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안 1세

1 신성 로마 제국황제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막시밀리안 1세카를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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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imilian I

1459년 3월 22일 ~ 1519년 1월 12일

카를 5세페르디난트 1세의 선대 황제이자 조부. 재위 1493 ~ 1519.

정략적 결혼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와 세력을 크게 넓혔다. 또한 이탈리아를 놓고 프랑스와 맞서 대를 잇게 되는 지리한 싸움을 시작하기도 했다.

1459년 프리드리히 3세와 포르투갈의 엘레아노르 사이에서 태어난 막시밀리안은 부르고뉴 공작 샤를의 외동딸인 마리와 1477년 결혼함으로써 부르고뉴 백작령과 저지대 지역-베넬룩스 3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분쟁이 계속되어 1493년 상리스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프랑스와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이 기간 중 마리가 1482년에 사망한 후 브르타뉴 여공작 안과 결혼을 하려고 시도했으나 어린 샤를8세의 섭정이었던 안이 샤를의 약혼녀인 딸인 마르가레테를 돌려보내고 샤를과 브르타뉴의 안을 결혼시키는 일도 있었다.

한편 이 기간 동안에는 오스트리아 내의 합스부르크 영지들의 종주권을 그 자신에게 통합시키는데 성공하였는데, 특히 인스부르크와 이 지역의 은광을 획득한 것은 특히 중요한 성과였다. 1493년에 황제로 등극했고 그 다음해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함으로서 밀라노에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다.

1495년 보름스 의회에서 황제권, 즉 중앙권력의 강화를 시도했으나 독일 내의 선제후들과 귀족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이는 1504년에 반대파의 수장인 베르흐톨트 마인츠 대주교가 사망하고 독일 최대의 금융업자인 푸거 가문과의 신용협정을 통해서 막대한 자금을 융통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1]. 1499년에는 슈바벤 전쟁에서 패전하여 바젤 조약을 통해서 스위스의 합스부르크 영향력에서 사실상 독립을 인정해야 했으나, 1495년 아들 필리프(카스티야 왕으로서 펠리페 1세)가 카스티야의 후아나와 결혼함으로써 훗날 스페인을 합스부르크가에 편입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2]. 필리프와 후아나 사이에 나온 카를 5세는 제국의 차대 황제이자 스페인 왕으로, 페르디난트 1세는 차차대 황제로 즉위한다.

이탈리아에서는 1495년부터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샤를 8세의 나폴리 왕국 정복을 저지했고, 베네치아와도 상당한 기간동안 대립하고 있었다. 교황이 황제대관을 해주기로 했으나 베네치아가 끼어들어 막시밀리안의 이탈리아의 안전한 통과를 방해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와 가까운 트렌트에서 교황의 대리인 자격으로 트렌트 대주교가 대관해주었다. 그러나 이미 이시기엔 교황의 황제대관은 황제즉위와 상관 없었다. 스스로 그 이전부터 황제 칭호를 썼고 아무도 트집잡지 않았다. 훗날 그가 심혈을 기울여 기반을 닦아준 손자 카를 5세는 클레멘서 7세를 사로잡고 볼로냐에서 교황에 의해 대관식을 치렀다.

1499년 슈바벤 전쟁에서는 스위스동맹에게 패하고 스위스를 합스부르크가문 영향권에서 사실상 독립한다. 다만 신성로마제국 권역에서 독립한건 아니다.

막시밀리안의 진정한 시련은 밀라노 지역에서 일어났다. 모계를 통해서 비스콘티 가문을 잇고 합스부르크와 평생에 걸친 항쟁에 들어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자신이 밀라노 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의 패배와 이를 추인한 브뤼셀 조약을 통해서 밀라노 공작령을 프랑스에게 넘겨야만 했다. 이 영지는 뒤에 손자 카를 5세가 수복할 때까지 프랑스령이 되었다. 이후에는 손자인 카를 5세에게 스페인 왕위와 제국의 제위를 순조롭게 물려주려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구성하는데 전념하다가 1519년 1월에 상 오스트리아의 벨스에서 사망하였다. 그해 말 손자 카를 5세는 로마왕에 추대되었고 그로부터 1년 뒤 선출된 로마 황제로 즉위했고, 10여년 후에는 교황에 의해 마지막으로 대관식까지 치뤘다..[3] 원정은 실패했지만 이탈리아 원정비용을 제공한 야코프 푸거에게 제국백작을 수여했다. 훗날 야코프 푸거는 장손자 카를 5세의 황제 선거자금 대출을 해줘서 당선에 공헌했고, 면죄부 판매자금을 대출과 로마교황청 송금을 맡아서 종교개혁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말년에 교황청에서 마르틴 루터를 체포하고 처벌하라는 압력에는 냉담했다.

란츠크네히트를 창설하는 등 군사적인 업적에서 재능을 발휘했고, 중요한 군사개혁과 행정개혁을 실속있게 시행했으며 중세적 사고가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고에도 관대하였으며, 예술과 문학 및 과학의 발전에도 상당한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군주의 기사도적인 면모를 보이는 데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경제문제에는 문외한이었으며 재정적으로도 믿음직하지 못했기에 결국 열세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어 이탈리아에서의 이익 확보에 결과적으로 실패하게 되었다.

막시밀리안은 샤를마뉴의 제국을 부활시키려고 했지만, 그 많은 결혼전쟁에도 불구하고 그 당대에 얻은 것은 보잘 것 없었다. 다만 이것은 후대에 가서 엄청난 효과와 역사적 사건들을 야기하지만.

그러나 그의 유업은 손자인 카를 5세에 의해 계승되어, 제국령에 추가로 스페인,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아메리카, 필리핀을 넣어 합스부르크 사상 최대 판도의 대제국을 이룩하는 위업을 세운다. 자세한 것은 카를 5세 항목 참조.

총 3번의 결혼을 했는데

  • 1. 마리 드 부르고뉴 1457년 - 1482년 (25세)
프랑스의 왕자들에게 물려주던 부르고뉴 공국의 유일한 후계자로 당시 황금의 신부, 부귀공 마리 뭐야 무서워..별명이 리치야... 등등 으로 불렸던 여성. 마리와 막시밀리안은 서로 6촌 사이로 [4] 막시밀리안의 외할아버지는 모두 포르투갈의 왕인 주앙1세의 자녀였다. 당시 부르고뉴 지방이 노른자 같은 지방이라 서로 마리와 결혼해 부르고뉴를 가지고 싶어했다. [5] 이를 계기로 마리는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 하게 된다.[6] 아름답고 부유하며 잘 배운 여성이였다고 전해지는 마리를 막시밀리안은 매우 사랑했고 둘 사이에는 두명의 아이가 태어나게 된다. 미남왕 필리프 [7] 와 이후 아스투리아스 공비와 샤보이의 공작 부인이 되는 마르가레테로 마리는 세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중 즐겨하던 사냥을 갔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사망했다. 이후 막시밀리안은 평생 마리를 그리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결혼은 더 했다 사망 후 마리가 고향인 벨기에에 묻히자 막시밀리안은 자신의 사후 오스트리아에 묻힐 자신의 시신에서 심장을 꺼내 마리 곁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
여담이지만 동화 라푼젤의 모델이다. 그녀가 막시밀리안에게 청혼하며 편지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보낸 것이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이야기의 모태가 된 것. 고립된 상황의 미녀라는 점에서 동일한 면모를 보인다.
  • 2. 안 드 브르타뉴 : 대리혼까지 했는데 프랑스에서 신부를 가져감. 실제 결혼생활을 한 것은 아니라서 부인이라고 보기는 좀 어려움.
자그마한 키에 예쁘장한 얼굴을 가진 안 드 부르타뉴는 부르타뉴 공국의 상속녀로 이전에 마리 드 부르고뉴를 빼앗긴 것이 못내 아까웠던지 프랑스의 왕이 홀랑 데려가 왕비로 삼는다. 이 불쌍한 여성은 이후 2명의 프랑스 왕과 결혼을 해서 내내 임신과 출산만 반복 하다가 변변한 후계자도 남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게 사망하게 된다. 부르타뉴 공국은 프랑스가 냠냠 했음은 당연하다.
  • 3.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 1472년 - 1510년 (38세)
밀라노의 공작인 갈레아쪼 마리아 스포르차와 두번째 부인인 샤보이의 보나 [8]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아버지는 여자 밝히고 잔인하고 폭력적이기로 유명했다. [9] 비앙카는 2살도 되기 전에 사촌과 결혼을 했는데 10살의 비앙카를 남겨놓고 남편이 죽어버렸다. 어린 과부였던 비앙카는 좋은 교육도 받지 못했고 세련되거나 교양이 있지도 않아 첫번째 부인인 마리와 많이 비교를 당했다. 몇명을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사망했고 그나마도 간간히 이어지던 관계는 1500년을 기점 별거 하게 된다.

여담으로 헨리 8세처럼 무구에 조예가 깊어 맥시밀리언 아머에 이름이 붙은 그 분이시다. 그와 원수지간이 된 손자와는 달리 헨리 8세와 관계는 같은 취미를 가진 덕후로(...) 나쁘지 않았는지 악마처럼 기괴한 모양의 철가면을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2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황족이자 멕시코황제

막시밀리안 1세(멕시코)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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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

1832년 7월 6일 ~ 1867년 6월 19일(34세)

재위 기간 : 1864년 4월 10일 ~ 1867년 6월 19일(멕시코의 황제)

1번 항목의 먼 후손.[10] 어머니 조피 대공비[11]나폴레옹 2세와 염문이 있었기 때문에 실은 나폴레옹 2세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이는 소문에 불과하나 나폴레옹 2세가 병중에 있을 때 조피 대공비가 막시밀리안 1세를 임신 중인 무거운 몸임에도 불구하고 병간호를 했을 정도로 두 사람이 친밀했던 것은 사실이다.

1832년 7월 6일에 빈에서 태어나 황족으로서 자라다가 1854년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 사령관이 되었고, 1857년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1세의 딸 샤를로테와 결혼하여 오스트리아의 북이탈리아 영토인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총독을 지냈다.

그대로 살았다면 평범한 황족으로서 편안하게 살았을 테지만 나폴레옹 3세의 욕심이 그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고 만다.

그 당시 멕시코에서는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이 원주민의 권리를 확보[12]하고 성직자와 군인의 특권을 제한하는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반대파들은 후아레스를 몰아내기 위해 내전을 벌여 수도 멕시코 시티를 점령하고 승기를 잡는 듯 보였으나 후아레스 대통령이 무기한 영토 종단 통과권까지 약속해가며 미국의 힘을 빌어낸 덕분에 패퇴당하자 후아레스처럼 외세를 끌여들일 작정으로 나폴레옹 3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편 반대파가 와해되고 후아레스가 내전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수도의 주인이 두번씩 바뀌는 등 국토가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멕시코 경제는 마비되는 상황에서 빚 갚을 날은 다가오자 후아레스 대통령은 모라토리움을 선언했다. 그런데 이것이 영 좋지 않은 효과를 가져와 결정적인 빌미를 주고 말았다. 나폴레옹 3세는 이것을 기회로 멕시코를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만들 속셈으로 1862년 멕시코에 군대를 파병한 것이다.

보통 같았으면 프랑스를 막으려고 수작을 부렸을 영국은 멕시코에 돈을 떼먹힌 채권국이었으므로 제동을 걸려 하지 않았고 미국남북전쟁으로 시끄러웠기 때문에 프랑스의 간섭을 막을수 없었다. 그리고 멕시코를 상대로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던 1864년, 프랑스는 막시밀리안을 멕시코로 데리고 와서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세웠다. 이 때, 막시밀리안의 형인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멕시코로 가려면 제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가라고 하였고 이에 막시밀리안 1세는 자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제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멕시코로 떠나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하지만 말이 멕시코 제국의 황제지, 사실상 막시밀리안은 나폴레옹 3세가 세운 괴뢰 정권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막시밀리안의 황제라는 자리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자리였다. 멕시코 반 후아레스 세력의 추대로(물론 나폴레옹 3세의 입김이 강했지만) 황제에 오르긴 했지만 멕시코 국민들은 외국 사람인데다가 낙하산으로 들어온 막시밀리안을 크게 지지하지 않았다. 게다가 막시밀리안 본인은 후아레스의 개혁을 일부 지지하기까지 입장을 내보였기 때문에 그를 추대한 세력과도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더욱이 남북전쟁으로 외부에 신경쓸 여력이 없던 미국이 남북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의 멕시코에 대한 내정간섭을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막시밀리안의 멕시코 황제 등극을 반대했고, 프랑스는 프로이센이 점점 강대해지자 멕시코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졌다. 결국 미국의 지원을 받은 후아레스가 막시밀리안의 군과 프랑스군을 물리치기 시작하자 프랑스는 막시밀리안에게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자신의 지지자들을 버리고 떠날 수 없다며 막시밀리안은 거부했다. 형인 프란츠 요제프 1세도, 당시 오스트리아는 멕시코에 어떻게 영향력을 끼칠 처지도 못되고, 그나마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한 처지라 오스트리아로 귀환하라고 권고하는 것 외에는 도저히 막시밀리안을 지원할 수 없었다.

결국 황제 즉위 1년도 되지 않아 프랑스군의 멕시코 철병이 시작되었고,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막시밀리안은 결국 후아레스군에게 체포되어 1867년 6월 19일 측근인 두 장군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가 죽기 전에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 레 미제라블의 작가이자 당시 프랑스 정계 진보파의 거두였던 빅토르 위고 등 많은 유럽의 명사들, 그리고 교황, 오스트리아와 적대적이었던 프로이센오토 폰 비스마르크 마저도 베니토 후아레즈에게 막시밀리안의 목숨만은 살려주라고 부탁했다. 사실 후아레즈 대통령 본인 또한 인간적으로는 막시밀리안에게 나름 호감을 가졌었다. 내전 당시 막시밀리안은 후아레즈에게 "항복하면 모든 죄를 사면함은 물론 대법원장에 임명하겠다"고 제의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세력이 한창 승승장구하던 시절에. 물론 후아레즈는 그 제의를 거절했고, 후에 막시밀리안에게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자기편이 유리한 상황에서 저런 통큰 제의를 해 온 막시밀리안이 나쁘게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후아레즈는 "이 기회에 함부로 내정간섭 하면 어떻게 되는지 유럽 국가들에게 똑똑히 보여줘야 한다"고 하며 결국 처형을 명했다. 처형되기 전 막시밀리안은 총살형을 집행할 병사에게 금화를 주면서 얼굴이 아닌 다른 곳에 총을 쏘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정작 병사들이 얼굴을 정조준해 쏘는 바람에 안습한 죽음이 되어버렸다.(…) 사족으로, 그의 수염은 매우 독특해 생전에 많은 신망을 얻었는데, 그가 죽자 그의 시체에서 그의 '아름다운 수염'을 수집가들이 잘라갔다고 전한다. 그의 유언은 "멕시코인들이여! 나는 멕시코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정당한 대의 아래 죽는다! 지금 흐를 내 피가 이 땅의 마지막이 되기를! 멕시코 만세!"

현명하고 사람 좋으며, 인품 또한 고결했던 동생 막시밀리안의 죽음을 통보받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큰 충격을 받으며 슬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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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구하기 위해 유럽에서 동분서주하던 아내 샤를로테는 끝내 남편이 비참하게 죽은 것에 충격을 받고 결국 정신병에 걸려 강제로 유폐 생활을 하다가 1927년 사망한다. 사망당시 나이는 87살이니....무려 60년 가까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비참하게 지내야 했다.

막시밀리안을 사지로 내몰고 나몰라라 한 나폴레옹 3세에 대해서 프랑스 국내에서도 비판이 일 정도였다. 참고로 샤를로테가 남편을 구해달라고 나폴레옹 3세에게 애원하자 그는 무책임하게도 그 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에두아르 마네는 이를 비판하는 "막시밀리안의 처형"(Die Erschießung Kaiser Maximilians von Mexiko)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처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의 복장을 프랑스군의 복장과 비슷하게 그렸다. 즉, 막시밀리안을 죽인건 프랑스라고 비꼬는 그림이다. 게다가 맨 오른쪽에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군인은 나폴레옹 3세와 상당히 닮았다.

결국 남을 사지에 내몰고 나몰라라한 나폴레옹 3세도 프로이센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하고 강제로 퇴위당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으니 인과응보라면 인과응보인 셈일지도.

그런데 역사적으로 골때린 일이 있었는데. 나폴레옹 3세의 큰아버지인 죠세프 보나파르트(즉 나폴레옹 1세의 형)가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1820년에 미국에서 그를 멕시코 황제로 옹위하려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호세 1세로 제위하여 스페인 국왕이 되었던 터라 허수아비와 같은 군주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안다며 거절했기에 그는 막시밀리안과 달리 천수를 누리다가 갔다.

아무튼 자신이 '벼락출세자'라 불렀던 나폴레옹 3세에게 이용당하고, 레닌에게는 '쓸모있는 바보'로 불리는 등 왕족이 지나치게 순수하면 비극이 된다는 사례를 몸소 보여준 슬픈 사례였다. 시대적 상황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명군의 자질이 있었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이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독립한 남부연합의 지원으로 황제 자리를 유지하며 남부연합과 함께 태평양 연안의 영토를 얻기 위해서 북부를 침공하하기도 한다. 당연히 이 사건 이후 멕시코는 전제 군주제인 세습정권으로 2차 대전때도 존속한다. 대신 혁명세력을 지원하는 북부와 황제를 지원하는 남부연합간의 대리전으로 끝없는 내전 상태 중으로 묘사된다.

3 바이에른 선제후

1573~1651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대학 동창 사이다.
팔츠 선제후에게 황제 자리를 제의받은 적도 있으나 거절했다. 재산이 1천만 플로린에 달했는데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20년분의 궁정 예산과 맞먹었다.

  1. 푸거 가문의 막대한 재력은 막시밀리안의 후계가 계속 제위를 차지하게끔 절대적 기여를 한다.
  2. 다만 원래 신성 로마 제국 소유였던 네덜란드도 훗날 카를 5세에 의해 스페인 소속으로 넘어가게 된다.
  3. 14세기 카를 4세 시기부터 황제 즉위는 로마 교황의 대관이 필요없다. 선제후의 투표 만으로도 확정된다.
  4. 부계, 모계 따지지 않고 6촌
  5. 특히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자신의 7살 난 아들과 결혼시키려 했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냈다. 당시 20대였던 마리는 당연히 이를 거절했고, 루이 11세에 의해 탑에 감금된다. 아버지가 죽고 부르고뉴의 후계자가 된 마리는 자신을 보호해 줄 보호자가 필요했기에 아버지의 유언대로 생판 모르는 오스트리아 왕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6. 마리를 탑에서 구출한 다음날 막시밀리안은 마리의 이니셜 M모양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며 청혼했다고 한다. 이 반지를 후대의 결혼반지의 유래로 보는 견해도 있다.
  7. 얼마나 잘생겼으면 별명이 미남왕 또는 미남공. 실제로도 미남이였던지 부인 후아나가 한눈에 뿅가서 점점 이상해지더니 남편이 먼저 사망한 이후 정줄을 놓아버린다. 이 여자가 그 유명한 카스티야의 여왕인 후아나 라 로카 (미친 후아나)다. 물론 후아나의 외가 혈통이 정신적으로 취약하긴 했으나 그 만큼 후아나가 필리프를 사랑했다 해서 후대의 창작물에 많이 영향을 미치게 된다.
  8. 샤보이의 보나는 영국의 왕인 에드워드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기 이전 워릭 백작이 결혼 대상으로 찍어 뒀던 여성. 영국의 왕비가 되었을 수 도 있었던 보나는 에드워드가 엘리자베스랑 홀랑 결혼해 버려서 갈레아쪼와 결혼하게 됨.
  9. 나쁜놈이 가질 모든 조건을 다 가졌다
  10. 족보상으로 보면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의 고조모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통해 모계 쪽으로 먼 조상중 하나이다.
  11. 조피의 남편 프란츠 카를은 황제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조피 역시 황후가 될 수 없었다.
  12. 후아레스 자신도 원주민 출신. 실제로 후아레스는 역대 멕시코 대통령 중 유일하게 백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