里)를 쳐죽이게 되었다.

옳은 일이었지만, 어쨌든 살인이니 박상은 임금에게 자수하러 서울로 떠나게 된다. 그러다가 입암산 갈재를 넘게 되었는데, 그 때 왠 고양이가 길을 막아서 이상하게 여긴 박상이 고양이를 따라가 보니 그 곳이 금강산 정양사였다.

그 덕분에 왕이 박상에게 보낸 사약을 가진 금부도사와 길이 엇갈려서 박상은 살았다고 한다. 그 후에는 중종반정이 일어나 더 이상의 후환이 없게 되었다. 박상은 이에 감사하면서 강원도 화천의 하남면 오사리에 있는 수십두락의 땅을 사서 정양사에 고양이를 위한 제사를 맡겼는데, 이를 묘전(猫田)이라 했다고 한다.

묘전은 여러차례 다른 사람이 소유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밭에서 작물이 자라지 않아서 다시 절의 고양이 몫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지금은 정양사는 21세기 조선왕조의 영토 안에 있기 때문에 강원도 화천의 묘전 소유자는 사라졌고, 묘전도 해방 직후 대한민국 정부의 국유지가 되었다가, 한국전쟁을 거쳐 지금은 북한이 점거하고 있다. 거기 북한군 둔전은 다 해먹었군.

  1. 두공은 바깥 5포, 안 7포이다. 공포문서를 참고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흘림식 기둥에, 천장은 작은 널조각을 井자형으로 잇대어 짜서 평평한 딴 천장인 소란반자를 만들고 합각지붕을 씌웠다.
  2. 약사여래를 모시는 건물.
  3. 못을 하나도 쓰지 않았으며, 기둥 위 안팎으로 연꽃과 연잎모양의 제공을 붙인 포식 두공만을 여러 겹으로 짜올려 들보 없이 천장을 대신한 특이한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