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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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30대 문무왕 김법민31대 신문왕 김정명
당 작위 역대 계림주대도독
신규 책봉김법민도독부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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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호문무왕(文武王)
김(金)
법민(法敏)
생몰년도음력626년[2]~ 681년 7월 1일 (56세)
양력661년 ~ 681년 7월 21일
재위기간음력661년 ~ 681년 7월 1일 (21년)
양력661년 ~ 681년 7월 21일

1 개요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세운 왕이자 신라의 전성기를 연 임금 진흥왕:뭐?

신라 제30대 왕. 부친은 29대 태종 무열왕이고 모친은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이다. 그리고 여동생인 지소부인은 김유신의 부인 여동생이 외숙모 아니, 외삼촌이 매제 왕비는 자의왕후. 태자 시절부터 즉위 후까지도 문무 양면에서 활약한 그래서 文武王인가 숨겨진 먼치킨 군주. 본격 화전양면전술의 달인이다.

삼국유사》 원문에는 '문호왕(文虎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고려 제2대 왕인 혜종의 휘 무(武)를 피휘했기 때문.[3]

2 출생과 즉위 전

諱法敏 太宗王之元子 母金氏文明王后 蘇判舒玄之季女 庾信之妹也

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무열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막내딸이고 유신(庾信)의 누이이다.


삼국사기

김춘추문명왕후의 일화를 토대로 속도위반으로 태어났다는 드립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다. 태아 상태에서 죽을 뻔한 걸 살려준 선덕여왕은 생명의 은인? 다만 이 추측은 무리가 있는 게, 문무왕이 문명왕후의 첫째 아이라는 기록은 《삼국사기》 기록이고, 속도위반 이야기는 《삼국유사》 기록이다. 다시 말하면 2개의 기록을 섞어서 만든 스토리다. 문명왕후 참조. 부모의 혈통을 따지고 보면 신라 왕실과 가야 왕실의 피를 한몸에 담고 태어난 셈이다.[4]삼국사기》에서 왕의 본기 도입부에는 항상 왕에 대한 찬평이 간략하게 나오곤 하는데(용모가 웅장했다거나, 백성을 사랑했다거나, 앞 일을 미리 예측할 줄 알았다거나 등) 문무왕은 영특,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 이런 건 립서비스가 대부분이지만 문무왕의 행적에 비춰보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진덕여왕 때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가기도 했으며 무열왕 재위시엔 대외정복사업에 일조를 했다.

二十一日 王遣太子法敏 領兵船一百艘 迎定方於德物島 定方謂法敏曰 "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南 與大王兵會 屠破義慈都城" 法敏曰 "大王立待大軍 如聞大將軍來 必蓐食而至" 定方喜 還遣法敏 徵新羅兵馬 法敏至 言定方軍勢甚盛 王喜不自勝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이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은 지금 대군(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숫고 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니,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삼국사기태종무열왕 7년 기사

660년에 백제를 치러온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을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서 맞이했으며 김유신과 함께 백제 공격에도 직접 참전했다. 특히 백제 공격 때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이 항복하자 문무왕은 부여융을 말 밑에 꿇어앉히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예전에 네 아비가 내 누이[5]를 억울하게 죽여서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했는데, 오늘 네 목숨은 내 손 안에 있구나"라고 꾸짖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누이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이 상당했던 모양인데, 은근히 한 성깔하는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시스콤인가? 사실 문무왕 법민과 그의 누이 고타소랑을 다룬 문학작품, 혹은 영상물에서 법민은 고타소를 매우 따랐던 남동생으로 기록된다. 누이가 시집을 가자 엉엉 우는 어린 아이로 묘사될 때도 있고, 누나를 잃고 난 뒤 유년기를 벗어나는 소년의 모습을 그려질 때도 있다. 연도를 짚어보면 누이 고타소를 잃었을 때 법민의 나이는 16~18세쯤으로 짐작되는데, 그 일로 인해 20년 간이나 두통을 앓았다고 본인 입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끔찍한 남매 사이였던 듯하다. 고타소의 죽음은 아버지 태종무열왕 김춘추나 문무왕에게 씻을 수 없는 상흔이 되어, 삼국통일 전쟁의 시작이 이 죽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시각까지 있을 정도다.

法敏跪隆於馬前 唾面罵曰 "向者 汝父枉殺我妹 埋之獄中 使我二十年間 痛心疾首 今日汝命在吾手中" 隆伏地無言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날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삼국사기태종무열왕 7년 기사

삼국사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삼국사기의 언어는 매우 정제되어 있고 우아하다. 그럼에도 때때로 시대적 상황이 손에 잡힐 듯이 쓰여진 문구가 있는데, 위에 있는 문무왕의 발언도 그 중 하나다. 걸러지지 않은 피 냄새와, 백제 신라 양국의 증오가 그대로 전해진다.

3 고구려 공격

이듬해 무열왕이 병사하자 이를 이어받아 즉위했으며 꾸준히 백제와 고구려 정벌에 힘을 기울였다. 문무왕 재위 2년째던 662년에 무열왕을 도와 백제 정복에 공이 컸던 대당장군 김진주와 그의 동생 남천주총관 김진흠을 직무태만으로 처형하고 그들의 일족까지 잡아 죽였는데 왕권을 공고히 하고 군기를 잡기 위한 시범 케이스로 삼은 걸로 추측된다. 이 일로 인해 훗날 나당전쟁시 당에 숙위하고 있던 김진주의 아들 김풍훈이 원한을 품고 향도를 자청해 당군에 합류하기도 했다.

대당 총관 진주(眞珠)와 남천주 총관 진흠(眞欽)이 거짓으로 병을 핑계삼아 한가로이 지내며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그들을 목베고 아울러 그 일족을 멸하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2년 기사

이 당시, 백제가 멸망하긴 했으나 복신과 도침을 중심으로 한 백제 부흥군이 세력을 떨쳤는데 왜국에서 부여풍이 합류하면서 그들 사이에 틈이 벌어졌고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등 자중지란을 벌였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663년 8월 17일에 국에서 보낸 구원병인 1만의 군사와 170척의 전함 등이 백제에 도착했으나 백강 하구에서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벌여 대패당했다. 결국 663년 9월 8일, 그들의 본거지인 주류성이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당했다.마지막 남은 백제 부흥군의 거점인 임존성지수신의 지휘하에 끝까지 버텼지만 결국 주류성 함락 2개월만에 임존성 또한 무너졌다.

백제가 없어지고 남은 고구려에 대해서도 문무왕은 줄기차게 공격을 명했다. 662년에 평양을 공격하다 역관광을 당하고 오도가도 못하던 소열에게 군량을 수송해주기도 했으며[6],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나서 고구려 부흥군이 줄기차게 활동했는데 검모잠이 이끄는 부흥군이 특히 세력을 떨쳤다. 검모잠은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왕으로 즉위시키고 당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안승에게 살해당했고 안승은 신라로 귀순했다.

문무왕은 생전의 무열왕이 그토록 바라던 백제 정복 사업을 완수하는데 성공할 뻔 했지만 역시나 생전의 무열왕과 김유신이 그토록 우려하던 당이 태클을 걸기 시작했다.

4 나당전쟁과 삼국통일 완수

사실, 당은 처음부터 신라에 영토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다음 신라까지 멸망시켜 한반도를 통째로 삼키려고 했다.

일례로 사비성을 점령하고 백제를 무너뜨린 뒤 당은 백제 전토를 5등분해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도독부로 나누어 통치했으며 663년에는 일방적으로 신라에 계림 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임명했다[7]

옛 백제의 5도독부들은 백제 부흥군의 저항과 신라의 공격으로 유명무실해졌으며, 계림 도독부는 당연하지만 나당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함으로서 끝나버렸다.[8]

西海史冶島 見高句麗大臣淵淨土之子安勝 迎致漢城中 奉以爲君 遣小兄多式等 哀告曰 "興滅國繼絶世 天下之公義也 惟大國是望 我國先王以 失道見滅 今臣等得國貴族安勝 奉以爲君 願作藩屛 永世盡忠" 王處之國西金馬渚

서해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 다음과 같이 슬피 고하였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게 해주는 것은 천하의 올바른 도리이니 오직 대국에게 이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왕이 도를 잃어 멸망당하였으나, 지금 저희들은 본국의 귀족 안승을 맞아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바라건대 대국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살게 하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10년 기사

문무왕은 귀순한 안승을 금마저[9]에 정착시켰고 670년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했다. 순순히 물러갈 생각이 없는 당에 대항하기 위해 옛 백제인들과 고구려인들을 이때부터 '일통삼한'의 기치로 끌어모으기 시작한 듯하다.[10]

67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문무왕은 당나라에 대한 항쟁을 개시했으며 이에 대한 것은 나당전쟁을 참조할 것.

5 내정

내치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 앞서 썼던 김진주, 진흠 형제와 그 일족 몰살을 비롯해 당과 내통한 귀족들은 모조리 주살하는 등 강력하게 내부결속을 다졌고 9주 5소경의 근간을 마련했으며 통일신라의 군사체제 또한 문무왕의 재위 때 정비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병기를 녹여 농기구로 바꾸어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농업을 다시 회복시키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679년에 2월에는 궁궐을 화려하게 수리하고 월지(안압지) 부근에 동궁을 건설했으며 이 해에 왕경 남쪽의 남산성을 증축하는 대대적 토목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재위 말년인 681년에는 도성 주위를 빙 둘러싼 성벽을 지으려고 했지만 의상대사의 간언[11]을 듣고 그만두었다. 문무왕 입장에서는 중국의 도성을 본따서 서라벌을 규격화된 수도로 리모델링하려는 의도였던 듯. 아니면 나당전쟁까지 내내 마음 졸이며 살았던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든지. 하지만 전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대적 토목 공사를 벌인 것은 분명 백성에게 무리가 가는 조치였다.

6 죽음과 호국대룡 전설

문무왕은 681년 음력 7월 1일에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김유신과 사망일이 같다. 《삼국사기》 문무왕본기 마지막을 보면 문무왕의 유조 전문이 실려있는데, 이를 보면 문무왕은 자신의 치적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한일통도 완수하고 민생도 안정시켜 태평성대의 기반을 닦았고 물론 재위 말년에는 토목질도 했었지만 당시 초강대국 당에 맞서 나라를 지켜냈으니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하다.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능히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자들을 치고 협조하는 자들을 불러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오랜 원한을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두루 상을 주었고,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벼슬에 통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살게 하였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살펴주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이 풍족하며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언덕과 산처럼 쌓였고 감옥에는 풀이 무성하게 되니, 혼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삼국사기》 문무왕본기 문무왕 21년에 수록된 문무왕 유조 중에서

문무왕의 유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다고 평소에 말했으며 이에 따라 화장하라는 유언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낭산 기슭 능지에서 화장한 뒤 동해 바다에 능을 조성했는데 오늘날의 '대왕암'이 문무대왕릉으로 전해져 온다. 다만 사실 대왕암이 문무왕릉이라는 정설은 없으며 그냥 전해져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울산 앞바다에 있는 고래바위라는 설도 있다.

왕이 평소에 항상 지의법사에게 이르기를 "짐은 죽은 뒤에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법사가 말하기를, "용이란 축생의 업보인데 어찌합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랜지라,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된다면 짐의 뜻에 합당하다."고 하였다.

삼국유사》기이 제2, 문무왕 법민

그리고 이 되어 신라를 수호하겠다고 한 유언에 따라 감은사를 세웠다.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고 한 《삼국유사》의 유언을 토대로 왜가 신라에 위협적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통일신라인들이 일본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무시하고 얕잡아보는 태도가 보인다. 사실 문무왕 치세는 일본의 침입보다는 당의 재침이 더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다만 신라의 삼한일통 이후에도 몇 번이고 일본은 신라를 침공할 계획을 하였고 실시하였다(성덕왕경덕왕 때). 모두 무산되거나 격퇴되었지만.

전설에 따르면 동해에 섬이 많았는데 문무왕이 왜구가 터를 잡고 사니까 한반도의 맥이 자리잡은 울릉도 빼고 다 뽀개버렸다(...)고도 한다. 실제로 울릉도 주변에 해산이 꽤나 자리잡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있었던 지진 등의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일지도 모른다. 지진운이라는 것도 있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더.

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삼국사기》에서는 56명의 신라 군주들 중 유일하게 두 권의 분량을 차지한 위엄 있는 왕이다. 《삼국사기》의 권6, 권7이 모두 문무왕본기이다.[12] 어쨌든 여러 이야기거리를 남긴 것도 그렇고 호국용 전설이나 신문왕 때 만파식적을 주는 것도 그렇고 문무왕은 무열왕 못지않게 신라인들에게 굉장히 특별한 의미로 기억된 군주였던 것 같다.

文武大王之理國也 早應天成家邦(마멸자)晏 恩開大造功莫能宣

문무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림에 일찍이 하늘의 부름에 의해 천하를 편안히 하시고, 은혜를 여시어 크게 이루어졌으니 그 공을 능히 선양하기 어렵다.


애장왕 때 건립된 고선사 서당화상탑비 중에서

7 삼국사기 기록

7.1 삼국사기 6권

一年 문무왕이 왕위에 오르다
一年夏六月 숙위 인문과 유돈 등이 황제의 명령을 전하다
一年秋七月十七日 김유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一年秋八月 대왕이 백제의 남은 무리를 타이르다
一年秋九月十九日 대왕이 총관과 대감의 서약을 받다
一年秋九月二十五日 군사들이 옹산성을 포위하다
一年秋九月二十七日 옹산성을 쳐서 항복을 받다
一年秋九月 옹산성 함락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을 주다
一年秋九月 웅현성을 쌓다
一年秋九月 상주 총관 품일이 우술성을 함락하다
一年秋九月 달솔 조복과 은솔 파가에게 관직과 토지 등을 내려주다
一年冬十月二十九日 당나라 사신이 와서 선왕의 제사를 지내다
一年冬十月二十九日 당나라 황제가 평양으로 군사의 양식을 보내라고 명령하다
二年春一月 당나라 사신이 왕을 책봉을 하다
二年春一月 문훈을 중시로 삼다
二年春一月 양식을 싣고 평양으로 가라고 하다
二年春一月十八日 유신 등 아홉 장군이 풍수촌에서 묵다
二年春一月二十三日 유신 등 아홉 장군이 산양에 이르다
二年春一月二十三日 성천 등이 이현에서 적의 군사를 물리치다
二年春二月一日 아홉 장군이 당의 군영에 사람을 보내다
二年春二月六日 아홉 장군이당 군사에게 군량미를 전하다
二年春二月 아홉 장군이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물리치다
二年春二月 왕이 유신과 인문에게 재물과 토지, 노비를 내리다
二年春二月 영묘사에 불이 나다
二年春二月 탐라국이 항복하여 속국이 되다
二年春三月 왕이 죄수를 풀어주고 큰 잔치를 베풀다
二年秋七月 김인문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다
二年秋八月 흠순 등이 백제의 남은 적을 물리치다
二年秋八月 진주와 진흠 등을 죽이다
二年秋八月 여동이 벼락에 맞아 죽다
二年 남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치다
三年春一月 남산신성에 장창을 짓다
三年春一月 부산성을 쌓다
三年春二月 흠순과 천존이 거열성을 공격하여 승리하다
三年春二月 흠순과 천존이거물성·사평성·덕안성을 함락하다
三年夏四月 당나라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왕에게 대도독의 관작을 내리다
三年夏五月 영묘사의 문에 벼락이 치다
三年 복신과 도침이 부여풍과 함께 부흥을 꾀하다
三年冬十月二十一日 지수신을 공격하다
三年冬十一月四日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을 주다
四年春一月 김유신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다
四年春一月 군관을 한산주 도독으로 삼다
四年春一月 부인들에게 중국의 의복을 입도록 하다
四年春二月 여러 왕의 능원에 백성을 이주시키다
四年春二月 김인문, 유인원, 부여륭 등이 웅진에서 맹약을 하다
四年春三月 반란을 일으킨 백제의 무리를 물리치다
四年 지진이 일어나다
四年 성천과 구일 등에게 당 음악을 배우게 하다
四年秋七月 인문 등에게 고구려 돌사성의 공격을 명령하다
四年秋八月十四日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다
四年 함부로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지하다
五年春二月 이찬 진복을 중시로 삼다
五年春二月 이찬 문왕이 죽자 왕자의 예로 장례를 치루다
五年秋八月 왕이 유인원, 부여융과 함께 웅진의 취리산에서 맹세를 맺다
五年秋八月 왕자 정명을 태자로 삼다
五年 백성을 동원하여 군대에 쓸 물건을 하서주로 옮기다
五年 비단 한 필의 기준이 바뀌다
六年春二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六年夏四月 영묘사에 불이 나다
六年夏四月 나마 한림과 삼광이 당에 들어가 숙위하다
六年夏四月 왕이 당에 군사를 요청하다
六年冬十二月 당의 이적과 학처준이 연정토의 항복을 받다
七年秋七月 큰 잔치를 베풀다
七年秋七月 당 황제가 지경과 개원을 장군으로, 일원을 운휘장군으로 삼다
七年秋七月 대나마 즙항세를 보내어 당에 조공하다
七年秋七月 당 고종이 신라 군사가 평양에 모이도록 명령하다
七年秋八月 왕이 장군을 이끌고 출정하다
七年秋九月 왕이 한성정에 도착하다
七年冬十月二日 영공이 대왕에게 편지를 보내다
七年冬十一月十一日 왕이 영공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돌리다
七年冬十二月 중시 문훈이 죽다
七年冬十二月 왕이 대장군의 정절을 받다
八年 아마가 와서 항복하다
八年春三月 파진찬 지경을 중시로 삼다
八年 파진찬 용문을 비열홀주 총관으로 삼다
八年夏四月 꼬리별이 천선을 지키다
八年夏六月十二日 유인궤와 김삼광이 당항진에 도착하다
八年夏六月二十一日 여러 사람을 총관으로 삼다
八年夏六月二十二日 고구려의 군, 성이 귀순하고 인문 등이 당 군영으로 나아가다
八年夏六月二十七日 왕이 당 군영으로 나아가다
八年夏六月二十九日 여러 도의 총관들이 행군하다
八年秋七月十六日 당 군대와 회합하라고 명령하다
八年秋九月二十一日 고구려 왕이 항복하다
八年冬十月二十二日 고구려 정벌에 대한 공을 포상하다
八年冬十月二十五日 국원 사신 용장의 잔치 대접을 받다
八年冬十一月五日 고구려 포로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오다
八年冬十一月六日 문무 관료를 이끌고 선조의 사당을 찾다
八年冬十一月十八日 전쟁에서 죽은 자를 포상하다
八年冬十二月 영묘사에 불이 나다
九年春一月 신혜법사를 정관대서성으로 삼다
九年春一月 승려 법안이 자석을 구하다
九年春二月二十一日 신하에게 교서를 내리다
九年夏五月 천정군 등 세 군의 백성을 진휼하다
九年夏五月 당에 자석을 바치고, 흠순과 양도를 보내 사죄하다
九年 사찬 구진천이 당에 들어가 쇠뇌를 만들다
九年 여러 신하에게 목장을 나누어 주다
十年春一月 당에 억류되었던 양도가 죽다
十年春三月 설오유가 고연무와 함께 옥골에 나아가다
十年夏四月四日 설오유와 고연무가 말갈 군사를 크게 무찌르다
十年夏六月 모잠이 안승을 임금으로 받들어 귀순하자 이들을 금마저에 머물게 하다
十年夏六月 한 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은 여자에게 벼를 주다
十年秋七月 백제의 남은 무리를 여러 곳에서 물리치다
十年秋七月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봉하고 책문을 전하다
十年冬十二月 토성이 달에 들어가다
十年冬十二月 중시 지경이 물러나다
十年冬十二月 왜국이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고 하다
十年冬十二月 수세와 진주가 백제의 남은 무리를 진압하다

7.2 삼국사기 7권

十一年春一月 이찬 예원을 중시로 삼다
十一年春一月 백제에 쳐들어갔다가 당주 부과가 죽다
十一年春一月 말갈 군사의 목을 베다
十一年春一月 당 군사의 침공에 대비하여 옹포를 지키게 하다
十一年春一月 흰 물고기가 뛰어 들어가다
十一年夏四月 흥륜사 남문에 벼락이 치다
十一年夏六月 장군 죽지 등이 백제 가림성의 벼를 밟다
十一年夏六月 당 군사와 석성에서 싸우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당 총관 설인귀가 왕에게 편지를 보내 회유하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문무대왕이 설인귀에게 답서를 보내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소부리주를 두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삼다
十一年秋九月 당 장군 고간 등이 대방을 쳐들어오다
十一年冬十月六日 당 조운선을 치다
十二年春一月 백제의 고성성을 공격하여 이기다
十二年春二月 백제의 가림성을 이기지 못하다
十二年秋七月 당 장수 고간과 이근행이 평양에 군영을 설치하다
十二年秋八月 신라와 고구려 군사가 당나라와 싸우다
十二年秋八月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다
十二年秋九月 살별이 북쪽에서 일곱 번이나 나타나다
十二年秋九月 왕이 당에 용서를 구하다
十二年 사람들이 굶주리다
十三年春一月 커다란 별이 황룡사와 재성 사이에 떨어지다
十三年春一月 강수를 사찬으로 삼다
十三年春二月 서형산성을 늘려 쌓다
十三年夏六月 호랑이가 대궁 뜰에 들어오다
十三年秋七月一日 김유신이 죽다
十三年秋七月一日 반란을 일으키려던 아찬 대토를 죽이다
十三年秋八月 파진찬 천광을 중시로 삼다
十三年秋八月 사열산성을 늘려 쌓다
十三年秋九月 국원성 등 여러 성을 쌓다
十三年秋九月 서해를 지키게 하다
十三年秋九月 당과 말갈·거란의 군사를 아홉번 싸워 물리치다
十三年 당과 거란·말갈 군사가 고구려의 여러 성을 공격하다
十三年 주군에 외사정을 두다
十三年 국경을 지키는 병사를 다시 두다
十四年春一月 대나마 덕복에 의해 새 역법을 사용하다
十四年春一月 당이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다
十四年春二月 궁궐 안에 연못을 파다
十四年秋七月 큰 바람이 황룡사의 불전을 무너뜨리다
十四年秋八月 왕이 서형산 아래에서 군대를 사열하다
十四年秋九月 의안법사를 대서성으로 삼다
十四年秋九月 안승을 보덕왕으로 봉하다
十四年秋九月 영묘사 앞 길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육진병법을 보다
十五年春一月 각 관청 및 주군에 구리 인장을 만들어 내려주다
十五年春二月 유인궤가 칠중성을 공격하자 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다
十五年秋九月 설인귀가 천성을 치자 맞서 싸워 크게 이기다
十五年秋九月二十九日 이근행이 매초성에 진을 치자 공격하여 내몰다
十五年秋九月 사신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十五年秋九月 안북하를 따라 관과 성을 설치하다
十五年秋九月 말갈이 아달성을 노략질하자 소나가 맞서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九月 당 군사와 거란·말갈 군사가 칠중성을 포위하자 유동이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九月 말갈이 적목성을 에워싸서 공격하자 탈기가 맞서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九月 당 군사가 석현성을 빼앗자 선백과 실모 등이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九月 당 군사와 열여덟 번 싸워 전과를 올리다
十六年春二月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다
十五年秋七月 살별이 북하와 적수사이에서 나타나다
十五年秋七月 당 군사가 도림성을 공격하자 거시지가 맞서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七月 양궁을 짓다
十五年冬十一月 사찬 시득이 기벌포에서 설인귀와 싸워 이기다(나당전쟁 종전)
十五年冬十一月 재상 진순이 물러나기를 요청하자 안석과 지팡이를 주다
十七年春三月 왕이 강무전 남문에서 활쏘기를 보다
十七年春三月 좌사록관을 설치하다
十七年春三月 소부리주에서 횐 매를 바치다
十八年春一月 선부에 령 1인을 두다
十八年春一月 좌이방부와 우이방부에 경을 각각 1인씩을 더 두다
十八年春一月 북원소경을 설치하다
十八年春三月 대아찬 춘장을 중시로 삼다
十八年夏四月 아찬 천훈을 무진주 도독으로 삼다
十八年夏五月 북원에서 기이한 새를 바치다
十九年春一月 서불한 천존을 중시로 삼다
十九年春二月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다스리다
十九年春二月 궁궐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고치다
十九年夏四月 형혹이 우림을 지키다
十九年夏六月 태백이 달에 들어가고 별똥별이 삼대성을 침범하다
十九年秋八月 태백이 달에 들어가다
十九年秋八月 각간 천존이 죽다
十九年秋八月 동궁을 짓고 문의 이름을 정하다
十九年秋八月 사천왕사가 완성되다
十九年秋八月 남산성을 늘려 쌓다
二十年春二月 이찬 김군관을 상대등으로 삼다
二十年春三月 보덕왕 안승에게 예물을 주고 왕의 여동생의 딸과 혼인시키다
二十年夏五月 보덕왕 안승이 왕의 생질과의 결혼을 감사하다
二十年夏五月 가야군에 금관소경을 설치하다
二十一年春一月一日 하루 종일 밤처럼 어둡다
二十一年春一月 사찬 무선이 정예군사를 데리고 비열홀을 지키다
二十一年春一月 우사록관을 두다
二十一年夏五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一年夏五月 별똥별이 삼대성을 침범하다
二十一年夏六月 천구가 서남쪽에 떨어지다
二十一年夏六月 성을 새로 쌓으려고 하다
一年秋七月一日 문무왕이 죽다

삼국사기에서 고구려보장왕과 더불어 유이하게 책 2권 분량의 기록을 갖고 있다. 위에 보면 알겠지만, 기록의 양이 매우 많다. 신라의 왕들, 아니 삼국사기에 기록된 삼국시대의 모든 왕들 중에서도 기록의 양이 TOP. 그 양이 많아 한참 후대인 고려시대의 웬만한 왕들을 능가할 정도. 한국 고대사의 왕들 기록이 문무왕 정도만큼만 남았어도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축복이었을 것이다.

현실은 안타깝게도 백제개루왕처럼 39년 재위기간 동안 기록이 고작 7줄 남아있거나, 수많은 고조선, 삼한, 부여, 가야의 왕들처럼 이름조차 제대로 안 전해지는 게 더 많다.

덤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 중에서 고구려왕은 보장왕의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있으며, 백제는 의외로 시조인 온조왕이다.

8 오늘날의 문무왕

  • 충무공 이순신급 2번함(DDH-976)의 함명인 문무대왕함은 문무왕을 유래로 하고 있다.
  • 사극에서는 아버지 무열왕이나 외삼촌인 김유신에 비해 비교적 비중이 적은 편이다. 삼국통일기의 전쟁에서 문무왕의 활약은 아버지나 외삼촌 못지 않은데, 태자 시절 백제 공격 때는 김유신과 함께 직접 백제를 공격하기도 했고 고구려 멸망이나 나당전쟁 승전은 문무왕 치세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나 삼국통일기를 다룬 사극들이 통일전쟁의 서막을 연 무열왕과 김유신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한 세대 뒤의 문무왕은 그저 이들이 주도한 통일 사업을 마무리하는 군주 정도로 간략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마치 삼국지에서 도원결의~제갈량 사망까지만 상세하게 나오고 그 뒤는 아예 생략하거나 대충 넘어가는 것과도 비슷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그 업적이나 중요도에 비해 사극에서 크게 조명받지 못한 역사 인물이다. 삼국지도 그렇듯 후반부까지 똑같은 비중으로 제대로 다루기엔 초반부터 달려온 작가의 필력과 근성 문제나 사극의 경우 전쟁씬 연출의 체력적ᆞ비용적 부담이 큰 것으로 보인다.
  • 대조영에서는 고구려 부흥 운동에 나선 대조영 일행을 지원해주기도 한다. 이는 문무왕이 대당전쟁을 위해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한 것에서 따온 묘사이다.
  • 후속작 평양성에서는 배우가 황정민으로 변경되었다. 여기서는 김유신 못지 않은 능구렁이. 전작의 좀 어리숙한 태자에서 벗어나 제법 정치 경험을 쌓은 모습이 엿보인다. 첫 장면에서 당 고종에게 비굴한 듯 보여도 백제 땅 달라고 깐죽대며, 당나라 장군 이적이 뭐라고 하자 "니는 주디 닥치라! 지금 왕들 얘기해싸는데 어디 쳐늙은 게!"라고 일갈하는 장면은 백미. 평양성이 함락된 후 이적 행위를 했단 이유로 김유신과 신라군이 몰릴 때 대군을 이끌고 평양에 입성해 이적에게 "(웃으면서) 지랄하네. 우린 15만인데, 당나라 느그들은 얼마나 남았노? 엉? 고마 확 씨, 한 판 붙어볼까?" 대동강 이남은 신라 땅이라고 주장하며, 나당전쟁의 떡밥을 뿌린다.
  • 게임 천년의 신화에서는 신라의 영웅으로 등장. 어째 공격 모션이 허세 모션이라 공속이 느리다. 그런데 특수기로 메테오 유성술을 사용하여 적을 학살하거나 적 진영을 초토화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복불복이라 그렇지

8.1 드라마 대왕의 꿈

대왕의 꿈에서는 주인공 김춘추의 아들로 나온다. 그러나 역사적 행적으로 볼 때 극이 전개될수록 극의 중심인물이 될 것이다. 아역 배우는 김진성, 성인 배역은 이종수로 결정되었다. 재미있게도 이종수는 SBS 연개소문에서 청년 시절의 김유신 역을 맡았다.

아역 분량에서는 성깔 있는 아이로 그려진다. 글공부보다는 무예를 좋아하는 듯하며 언젠가 삼한을 호령하는 장수가 되어 무례한 당의 사신의 볼기를 칠 것이라고 김춘추에게 말했다. 실제 나당전쟁의 총 지휘관이었던 만큼 어떤 의미에서는 복선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타소의 복수를 했을 때의 사실을 반영한 건지 어째 누이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설정이 붙은 듯하다. 동생(김인문)을 임신한 문희와 함께 덕만공주의 처소를 방문했을 때 덕만이 사내동생이 좋냐, 누이동생이 좋냐고 묻자 '전 고타소 누이만 있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동생이 뒷날 삼국통일 전쟁에서 엄청난 도움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채[13]

극중에서 시노의 딸(사실은 승만왕후의 딸)인 연화에게 반했는데 승만왕후의 아들(사실은 바꿔치기한 유랑민 출신의 아이)인 원자 만화가 연화를 괴롭히자 성질을 못 이기고 달려들어 원자를 때려눕힌다. 물론 문희에게 뺨까지 맞으며 승만에게 데꿀멍.[14] 문희에게 엄한 가르침을 받고 성장.

장성해서는 김유신의 아들이자 외사촌인 김삼광, 그리고 자신을 형님으로 모시는 화랑인 천광[15]과 함께 백제 국경에 가서 백제 병사들을 도발하는 행동을 하는 게 첫 등장. 불 같은 성격도 여전해서 차분한 성품의 동생 김인문과 티격태격한다. 어릴 때 만났고 장성해서 기녀로서 비담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연화와는 플래그가 서 있었으나 비담의 난이 진압된 후 연화는 자결.

비담의 난 전에는 철 없는 김춘추의 아들이라는 인상이 더 강했지만 김춘추와 김유신의 지도 아래 성장해 가는 성장형 캐릭터이다. 특히 비담의 난 이후에는 다혈질인 성격은 여전하지만 어느 정도 통찰력도 있고 지도력을 갖춘 인물로 성장했다. 그러나 아버지 김춘추와 동생 김인문의 친당정책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어 태자가 된 후에는 아버지보다는 외숙인 김유신과 많이 가까워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을 알고는 아버지와 화해했고 아버지가 죽은 후 왕이 되어 고구려 원정과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삼한을 통일한다. 문제는 이 드라마에서 문무왕 재위기는 단 4회 분량이었다는 것. 또한 나당전쟁 와중에 당으로부터 신라 왕으로 임명된 동생 김인문과는 끝내 돌아서게 된다.

드라마 마지막 장면에서는 등장인물들과 함께 해변가에서 말을 달리며 마지막 장면을 장식했는데 그 해변이 바로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경주 대왕암 해변가이다. 그 장면에서 바다 위의 대왕암을 볼 수 있다.

참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 삼국통일전쟁

  1. 경주시 통일전에 있는 문무왕 표준영정. 김기창 화백의 작품이다. 무열왕 표준영정과 혼동되는 경우도 많다.
  2.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의 생년이나 수명이 기록되어있지 않다. 이 생년은 문무대왕비에 기록되어있는 왕이 죽었을 때 56세였다는 부분에서 역산한 생년. 《삼국유사》에서 아버지 김춘추와 어머니 문희의 만남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에서 이를 해결해주는 사람이 선덕여왕인데, 626년은 진평왕 재위기다. 문희와의 에피소드가 선덕여왕이 공주였을 때 있었던 에피소드로 해석하는 설이 이런 이유 때문에 생겼다.
  3. 비슷한 사례로 고려시대에 문무 양방 중 무반을 호반(虎班)이라고 불렀다. 한자 '武'를 흔히 '호반 무'라고 읽는 것도 여기서 유래. 결국 '무반 무'인 셈이다.
  4. 그래서인지 문무왕도 가야 멸망 후 제대로 제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김수로의 제사와 능역 관리에 신경을 썼다.
  5. 선덕여왕 재위기인 642년, 윤충이 이끄는 백제군에게 함락된 대야성에서 죽은 대야성주 김품석의 아내인 고타소는 문무왕의 누이다. 아버지인 무열왕은 고타소의 죽음을 듣고 하루종일 정신 나간 사람처럼 기둥에 선 채로 있었으며 앞에 뭔가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6. 이걸 근거로 김유신을 까는 자들은 김유신을 쌀배달꾼이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7. 게다가 이미 멸망한 나라인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취리산에서 문무왕과 화맹을 맺게 한것을 보면 당이 신라를 나라가 아니라 자기네 행정구역으로 취급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8. 물론 당이 이를 정식으로 인정한 건 후의 일이다.
  9. 현재의 익산. 즉, 옛 백제 땅 이다. 그것도 백제 무왕미륵사와 왕궁을 세웠을 정도로 사비, 웅진 다음가는 백제의 중심 지역. 즉 고구려인을 이용해 백제인을 견제한 것이다.근데 고구려와 백제도 같은 혈통이지 않나?
  10. 신라의 9서당 중 신라인이 아닌 백제인, 고구려, 말갈인들로 구성된 부대가 무려 6개다.
  11. "비록 들판의 띠로 엮은 집에 살아도 바른 도를 행하면 그것이 곧 복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제아무리 사람을 힘들게 하여 성을 쌓아도 이익되는 바가 없습니다".
  12. 참고로 고구려의 경우 보장왕본기가 두 권의 분량(《삼국사기》 권21, 22)을 차지하고 있으며 백제는 의자왕본기가 한 권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삼국사기》 권28).
  13. 화랑세기》의 설정이 일부 반영된 극중에서는 이복남매지만 《삼국사기》에서 문무왕과 고타소는 둘 다 문희의 소생으로 엄연한 동복남매다. 이랬건 저랬건 남매 사이가 좋았던 건 틀림없는 듯. 가족이니 당연한 것 아닌가?
  14. 사실 승만에게 데꿀멍한 것보다는 문희에게 뺨을 맞은 게 더 큰 충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승만도 문희의 행동에 다소 놀랄 정도였으니.
  15. 실존인물로 고구려 원정과 나당전쟁 때 장수로 활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