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메이 덴노

일본의 역대 덴노
28대29대30대
센카 덴노긴메이 덴노비다츠 덴노
왕호긴메이 덴노(欽明天皇)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스메라미코토(天国排開広庭)
생몰음력509년 ~ 571년 4월 15일
양력509년 ~ 571년 5월 24일
재위음력539년 12월 5일 ~ 571년
양력539년 12월 30일 ~ 571년 4월 15일
히노쿠마노사카이능(檜隈坂合陵)

1 개요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스메라미코토(天國排開廣庭天皇)는 워호도노스메라미코토(男大迹天皇)의 적자(嫡子)이다.

(중략)
겨울 12년 경진삭 갑신에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스메라미코토가 덴노로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는 천황이 대괴기에는 어린 나이ㅕㅆ다. 황후를 높여서 황태후라 불렀다. 오호토모 카나무라(大伴大連金村)와 모노노베노오오무라지오코시(物部大連尾輿)를 대련으로 삼고, 속아도목숙녜대신을 대신으로 삼은 것은 모두 예전과 같다.

ㅡ 《일본서기》 권 15 흠명조 원년.

일본의 29대 덴노. 케이타이 덴노타시라카 황녀의 아들. 아스카 시대가 그의 통치기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의 재위 기간 중에 여러모로 유명한 임나일본부가 등장한다. 킨메이, 흠명(한자를 한국식으로 음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긴메이 덴노는 히노쿠마노사카아이노미사사기(檜隈阪合陵 ひのくまのさかあいのみささぎ)에 묻혔다고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가시하라 시(橿原市)의 미세마루야마 고분(見瀨丸山古墳)에 묻혔다고 추정된다.

2 한국과의 관계

6세기 당시, 한성 함락으로 인한 국력 약화를 극복한 백제와 대대적으로 성장한 신라의 사이에 낀 가야 제국(諸國)의 세력은 점점 약해져 갔고, 신라는 가야를 차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가야 제국은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에게 대항하고자 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하나 둘씩 멸망했다. 이 과정에 있어서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킨 경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도 어느 정도 기록이 있으나, 백제와 가야 제국 간의 교섭은 삼국사기에서는 보이지 않고, 일본서기의 긴메이기에 기록된 내용에 의거하는 바가 크다.[1]

물론 일본서기는 일본 입장에서 대외관계를 기술한 사료로써 일본서기 중 백제와 가야 제국 등등을 일본의 속국 취급하는 부분이야 적절한 사료비판을 거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임나 지배라는 임나일본부설적 관점을 제거하고 볼 경우, 백제계 사료를 대대적으로 참조하여 당시의 가야 제국의 동향에 대해 서술한 것은, 그만큼 가야 제국과의 교류 관계(지배-피지배가 아니다!!!)가 왜 왕권에게 있어 중요한 사안이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고고학적으로 보더라도, 일본 열도 내의 한반도계 유물/유구 중 백제계가 주축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6세기 이후의 일이며, 그 이전에는 금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등의 가야 제국과 신라(!)의 문물이 대부분이다.[2] 이러한 가야 제국과 왜의 관계가 "임나 지배"라는 임나일본부의 남선경영론 사관이 탄생하는 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3 백제 성왕 동일인물설

백제 성왕이 사실은 긴메이 덴노로, 일본의 왕을 겸임했다는 설이다. 긴메이 덴노의 기록이 굉장히 소략하기 그지없는 반면에 성왕 기록만 잔뜩 나와서(...) 생긴 오해(?).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 역사학계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좋다. 일단 결정적인 근거는 없고, 단편적인 의문점들이 종합되어 구성된다.

  • 재위기간의 동일
우선 성왕의 재위기간을 보자. 523 ~ 554니까 32년간이다. 그럼 긴메이 덴노는? 539 ~ 571이니까 33년간이다. 심지어는 539년에는 12월에 즉위해서 얼마 해먹지도 못했기에 540년을 원년으로 치는 상황이다. 그럼 32년... 사실상 동시대에 살았던 양 국의 지배자가 재위기간이 동일하다. 시기는 다르지만, 알다시피 일본서기의 시간대가 굉장히 모순적이라는 것은 비교적 알려진 사실. 고지키(고사기)에는 긴메이가 528년에 즉위했다고 되어 있고, 이 경우에는 재위기간이 같았던 긴밀한 관계의 두 왕이 불과 5년 차이로 양 국에 있었던게 된다. 하여간 성왕과 상당히 유사한 기간동안 왕을 했었고, 재위기간이 같다는 점이 뭔가 의심된다는 식의 주장이다.
  • 밀접한 관계와 압도적인 차이의 기록량
긴 31년 동안 왕위에 앉았던 두 왕에 대한 기록량은 일본서기 안에서도 대단히 많이 차이난다. 사실상 긴메이 덴노는 자식 낳은 것과 소소한 내치, 그리고 신라정벌로 대판 깨진 것과 고구려 정벌로 성공한 것만 나오는데, 고구려 정벌 역시 백제측의 기록을 끌어온 것으로 의심받는 상황이라 독자적으로 한 일이 거의 없다.(...) 사실상 긴메이의 기록은 백제 성왕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지시한 기록만 나오고, 실제로는 거의 모든 과정은 성왕이 직접 다 해치운다. 이게 뭔가 많이 석연찮다는 식의 주장이다.
  • 유일한 대외업적이 성왕의 것
아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긴메이의 유일한 대외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 정벌은 실제로는 백제 성왕의 업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 또한 의심스럽다는 주장.
  • 백제궁?
긴메이의 아들인 비다츠 덴노가 즉위하고 나서 한 일이 백제에 왕궁을 짓는 일이었다(...) 대체 얘 정체가 뭐냐 (皇太子卽天皇位是月, 宮于百濟大井(황태자:민달, 즉 비다츠)가 덴노에 즉위하였다. 이 달 백제의 대정에 궁을 지었다.) 물론, 위의 백제가 일본 지명일 가능성디 높다. 쿠다라(백제)천 등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는 백제에 관련된 지명이 일본에는 많이 남아있다. 어쨌든 백제에 대한 지명이 등장하는 게 의심스럽다는 식의 주장이다.


일본 나라현 고료초에 존재하는 쿠다라(백제). 마을의 이름이 백제이며 과거 지명은 쿠다라노(百済野)즉 백제들판. 마을에 흐르는 강의 이름은 백제강이었다.


백제사의 모습. 화제로 소실된 후 재건을 거쳤고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은 카마쿠라 시대에 재건한 3층 탑이다. 창건당시엔 9층탑이었다. 원래 명칭은 백제대사이며 비다츠 덴노가 백제강을 중심으로 서쪽엔 백제대사 동쪽엔 백제궁을 짓고 백제궁에 기거하며 백제사를 자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비다츠 덴노가 만든 백제궁은 백제에 있는것이 아니라 나라현에 있는 것이다. 전격 백제 빠돌이

  • 왕위 계승의 문제
케이타이 덴노의 뒤를 이은 안칸 덴노센카 덴노의 통치기는 합쳐도 10년이 안 된다. 기록을 보자면 센카 덴노가 사망한 시점에서 긴메이 외엔 케이타이 덴노의 자식들이 모두 사망했으니, 긴메이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내려오던 덴노의 승계에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긴메이 덴노는 일단 안칸 덴노와 센카 덴노의 배다른 형제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적으며 그가 즉위한 시기즈음에 백제 사람이 건너왔다는 기록이 있는 등의 기록이 존재한다. 고사기에는 케이타이의 사망이 527년이고, 긴메이의 재위가 528년부터 시작되는데.. 아래 항목을 보면 528년 긴메이 재위 시작설도 있다. 그렇다면 안칸과 센카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덴노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긴메이의 정체가 의심스럽다는 식의 주장.
  • 백제 관료들의 왜 파견
백제 성왕이 사망하기 전까지 성왕 시기에는 관료들이 꾸준하게 파견되었다.
  • 백제 위덕왕의 아들은 왜국에 남았다
백제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은 백제 왕이 되었지만, 위덕왕의 아들인 아좌태자는 위덕왕이 죽은 이후에도 그대로 일본에 남게 된 것으로 되어 있다. 아좌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쇼토쿠 태자의 실존이 의문시 되는 상황에서 아좌태자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 외에도 위덕왕이 성왕의 모습을 본따 만들었다는 구세관음상은 호류지 몽전에 안치되어 있는 등 이상한 점이 있다는 주장이다.
  • 고구려 정벌과 연도 문제
일본서기에는

551년(긴메이 12년)에 성왕이 신라와 임나(가야)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서 한성을 되찾았고,
554년(긴메이 15년)에 왕자 여창(餘昌:삼국사기의 부여창,후의 위덕왕)이 임나와 함께 신라로 처들어갔는데, 성왕이 그를 방문하다가 신라군에게 잡혀 죽고,
562년(긴메이 23년)에 임나가 신라에 의해 망했고, 7월 왜군이 신라에 갔다가 패한 다음 갑자기 난데없이 8월에 고구려를 쳐서 고구려 왕궁을 점령했다고 쓰여 있다.(...)

삼국사기에는

554년에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신라군에 의해 사망하였고,
562년에 신라장군 이사부대가야를 공격하여 신라에 합병시켰다.

시기에 대한 언급이 모순적인 것이 종종 있는 일본서기지만, 그래도그럭저럭 삼국사기와 잘 맞는다. 그런데 대체 고구려를 쳐서 고구려 왕궁까지 점령했다는 이 황당무개한 기록은 왜가 갑자기 고구려를 친 이유는 고사하고 대체 어디서 온 기록인지 근거가 뭔지 궁금해진다. 560년 즈음에는 왜는 커녕 백제가 고구려를 친 기록마저 다른 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7월의 전투는 매우 상세해서 사실로 보이는데, 거기서 대패하고 8월에 또 고구려와 전쟁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 게다가 7월의 전투와 달리 기록이 매우 간략하며, "백제의 계책"을 써서 고구려를 격파했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고지키(고사기)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실려있다. 긴메이의 즉위년이 528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것에 긴메이의 재위기간을 맞춰보면 긴메이 23년은 550년이 되는데, 550년에는 백제 성왕이 양원왕 시기(양원왕 6년)의 고구려를 쳐서 도살성을 함락시킨 일이 있다. 한마디로 왜가 성왕의 고구려 정벌을 엄청나게 뻥튀기를 해서 자신들의 기록으로 삼았다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사기에 맞추게 되면 성왕이 한강을 수복했다는 긴메이 12년은 539년이 되게 된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538년과 불과 1년 차이로 좁혀지게 된다.
시기가 개판으로 흩어지긴 했지만, 어느정도 사실에 근거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뒤죽박죽이고 일본 덴노에게 유리한 일본중심주의적으로 가득 차 있는 일본서기임에도 묘하게 특정 사건과 그 관계에 있어서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일본서기의 사관들이 고대 일본제국이랑 일본 천황들을 드높이기 위한 사관으로 인해 일본중심주의적으로 사건을 재구성해야 했고, 그 안에서 일말의 진실을 남긴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믿거나 말거나의 영역.고대의 X파일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긴메이가 사실은 성왕이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다만 동일인물 설에도 몇가지 차이들이 있다.

3.1 동일인물설 비판

그렇게 그럴듯 해보이는 동일인물 주장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개소리. 환독 오른 아마추어 역사가들이나 주장하지 학계에서는 일설로조차 성립하지 못하는 뻘소리이다.

  • 재위기간

재위 기간이 엇비슷한 것만으로는 동일인물의 증거로서 불충분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당연하잖아 그 때문에 고사기를 인용하여 두 군주의 즉위년이 최대한 비슷하게 보이려 한 듯 하지만, (고사기가 일본서기보다도 정식 사서가 아닌 사서인 점은 제쳐두고라도[3])고사기에서 긴메이의 즉위년은 528년이 아니다. 긴메이의 아버지인 게이타이의 사망 연도가 527년으로 나온 점에서 착안한 것 같지만, 고사기에서는 엄연히 긴메이 이전에 안칸/센카 덴노가 즉위한 것을 기록한 데다[4], 안칸의 사망이 535년으로 일본서기와 같으므로 '고사기에 충실히 따를 경우' 528년 즉위는 있을 수가 없다. 긴메이가 게이타이 바로 다음에 즉위했다는 기술이 상궁성덕법왕제설에 있으나, 여기서는 531년을 게이타이 사망/긴메이 즉위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527년이 게이타이의 사망 연도라고 보는 설에서도, 안칸-센카가 531년까지 즉위하였던 것으로 보아 백제본기와의 정합성을 맞춘다(이 경우, 안칸의 사망이 535년이라는 부분은 무시하게 되지만...). 요는, 이런저런 설에서 입맛에 맞는 부분만 골라내야만 528년이라는 즉위년이 성립한다는 것. 그러나 긴메이의 즉위가 528년일 경우, 531년의 백제본기 인용 천황 사망 기사가 붕 뜬다. 그나마 믿을 만 한게 백제계 사서 아니었나?

  • 고구려 정벌과 연도 문제

간단히 말하면, 538년에 성왕이 한강유역을 탈환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없다. 백제의 한강 유역 회복은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거칠부전을 근거로 551년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한편, 551년 이전에 한수 등의 지명이 나오는 것을 근거로, 백제가 실지를 회복한 것이 보다 이르다는 주장도 적지 않지만, 이러한 지명은 538년 이전에도 나오므로 538년의 한성 회복은 근거가 없다. 사실 그냥 백과사전만 찾아봐도 아는 거지만, 성왕이 538년에 한 일은 사비 천도다.
백제의 한성 수복과 관하여 긴메이기의 연대를 앞당길 필요가 없다면, 562년의 고구려 공격을 굳이 550년에 가져다 붙일 필요도 없다. 기사 전체가 조작일 가능성도 없지 않고, 삼국사기에서는 누락된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를 그냥 아전인수적으로 왜곡한 것일 수도 있다(고구려 왕이 도망가고 왕궁을 약탈했다는 것이 구라인 거야 굳이 말할 것도 없으리라).

  • 백제 관련 지명

일본에 백제 관련 지명이 여기 저기 있는 이유는, 말 그대로 백제 사람들이 가서 살아서 그렇다(...).고대의 코리아타운 백제 외에도 신라, 고려(고구려)와 관련된 지명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긴메이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비다츠를 꺼낸 듯 하나, 백제대사를 세운 건 7세기 인물인 조메이 덴노다.
일본서기 조메이기 11년(639) 7월조에 백제천(百濟川) 옆에 궁궐과 절을 세우도록 지시하여, 서쪽 백성은 궁궐을, 동쪽 백성은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쿠다라노오오이(百濟大井 くだらノおほゐ)에 비다츠가 궁궐을 만든 것과 백제대사는 무관한 것이다.

이렇듯 논거의 중요한 부분들이 가장 기초적인 사실 관계조차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계에서 아무도 동일인물설을 제기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하겠다.

4 신라군과의 싸움

562년 7월 임나가 멸망한 직후에 왜군이 신라에 싸움을 걸었다가 대패한 기록이 있다. 뭔가 전개가 기승전병(...)스러운데다, 어째서 이런 기록이 남아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추태를 보이기도 한다.

전투 내용을 요약하자면 왜는 신라가 임나를 친 것을 복수하기 위해 신라로 출정을 가는데, 임나에 가서 코모츠메베노오비토 토미(薦集部首登弭 こもつめべノおびと とみ)라는 장수가 처갓집에서 자다가 군사계획이 든 서류를 길에서 잃어버린다(...).[5] 그걸 얻은 신라가 거병했으나 패망하고(??) 승리한 왜군은 백제로 돌아온다.

한편 카와베노오미 니에(河邊臣瓊缶 かはべノおみ にへ)는 홀로 나아가서 연승하고, 신라군이 백기를 들고 항복한다. 그런데 군사에 밝지 않은(??) 카와베노 니에가 자기도 백기를 들고 혼자 앞으로 나왔다가(...) 신라군의 반격에 도망했으나 결국 잡혔다(...) 이정도 되면 개그가 아닌가 싶다.

이에 카와베노 니에와 그 가족들을 잡은 신라 장군은 카와베노니에의 아내인 우마시히메(甘美媛 うましひめ)를 보고 "니 목숨이 소중하냐 아내가 소중하냐"라고 이야기 했고, 카와베노 니에는 목숨이 소중하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신라 장군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우마시히메를 강간한다. 뒤에는 둘 다 풀어준 모양이지만 우마시히메가 엄청나게 비난하고 끝내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이 신라장군은 츠키노키시 이키나(調吉士伊企儺 つきノきし いきな)라는 왜군 장수를 보더니 이키나의 바지를 벗긴 후 엉덩이를 왜국 방향으로 돌리게 한 다음 이키나에게 "왜국(일본) 대장은 이 엉덩이를 먹어라"라고 외치라고 시킨다.(...) (아무래도 일본 섬을 바라보고 하라고 했으니 일본왕을 조롱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일본서기에서 대장이라고 바꾼 것 같다.)[6] 하지만 이키나는 고통속에서도 끝까지 "신라왕은 이 엉덩이를 먹어라"라고 외치며 저항했고, 결국 아들과 같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측 기록에서는 충신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서기 입장에서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이런 내용이 기재된 이유는, 아마도 위와 같이 그 충절(...)을 기려서 간접적으로 천황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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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키노키시 이키나(調吉士 伊企儺)의 일화를 표현한 그림

5 일본서기 흠명조

긴메이 덴노 번역본을 보려면 일본서기/긴메이 덴노항목 참조.

  1. '한국 관련 기록을 빼고 나면 긴메이 덴노가 누군지 묘사조차 안 되는 수준' 이라는 서술이 본 항목에 있었는데, 원래 일본서기 내용의 큰 축은 (중립적으로 말하면) 대외 관계에 대한 기록이다.
  2. 박천수「새로 쓰는 고대 한일교섭사」(2007, 사회평론)참조.
  3. 일본서기는 일단 정식으로 편찬된 사서지만 고사기는 정사서 취급이 아닌 야사이다.
  4. 게이타이의 자녀 중 즉위한 사람에 관한 부분에서는 긴메이를 안칸/센카 두 명보다 앞에 기록하고 있으니 528년이 맞지 않냐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이 순서가 정말 맞다면,안칸/센카는 긴메이 사후에 즉위한 게 된다. 왕조 병립설을 가져다 쓸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병립설의 전제 중 하나는 게이타이의 사망이 531년이라는 점이다(...)
  5. 그런데 남북전쟁 때 앤티텀 전투에서도 남군의 장교가 군사기밀을 길에다 떨어뜨린 것을 북군이 주운 덕분에 유리한 전투를 할 수 있었던 걸 보면 이 일도 실제로 있었던 일인 듯.
  6. 사실 엉덩이라는 표현도 실제로는 이 것을 순화시켰을 가능성이 높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