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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語學會 事件
1 개요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일본이 한글 교육 및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에 따라 당시 한글에 대한 연구를 해왔던 조선어학회 한글학자들에 대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한글 사용 금지를 어겼다는 사유로 집단으로 체포 및 투옥했던 사건. '한글학회 사건', 또는 '한글학자 집단 체포사건' 이라고도 불리우며, 조선어학회의 후신인 현 한글학회에서는 '조선어학회 수난'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국어사전 편찬 사업은 중단되었고, 원고가 실종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뒤 남한에서는 1957년 한글학회에 의해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 사업이 완료되었으며, 반면 북한에서는 김두봉 등의 주도로 《조선말사전》이 편찬되었다.
2 사건의 경과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한국인과 일본인은 본래 같은 종족이라는 논리로 전시 체제의 동조를 유도하는 내선일체론을 내세웠으며, 이를 위해 한국어의 말살과 창씨개명 등을 시도하였다.
1938년 제 3차 조선 교육령으로 한국어 및 한국사 수업이 의무 교육에서 해지되었고 이로 인해 사실상 조선어 과목은 버려진 상태였으며[1] 이 시기 일본어 교육 및 사용을 의무화하라는 훈령을 각급 학교에 지시한 상태였다. 한편 지식인에 대한 탄압도 계속되어, 1941년에는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이 발령된 상태였다.
이 즈음 함경남도 함흥에서 함흥 영생고등학교 소속의 여학생이 기차 안에서 일본어가 아닌 조선어로 대화를 하자 이를 눈치챈 친일계 조선인 경찰관 '야스다(한국명 : 안정묵)'가 즉시 체포하였다. 이 여학생은 일본 경찰의 취조와 고문 끝에, 조선어학회 소속 한글학자이자 서울에서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고 있다는 정태진이 그녀에게 민족정신을 수호해야 한다는 것을 교육받게 되었다는 진술하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이러한 사업이 민족 운동의 일환이라고 주장하며 탄압에 들어간다.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자신들은 우리말 연구와 사전편찬에 신경을 쓴 것 외에는 독립운동을 조장한 적이 없다고 변론했지만, 일제는 1943년 4월까지 총 33인의 한글학자들을 체포하였다. 그 결과 학자 대부분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았거나 모진 고문 등을 당한 끝에 이 중 16인은 치안유지법[2]에 근거하여 '내란죄'를 죄명삼아 함흥형무소로 수감시켰고 12명은 기소유예 처리를 받았다. 그 중 한글학자였던 이윤재, 한징은 형무소 수감 중 옥사(獄死)하였으나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남은 학자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2.1 체포된 한글학자 명단
- 이극로
- 최현배
- 이희승
- 이윤재 - 함흥형무소에서 사망.
- 정인승
- 정태진
- 김도연
- 김양수
- 이인
- 김법린
- 장지영
- 이중화 - 조선의 궁술 편찬자이기도하며, 그가 쓴 조선의 궁술은 전통 국궁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 이우식
- 정열모
- 한징 (함흥형무소에서 사망)
- 김윤경
- 권승욱
- 이야자
- 이병린
- 이강래
- 김선기
- 이고루
- 정백수
- 윤병호
- 서승효
- 장현식
- 신윤국
- 김종철
2.2 체포 면제자
- 권덕규(병중(病中)인 관계로 체포면제)
- 안호상(이후 1948년에 초대 문교부 장관 역임)
3 해방과 큰사전 출간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투옥됐던 한글학자들은 석방되었고, 이들은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고 국어사전 출간을 재개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중 사건 당시 압수된 후 행방불명이었던 초고 26,500여장의 원고를 경성역(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찾아내게 된다. 고등법원에 항소를 내면서 증거물로 서울로 이송되었다가 유야무야하다 보관되게 된 것.
이후 되찾은 원고를 기초로 내용을 추가하고 수정한 끝에 1947년 한글날에 《조선말 큰사전》 1권을 을유문화사에서 출판하였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국어사전을 출판하게 된 이들의 감개가 담긴 서문은 지금 읽어도 뭉클해지는 명문. 우리말 큰사전 머릿말 전문
1949년 조선어학회가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조선말 큰사전》에서 《우리말 큰사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3권까지 나왔으나, 1950년 6.25 전쟁이 터지면서 큰사전의 출판은 다시 중단되었다. 전쟁통에 원고를 땅에 파묻고 피난을 가는 수난을 겪은 끝에 다시 발간이 시작되어 1957년에 6권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희승은 사건 당시의 수감 생활을 소재로 한 '칠불당(七佛堂)'이란 제목의 수필을 썼다. 이희승 특유의 유머 감각이 잘 살아있는 수필로 칠불당이란 필자인 이희승 본인을 포함한 감방 수감자 7명을 부처님에 비유한 것이다. 처참한 수감 생활을 유머있게 표현함으로서 반어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