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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조선시대 세조 집권기인 1467년에 일어난 대규모 반란.
2 배경
세조는 즉위하면서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해 북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경관(京官)으로 대체하였으며, 호패법을 강화시켜 지방민의 이주를 금지시켰다. 이러한 행동을 취한 까닭은 워낙 의심이 많았었던 세조가 자기 측근 외의 말은 잘 믿지 못하였고 특히 북쪽 변방의 장수를 믿지 못하였다고 한다. 증조 할아버지부터가 북쪽 변방의 장수였는데..
3 전개
이러한 집권정책으로 인하여 북도인의 불만이 쌓일 대로 쌓였는데 마침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고향 길주에 머물러 있었던 북방 출신 호족 이시애는 아우 이시합 등과 모의하여 중앙집권 정책에 반대하여 불만에 차 있었던 호족들을 선동하여 길주에 와 있던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을 죽인 다음 목사 설정신이 다스리고 있는 길주를 점령한 뒤 세조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신숙주, 한명회가 강효문과 짜고 반역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신이 강효문, 설정신, 김익수를 죽였습니다.
의심이 많았던 세조는 일단 한명회와 신숙주를 옥에 가두어 놓는데 신숙주는 이때 함길도 관찰사로 있던 아들이 이시애군에게 목숨을 잃는 참변을 감옥 안에서 듣게된다.[1] [2]이후 구성군 이준에게 3만 병의 군사를 주어 함길도로 보내게 된다. 이 구성을 보면 세조가 기존 공신들에게 완전히 신뢰를 잃어서 불안해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총지휘관인 이준은 25세로 문과에 급제해서 1년 밖에 안 된 상황이고, 남이 역시 19세에 무과 급제한 후 7년차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걸 보좌한다고 보낸 부사령관격인 강순은 무려 77세. 26세의 총사령관과 26세의 선봉장. 그리고 77세의 부사령관 이건 세조가 종친인 이들을 신뢰했기 때문이었다[3].
구성군 이준은 20대의 혈기왕성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신중하게 행동했고 사사건건 세조에게 군량미를 보내달라, 증원군을 보내달라, 무기를 더 보내달라고 요구하여 세조가 짜증을 낼 정도였고 구성군은 자신이 만족할 정도의 지원을 받은 다음에야 철령을 넘어 반군 공세에 나섰고 결국 이 두 세력이 함흥에서 맞붙게 되는데 약 4개월간의 시간을 소비했다고 한다. 흠좀무.
3.1 관군, 정면대결을 회피하다
관군의 입장에서는 사실 토벌전이 여의치는 않은 편이었는데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면서 함경도 정예군을 다 들고갔기 때문이었다. 구성군의 병사는 그대로 철원까지 밀려버리게 되고 이렇게 되자 세조는 지원군을 더 파견한 후 인사개편을 단행하게 된다. 강순을 진북대장으로 삼고 평안도 병력 3천을 영흥으로 파견한 후 병조참판 박중선을 평로(平虜)장군으로 삼아서 황해도 병사 1천명을 이끌고 함길도 문천군으로 들어가게 했으며 그리고 어유소에게는 한성부의 경군 1천명을 보내서 구성군을 돕게 한다. 이렇게 지원을 받은 후 5월 15일에 구성군은 강원도 이시애군을 밀어버리고 철령의 입구인 회양으로 진격했다. 그런데 이때 구성군은 회양에서 보름을 버텼는데 난의 사태를 파악함과 동시에 경솔히 움직이다가 당하지 않으려는 측면이 다분히 있었다. 그동안 세조는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고 사자를 보냈는데 이시애는 사자를 벰으로서 드디어 돌이킬 수없는 길을 가게 되었다. 리얼 함흥차사
6월 1일 구성군은 철령을 넘어 안변까지 주둔했다.
3.2 계속되는 이시애의 후퇴
관군의 진격은 계속되어 허종의 부대가 영흥으로 들어가 반란군과 교전을 벌이기 시작하고 6월 초 영흥이 함락되면서 관군은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세조는 그 직후 신숙주 등을 풀어주고 본인의 친정을 고려하는 등 강경책을 내놓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이시애 역시 저항이 어려운 함흥을 버리고 북청까지 후퇴하게 되었고 관군은 이에 함흥과 신익평을 지나 흥원으로 나가 함관령을 넘어가는 신원에 본진을 설치한다. 급기야 이시애는 북청을 지나 이성까지 퇴각하고 관군은 6월 20일에 북청성에 입성했다.
여기까지는 관군의 무난한 승리 시나리오 였지만 ...
3.3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나다:북청 포위전
6월 19일 이시애군이 북청에서 퇴각할 당시 이시애군은 둘로 흩어져 동생 이시합의 본군은 2만명 병력으로 북청 근처 여주을현에 주둔하고 이시애는 단천 이북의 여러 정예진군과 여진족 500명까지 합쳐 이성에서 대기한다. 한마디로 북청성의 관군을 완전히 고립시켜 버린 것
강순은 관군을 이끌고 북청성으로 들어갔지만 바로 직후 이시합군은 북청성을 포위했고 뒤이어 이시애가 합류한다. 6월 24일 밤 2시전후로 이시애군은 강순군을 기습하는데 이때 강순은 이미 이것을 예측하고 안에는 목책을 두르고 밖에는 녹각을 세우는 한편 성 밖에는 함정을 파두는 등 철저한 준비를 해왔던 터라 이시애군의 공격에 맞서 어느정도 수성을 해냈다. 하지만 낡이 밝자 관군의 화살을 다 떨어지고 북청성이 떨어지기 직전 이시애는 "관군이 너무 잘 버틴다"고 평가하고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는, 무릎까지 꿇으며 귀순을 시도했다.[4] 이시애의 뻘짓 덕분에 강순은 그렇게 한숨을 돌렸고 이시애는 그 후 10여차례 정도 싸움을 걸었지만 끝내 강순의 수비진을 뚫지 못한다. 보름이 넘어가자 이시애는 상당히 조급해졌고 이에 이시애는 사위 이명효와 홍원/북청/삼수/갑산의 백성들을 모아 1군을 만들고탕구령을 넘어 신익평에 주둔하게 한다. 또한 이성 ,길주 ,경성의 본군들은 이시합이 수습하여 마어령을 넘어 2군을 형성하고 마지막으로 회령 이북 6진의 백성들을 이시애가 이끌고 이성 후방으로 물러나 장기전을 기획한다. 결국 관군은 북청에서 퇴각하여 이시애는 북청을 회복한다.
3.4 주도권의 분수령 , 2차 북청전투
그러나 이런 이시애의 승전은 열흘을 채 가지 못했으니.... 관군은 재정비를 한 후 역으로 이시애에게 당했던 기습을 역으로 활용한다. 강순의 제 1진은 산개령을 넘고 어유소의 2진은 종개령을 넘어 북청으로 진입하고 구성군의 군사는 북청 앞의 평포로 진격한다.강순과 어유소의 군사는 협공을 하여 산개·종개령의 이시애군을 격파하고 북청으로 쇄도해 들어가 이시애가 임명한 가짜 부절도사 유득지(劉得之)의 군을 격퇴시키고 그 병력을 흡수하여 당시 관군의 수는 약 5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시애는 북청 패퇴의 소식을 듣고 1만여 명의 군병을 이끌고 북청 동쪽 68리에 있는 천험의 만령(蔓嶺)으로 갔다.
3.5 난의 결말, 만령전투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시애군은 이제 농성전으로 가게 된다. 이성(현재는 이원군)의 만령(蔓嶺)은 남으로는 동해를 등지고 북으로는 태산을 끼고 있는 천혜의 요새였고 이시애는 여기서 버티기로 한다. 관군역시 만령에 전군을 집결한 후 구성군/강순/박중선의 본군은 큰길로 나아가고 허종은 남쪽 중봉으로 우공은 이시애군 선봉이 있는 주봉 , 어유소는 바닷가를 돌아 동봉으로 가고 김교는 북산 밑으로 나아가 4면으로 포위했다. 그 사이 이시애는 여진족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사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탈탈 털리고 결국 이시애는 만령 중봉에 3중으로 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버티면서 만령을 지키려 했지만 음력 7월 31일 저녁 6시 유시에 어유소의 군대가 만령 동봉에서 좌측의 허를 찔러 방어선을 무너트렸고 결국 만령이 함락되자 이시애는 이성으로 도망친다. 8월 1일 이시애는 이성의 객사와 창고를 불사르고 마운령을 넘어 단천으로 퇴각하고 8월 8일에 관군이 마운령을 넘자 이사애는 단천 앞 남대천에서 저항을 시도했지만 또 패했고 8월 12일에는 단천에서 패배해 마천령을 넘어 거병지 길주로 퇴각한다. 이에 관군이 마천령을 넘어 영동(嶺東)역까지 나아가자 이시애는 여진에게 투항할 생각을 했지만 그 전에 처조카인 사옹원 별좌(지금으로 치면 조선 도자기 공사 직원)인 허유례에게 포박당해 관군에게 넘겨졌고 그대로 관군에게 넘겨진 이시애는 서울로 끌려 가지도 않고 토벌군 진지 앞에서 즉결 능지처참을 받고 효수된다.
4 영향
구성군 이준, 남이, 강순, 그리고 갑사 유자광 등은 이 사건을 계기로 급성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신공신(신훈)이다. 세조가 구공신(원훈 혹은 구훈)을 견제하기 위해 키운 것인데, 신숙주와 한명회를 잠시 옥에 가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세조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면서 구공신을 다시 우대했고, 예종과 성종시기가 되면서 토사구팽 당한다. 유자광을 제외하고. 그리고 이 때를 기회로 훈구 공신들은 종친들이 벼슬에 나가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를 하게되는데, 그게 바로 종친사환금지법이다[5].
그리고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기 위한 세력을 모을 때 유향소를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6] 다시 폐지되고, 이후 성종 때나 되서야 복구되었다.
이시애의 고향 길주는 반역향으로 낙인찍혀 길성현으로 강등되었고, 함길도(함흥+길주) 또한 영안도(영흥+안변)로 개칭되기도 하였다.[7]
또한 조사의의 난과 이징옥의 난에 이어 이시애의 난까지 터지면서, 함경도 지역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의 발판이 된 곳임에도 불구하고 반역향으로 취급받고 유,무형의 차별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차별 속에 함경도민의 분노는 쌓여갔고, 훗날 임진왜란 때 피난 온 임해군, 순화군이 함경도민에 온갖 횡포를 부린 것이 그 분노에 기름을 부어 결국 국경인을 중심으로 함경도민들이 두 왕자를 체포하여 당시 함경도 지역으로 침공해 온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왜군에게 바쳐버리는 사태가 터지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5 기타
애초에 이시애의 난은 세조시기 말년을 잠시나마 뒤흔들었던 일이라고 알려져있긴 하지만 애초부터 별다른 명분이 없었다. 난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정작 요구사항은 함길도 지방의 토호를 다시 함길도 출신 북방민으로 임명해달라는 정도였다. 명분으로만 본다면 시작부터가 이미 진 게임에 가까웠던 것일 수 있다.
종친이었던 구성군 이준, 남이와는 달리 서얼 출신의 일개 갑사였던 유자광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다. 좁은 쥐구멍에 쥐 둘이 만나면 용감한 쥐가 이기듯이, 강경한 대책을 주문하는 상소를 올려서 세조의 신망을 샀다. (원래 이건 전국시대 조나라 관리 조사의 표현이다.) 이후 토벌군과의 연락관으로 활동하며 공을 세워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 이 때 죽은 아들이 공주의 남자에도 등장한 차남 신면이다.
- ↑ 덧붙여서 내시를 불러 신숙주의 목에 칼이 너무 헐겁다는 첩보를 들은 세조는 감옥의 관리들을 모두 처형했다고...
- ↑ 귀성군 이준은 세조의 조카, 남이는 태종의 외증손자로 세조에게는 5촌 내종조카가 된다.
- ↑ 물론 강순은 충의의 군사라면 대궐로 나와 자수하라 말했다.
- ↑ 이건 왕실종친을 완전히 정치에서 배제해버리는 법률로, 조선이 군약신강의 나라가 되는 것에 큰 공헌을 했다.
- ↑ 유향소는 고려시대에 있었던 사심관 제도를 기반으로 삼은 제도로서, 지방 수령의 보좌기관/향리의 감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점차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과 대립하는 경향이 강해져서 태종 때 폐지했다가 세종 때 중앙의 감독기관으로서 경재소를 두고 복구시켰다.
- ↑ 함경도(함흥+경성군)로 개칭된 건 중종 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