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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스페인 국왕 | ||||||
페르난도 7세 | ← | 호세 1세 | → | 페르난도 7세 |
파일:Attachment/호세 1세/Example.jpg
생몰년도 | 1768년 1월 7일 ~ 1844년 7월 28일 |
출생지 | 프랑스 코르시카 |
사망지 | 토스카나 공국 피렌체 |
재위기간 | 나폴리 왕국 국왕: 1806년 5월 30일 ~ 1808년 6월 6일 |
스페인 국왕: 1808년 6월 6일 ~ 1813년 12월 11일 | |
별명 | 주정꾼 조제프(Pepe Botella)[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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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1세의 문장
1 스페인 왕위 즉위 전 시절
이름은 조제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Joseph-Napoléon Bonaparte). 줄여서 조제프 보나파르트라 불린다.
나폴레옹의 형이다. 나폴레옹이 사관학교에 다닐 동안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으며, 코르시카 시절부터 나폴레옹과 함께 활동했고 나폴레옹이 군인으로써 공적을 세우기 시작할 때부터 나폴레옹을 따라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를 역임했다. 나폴레옹 집권 과정에서 뤼시앵과 함께 상당한 활약을 했지만, 실상 기질이 나약하고 탐욕스러워서 큰 도움이 된 적은 없었다... 나폴레옹 집권 후에는 주로 외교 분야에서 활동했는데, 깽판친 게 많아서 나폴레옹이 직접 나서서 상황을 수습한 적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형이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이탈리아 왕국의 전신인 치살피나 공화국의 의장, 그 뒤에는 이탈리아 왕과 나폴리 왕을 차례로 제안했지만, 조제프는 나폴레옹의 제위계승권을 요구하면서 고집을 부리다가 나폴리 왕위를 수락한다.
그 후로는 나폴레옹이 그 자리를 처남인 조아생 뮈라에게 주고, 뮈라의 깽판으로 무주공산이 된[2] 스페인의 왕위를 주었을 때에도 군말없이 따랐다. 그러나 그가 스페인 왕이 되면서 프랑스에 대한 스페인 민중들의 적개심이 폭발,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촉발되게 된다. 분명 나폴레옹은 이 결정을 평생 후회했을 것이다.
2 스페인 왕 재위시절
비록 동생덕분에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나름 개혁정치를 펼쳤다. 구시대의 산물인 이단심판을 폐지하였으며 봉건제도를 폐지하려고 하는 등 그들의 전임자였던 카를로스 4세나 페르난도 7세에 비하면 이는 상당한 진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당연히 성직자등 보수세력들에게 가로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게릴라들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펼치려고 했지만 나폴레옹은 강경하게 게릴라를 토벌했고, 프랑스군이 스페인인들을 탄압하게 되면서 자연히 민중들의 지지까지 잃게 되었다.
어째서인지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그가 무능했다는 편견이 인터넷에 널리 퍼져있지만 그는 결코 무능하지 않았다. 그는 순간순간마다 제법 정확한 판단을 했고, 필요한 것을 알맞게 짚어서 동생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불운한 점이라면 첫째로 그의 상대가 아서 웰즐리,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최상위급의 명장이었다는 점이었고 둘째로 파리의 사령부에서 이베리아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낙관하기만 했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필요한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오히려 러시아 원정에 병력을 차출당하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결국 그는 아서 웰즐리에게 털리고 반도 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3 폐위, 그리고 말년
결국 1813년 그는 폐위되었으며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는 유럽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1817년에 미국으로 망명하여 거기에 15년을 살았다
1820년에는 허수아비 멕시코 황제로 그를 제위시키려는 미국 정치계 유혹을 받았으나 "난 허수아비 왕 생활을 해봐서 그게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안다!"라며 거절했다. 우습게도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세월이 훨씬 지나서 막시밀리안 1세를 멕시코 황제로 옹립했다가 막시밀리안 1세는 비참하게 총살당했던걸 보면 그가 잘 생각했다. 늘그막에는 프랑스로 돌아와서 조용히 살다가 1844년 피렌체에서 세상을 떠났다.
- ↑ 호세 1세에 반감을 가진 스페인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 ↑ 자세한건 이베리아 반도 전쟁 문서를 참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