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생
실존하는 정치깡패로 동아일보의 1961년 10월 24일자를 통해 동대문파에서 동대문시장상인련부회장을 지낸 것으로 나오며, 제1공화국 당시의 여러가지 폭력 사건으로 인해 1961년 12월 23일 혁명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65년에 가석방되었고 이후 행적은 불명. 약 20여 년 뒤에 동대문파 분석기사로 잠시 등장하는 것 외에는 소식을 알 수 없다.
2 야인시대
담당배우는 차룡. 극중 동대문파의 고문으로 동대문에게서 임화수에게 형님대접받는 인물. 비록 실권은 임화수보다는 딸리지만 나름 큰 영향력을 떨친 인물이다. 말그대로 서열만으론 김기홍 다음이었지만 그가 떠난 후 1.5위쯤 된다. 이정재가 단성사 저격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2인자격인 임화수가 병원으로 피해서 농땡이를 치는 동안 회장대행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서남 방언을 사용한다. 조열승의 고향은 미상이지만, 배우 차룡씨가 전남 목포 출신으로 서남 방언에 익숙하다는 점 때문에 그렇게 설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등장은 동대문 지게꾼 왕초로 나오며 임화수와 같이 극중 장사장[3] 이라는 인물을 협박해 점포를 날로 먹으려고 나온다. 그리하여 장사장의 요청을 받은 이정재와 1:1로 맞붙어 초반에는 대등하게 싸웠으나 점차 밀리면서 결국 이정재에게 항복하고 점포를 포기한다. 본인말로는 맞장떠서 진건 이정재를 상대로 처음이라고 한다.
그 후로 이정재를 형님처럼 모시게 된다. 그래서 동대문파가 결성되었을때 고문역할로 취임했다. 김기홍이 조직을 떠난 후로는 그를 대신해 참모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극중 대사와 비중도 약간은 더 늘어났다. 하지만 초반에 나름 한주먹하는 이미지와는 달리 시라소니에게 손도 못쓰고 당하는 등[4] 전투력 측정기로 전락하는 인물...
이정재가 동대문파 회장에서 물러날때 이석재, 이억일과 더불어 은퇴한다. 이석재와 함께 초야에 칩거한 이정재의 집을 방문하거나 이정재의 명령으로 고대생 습격 사건을 터트린 임화수에게 찾아가 따지는 장면이 몇번 묘사된다. 실제 인물 조열승이 이정재 실각 이 후에도 주먹계에서 손을 씻지 못했다가 혁명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작중 대우가 나름대로 좋은 편이다.[5]- ↑ 신문에서 1961년 당시 41세라고 표기한 신문도 있고, 43세라고 표기한 신문도 있다.
- ↑ 야인시대에서는 임화수보다 한 살 많다고 임화수가 언급했다. 임화수가 1921년 생이니, 조열승은 작중 1920년생이 되는 셈이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나이가 불명확하나 아마도 임화수와는 비슷한 나이대고 이정재하고는 연배 정도쯤 될 것 같다.
- ↑ 이정재의 학교 선배라고 한다. 하지만 6.25 전쟁 이후 행방불명. 덕분에 장사장이 갖고 있던 동대문은 이정재의 것이 된다.
- ↑ 참고로 배우 차룡은 왕초에서 시라소니 역을 맡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시라소니가 시라소니를 때려눕힌 셈(...).
- ↑ 다만 그렇다로 너무 좋아할만한게 아닌 것이 결국에는 그도 허정 과도정부나 제 2공화국 또는 5.16 이후 잡혀갈것이 뻔하고 동대문패의 최고위 간부(그것도 3인자에서 단성사 저격 사건으로 2인자로 오른, 말 그대로 이정재 바로 다음 위치이다.)인데다 여러 정치인 테러나 폭력사건에 주모자, 지휘자로 연루된 것을 고려하면 그도 중형을 면치가 못하게 되고 최악의 경우, 최고 사형까지 각오해야 한다. 실제로 그는 결국 상술한대로 군정때 사형까지는 안 갔지만 종신형을 받았고 가석방을 받았으니 드라마라고 해서 마냥 안심을 못하는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