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중에서 |
1908년 8월 31일 설립된 한국어와 한글 연구하는 민간 학술 단체.
1911년 9월 3일, 총회에서 학회 이름을 "국어연구학회"에서 "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로 바꾸었다. 1913년 3월 23일 임시총회를 열어 학회의 이름을 한글모로 바꾸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로 학회 활동이 위축되었다가 1921년 12월 3일 총회를 열어 조선어연구회로 조직을 확대하며 되살아났다. 시간이 지나 조선어연구회의 외연이 커지고 사업이 확장되며 1931년 1월 10일 총회를 열어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바꾸었다. 광복 뒤에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나뉘며 조선이라는 이름이 문제가 될 수 있어 1949년 10월 2일에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2 학회의 시작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글학회 100년사"에 따르면 학회의 시작은 주시경 선생과 여러 사람이 모여 만든 "국어연구학회"를 그 시작으로 본다. 따라서 학회의 시작은 1908년 8월 31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실제로 한글학회는 매해 8월 31일에 창립 기념 잔치를 열고 있다.
3 역사
1921년 12월 3일에 한국어와 한글의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로 처음의 명칭은 <조선어연구회>였다. 장지영·김윤경(金允經)·이윤재·이극로·최현배·이병기 등을 회원으로 하여 연구발표회와 강연회를 하고 한글의 우수성과 소중함을 홍보하는 한편, 1927년 2월부터 기관지 <한글>을 발간했다. 이 기관지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일본인 관변학자들을 모아 똑같은 이름의 '조선어 연구회'를 만들자, 1931년 명칭을 '조선어학회'로 바꾼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이윤재, 한징은 옥사했으나,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조선어학회의 주축을 이루던 학자들이 석방되면서 조선어학회는 조직을 재건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던 '조선말 큰사전' 사업을 재개한다. 이는 광복 이후 서울역 창고에서 유실된 줄 알았던 큰사전 원고가 온전히 발견되어서 가능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을 재판에 넘긴 일제 당국이 증거품으로 법원에 제출할 요량이었는데, 태평양 전쟁 막바지 난리통에 그냥 서울역 창고에 처박힌 채 잊혀졌던 것이다.
조선말 큰사전은 1947년 10월 9일(한글날) 제1권이 간행되었고, 1957년 총 6권으로 완간되었다. 조선말 큰사전은 현재도 '우리말 큰사전'이란 이름으로 배포되고 있다.
이후 1949년 한글날을 기해 이름을 '한글 학회'로 바꾸고.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아마도 1948년 고착화된 남북 분단이 계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북한의 경우는 월북[1]한 김두봉이 따로 한국어 및 한글 정비 사업을 주도하여 분단 이후 남과 북의 말이 표준어와 문화어로 달라지는 계기가 된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조선어학회가 일제의 치안유지법으로 박해를 받았고, 이 과정에서 일부 회원이 고문을 받았고 일부는 옥사하였으며 그간 추진되었던 우리말큰사전 계획이 무산되어 버렸다.
4 1945년 독립 이후
해방 직후 석방된 학자들을 중심으로 학회를 재건하고 조선말 큰사전 편찬 작업을 재개했다. 조선어 학회는 1947년 한글날을 기념하여 조선말 큰사전 1권을 간행하였으며, 이후 1957년 6권 발간을 마지막으로 한글 사전 편찬을 마무리한다. 1949년 10월 학회의 명칭을 '한글 학회'로 바꾸게 되며,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한글학회는 조선어학회를 계승하는 다른 단체인 줄 아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한글학회는 옛 조선어학회가 광복 이후 이름만 바뀐 것일 뿐 그 시절 그 단체의 명맥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다.
1988년 문교부에서 고시한 한글 맞춤법은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을 토대로 일부 고쳐서 고시한 것이다.
5 위치
5호선 광화문역 근처에 있는 한글회관 5층에 사무실이 있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3길 7.
#홈페이지
6 기타
영화 말모이가 조선어학회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며, 제작단계에서부터 한글학회의 도움을 받았다. 영화 끝 스탭롤에 보면 한글학회가 보관중인 자료의 실물 사진들이 등장한다.
7 대중 창작물
8 영화
8.1 말모이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조선어학회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 정확히는 월북이 아니라 그냥 북한으로 귀국한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일제 당국에 체포당하지 않은 사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