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북한의 국가원수 | ||||
대수 | 이름 | 직책 | 임기기간 | 비고 |
1대 | 김두봉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 1948년 9월 9일 ~ 1957년 9월 20일 | |
2대 | 최용건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 1957년 9월 20일 ~ 1972년 12월 28일 | 1962년 재선 1967년 3선 |
3대 | 김일성 | 국가주석 | 1972년 12월 28일 ~ 1994년 7월 8일 | 1977년 재선 1982년 3선 1986년 4선 1990년 5선 |
권한대행 | 김정일 | 국방위원장 | 1994년 7월 8일 ~ 1998년 9월 5일 | 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 권한대행 |
4대 | 김영남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 1998년 9월 5일 ~ 2009년 4월 9일 | 상임위원회 위원장직은 현직 |
5대 | 김정일 | 국방위원장 | 2009년 4월 9일 ~ 2011년 12월 17일 | |
권한대행 | 김영남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 2011년 12월 18일 ~ 2012년 4월 12일 | 상임위원회 위원장직은 현직 |
6대 | 김정은 |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 2012년 4월 13일 ~ 2016년 6월 29일 | 직책 폐지 |
국무위원회 위원장 | 2016년 6월 29일 ~ 현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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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좌측에 서있는 인물이 바로 김두봉. 오른쪽부터 김일성, 박헌영, 김원봉, 허헌, 김달현. 한국 전쟁 초기인 1951년에 사망한 허헌이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 해방 후 전쟁 전인 1948~9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출처 : #)
1 개요
김두봉(金枓奉, 1889년 3월 17일 - 1961년?)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한글학자이자 북한의 정치인, 일제시대에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과 한글연구를 병행했다. 또한 주시경 선생의 수제자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의 저서로는 일제 강점기 당시 한글사전인 조선말본이 있다. 호는 백연(白淵, 히못)이다.
2 일제강점기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문과 한학을 배웠으며 일제가 세운 소학교 입학을 거절하고 그 대신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 이 학교의 국어교사로 주시경이 있었다. 김두봉은 이러한 주시경의 영향을 받아 한글학자가 되었다.
1910년 이완용이 한일합방을 체결하자 안교재, 남형우, 신배부, 이경희 등 동료들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해서 활동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계속 한글을 연구하며 조선말본 집필에 들어갔으며 1916년 조선말본을 완성했다. 1917년 보성고등보통학교의 국어교사로 부임했으나 일제의 끈질긴 추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압록강으로 도주한 뒤 영국에서 온 화물선에 숨어서 상하이로 밀항했다.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했고 김두봉 자신은 내무부장 겸 선전부장이 되어 활동했다.
이후 상하이가 아닌 1942년 중국 화베이 옌안에서 활동하면서 조선독립동맹에 가담, 그 해 7월 의장이 되었다.
3 해방 후
하지만 해방이 되어 귀국하자 남한이 아닌 북한으로 가고 거기서 조선신민당을 조직하여 그 위원장을 지냈으나, 1946년 8월 소련군의 지원을 받고있던 김일성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합당하여 북조선 노동당이 창건되자, 그 위원장이 되었고, 소군정하에서 조선어신철자법 제정에 힘을 쓴걸로 알려졌다.
이후 1948년 북한정권 수립 당시 김일성, 박헌영 등의 추대를 받아 북한의 초대 수령이 되었고, 북한의 어문정책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일성이 박헌영과 힘을 합쳐 한국전쟁을 일으키려 할 때 김두봉은 김원봉과는 다르게 서울은 한반도의 심장이다. 서울만큼은 무조건 장악해야만 한다며 김일성의 남침을 찬성했다는 의견이 있다.
3.1 6.25 침략 참여 논란
김두봉이 김일성의 침략행위에 같이 참여했는지 논란이 있다.
3.1.1 침략에 참여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과 한국전쟁 - 김두봉의 활동과 역할을 중심으로 라는 논문의 pdf p17부터 보면 6.25 전쟁 발발 후 상임위원장으로서 북한 법적 체계상 '남조선' 행정기구 등을 도입하게 하고 인민군의 사기 진작을 도왔다. 6.25 직전 평화회담을 대한민국에 제안하는 것을 보면 침략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뿐 아니라 김두봉은 연안파 북측 인물들과 끈이 있고 대표성이 있는 인물이다. 또한 소극적 반대를 했다고 보기엔 평화회담 제의 뒤 바로 전쟁 이틀 전 남한 국회를 비방하면서 남측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발언을 한 점 즉 북측이 6.25전쟁 북침 주장의 밑밥을 깐 점, 전쟁 발발 즉시 북침으로 가정, 7월 4일 남측 토지 개혁 추진과 더불어 남측 행정기구 조직, 1951년에도 여전히 미제국주의자들에 의한 괴뢰 비방 등을 볼 때 김두봉이 반대 또는 소극적 반대 입장 근거는 부족하다.
3.1.2 침략에 참여하지 않았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책에 의하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예정대로 북한군은 1 9 5 0년 6월 2 5일 새벽 4시를 기해 일제히 3 8도선을 넘어 전면남침을 개시했다. 같은 시각 김일성은 내각비상회의를 개최해“동지들, 매국역적 리승만의 군대는 오늘 이른 새벽 3 8선 전역에 걸쳐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무력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라고 둘러대면서 휘하의 고급 당 간부들까지 속였다.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북한은 줄곧“미제와 이승만 도당은 1 9 5 0년 6월 2 5일 드디어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하여 조선인민을 반대하는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인민군이 미제와 그앞잡이들의 무력침공을 물리치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고수하기 위한투쟁에 떨쳐나섬으로써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출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알아봅시다! 6.25 전쟁사, 110쪽
여기에 의하면 김일성과 군부는 고급 당 간부들까지 속인 것을 알 수 있다.
A.V.토르쿠노프의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란 책에 인용된 문서에[1]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의 이름은 나오나 김두봉이라는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김두봉 보다는 스티코프가 더 참여했을지경.[2]
박명림 교수의 책에 의하면 이런 내용도 확인이 가능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한국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김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이권무, 김창덕, 유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나남출판. 303~304쪽.
이 내용을 구글 도서 검색에서 검색해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최용건 을 제외 하고도 전쟁 에 소극적인 인물 들이 있었다 . 그 중에는 우선 최고 인민 회의 상임 위원장 을 맡고 있었던 김두봉 이 있었다
김일성은 침략 당시 북한에 대대적인 조작을 했다. 일본과 독일은 최소한 침공주체를 왜곡하지는 않았는데 북한은 침공주체도 까지 조작을 했다. 물론 군사학에 기본 지식만 있어도 침공주체가 대한민국이 아닌 북한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두봉은 한글학자인데 당시 한글학자가 그런 군사학적 판단이 가능했을까? 항일활동을 한 김일성 세력조차도 전면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안 되있는 머저리였다.
김두봉이 침략계획에 참여했는가 물증은 없다.
4 6.25 전쟁과 그 후
6.25 전쟁이 끝나자 김일성이 김두봉을 바지사장으로 전략시키려고 하자, 김두봉은 이에 반발하여 김일성에게 계속적인 비판을 했다. 이 때문에 김일성은 김두봉의 꼬투리를 잡을 궁리를 하게 되었고 때마침 일부 연안파 간부들이 김일성이 혼자 다해먹으려는 행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하자 김일성은 이 사건을 김두봉과 엮어서 김두봉을 실각시켰다. 김두봉을 실각시킨 김일성은 후임 바지수령으로 최용건을 내세웠으며 최용건을 1972년까지 바지수령으로 써먹다가 1972년 김일성이 그냥 지가 수령이 되어 본격적인 독재자가 되었다.
1958년 조선노동당에서 출당되었고, 농민으로 강등되어 1961년 합작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총평
공산주의를 신봉하여 한국을 좀더 노동자가 잘사는 나라로 만들고는 싶어했으나, 하필이면 김일성과 손을 잡는 바람에 망했다. 심지어는 한국전쟁 때 북한의 남침을 찬동한 탓에, 독립운동으로 활약한 이력까지 상쇄했다. 북한을 위한 애국심은 있었으나 선택을 잘못해 독재자에게 놀아난 비운의 인물이다.근데 또 한편으로는 그대로 남한에 남아있었다면... 이런 사람들이 결국 남한에서나 북한에서나 양심과 신념 보다는 권력자의 입맛에 맛는 인간들이나 살아 남아 한자리 해먹고, 소신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은 남한의 양민 학살이던, 북한의 강제 수용소에서든 때거지로 죽어갔다는 점 자체가 근대 한국사의 비극이다.
6 여담
같은 독립운동가였으며 월북한 인사인 약산 김원봉과 이름과 행보가 비슷해 헷갈리거나 친척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봉'자로 인해 돌림자로 아는데 김두봉의 '봉'자는 받들 봉(奉)이고 김원봉의 '봉'자는 봉황 봉(鳳)이다. 다만 인척 관계이긴 했다. 정확히 말해서 김두봉은 김원봉의 본처 박차정[3]의 외당숙이었다. 박차정은 김두봉의 5촌 조카인 셈. 생전에 김원봉에게 "내 조카 차정이는 갔지만 약산은 언제까지나 내 조카사위"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 3봉이 있다. 김원봉 김두봉 양세봉 (원봉 투봉 쓰리봉!!) 도담삼봉
한편 김두봉이 어느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하거나 이름을 올린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김두봉은 연안으로 가기 전 까지는 사회주의와는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와 대립했다고 한다. 상해에 있을 때는 한때 인성학교의 교원으로 활동하다 인성학교 교장에 추천되었는데, 한 번은 공산주의자들이 학교를 집회장소로 허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김두봉은 신성한 교육장소를 정치적인 투쟁장으로 쓰도록 허락할 수 없고, 남의 나라 조계안까지 와서 정치투쟁을 하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라며 이를 거부했었다. 김두봉의 거절에 앙심을 품은 공산주의자들은 집단으로 김두봉과 인성학교를 비난하는 성토를 했다. 이에 격분한 김두봉은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며, 그들에게 학교를 빌려주는 것을 거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한다.
월북 인사이며 북한 정권 초창기에 숙청당했기 때문에 다른 북한 정치인들에 비해 존재감이 매우 부족한 편. 그나마 그를 자세히 다룬 매체는 MBC 공화국 시리즈의 시작인 제1공화국(드라마)이다. 해당 배역은 중견 배우 박영지가 맡았다. 당시 김일성 역의 국정환과 함께 호연으로 호평을 받았다. 당시에는 시대가 시대인지라 북한 인물에 대한 정보나 자료가 부족했고 있어도 다소 왜곡,폄하된 것이 대부분이였기에 박영지는 나름 자신만의 해석을 가지고 연기에 임했다고 한다.
그가 나고 자란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현재는 부산광역시로 편입됨)는 김해 김씨 일파의 집성촌으로, 이 지역 출신의 친척 중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람이 많았다. 제1공화국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김약수는 그의 6촌 동생이다. 김약수는 개명한 것으로서 본명은 김두전(金枓全). 두(枓)가 돌림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