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메이저

역대 영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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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대72대73대
마가렛 대처존 메이저토니 블레어
풀네임Sir John Major(존 메이저 경)
출신 정당보수당
생년월일1943년 3월 29일 ~
재임기간1990년 11월 28일 ~ 1997년 5월 2일

1 개요

1990년부터 1997년까지 7년동안 영국의 총리직을 지낸 보수당의 정치인이다. 근데 정작 전임후임의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 7년이나 총리했음에도 인지도가 안습이다. 현재 영국의 총리직을 지낸 인물 중 최고령자.

2 생애

1943년 서리 지방에서 서커스 단원의 아들[1]로 태어났다. 세례는 존 로이 메이저(John Roy Major)로 받았지만 전시의 혼란스러운 행정 탓이었는지 로이라는 미들네임은 생략되고 존 메이저로 출생신고가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정작 본인은 그 후로도 꿋꿋이 미들네임을 사용한다. 가세가 점차 기울어지면서 16살의 나이에 학교를 자퇴한 이후 각종 허드렛일을 전전하면서 살아가다가[2]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에 취직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고 평소부터 관심이 깊었던 정계에 본격적으로 투신한다.

이미 16살의 나이에 보수당에 입당했던 존 메이저는 보수당 내 소장파들의 모임이라고 볼 수 있는 소위 청년 보수당(Young Conservative)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당 내에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각종 지방의회를 거쳐 1979년 헌딩턴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마가렛 대처 역시 이 젊은 정치인에게 눈길을 들이기 시작했고 메이저는 1987년 대처에 의해 재무성 차관으로 발탁된 데 이어서 1989년에는 외무장관으로 승진하며 승승장구한다.

1990년 11월 14일에 열린 보수당 당수 1차 선거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한 대처가 총리직에서 사임하자 많은 야심가들이 대처의 후임에 도전하고 메이저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3] 11월 27일에 있었던 2차 투표에서 메이저는 여유있게 다른 경쟁자들을 누르고 보수당 당수직에 선출됐고[4] 이와 동시에 영국의 수상직에 오르게 된다.

메이저가 당수직에 선출될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그의 정치적 위치였다. 비타협적이고 강경했던 대처와 달리 메이저는 상대적으로 타협적인 사람이었으며, 비록 보수당이지만 노동자 출신이라는 그의 출신 배경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던 것.[5]

2.1 총리 재임 시기

별다른 문제없이 지나가던 메이저 내각이었지만 취임 2년차였던 1991년 말 걸프전이라는 커다란 파도가 다가온다. 국제 사회의 눈치를 보느라 울며겨자먹기로 참여[6]한 걸프전에서 영국은 커다란 부채(30억 파운드)를 얻어갔고 이 부채는 영국 경제를 다시 침채기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아이러니컬하게도 대처가 재임기간 내내 펼친 신자유주의마저 악순환의 고리로 작용한다. 신자유주의를 내세우는 과정에서 생산성/수익성이 없음을 빌미로 각종 산업들을 대거 해채했는데 정작 이 산업을 대체할만한 산업을 키우지는 못했기 때문. 여기에 파운드화의 가치가 대폭락[7] 한 것은 덤(...) 되는게 없네

그렇지만 1992년 7월의 총선에서 메이저는 재선에 성공한다. 메이저가 재선에 성공했던 원동력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메이저가 점진적이지만 꾸준히 보수당에게서 마가렛 대처의 색채를 지우는 데 성공[8]하면서 지지자들을 재결집하는데 성공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인두세로 인하여 노동당의 핵심 지지층들이 선거인 등록을 하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9] 아아.. 좋은 선거 방해다.

1992년의 선거를 통하여 메이저는 권력의 기반을 탄탄히 다진듯이 보였지만 그 뿐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보수당 내에서는 스캔들이 터졌고, 심지어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관련하여 자당 내에서 반란표가 쏟아져나와 조약 비준이 부인되는 굴욕까지 맛본다.[10] 여기에 1995년 5월에는 스코틀랜드 내 지방 자치 선거에서 참패를 맛보자 근데 애초에 스코틀랜드는 노동당 표밭인데 뭘 기대한거지? 보수당 내에서 '메이저로는 안된다'라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이에 메이저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당수직 사퇴와 조기 당 내 경선을 실시한다. 다행히 이 승부수가 먹혀들어 메이저는 당수로 재신임을 받지만 결국 1997년 5월 총선에서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에게 참패하고 총리직을 넘겨주고 만다.

3 여담

  • 박격포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1991년 내각 각료회의를 주최하다가 IRA에게 박격포로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하마터면[11] 영국 내각 전체가 날라갈 뻔한 상황.
  • 평민 출신이지만 2005년에 기사 작위를 받아서 이후로 존 메이저 경이 공식 호칭이 됐다.
  • 크리켓의 열렬한 팬이다. 총리 직에서 물러난 후로 정계 활동보다 크리켓 경기장에서 더 자주 보인다는 말이 나올 정도.
  1. 근데 메이저의 아버지는 메이저가 태어났을 당시에 이미 63세였다. 늦둥이도 이런 늦둥이가...
  2. 여담이지만 이 시기 전기배공일을 하다가 자신의 정적이자 후임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를 만난적도 있다고 한다. 참 기묘한 인연
  3. 대처가 출마한 1차 선거 당시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 때 대처에게 도전하여 대처를 몰락시킨 인물은 바로 메이클 헤즐타인이라는 인물.그리고 헤즐타인은 죽 쒀서 남줬다.
  4. 375명의 대의원에게서 185표를 받았다. 과반수에 두 표가 모자랐지만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적으로 앞섰기 때문에 다른 경쟁자들이 선거 후 줄줄이 사퇴했고 그 덕에 당수직에 오르게 된다.
  5. 그래서 메이저가 총리직에 올랐을 당시 야당들은 한결같이 '엌ㅋㅋㅋ 대처 배신당했네'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정작 메이저 본인은 대처의 정책에서 큰 물줄기는 그대로 가져간다.
  6. 사실 영국내에서도 참전 자체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일단 여전히 막강한 정치력을 발휘하던 미국빠 대처가 열심히 걸프전을 지지했었고...
  7.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통일 과정에서 막대한 독일 마르크화가 시장에 풀렸다. 그러자 독일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막는다는 이유로 금리를 미친듯이 인상하는데, 문제는 유럽 국가들이 서로의 환율을 일정하게 유지하기로 약속한 것. 그러기 위해서 다른 나라들도 자국의 화폐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금리를 올리는데 문제는 독일보다 경제 구조가 취약했던 국가로서는 그게 경제 불황을 가져온것. 영국도 그 중 하나였고, 결국 이러한 영국 경제의 취약한 점을 노린 헤지펀드들의 공격으로 파운드화의 가치가 폭락하게 된것이다. 이때 이탈리아스웨덴 같은 나라들도 제대로 피봤다.
  8. 1990년대 중반 영국의 사회적 분위기는 과장 좀 보태서 무슨 일만 있으면 '이게 다 대처 때문이다.'였다. 보수당 입장에서는 대처랑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던 상황.
  9. 노동당도 바보는 아니라서 인두세를 폐지하고 새로운 종합특별세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 종합특별세 실시에 겁을 먹은 기득권층이 단!결!하여 보수당에게 표를 몰아줬다(...)
  10. 여기에 제대로 꼭지가 돈 메이저는 반란표를 던진 자당 의원 8명을 그대로 출당시켜 버린다(...)
  11.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12. 해리포터와 혼혈왕자 소설판 제 1장에 나오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