젝스키스/음반

1 정규 앨범

1.1 1997년

1.1.1 정규 1집 Sechs Kies

1집 Sechs Kies
  • 주요 활동 곡
    • 학원별곡 (데뷔곡)[1]
    • 사나이 가는 길(폼생폼사)[2]
    • 연정
    • 배신감
    • 기억해줄래

4월 15일 KMTV 《쇼 뮤직탱크》에서 1집 수록곡 "학원별곡"으로 방송 데뷔 후 4월 18일 SBS 《충전 100% 쇼》에서 공중파 데뷔 무대를 가졌다. 데뷔곡 학원별곡은 당시 문제였던 성적지상주의의 교육문제를 비판한 가사와 강한 비트의 랩에 타령을 하는 듯한 노래로 10대 연령층의 이목을 끌었고 아크로바틱한 춤과 백다운 퍼포먼스, 실력있는 라이브 무대를 많이 선보이면서 가요톱텐에서 10위 권대에 랭크되었다. 데뷔 초 예능에서 부산 출신 멤버 김재덕의 화려한 춤과 부산 사투리로 인기몰이를 했으며, KBS 2TV <토요일 전원 출발 - 젝스키스의 학원별곡>이라는 고정 코너에 출연하면서 젝스키스의 이름을 알렸다. 참고로 학원별곡 후반부에서 소찬휘의 코러스를 들을 수 있다. 2016년 무한도전에서 은지원 강성훈은 이 곡을 싫어한다고 밝혔다. 특히 은지원은 "전사의 후예는 멋있는데 이 노래는 구리다"라고까지 했다.(...) 반면 김재덕, 이재진은 학원별곡이 나름 마음에 들었던 듯하다.

이후 여름에 후속곡 박근태(작곡가)의 "사나이 가는 길(폼생폼사)"가 대박이 나면서 톱아이돌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데뷔 당시 고지용이 이 곡으로 활동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으나, 은지원이 이 곡으로 무대에 오르자고 밀어붙였다. 그렇게 폼생폼사는 수록곡1로 묻힐 위기에서 벗어났다. 학원별곡과는 달리 신나고 대중적인 곡으로 다양한 연령층에게 사랑받으면서 가요프로그램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으며 후에 젝스키스의 히트곡으로 기억되고 있다. 젝스키스 멤버들이 연습생이었고 박근태 작곡가 역시 20대 초중반의 신인인 시절, 이호연 사장과 인연이 있어서 같이 작업을 하게 됐다고 한다. 당시 H.O.T가 히트치면서 시장 판도가 바뀌자 전략을 전체적으로 수정해 좀 더 대중적으로 가자고 해서 나온 곡이 '폼생폼사'라고 한다.원문기사

6월 19일 CF 데뷔와 더불어 7월 17일에는 팬클럽 "DSF" 창단식을 가졌다.
1집 활동 중간 중간에 댄스곡인 "연정", "배신감" 등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발라드 곡 "기억해줄래"로 활동을 마무리하였다. "기억해줄래"는 젝스키스의 발라드 중 팬들에게 손꼽히는 명곡이다. 이 곡 역시 박근태 작곡가의 곡이다.

학원별곡 데뷔 무대 영상

폼생폼사 Live 무대 영상

KBS 2TV 가요톱10에서 방영된 폼생폼사 라이브 무대 장면이다.

연정 Live 무대 영상

배신감 무대 영상

기억해줄래 무대 영상

한국영상음반협회#- 52만 장

한국닷컴 스타스토리 - Sechs kies 中#- 60만 장 돌파
원문: 어쨌든 우리 젝스키스는 <학원별곡>에 이어 <연정>, <폼생폼사>를 연이어 히트시키며 불과 데뷔 3달 만에 가요계 정상 우뚝 선 그룹으로 발전했다. 앨범판매도 60만장이 넘어섰다고 한다.

1997년 9월 2일 일간스포츠 中#- 60만 장 돌파
원문: 지난 5월 첫선을 보인 젝스키스는 여름동안 <학원별곡> <연정> <폼생폼사> <배신감>을 연속 히트시켰으며 가을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 발라드풍의 <기억해줄래>가 또 인기순위 20위권안으로 올라서 빅히트앨범을 탄생시키고 있다.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한 앨범에서 5곡을 연속 히트시키는 것은 드문일로 젝스키스의 저력을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 5곡이 히트되면서 앨범판매량도 이미 60만장을 돌파했으며 요즘도 하루에 5~8천장의 주문이 꾸준히 밀려들고 있다. 1~2달 반짝 히트하다 사라지는 여타 댄스그룹의 앨범과는 다른 모습이다. 음반제작자들이 가장 꺼리는 반품 또한 전혀 없어 80만장의 판매는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1.1.2 정규 2집 Welcome To The Sechs Kies Land

2집 Welcome To The Sechs Kies Land
  • 주요 활동 곡
    • 기사도(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3]
    • 탈출
    • 말괄량이 길들이기
    • 거절의 이유

11월 13일, 1집 활동 종료 한 달 만에 2집을 발표하고 타이틀 곡 "기사도"로 컴백한다. 중독성 넘치는 후렴구로 많은 사랑을 받은 "기사도" 외에도 하우스, 펑크, 힙합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한 앨범이며, 인기 상위권 댄스 그룹으로서의 입지를 굳힌다. SBS TV 가요 20에서는 기사도로 3주 연속 1위를 차지했으며, 가요톱텐에서는 1위 후보에 여러 번 올랐다. 또한 12월 4일 SBS 가요대상 본상, 12월 14일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 KMTV 가요대상 신인상, 12월 3일 KBS 가요대상 본상, 12월 31일 MBC 가요대제전 가수상 등 여러 시상식을 휩쓸면서 큰 전성기를 누렸다.

12월 21일, 댄스 그룹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가진 단독 콘서트는 대형 사고에 대비한 수억 원의 보험 가입, 예매 5시간 만에 티켓 매진 등 화제를 낳았으며 타이틀 곡 활동 이후 "탈출", "말괄량이 길들이기", "거절의 이유"로 후속 활동을 이어갔다.

기사도 Live 무대 영상

탈출 무대 영상

거절의 이유 Live 무대 영상

사랑하는 너에게 Live 무대 영상

하얀 밤에 Live 무대 영상

말괄량이 길들이기 무대 영상

젝키의 크리스마스 무대 영상

1997년 12월 10일 동아일보 中#>- 70만 장
한국영상음반협회#- 70만 장

1.1.3 정규 1집, 2집 음반판매량 합산수치 축소 의혹

한국음반영상협회##- 122만 장(1집 52만 장+2집 70만 장)
1997년 스포츠 조선#- 170만 장[4]
2001년 9월 강성훈 도전천곡 중#- 120만 장
2012년 오마이뉴스 젝스키스 前 매니저 김기영#: 젝스키스 데뷔앨범이 170~180만 장

김기영의 젝스키스 데뷔앨범 170~180만 장 발언은 1, 2집의 합산 수치가 170만 장이라는 당시 스포츠 조선 기사와 일견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김기영의 이 발언은 위의 정보들을 종합해서 볼 때, 오류가 있는 것으로 그 실상은 활동기간의 차이가 불과 한 달 밖에 없는 1, 2집을 합산한 수치를 일컬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강성훈의 폼생폼사 앨범이 120만 장 나갔다는 발언 역시 김기영의 발언과 마찬가지로 1, 2집을 합산한 수치를 일컬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는 DSP가 한국음반영상협회에 제출한 젝스키스 1, 2집의 합산 수치인 122만 장과 상통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1, 2집을 합산한 공식집계인 122만 장과 언론 및 관계자의 170~180만 장의 차이는 지나치게 크다. 이러한 차이는 후술에 언급됐듯이 DSP의 세금탈세를 위한 음반판매량 축소 의혹을 들게 한다. 만일 122만 장이 아니라 170~180만 장 맞다면 젝스키스 1, 2집은 도식적으로 볼 때, 각각 85만~90만 장 판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2 1998년

1월 30일에 젝스키스 결성 1주년 기념식을 과천시민회관에서 개최하고 2월에 2집 활동을 마무리한다. 2월 말부터 4월까지 부산, 울산, 광주, 부천, 대구, 대전을 거친 전국 투어 콘서트를 진행했다. 1집과 2집의 공백이 거의 없다시피 했음에도 불구하고 2집 활동 이후 뮤지컬과 영화에서도 활동한다. 4월 25일부터 5월 5일까지 가수 "진주"와 함께 뮤지컬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공연을 가졌다. 7월 3일에 영화 "세븐틴" 시사회를 가졌고, 17일에 대한극장에서 영화가 개봉했다.

1.2.1 정규 3집 Road Fighter

3집 Road Fighter

젝스키스 최전성기의 시작이 되는 활동으로, 7월 5일 SBS 인기가요에서 "Road Fighter"와 "Crying Game"으로 컴백한다. 컴백 초반에 "Crying Game"으로 짦게 활동 후 1위까지 차지하지만 실질적인 타이틀곡은 "Road Fighter"이며, 강하고 남성적인 이미지의 무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8- 9월 전국 5개 도시 순회 드림 콘서트 공연을 했다. 9월 5일 012콘서트에서 후속곡 "무모한 사랑"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곡 또한 연이어 히트하였다. Say 역시 기억해줄래와 마찬가지로 팬들 사이에서 발라드 명곡으로 꼽히며 많은 남자 중고딩들이 노래방에서 불러제꼈다.

Crying Game 무대 영상

로드파이터 Live 무대 영상

무모한 사랑 Live 무대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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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 Live 무대 영상

약속된 운명 + Flying Love + Road Fighter 무대 영상

1.2.2 정규 3집 음반 판매량 축소 의혹

한국영상음반협회 4월~9월#- 226,569장

한국 음악 통계 연감#- 36만 장

1999년 1월 28일 한국일보#- 70만 장 이상[5]

위의 음반판매량 링크에서도 알 수 있듯이 DSP가 한국영상음반협회에 제출한 3집 음반판매량은 약 36만 장이고 언론과 젝스키스 본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3집 음반 판매량은 70만 장 이상이다. 특히 젝스키스 3집은 젝스키스 최전성기의 시작으로 H.O.T.로 시작되는 아이돌 그룹 중에서 최초로 단일앨범에서 3개의 곡이 1위를 달성한 앨범이다. 이에 대한 방증으로 젝스키스 3집 활동 당시 주요 1위 경쟁상대였던 김현정의 인기는 1집 앨범이 552,639장 판매되고, 그해 연말 시상식을 휩쓸 정도였는데, 이러한 김현정과의 1위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했다는 것[6]은 젝스키스의 3집 앨범이 상당히 선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DSP의 음반판매 축소 혐의가 반영된 공식집계는 신뢰하기 어려우며, 70만 장 이상이라는 기사가 보다 신뢰성이 강한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 젝스키스 3집의 음반 유통사는 킹레코드와 신나라 두곳으로, DSP는 이 중 신나라에서 집계된 음반판매량을 음협에 제출하였다. 젝스키스 해체 후 의혹이 일자 DSP는 신나라와 킹레코드는 같은 곳이라고 항변하였으나, 정작 유통사측에서는 서로 별개의 유통사라고 분명히 언급하였다.

1.2.3 3.5집 Sechs Kies Special

3.5집 Sechs Kies Special
  • 주요 활동 곡

10월 30일, 영화 세븐틴의 수록곡과 신곡을 더한 3.5집 스페셜 앨범을 발표하여 젝스키스 최고의 히트곡인 "커플"로 활동한다. 3.5집을 준비할 당시 이호연 사장은 은지원의 똥고집에 머리를 썩히다 은지원의 '자신이 다 책임지겠다'는 말에 결국 두손두발 다 들었다. 그렇게 커플이 3.5집 타이틀곡이 되었다.은지원의 선견지명 괜히 착한독재라 불리는 게 아니다 커플 때에는 사장이 반대하는 것이다보니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했다고 한다. 참고로 커플의 작곡가 마경식은, 노래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슬래쉬메탈 그룹 아발란쉬의 보컬이었다.가창력이 엄청나다 커플 이미지는 1도 안 떠오르는 모습이었다ㄷㄷ 사실 커플이 원래는 타이틀곡으로 지정 안됐다고 해서 소속사와 이호연 사장을 비난하기는 힘들다. 마경식은 작곡가로서 그때까지 제대로 된 히트곡이 없었다.# 게다가 기존에 해오던 음악과 정반대 느낌의 곡을 작곡해왔다. 우려가 클 수 밖에 없었다. 반면 3.5집의 '너를 보내며'를 작곡한 김석찬은, 얼마 전에 핑클내 남자친구에게로 초대박을 쳤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너를 보내며' 노래 자체도 충분히 타이틀곡으로 지정할만한 퀄리티다.# 회사 측에서는 커플을 타이틀곡으로 선정하는 것을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회사가 무능했던 것이 아니라, 은지원의 선구안이 뛰어났던 것이다.[7] 그동안 댄스곡 위주였던 분위기에서 탈피해 겨울에 어울리는 달콤한 사랑노래로 부드러운 분위기와 무대를 보여주며 10대뿐만 아니라 20대 이상에게서도 많은 사랑을 받는다. 11월 3일, KBS 뮤직뱅크에서 "커플"로 활동을 시작하여 3집의 "Road Fighter"와 "무모한 사랑"에 연이은 히트를 친다. "커플"은 대표적인 사랑노래로 자리잡아 현재까지도 연인들의 대표적인 노래방 커플곡이자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 또는 특별 공연 형태로 방송에서 종종 선보이는 명곡이다. 연말에는 각종 가요 시상식에서 본상을 수상하였고, 12월 18일 서울가요대상에서 H.O.T.와 공동 대상을 수상한다. 이후 1999년 1월 말까지 발라드곡 "너를 보내며"로 활동해 1위를 기록하며 3집과 스페셜 앨범 활동의 화룡점정을 찍는다. 이 앨범은 정규 앨범이 아닌 영화 세븐틴의 OST를 담은 앨범이지만 수록곡 규모나 활동 면에서 정규 앨범을 넘어서는 큰 인기를 누렸다.

커플 무대 영상

너를 보내며 무대 영상

1.2.4 3.5집 음반 판매량 축소 의혹

한국음반산업협회#- 305,307장

한국 음악 통계 연감#- 60만 장

은지원#- 100만 장 가까이(은지원은 1박 2일 등에서도 3.5집이 100만장 정도 판매되었다고 하였다.)

젝스키스 매니저였던 김기영은 1998년 13회 골든디스크 시상식을 회상하면서 젝스키스나 H.O.T.가 대상을 수상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김종환이 대상을 수상해서 의아했다는 인터뷰를 하였다.# 골든디스크는 음반판매량을 기준으로 심사하는데, 이는 당시 젝스키스가 골든디스크 대상을 노려볼 정도로 3.5집의 판매량에 자신이 있었다는 반증이다. 김종환 역시 당시 골든 디스크 대상은 H.O.T.나 젝스키스가 수상할 줄 알았다고 회상하였다.#
젝스키스는 3.5집으로 1998년 서울가요대상에서 H.O.T.와 공동대상 수상하고, 강타는 무릎팍도사에서 빛이 커플에게 졌다고 회고하였다.(다만 음반판매량에서 졌다는 말이 아니라 가요프로 순위에서 졌다는 말이었다.) 이를 종합해서 볼 때, 3.5집의 공식판매집계인 305,307이나 60만 장은 신뢰하기 어렵다. 또한 골든디스크는 음반판매량을 기준으로 심사하는데, 30만 장 판매고로 골든디스크 대상 수상 실패에 대해 아쉬워하는 것은 정황상으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30만 장 내지 60만 장 정도로 강타가 졌다고 판단할 수 없으며, H.O.T.와 서울가요대상을 공동수상하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결국 3.5집 판매량은 100만 장 정도라고 언급한 은지원의 발언에 신뢰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은지원은 해체 이후에도 지금까지 젝스키스에 대한 미화를 극도로 꺼리고, 지나칠 정도로 겸손한 편으로 이러한 그의 발언은 과장이 없는 발언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만일 한국 음악 통계 연감의 60만 장이 신나라 한 곳만의 집계를 반영한 것이라면 3.5집의 판매량은 그보다 2배 정도 판매된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1.3 1999년

2월 26~28일, 88체육관에서 단독 콘서트를 했다. 4월 18일에는 데뷔 2주년 기념식 & 팬클럽 창단식을 개최했다.

1.3.1 정규 4집 Com' Back

4집 Com' Back
  • 주요 활동 곡

8월 29일, 타이틀 곡 Com' Back으로 컴백한다. 9월 7일 출시한 4집 앨범은 여섯 멤버들의 자작곡과 함께 빅비트라는 새로운 장르인 "Com' Back"을 타이틀로 하여 거칠면서도 강한 남성적인 면모를 선보였다. 9월 23일에는 대만에서 앨범을 발매하였고, 10월 26- 31일 대만 프로모션 투어에 참여했다. 대만에서의 활동명은 수정남아(水晶男兒)였다. 10월 18일에는 MBC "젝키의 FM 플러스"로 라디오 DJ 활동을 시작했다. 10월부터는 후속곡 "예감"으로 활동하며 "Com' Back"과 달리 부드럽고 달콤한 무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10월과 11월에 젝스키스는 가요프로그램에서 조성모와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치열한 1위 쟁탈전을 벌였는데, 아무래도 팬덤에서 우세했던 젝스키스가 근소하게 우위를 확보하였다.[8] 당시 조성모의 대중성은 젝스키스를 압도했었는데, 이러한 조성모를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1위를 수상했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11월 29일, 같은 소속사의 핑클과 함께 2000 평화 친선음악회에 참가해 평양에서 공연을 하였다. 각종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 본상을 수상하며 12월 말부터 "예감"의 후속곡 "그대로 멈춰"로 2000년 1월 2일까지 활동했다.

Com'back 무대 영상

예감 Live 무대 영상

그녀가 남기고 간 선물

A+, 비, 그대로 멈춰 Live 무대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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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정규 4집 음반 판매량 축소 의혹

1999년 9월 10일 일간스포츠- 양일간 60만 장 젝스키스가 이틀동안 60만 장(첫날-35만 장, 이튿날- 25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고 하여 젝스키스는 자신들의 최고기록을 갱신하겠다는 자신감을 내비췄다고 언급하였다.[9]

출처 불명확 기사#- 9월 말경 젝스키스 4집은 7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었다.

1999년 10월 29일 한겨례#- 9월 한 달 동안 35만 장

한국음반산업협회#- 350,128장

한겨례 보도와 DSP가 제출한 한국음반산업협회의 공식집계는 서로 부합한다. 이에 젝스키스 팬들이 지속적으로 음반축소 혐의 의문을 표하자,[10] DSP는 2000년 1월 9일에 다음의 공식입장을 발표하였다.
DSP 공식입장

그러나 해당 의혹을 보도한 MBC <피자의 아침> 보도에 의하면 당시 도매상들은 젝스키스 4집 반품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국세청 관계자는 실제 협회나 공식적인 숫자와 실제 세무신고와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일단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한 반품율을 높이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1999년 12월 9일 튜브뮤직에서는 12월 당시 음반판매 2위가 젝스키스 4집이라고 하였다.
튜브뮤직 원문:
'99 Tube Music 베스트 판매 앨범 40·40 러브 레터·조성모, 각각 최다 판매 기록
Date : 1999-12-09
Writer : 송수연, 조은미 love41@tubemusic.com, jamogue@tubemusic.com
Illustrator : 박성균 올 한 해동안 튜브 고객들의 사랑을 받은 국내외 앨범들을 순위별로 집계했다. 국내 앨범 차트를 살펴보면 각기 다른 색깔들의 앨범들이 다양하게 올라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200만 장이라는 판매량을 보여준 99년 최고의 음반인 조성모의 For Your Soul이 당당히 1위의 자릴 차지하면서 TUBE에서도 2위는 그 뒤를 이어서 젝스키스의 4집 앨범 Com’Back과 국내 최고 아티스트 30팀이 참여해 화제를 모은 앨범인 Millennium Carol이 3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튜브뮤직에서 3위였던 캐롤 앨범은 12월에만 145,625장을 판매하였다.# 즉, 젝스키스 4집은 반품은 커녕 12월 음반판매순위에서도 압도적은 음반판매량을 자랑하는 조성모의 뒤를 이어 2위를 달리고 있었다.

한국 음악 통계 연감#- 42만 장

은지원(미소년통신, 해피투게더, 무한도전)- 50만 장

이를 종합해서 볼 때, 4집의 판매량은 크게 양일간 60만 장, 9월 말경 70만 장, 공식집계인 350,128장 혹은 42만 장, 은지원의 50만 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가운데 DSP의 공식입장이 반영된 공식집계인 35만 장은 신뢰하기 어렵다. DSP는 한달(혹은 첫날) 판매량이 총 판매량과 같은 원인이 반품 때문이라고 못 밖았으나, 이는 도매상들의 증언과 12월에도 음반이 계속 판매된 정황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탈세를 위해 음반판매 축소 등의 혐의로 조사 받은 DSP는 세무당국에 덕지 않은 세금을 물었다.# 그리고 그 추징금은 무려 수억원대였다.# 따라서 DSP의 입장이 반영된 공식집계는 신뢰할 수 어렵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젝스키스 음반판매량은 1, 2집부터 축소한 정황들이 지속적으로 포착됐다. DSP는 젝스키스에게 4집이 반품 때문에 50만 장 밖에 판매되지 않았다고 축소해서 말했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DSP는 반품율을 높이면서 35만 장으로 최종 축소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전술한 바와 같이 DSP는 수억원 대의 추징금을 납세해야 했다. 당시 젝스키스 4집의 앨범 유통사는 신나라와 대영AV였는데, 35만 장이라는 집계는 신나라 한 곳만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집계조차도 젝스키스의 4집 앨범이 9월 이후 팔리지 않고 반품되었다는 것이 전제된 집계이기 때문에 신나라에서 유통되어 판매된 젝스키스 4집의 총 앨범 판매량이 아니다. 결국 DSP는 9월 이후의 판매량은 음협에 제출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음악통계연감의 42만 장이라는 판매량은 신나라에서 유통된 젝스키스 4집 최종 최종판매량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도식적이긴 하지만, 대영AV와 신나라가 비슷하게 판매한 것으로 가정했을 때 젝스키스 4집 판매량은 대략 최소 84만 정도로 볼 여지가 있다. 4집에 대해서 보면, 강성훈이 솔로 시절에 한 방송에서 발끈하여 직접 120만장을 팔았다 말한 적이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보다 정확한 증거가 필요하다.[11] 참고로 1999년 H.O.T. 4집이 1,383.985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1.4 실질적인 음반판매량 추정

1.4.1 개요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젝스키스의 음반판매량은 공식 음반 판매량과 비공식 음반판매량(당사자, 매니저, 언론)에서 언급한 판매량 갭은 매우 크며, 공식 판매량(음반협회 & 한국음악통계연감) 조차도 일관적이지 않다. 그리고 공식집계 판매량은 DSP가 세무당국으로부터 탈세혐의로 수억원대의 추징금을 납세하게 된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 그 덕분에 젝스키스가 다른 1세대 아이돌들에 비해 심하게 저평가 받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아래의 집계는 상술했던 공식 집계와 비공식 집계를 한데 모은 것이다.

1.4.2 공식

1집- 52만 장
2집- 70만 장
3집- 36만 장
3.5집- 30만 장 혹은 60만 장
4집- 35만 장 혹은 42만 장
합계- 최소: 223만 장(음반협회 반영)
최대: 260만 장(한국음악통계연감 반영)

1.4.3 비공식

1집- 85만 장 혹은 90만 장
2집- 85만 장 혹은 90만 장
3집- 70만 장 이상
3.5집- 100만 장 정도 혹은 120만 장
4집- 84만 장 이상
합계- 최소: 424만 장(젝스키스 1, 2집의 합산 수치가 170만 장일 경우, 은지원이 수차례 언급한 젝스키스 3.5집 판매량이 100만 장)
최대: 454만 장(젝스키스 1, 2집의 합산 수치가 180만 장일 경우, 한국음악통계연감에 기록된 젝스키스 3.5집 판매량 60만 장이 신나라 한 곳만을 반영했을 경우)

1.4.4 결론

보다시피 공식집계와 비공식 집계가 무려 2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애시당초 DSP젝스키스의 음반판매량을 제대로 제출했다면 이렇게까지 들쑥날쑥하지 않았을 것이며, 젝스키스가 오늘 날까지 저평가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비공식 집계라고는 하나, 상당한 근거와 정황이 있기 때문에 팬들이 만들어낸 루머가 아니다. 하지만, 비공식 집계조차도 어디까지나 추정치가 반영돼었음을 염두하자.

1.5 살인 스케줄

당시 살인적인 스케줄을 감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97년 4월 15일 데뷔 이후 99년 1월 3.5집 활동 마감까지 엄청난 활동을 보여줬다.[12] 그 기간 동안 정규 앨범 3개[13], 스페셜 앨범 1개[14], 영화, 뮤지컬, 광고, 콘서트 등 휴식 기간이 없을 정도로 빡빡한 활동을 했고, 최근 예능에서 멤버들이 당시의 살인적인 스케줄을 언급하기도 했다. 영화는 아예 내용을 모르는 채로 현장에서 대사 외워서 찍었고, 노래 녹음도 다같이 모여서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소속사에서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냥 일방적으로 스케줄 통보만 계속 했다고 한다. 은지원은 매니저가 조금 자라고 집에 데려다 주길래 씻고 잘 준비를 했는데 매니저가 금방 다시 데리러와서, 빡친 나머지 뒤돌아 누운 채로 'XX, 너 같으면 일어나고 싶겠냐?'라고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당시 출연 안한 예능이 거의 없을 정도다. 이후 처음으로 휴식기 다운 휴식을 가지고 99년 9월 4집으로 컴백했는데, 그동안은 그렇게 활동이 많다가 마지막 4집 앨범 때는 전에 비해 스케쥴도 적어지고 활동기간도 짧아졌다. 그래서 팬들 사이에 불길한 예감이 돌았다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결국 휴식기간 등 제외하면 2년여 빡세게 활동한 것인데, 이런 짧은 기간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될 임팩트를 남긴 것은 어떤 의미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오늘날 톱아이돌의 스케쥴도 살인적인 것을 보면 소속사의 입장도 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스케쥴 굴린 만큼 케어나 대우를 해주며 최대한 잡음을 줄이고 있는데, 당시 젝스키스의 경우 그런 잡음을 없앨만한 환경을 갖추진 못했다고 보인다. 결국 이는 해체이유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다만 이렇게 죽어라 활동한 덕분에 H.O.T.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다. 2011년 해피투게더에서 은지원이 밝힌 바에 따르면해당영상 6분 20초부터, H.O.T.와 라이벌이라고는 하지만 데뷔초에는 인기 격차가 너무 커서 따라잡기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H.O.T.는 활동 후 휴식기가 있던 반면, 젝스키스는 전혀 쉬지 않고 1년에 2~3장 씩 앨범을 내며 활동해서 팬을 늘려가, 따라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렇게 쉬지 않고 활동한 기간(97년 4월 15일 ~ 99년 1월)의 마지막인 3.5집 커플에서 H.O.T.를 이겼었다. 강타가 무릎팍도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젝키의 3.5집 커플에 처음으로 지면서 위기감을 느꼈었다고 한다. 아무튼 팬들 입장에선 음악방송이며 각종 예능에서 거의 1년 내내 젝키를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이때에 익숙한 일부 올드팬들은 재결합 후 젝키의 신곡 활동이 2~3주란 소리를 듣고 적응 못하고 있다.
2008년 7월 21일 놀러와 힙합특집에서 게스트들이 잠수 탔던 일화를 밝힐 때, 은지원도 젝키 활동 중 잠수탔던 일화를 밝혔다.해당영상 당시 방송이 너무 많고 아무 상의 없이 스케쥴을 계속 잡아서 멤버 단체로 잠수를 탔다고 한다. 잠수기간은 2주정도에 생방만 한 4~5개 펑크를 냈다고 한다ㄷㄷㄷ 차원이 다른 스케일에 패널들이 놀라며 그렇게 했는데 방송가에 어떻게 복귀했냐고 묻자, 자기들은 당시 너무 어렸고 해결은 매니저 형님의 몫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껏 잠수탄다는 것이, 멤버 집에 단체로 숨어서 매니저가 데리러 오면 부모님한테 '엄마, 나 오늘 없다 그래' '오늘 저희 안 온거에요'라고 시켰다고 한다. 패널들은 '거의 초딩수준이다' '소속사가 순진하다'는 반응이었다. 복귀 이후 방송국에 사죄하는 의미로 스케쥴이 2배 늘었다고 한다. 심지어 H.O.T.가 펑크낸 스케쥴도 대신 뛰어줬다고 한다. 제일 먼저 복귀하자고 한건 은지원이었고(리더라서 제일 크게 혼날 것 같았다고 한다. 근데 자기가 잠수타자고 제안한 것이 함정), 끝까지 반대를 하며 본때를 보여주자는 것이 고지용이었다고 한다. 패널 반응은 엄마 집에 숨어서 뭔 본때냐고 빵 터졌다.[15][16]
2015년 4월 20일 김창렬의 올드스쿨에 김재덕이 출연했을때, 위 놀러와 방송에 나온 잠적 사건에 관해 김재덕에게 물어봤다.영상기사 그런데 전술한 은지원이 말한 잠적 사건과는, 기간이며 정황이 하나도 맞지 않는다. 은지원이 말한 잠적 사건 이후 또 터진 다른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17] 김재덕 말에 따르면 2주는 아니며, 시기는 3~4집 쯤의 젝키 막판 상황이었다고 한다. 호텔에서 멤버 6명이 모여 이틀 정도 있다가, 비행기 티켓을 끊어서 제주도인가 부산으로 다 같이 내려가려고 했다. 사무실은 난리가 나서 잡으러 다녔다고 한다. 6명이서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에 갔는데, 그때 키 큰 매니저한테 잡혔다고 밝혔다.이 말을 들은 김창렬은 '아, 기영이'라고 바로 김기영 매니저임을 알아차렸다. 도망가려고 했던 이유는 스케쥴이 많아서 그랬던 것도 있고, 어린 마음에 머리가 커지면서 회사랑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 회사 말을 안 따라줬다고 하면서, 거만해졌다고 밝혔다.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라며 "어휴 고맙습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저를 이렇게 만들어주시다니."라고 할거라고 대답했다. 당시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냐, 스케쥴이 너무 많아 힘들었냐는 질문에는, 힘들었던 것은 맞지만 멤버들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고 밝혔다. 놀 때도 같이 다녔다고 한다.김창렬曰 '그러니 제주도로 6명이서 튈려고 했겠지'

1.6 뮤직비디오

뮤직비디오가 저렴하기로 유명했다. 라이벌인 H.O.T.는 멤버들의 비주얼과 적절한 스토리를 조합하여 드라마틱한 뮤직비디오를 찍었던 반면[18], 젝스키스는 멤버들의 비주얼에 의존한 단순한 뮤직비디오가 대다수였고, 배경도 소속사 옥상이나 폐창고, 심지어는 노래방(...)에서 찍기도 했다.[19] 4집 활동 곡 '예감'이 그나마 스토리를 첨가한 뮤직비디오였으나 스토리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함정이다.[20] 라디오스타에서 강성훈의 말에 의하면, "저희는 뮤직비디오에 한이 있어요" 데뷔곡이었던 학원별곡과 폼생폼사는 뮤비가 두 개씩 존재했는데, 퀄리티는 처참한 수준이고, 2집에서는 타이틀곡 기사도를 비롯한 그 어떤 곡도 뮤직비디오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 4집 타이틀 곡 Com'Back은 진원석 영화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배우 김규리(당시 김민선)를 주인공으로 섭외하여 나름 해외 촬영에 헬기까지 동원한 액션극으로 촬영했지만 공개되지 않고 4집 수록곡인 Summer in Love의 뮤비로 바뀌어 콘서트에서 공개돼버렸다.

1.7 2000년

1월 12일에 데뷔 1000일 기념 파티를, 2월 28일에 젝스키스 2000 콘서트를 개최했다. 99년 10월부터 활동했던 젝키의 FM 플러스 DJ 활동도 4월 16일로 마무리한다.
5월 18일, 갑작스런 공식 해체 기자회견으로 많은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원인은 젝스키스/해체 항목을 참조바란다. 이틀 후인 20일, 2000 드림콘서트에서 고별 무대를 갖고 3년 간의 짧은 활동을 마무리한다.

2 비정규 앨범

2.1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뮤지컬 추가바람

2.2 '99 live concert 앨범

'99 live concert 앨범

1999년 라이브 콘서트 실황을 담은 앨범을 3월 19일에 발표했다. 카세트 테이프, CD, 그리고 공연 실황을 녹화한 VCD/VHS 등 다양한 매체로 발매되었다. 테이프는 특성상 CD 버전에 비해 공연 실황의 많은 부분이 편집되고 노래에만 집중된 형태였다.

2.3 SECHSKIES 1020 MIX

추가바람

2.4 Blue Note

고별앨범 Blue note

해체 이후 5월 말 경 발매된 마지막 앨범이다. 2000년 콘서트 중 일부 곡이 수록되었고, 고별 무대에서 부른 "Bye" 등 발라드곡 위주로 구성되었다. 일부 팬들은 해체한 마당에 고별 앨범이라며 성의 없는 수록곡으로 끝까지 젝스키스를 우려먹는다고 대성기획을 가루가 되도록 까기도 했다. 젝스키스 발라드 명곡 중 하나인 "기억해줄래"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수록되지 않았다.

2.5 Thanks

해체 후인 7월, 팬들에게 감사의 의미가 담긴 곡 "THANKS"를 O2MUSIC이라는 음악사이트를 통해 발표했다.[21]
젝스키스의 공식적인 스케줄과 음반은 아니며 일체의 공연이나 방송 활동도 없었다.
Thanks 뮤직비디오 Youtube링크

2.5.1 You're welcome

위에 상술한 팬송 Thanks에 대한 답가 형식으로, 젝스키스 팬덤이 발표한 노래이다.
아이돌 팬덤이 직접 작사,작곡,녹음 후 발표한 유례가 없던 곡으로 이때 제작된 영상은 후에 단편영화제에서 상을 받기까지한다. 젝키 팬들 ㄷㄷ해
이 일은, 뮤직비디오조차 제대로 만들어주지 않았던 소속사와 대비되어[22], 젝키 팬들의 분노와 애정을 한번에 보여준 사건으로 회자된다.
You're welcome 뮤직비디오

You're welcome Youtube링크
  1. 원제는 청춘일기였다.
  2. 원제는 민주주의였다(…).링크 멤버들이 반대해서 최종 제목이 탄생했다. 원래 그룹명과 결합하면 육계장의 민주주의(...)
  3. 당시에는 어찌어찌 묻혔지만 MBC 공개방송 당시 라이브를 해도 계속 립싱크만 한다고 욕하자 홧김에 곡 인트로에서 대놓고 섹드립을 치기도 했다(...).
  4. 링크에는 어느 신문의 기사인지 나와있지 않다. 그러나 윤태섭 기자는 당시 스포츠 조선의 기자였으며, 현재 스포츠 조선 편집국장이므로 해당 기사는 스포츠 조선이 맞다.#
  5. 1998년 8월경 60만 장(1998년 8월 라디오에 출연한 정교민 기자가 청취자의 질문에 젝스키스 3집이 60만 장을 넘었다고 하였다고 한다.
  6. 1998년 8~ 9월 공중파 가요 프로그램 대결에서 젝스키스는 10회, 김현정은 8회 1위를 하였다.
  7. 젝키의 대부분 뮤비가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커플 뮤직비디오는 사무실 문짝이 나오는 등 유독 저퀄리티다. 전술한 바와 같이 커플 타이틀곡 문제로 사장이랑 대판 싸운 것이 사실이라면, 뮤비 퀄리티가 유독 그런 것이 이해가 간다.
  8. 젝스키스는 예감으로 공중파 1위 4회, 조성모는 For Your Soul로 1위 3회
  9. 원문: 조성모-젝키 새음반도 '대박' "불황? 우린 몰라" 역시 조성모다. 그리고 젝스키스다. 10대들의 우상 젝스키스의 4집 앨범 <컴백>과 밀레니엄 스타 조성모의 2집 앨범 <슬픈 영혼식>이 앨범 발표 일주일만에 70만장을 넘기는 판매고를 기록, 불황에 허덕이는 음반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중략)▲젝스키스(강성훈, 고지용, 이재진, 김재덕, 장수원, 은지원)는 첫날 35만장, 둘째날 25만장이 풀려나가는 폭발적인 장세를 보이고 있다. 데뷔 2년째 맞은 젝스키스는 이번 4집 앨범 <컴백>으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해 자신들의 최고 기록을 갱신한다는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10. 사실 팬들은 1998년 3집부터 음반축소혐의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었는데, 젝스키스에게 불이익이 돌아갈까봐 2000년 당시 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4집 때 폭발한 것이다.
  11. 강성훈이 폼생폼사 앨범을 120만 장 나갔다고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을 4집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해당 발언과 별개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2. 스케쥴이 빡셌던 것에 대해서 3년 내내라는 말을 붙이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99년 1월 이후로는 엄청난 스케쥴을 소화하진 않았다. 9월달 4집으로 컴백했을 때는 오히려 방송이 왜 이렇게 적냐며 팬들이 항의를 할 정도였다.
  13. 당시에는 싱글이나 미니앨범의 개념이 거의 없었고, 오로지 정규 앨범만 낸다음 앨범의 곡중 2~4곡 정도를 타이틀곡으로 정해 수개월간 연속적으로 활동하는게 기본 패턴이었다. 그러나 젝키는 이 정도가 심해서 앨범 활동 종료후 한달만에 새 앨범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으며, 앨범 한장에 4곡 이상씩 선정해 계속 활동을 시키기도 했다. 그에 따른 안무증가와 쉴틈없는 스케쥴은 덤. 게다가 이재진, 김재덕은 안무를 직접 만들기까지 해야 했으니..
  14. 3.5집 스페셜 앨범이라고 하는데 실질적으로 정규앨범이다. 영화 세븐틴의 OST로 기획된 음반에 수록될 곡이 늘어나자 아예 젝스키스 정식 앨범으로 출시 한 것.
  15. 아마 소속사에서 어느 정도 방조했다고 보인다. 뻔히 멤버 집에 모이는데, 집앞에서 지키고 서서 강제로 잡아오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반발이 더 심해졌을테니 제 스스로 복귀할 때까지 기다렸다고 보인다. 위 패널들 반응처럼 그냥 평범한 연예인이었으면 방송가 복귀가 어려울 정도의 잠적 스케일이지만, 당시 DSP 이호연 정도면 그 정도 무마시킬 파워는 있었다.
  16. 위 영상에 대한 팬들 반응은 소속사가 썪을 놈들이라며 멤버들이 너무 불쌍하다는 의견이다. 물론 소속사가 스케쥴을 빡세게 돌린 점은 맞다. 하지만 위 사건에 대해서는 소속사가 더 불쌍해 보이는 측면도 있다. 위 방송의 패널 반응에서 보듯이, 2주 동안의 잠적은 '그렇게 스케쥴 펑크내고 방송가에 어떻게 복귀했냐'고 놀랄만한 스케일이다. 그 기간 동안 소속사는 방송가에 죽어라 사죄하러 다녔을 것이고, 이후에는 다시 방송가에 복귀시키려고 또 죽어라 뛰어다녔을 것이다. 사실 요즘 저랬으면 트와이스 급이라도 그냥 은퇴각이다.
  17. 일단 은지원이 말한 사건은 기간이 2주인데, 김재덕이 말한 사건은 기간이 겨우 4일 정도다. 잡히는 과정도 은지원이 말한 사건의 경우 자발적으로 돌아간 것인데, 김재덕이 말한 사건은 공항에서 매니저에게 강제로 잡혔다. 은지원이 말한 사건은 이후 방송가에 사죄하는 의미로 H.O.T.가 취소한 스케쥴까지 다 뛰어주며 전보다 스케쥴이 2배 늘었다고 했다. 그런데 김재덕이 말한 사건은 3~4집 때 쯤의 막바지라고 하는데, 젝키의 막바지 상황은 스케쥴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팬들 사이에 불안한 예감이 감돌 때였다. 정황이며 시기를 볼 때 다른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8. 홍종호, 김세훈 등 당시 최고 주가를 달리던 뮤직비디오 감독들이 맡았고, '아이야'는 뉴욕 촬영까지 했다. '우리들의 맹세'는 당시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만화가 천계영이 참여한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었을 정도.
  19. 심지어 젝키 최대 히트곡인 '커플'은 사무실 문짝을 배경으로 찍었다고 한다. 강성훈이 라디오스타에서 이를 토로하며 치를 떠는 모습이 그야말로... "옥상이 뭐야 우리는... 사무실 문짝이 뭐야"
  20. 카더라에 의하면 로드파이터 뮤비는 감독의 사비로 찍었고, 그 뒤로 뮤비 촬영에 쓰라고 은지원의 집에서 돈을 보태주었는데 이를 DSP에서 먹었다는 루머가 있다...고 여기에 오랫동안 서술되어 있으나 전혀 사실무근의 말이다. 이게 사실이면 개막장 소속사겠지만, 전혀 증거가 없다. 단지 어떤 감독이 로드파이터 노래가 너무 마음에 들어 자기네 회사에서 비용을 다 부담해 뮤비를 찍고 싶다고 DSP에 연락을 했을 뿐이다(출처:#). 놀랍게도 그 감독이 YG 뮤직비디오 전담 감독인 서현승이다. 뱅뱅뱅, 판타스틱베이비, 내가제일잘나가 등 1억뷰 이상의 뮤비를 다수 보유한 감독이다. 해체 16년 후 젝키가 YG로 오게 됐으니 사람 인연이란 것이 참 희한하다. 참고로 김재덕과 이재진도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게 된 계기가, 양현석이 그들의 춤추는 모습을 비디오를 보고 만나자고 한 것이었다. 이후 둘은 이주노 소속사 연습생으로 있었는데, 이호연이 그 소속사로 찾아와서 젝키 멤버로 픽업해갔다.
  21. 당시엔 디지털싱글이라는 개념자체가 없었으나, 실물CD가 발매되지않고 음악사이트를 통해 mp3와 뮤직비디오만 공개되었기에 지금의 디지털싱글의 시초격이라고 볼 수 있다.
  22. 젝스키스 2집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주지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