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Alfred Leon Sarton (1884. 08. 31. ~ 1956. 03. 22.)
과학사학을 독립적인 분야로 만들어낸 전문학문분야의 창시자[1]
1 생애
조지 사튼은 벨기에 겐트에서 벨기에 국립철도국 엔지니어인 아버지 알프레드 사튼과 어머니 레오니 반 할메의 독자로 태어났다.
사튼의 어머니는 그를 낳은 뒤 몇 달 후 1885년에 죽었고, 그렇기에 사튼의 유년시절은 아버지와 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사튼의 양가 모두 가톨릭이었나 어머니의 주장에 따라 그는 영세만 받았을 뿐, 성찬식등 종교의식에는 참석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사튼은 항상 종교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사튼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정직과 관용, 자유를 강조했을 뿐, 그의 정신적 성장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사튼은 겐트대학에 진학하여 철학을 공부하였으나, 1년간 휴학을 한 뒤 화학과 결정학, 수학을 공부하였다. 1908년에는 네 곳의 대학에서 화학분야 금메달을 받았으며, 1911년에는 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직후 토목광산 엔지니어의 딸인 엘레노 마블 엘레스와 결혼하였고, 1912년에 딸 메이 사튼이, 1917년에 아들 휴 알프레드 사튼이 태어났다. 메이 사튼은 시인이자 소설가로 활동하였으며, 아버지 조지 사튼에 대한 중요한 기록들을 남겼다.
대학원에서 과학을 공부하면서 사튼은 오귀스트 콩트, 피에르 뒤엠, 앙리 푸앵카레등의 학자들이 지은 저술에 빠지면서 그의 관심이 실증주의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으며, 또 런던을 방문할 때 웰스, 버나스 쇼, 그리고 페이비언주의자들을 만나 그는 온건적인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사튼의 관심이 변화하면서 그는 과학 연구의 두 측면을 깨달았다. 하나의 측면은 과학자들의 탐구를 통해 과학지식이 진보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고, 또 다른 측면은 과학자 자신의 인간적인 측면이 과학을 단순한 사실과 추상으로 벗어난 진정한 연구로 만든다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무시되어 왔던 이 두번째 측면에 대한 연구는 과학사를 통해 이룰 수 있으며, 이 과학사 연구는 실증주의철학과 과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후 과학사에 대한 완벽한 통사의 서술과 과학사 분야를 위한 새로운 학술잡지를 창간하는 것에 자신의 일생을 바칠 것을 다짐하였다.
과학사 전문학술지를 창간하려는 사튼의 노력은 이시스의 발간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시스에 과학과 문화에 관한 내용들을 다루면서 과학사 연구의 중요 성과들을 소개하고 질의응답과 서평 등을 담도록 계획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시스가 체계적인 문헌정리를 통해 과학사에 관심 있는 이들의 연구 성과들을 알 수 있게 하고, 이전의 실수를 수정 발표할 장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딸 메이가 태어난 1912년경에, 사튼은 일생을 과학사 연구에 바칠 것을 결심하고 겐트 지역의 정치가에게 정부에서 한직을 얻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었으나 무시되었다. 이런 냉대는 그 이후에도 사튼이 겪을 것이었다.
이시스의 간행에 앞서서 그는 에밀 뒤르켐, 프레드릭 오스트발트, 앙리 푸앵카레 등 세계적으로 명성있는 지식인들을 끌어들여 동의를 얻어냈고, 1913년에 발간한 이시스 창간호에 이들을 포함한 33인의 이름이 후원위원회에 적혀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1914년 8월 벨기에가 독일에 의해 침공당한 직후 카네기 재단의 2대 총장 로버트 우드워드에게 편지를 보내 이시스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처음 편지는 답장조차도 받지 못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튼은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1915년 4월에는 무작정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런 사튼이 미국에 정착하는 데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과학사를 강의하고 있었던 헨더슨 교수의 도움이 있었다. 헨더슨은 사튼의 작업을 돕기 위해 자신의 연구실을 제공하였다. 이후에 사튼이 옮겨간 와이드너 도서관 185~189호는 하버드 대학교의 과학사 센터가 된다. 또 헨더슨의 호의로 사튼은 1916~18년에 하버드 대학교에 강사로 재직하였으며, 1920년에 다시 하버드 대학교의 과학사 강사가 되었는데, 1940년 코난트 총장의 배려로 사튼이 과학사 교수가 될 때까지 하버드 대학교에서 계속 강사로 활동하였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하는 것 외에도, 사튼은 친지들의 도움으로 마련된 초청강연과 세미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여러 대학에서 과학사 강좌를 하였다. 1918년에 사튼은 카네기 재단의 연구원으로 임명되고, 카네기 재단에서 정년을 보장받게 되어 안정된 수입을 얻게 되자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으로 휴간된 이시스의 재발간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1920년 사튼은 카네기 재단에 제출한 보고서에 자신이 학생들이 참고할 정보자료를 마련키 위해 과학사와 과학철학에 대한 입문서적을 쓰고자 하는 의도를 밝혔다. 사튼이 쓰고자 한 '입문'은 그의 개인적인 관심사였던 19세기 과학사에 대한 연구의 서론으로 구상된 것으로 과학의 등장과 발전에 대한 개관을 한 권으로 축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과학사가 독립적인 학문분야로 인정받으려면 여러 도구가 필요하다는 신념 하에, 전 시대에 걸쳐 누가 언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 알 수 있는 일종의 가이드북으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입문'은 사튼이 출간을 지연시키면서 19세기 과학사 뿐만 아니라 고대에서 부터 현대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다루는 엄청난 프로젝트로 성장하였다. '입문'은 1927년에 호메로스부터 11세기 말까지를 다룬 제 1권을 출간한 것을 시작으로, 1931년에 12, 13세기를 다룬 제 2권을, 1947년에 14세기만을 다룬 제 3권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입문'은 47년까지 출간한 것만으로도 4000 페이지를 넘는 방대한 분량과, 참고문헌을 직접 대조 확인하는 사튼의 완벽주의적 성격 때문에 애초의 19세기까지의 과학사를 다루는 데에 실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입문을 쓰는 것 외에도 사튼은 많은 활동을 벌였다. 1924년에는 헨더슨 교수와 함께 HSS(History of Science Studies)를 설립하였고, 과학사 잡지로 이시스 외에 1936년에 오시리스를 간행했다. 이시스와 오시리스는 HSS의 공식기관지가 되어 사튼이 1952년에 물러나기까지 과학사 연구를 알리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
HSS에서는 조지 사튼의 과학사에서의 업적을 높이 사, 1955년 조지 사튼에게 첫 조지 사튼 메달을 수여했다. 그리고 1년 뒤인 1956년 03월 22일에 조지 사튼은 사망하였다.
2 업적 및 영향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과학사학의 창시라고 볼 수 있다. 사튼 이전, 즉 19세기 말부터 과학사 연구가 시작된 것은 사실이긴 하나, 사튼은 과학사 연구를 단순히 과학에 종속된 분야가 아닌 독립적인 분야로 이끌어내려했고,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창간, 그리고 HSS의 설립을 통해 그의 시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라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과학사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설파하였다.
또, 그가 저술한 '입문'은 상당히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과학사가들의 주된 참고자료로 쓰였다. '입문'은 일명 '싹슬이 방법'이라는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이런 방식은 조지프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도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