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나폴레옹 전쟁/인물, 맹장, 전쟁 영웅, 인간흉기
Joachim Murat
1767년 3월 25일 ~ 1815년 10월 13일
장 바티스트 베시에르와 함께 나폴레옹 군 최고의 기병대장으로, 기병지휘관으로는 실전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던[1] 그 시대 최강의 기병 사령관.
장 란과 함께 황제를 너라고 부를 수 있던 인물.[2][3]
그리고 원쑤 4호. 결정적일 때 나폴레옹에게 막타를 먹였다.[4]
1 개요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 나폴리 왕 조아키노(Gioacchino) 1세이자 초대 뭐라 대공, 초대 베르크와 클레브 대공.[5]
키가 큰[6] 곱슬머리의 미남이였으며 딴건 몰라도 싸움 하나만큼은 거의 지구 최강.[7] 주로 기병대를 이끌었는데 전술적 은폐고 뭐고 다 무시했으며 작전 자체를 아예 짜지 않고 자신의 감각으로 판단 후에 돌격하여 덤벼서 이겼다.[8] 기병이 공격해야 하는 타이밍을 제대로 잡는 감각만큼은 천재적인 수준이었다고 한다.[9]
2 생애
2.1 나폴레옹과의 만남에서 원수가 되기까지
여관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시절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아버지의 여관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1787년 21세의 나이로 기병대에 입대, 진가를 발휘하여 승진을 거듭해 5년만에 장교로 진급했다.
1795년 10월, 파리에서 방드미에르 13일의 반란이 일어났다. 왕당파 반란을 나폴레옹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나폴레옹과 인연을 맺었다. 나폴레옹은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가능한 빨리 파리 교외에 비치되어 있던 대포들을 확보해야 했다. 휘하의 기병을 끌고 미칠듯한 스피드로 무기고를 장악하고 나폴레옹에게 대포를 끌어다 준 것.[10] 나폴레옹은 이 대포로 시내에서 산탄을 영거리에서 갈겨대는 미친짓을 해대며 왕당파 반란군을 때려 잡았다. 그 공으로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이것을 인연으로 뮈라는 나폴레옹의 측근이 되었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전쟁, 이집트 원정에 모두 참가하며 공을 세웠다.
1799년 7월 경, 영국은 아부키르 항구에서 프랑스 함대를 박살냈다. 이후 영국군은 나폴레옹군 마저 섬멸시키기 위해 아부키르만에 세이드 무스타파가 지휘하는 투르크군 2만명을 상륙시켜 교두보를 구축했다. 세이드 무스타파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나폴레옹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치루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2중으로 구성된 견고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장기전을 꾀했다.
아부키르만 전투 당시 뮈라
나폴레옹은 이 군대를 격멸시키기 위해 공세를 감행했지만, 견고한 방어선을 뚫지 못했고 단 1차 방어선만 간신히 돌파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프랑스군의 공세가 무위로 돌아갈 때, 투르크 병사들은 방어선에서 나와 전장터에 방치된 프랑스군 부상병들을 학살했다. 이때, 뮈라가 기병대를 이끌고 방어선을 습격했다. 어찌나 빨리 들이닥쳤던지, 투르크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대열을 허물어트려 버렸다. 뮈라는 방어선 안쪽으로 침투하여 무스타파의 천막까지 들이닥쳤다. 무스타파는 뮈라의 군도에 손가락 두개를 잘린 채 사로잡혔다. 이때 뮈라 역시 무스타파가 쏜 권총에 턱에 부상을 입었다.
다행히 내 입술은 무사하다.
걱정스러워하는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농담을 던졌다.
한편,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고립될 것을 우려하고 군대를 이집트에 남겨둔 채 심복 몇명만을 대동하고 비밀리에 프랑스에 입국했다. 이때 뮈라 역시 나폴레옹과 함께 프랑스에 귀국했다.
1799년 11월 9일,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켜 의원들을 건물 밖으로 내쫓을 것을 명령했다. 이에 뮈라는 척탄병들을 인솔하여 의원들을 모조리 밖으로 쫓아내버렸다. 이러한 공로로, 나폴레옹은 뮈라를 매우 총애해했고, 1800년에는 나폴레옹의 여동생 캐롤린 보나파르트와 결혼, 나폴레옹과 인척관계를 맺게 된다.[11] 덕분에 뮈라는 나폴레옹의 모든 심복과 장군 중 유일히 원수를 넘어 '나폴리 <왕>'위를 제수받았다.
1800년, 나폴레옹은 마렝고에서 오스트리아군과 격돌했다. 이때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레옹의 군대를 중간에서 요격하여 나폴레옹을 패배 직전에까지 내몰았다. 하지만 나폴레옹군의 결사적인 반격으로 오스트리아군의 공세가 주춤해진데다, 마침 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가 지휘하는 선발 예비대가 돌아와 반격을 가함으로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뮈라는 기병대를 이끌고 퇴각하는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하여 크나큰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12] 이 전투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의 영향권을 박탈당해야했고, 프랑스는 이탈리아 내의 세력을 넓일 수 있었다. 1801년, 뮈라는 나폴리 왕국에 폴리뇨 조약을 강요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제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함과 동시에 원수로 진급했다.
그런데 뮈라는 개인적으로 장 란과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이집트 원정 당시 넬슨 제독에 의해 프랑스 원정군이 고립의 위기에 처하자 뮈라는 나폴레옹의 실수를 통렬히 비난했다. 이런 불평이 나폴레옹에게 전해지자, 다급해진 뮈라는 란이 한 말이라며 그를 모함한다. 이 때문에 란은 평생동안 뮈라를 싫어했고, 뮈라 역시 란을 경멸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1805년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출정할 때 이 두 사람에게 공동작전을 수행하라고 명령했다. 작전이 제대로 먹힐리 없을 듯 했지만, 놀랍게도 두 사람은 힘을 합해 연합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805년에 두 사람은 울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포위, 항복을 받아내고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적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뮈라는 그 답지 않게 러시아 군을 함부로 추격하려 들지 않았고, 표트르 바그라티온의 거짓 시한부 휴전 계략에 놀아나기도 했다. 그는 확실히 독자적으로 지휘할 때는 매우 미숙한 모습을 보였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패주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여 완전히 섬멸시켰다. 결국 프로이센은 폴란드 주둔군과 동부 쪽 병력을 제외한 전군이 포로로 잡히는 비극을 맛보고 나폴레옹에게 굴복했다.
아일라우 전투 때 기병대를 이끌어 적진으로 돌격하는 뮈라
1807년, 나폴레옹은 이번엔 폴란드로 원정했다. 러시아는 이를 막기 위해 대군을 일으켜 아일라우에서 나폴레옹군과 격돌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패전을 당할 위기에 놓였다. 나폴레옹은 적을 찾기 위해 병력을 사방에 분산켰기 때문에 당시 그에게는 41,000명의 병력만 남아있었다. 그런 때에 베니히센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 63,000명이 대포 460문을 앞세운 채 당도한 것이다! 전투가 개시되었고, 나폴레옹은 갈수록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느꼈다. 러시아군은 파죽지세로 밀려들었고, 방어선마저 붕괴되어 나폴레옹이 포로로 잡힐 위기에 놓였다. 이에, 나폴레옹은 뮈라에게 명령했다.
"더 두고볼 것 없게 되었다. 이반[13] 녀석들의 종심을 뚫고 들어가 박살내버려라!"
뮈라는 11,000명에 달하는 기병대를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했다. 그는 기병대를 80개 제대로 재편성한 뒤, 이들을 둘로 나누었다. 그러한 작업이 끝나자, 그는 기병대를 이끌고 러시아 보병대를 관통한 뒤, 거센 안개와 바람을 이용해 적의 집중 사격을 피했다.[14] 그는 다시 기병대를 정비한 뒤, 제 2차 돌격을 감행해 러시아 보병대는 물론이고 460문에 달했던 러시아 포병대마저 박살내버렸다. 이러한 돌격전을 벌이면서 뮈라의 기병대는 1,1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엄청난 피해를 맛보았고, 더이상 나폴레옹군을 공격할 여력을 잃었다. 때맞춰 프랑스의 증원군이 당도하자, 나폴레옹은 반격을 명령하여 러시아군을 몰아내버렸다.
2.2 나폴리 왕이 되다
아일리우에서 엄청난 활약을 한 뮈라는 이 공로로 대공의 작위에 올랐다. 하지만 뮈라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왕이 되고 싶어했다. 마침, 스페인에서 국왕 카를로스 4세와 왕세자 페르난도 사이의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뮈라는 스페인 왕가에 개입, 둘 다 퇴위 시키고 자신이 스페인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민다. 음모는 거의 성공하여 두 사람 모두 망명했으나, 국민들은 뮈라가 왕위에 오르기를 원하지 않고, 마드리드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1808년 5월 2일에 진압[15]되었지만, 뮈라의 스페인 왕위찬탈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실을 안 나폴레옹은[16] 왕이 되고 싶어하는 뮈라를 위해 원래 나폴리의 왕이던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왕으로 전봉 조치한 뒤 뮈라를 나폴리의 국왕에 앉혀주었다. 나폴리의 왕에 임명된 뮈라는 1812년에 자유주의적 헌법을 채택했다. 이탈리아의 통일을 꿈꾼 뮈라는 나폴리를 발판으로 통일 이탈리아의 왕이 되고 싶어했다. 뮈라는 리소르지멘토를 뒤에서 지원하여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키도록 획책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음모는 오히려 역폭풍을 맞기도 하여 나폴리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자신만의 나폴리 왕국 국기로 국기를 변경하였으며 나폴리를 프랑스의 속국의 개념이 아닌 독립적인 왕국으로서 지배해 나갔다. 특히 국왕으로서 정치 자체를 프랑스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아닌 나폴리의 원래 주민들 위주로 했으며 자신의 휘하의 주요 관리들을 모두 나폴리 사람들로 임명했다. 이 때문에 뮈라는 프랑스와 사실상 결별 상태가 된 반면 나폴리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행동은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을 퍼트려 이탈리아에 반프랑스 정서를 불러들인다.[17]
1812년 러시아 원정에 다시 기병대장으로 참전, 보로디노 전투에서 또다시 기병돌격을 통해 러시아군의 방위선을 박살내는 등의 대활약을 펼쳤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그의 활약을 발판으로 삼아 마침내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모스크바의 화재, 러시아의 초토화 전술, 그리고 동장군과 코사크족의 기습,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나폴레옹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파리에서 쿠데타 모의가 발각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국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서둘러 귀국했다. 나폴레옹은 원정군의 지휘를 뮈라에게 맡겼다. 나폴레옹이 뮈라에게 맡겼던 것은, 첫째로 그는 나폴레옹의 인척이었으니 믿을만 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그는 나폴리의 왕이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부하들 중 가장 높은 직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뮈라는 제대로 지휘하질 못했다. 그는 사관학교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군사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그저 나폴레옹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용맹한 기병대장이었을 따름이었다. 그런 그에게 총사령관의 직함은 도무지 맞지 않았다. 뮈라는 철수하는 원정군을 맡아서 일을 그르쳤다. 나폴리 왕국의 왕위가 위험하다는 판단으로 수많은 병력을 고스란히 러시아에 내버려둔 채 서둘러 나폴리로 귀국해버렸던 것이다. 프랑스군 붕괴에 큰 영향을 주어 결국 원정군은 추위와 러시아군의 추격 등으로 무너졌다.[18]
2.3 배신과 말년
러시아 원정의 재앙 이후 1813년부터 나폴레옹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제4차 대프랑스 동맹군이 프랑스를 압박할 때, 나폴레옹은 뮈라에게 원군을 요청하지만, 뮈라는 나폴리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어느 쪽에 붙어야 할 지 열심히 저울질했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나폴레옹을 배반하는 쪽을 택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놀랍게도 그의 아내이자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캐롤린 보나파르트의 꼬드김이 있었다. 캐롤린은 뮈라에게 나폴리 왕위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라면 나폴레옹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뮈라는 카롤린의 꼬드김에 넘어가 대프랑스 동맹과 협상하며 자기의 지위를 유지하기에만 급급하고,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의 양아들인 외젠의 라이프치히 전투 참전을 막고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성의없이 전투에 임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원래 나폴레옹의 부하 원수였던 스웨덴 왕 칼 14세[19]가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나폴레옹의 약점을 이용하여 나폴레옹을 궤멸시키는 작전을 짜서 실행에 옮기게 하여 이 작전이 성공했다.[20] 결국 이렇게 대패한 나폴레옹은 사실상 몰락했다. 특히 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는 폴란드의 왕으로서 대우받던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엘스터 강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다. 결국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치명타를 입은 나폴레옹이 황제에서 퇴위, 엘바섬으로 유배되자, 뮈라는 빈 회의에 사절을 파견하고, 밀실외교를 펼치며 자기 왕위 유지에 몰두한다.
그러나 배신자라서 유럽연합국들은 뮈라를 나폴레옹 황제보다도 더욱 안좋게 보았고 단순무식하고 기병대 지휘밖에 모른다는 이유 등으로 연합국들 측에서 뮈라는 냉대와 무시를 당했다. 게다가 나폴리 왕국의 원주인이었던 부르봉 왕조 출신의 페르디난드 4세는 뮈라를 축출했다. 그제서야 자신을 알아주는건 나폴레옹 황제 밖에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실히 깨닫는다. 그래서 엘바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이 다시 프랑스의 황제에 오르자 태도가 돌변, 이번에는 절대로 다시는 나폴레옹 황제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각오하며 진심으로 나폴레옹 편으로 완전히 돌아섰으며, 나폴리군을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며 나폴레옹에게 직접 달려가서 합류하기를 청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여동생 카롤린의 이간질에 넘어가 자신의 일을 크게 망쳤던 뮈라를 엄청나게 증오하고 있었기에 그의 작위를 모두 박탈하고 합류를 거부했다.[21] 뮈라는 할 수없이 코르시카 섬에 피신하여 거기서 숨어지냈다. 나폴레옹에게 속죄하기 위해 톨렌티노 전투에 출진했는데 잘 다룰줄도 모르는 포병을 지휘하다 전투에서 참패하고 코르시카로 달아난 뮈라는 다시 나폴리의 왕이 되고 싶어서 칼라브리아 섬에서 반란을 일으키지만 바로 실패. 결국 오스트리아군에게 잡혀 총살당한다.
총살형을 받게 된 날, 장교가 뮈라에게 눈가리개와 의자를 권했다. 하지만 뮈라는 이를 거절했다.
"나는 죽을 위험은 지겹게 겪어서 죽음은 전혀 겁나지 않는다네."
그는 당당히 서서 아내의 모습이 새겨진 보석 장식에 키스한 뒤에 병사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내 잘생긴 얼굴을 쏘지말고 내 가슴을 쏴라. 조준. 발사!"
조아생 뮈라는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기병대장이었다. 적들은 그가 이끄는 기병대에 속수무책이었고, 그가 모습을 드러내면 벌벌 떨었다. 기병대 지휘관으로써는 당대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빛나는 공훈을 세웠지만, 자기 지위에 만족할줄 모르고 욕심을 부려 추한 음모를 꾸며댔고, 결국 나폴레옹 덕에 왕위에도 오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지위에 집착하여 나폴레옹의 파멸에 일조하고, 나폴레옹의 위기때는 돌아보지않더니, 정작 마지막 순간에 판단을 그르치고, 뒤늦게 진심으로 후회하고 나폴레옹 편으로 다시 완전히 돌아가려다가 완전히 몰락한다. 소설의 주인공이라도 이렇게 파란만장하기는 힘들 것 같다. 의미없는 말이지만 만약 그가 나폴레옹을 배반하지 않고, 워털루에서 기병대를 이끌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뮈라는 총살당하자 쓰레기를 버리는 구덩이에 각종 쓰레기와 같이 아무렇게나 버려졌는데 평소에 뮈라를 존경하던 나폴리의 평민 중 한 사람이 죽음을 무릅쓰고 뮈라가 총살당하던 날 밤에 아무도 몰래 뮈라의 영구를 쓰레기더미에서 꺼내 깨끗이 씻은 후 프랑스로 가져가서 프랑스 최고의 묘지라는 페르 라세즈 묘지에 안장한 후 융숭하게 장례식을 치뤄줬다.[22]
3 이야기거리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서 가장 화려하게 옷을 입는 군인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뮈라였다. 보병 및 포병의 화력에 쉽게 노출되는 그의 화려한 복장은 오히려 그 용맹으로 인하여 적대국의 군대가 바라본 관점에서는 악몽 그 자체였다. 오직 화려함과 용맹만으로 저돌적이고 무식하게 밀어붙인 뮈라는 본의 아니게 심리전에서도 승리를 거머쥐게 되었다. 매우 화려한 군복을 갖추고 앞장서서 군도를 휘두르며 돌격하는 스타일 덕택에, 그는 뒷시대 화가들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뮈라의 후손들은 현재까지도 귀족의 신분으로 살고있다. 그 작위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름아닌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 전투때 칼 14세에게 엿먹은 것으로 인해 칼 14세로부터 몰수한 퐁트 코르보 공작이다.
현재 퐁트 코르보 공작은 1973년생의 퐁트 코르보 뮈라로서 조아생 뮈라의 6~8대손쯤 된다. 조아생 뮈라의 아들의 외삼촌이 나폴레옹이다. 이 사람은 그 후손이므로 나폴레옹과 조아생 뮈라, 양쪽 다 이 사람의 조상이 된다.
여담으로 뮈라의 아내 카롤린이 당시 파리 치안사령관 이던 앙도슈 쥐노와 애인관계였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뮈라는 쥐노에게 결투신청까지 했다고 한다.- ↑ 기병의 달인이기만 할 뿐 전체적인 군사적 식견은 부족했으며 특히 포병 화력은 거의 문외한 수준이였다. 그래서 기병 하나만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뮈라의 주전공은 기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기병을 이끌때는 승승장구했으나 포병을 이끌 때에는 힘겨워했다. 그래서 뮈라는 기병을 이끌고 출진한 예나 전투 등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였으나 포병을 이끌고 출진했던 톨렌티노 전투에서는 괴멸적인 패배를 겪었다.
- ↑ 원래 다른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부를 때 vous, 즉 존칭을 써야하지만 뮈라는 나폴레옹을 tu라고 부를 수 있었다. 즉 다른 사람들이 나폴레옹을 폐하라고 부를 때 뮈라는 너라고 불렀다는 것. 다만, vous는 본래 황제에게만 쓰이는 존칭이 아니라 프랑스어에서 윗사람을 부를 때 쓰는 널리 쓰는 존칭이다. 이 점을 폐해 대신 너 라고 불렀다기 보다는 존댓말을 쓰지 않고 격의 없이 반말을 썼다는 정도가 더 적절한 비유일듯.
- ↑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란과는 앙숙이었다.
- ↑ 1호는 당연히 그 분(...), 2호는 오귀스트 마르몽 원수, 3호는 미셸 네 원수.
- ↑ 정식명칭은 1st Sovereign Prince de Murat, 1st Sovereign Prince de Clèves and Berg.
- ↑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평균 신장이 164cm 정도였는데 185cm에 달할 정도로 키가 컸다.
위너 - ↑ 유럽에서 주먹싸움을 제일 잘하는 사람이 뮈라였다. 게다가 자신의 주변 사방으로 총알이 날아드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곳을 마치 허허벌판 달리듯 달렸다고 한다. 뮈라에 필적하는 싸움실력을 지닌 프랑스의 원수는 폴란드 장군인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유일했다.
- ↑ 뮈라는 다른 원수들에 비해 군사 및 정치적 식견이 부족했다. 때문에 군사적인 부분은 장 란과 미셸 네가 보좌했으며 뮈라는 저돌적인 전투 부분만 보좌했다.
- ↑ 나폴레옹 이하 프랑스의 모든 지휘관 중 유일하게 작전지도를 갖고 다니지 않았던 사람이고 이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 전략은 적을 눈앞에 두고서야 완성된다!'며 자신의 용맹함에 대한 자랑으로 여겼다 한다.
- ↑ 힘은 엄청 장사였던 그는 나폴레옹이 대포가 필요하다고 하자 혼자 대포를 짊어지고 옥상에 뛰어 올라갔다!
임진록2 이령이냐? - ↑ 보나파르트 카롤린은 훗날 남편의 정치적 멘토를 자처하여 자신의 오빠를 배신할 것을 뮈라에게 권했다가 만사를 말아먹었다. 뮈라의 사망이후에는 어느 백작의 부인이 되어 유복하게 조용히 이름없이 살다 죽었다고 한다. 카롤린은 전략, 전술과 상황 판단능력도 전혀 없으면서 눈앞의 권력과 욕심에 집착하다 남편을 비겁자로 만들고 오빠를 망친 더러운 꼴불견인 여자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백작부인하고 싶어서 왕비 자리 버리는 멍청한 여자에 매국노다.
- ↑ 하지만 그 혼자 오스트리아군을 무너뜨린 건 아니다. 사실, 마렝고 전투의 일등 공신은 드제였다. 불행히도 루이 드제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 ↑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남성 이름
- ↑ 말이 쉽지, 이건 정말이지 대단한 기술이다! 생각해보라 80개 제대의 진로를 겹치는 부분 없이 설정하고, 막힘없이 전진하며, 그러는 와중에도 그 진로를 안개와 바람의 영향 지대에 전부 위치시키는 건 천재적인 직감력과 기병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일 것이다.
- ↑ 여담으로, 프란시스코 고야의 저 유명한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이 바로 이 사건을 다룬 회화이다. 제목의 날짜가 5월 3일인 이유는 진압 다음날까지 이어졌던 프랑스군의 양민학살을 주제로 삼았기 때문.
- ↑ 뮈라는 그 자신이 싸움은 잘했으나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부분은 약했다. 그런데 왕이 되고 싶어하는 뮈라를 위해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을 에스파냐로 옮기고 뮈라를 나폴리의 왕으로 봉했는데 뮈라가 왕의 재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폴레옹은 위기의 순간마다 뮈라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뮈라가 누구인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나폴리의 왕으로 봉했다.
- ↑ 그 영향으로 나중에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룩하게 되지만, 그것이 뮈라가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다.
- ↑ 60만의 원정군 중 9만 3천명 만이 겨우 귀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 ↑ 칼 14세 요한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부하 원수이면서도 나폴레옹의 약혼녀인 데지레 클라리와 결혼했다.
- ↑ 이러한 사건으로 칼 14세는 프랑스에서 주어진 모든 작위, 프랑스 육군 원수 계급과 퐁트 코르보 공의 작위를 몰수당하여 프랑스에서의 칼 14세는 아주 별볼일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차피 스웨덴의 왕이라 상관없지않나?나폴레옹은 그래도 자신의 여동생을 생각해줬는지 칼 14세에게서 몰수한 퐁트 코르보 공이라는 작위를 뮈라가 아닌 뮈라의 아들에게 준다. 그래서 현재도 프랑스의 퐁트 코르보 공은 뮈라의 후손이 하고 있다. - ↑ 일설에는, 나폴레옹이 루이 18세에게 "뮈라는 당신이 죽여도 무방하오" 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워털루 전쟁에서의 네와 그루시의 삽질을 생각하면 나폴레옹이 뮈라와 같은 인재를 거부한 것은 치명적인 실책이었을지도 모른다.
- ↑ 페르 라세즈 묘지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살아생전 유럽에서 유명세를 떨쳤던 많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전 세계에서 이곳보다 좋은 묘지는 에비타가 잠들었다는 아르헨티나의 무소코 공동묘지뿐이다. 아르헨티나의 무소코 공동묘지는 묘지임에도 아예 살아있는 사람이 사는 집과 똑같이 만들어놓았다. 방 1칸에 문까지 달려있으며 모든 방마다 창문도 있다. 심지어는 관 옆으로 침대, 책상, 의자, 꽃병까지 구비되어 있다. 완전히 무덤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집 그 자체다. 이곳에 묻히는 비용은 가장 저렴한 구석탱이조차 한국돈으로 6억원이나 지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