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엄 수네스


이름그레이엄 수네스
(Graeme James Souness )
생년월일1953년 5월 6일
국적스코틀랜드 (Scotland)
출신지에딘버러 - 생그턴
신장180cm
포지션중미, 중앙 공미
유소년 경력토트넘 핫스퍼 (1970–1972)
몬트리올 올림피크 (1972)
소속 클럽미들즈브러 FC (1972–1978)
리버풀 (1978–1984)
삼프도리아 (1984–1986)
국가 대표: 스코틀랜드
(1974–1986)
54경기 4골
스태프레인저스 감독 (1986–1991)
리버풀 (1991–1994)
갈라타사라이 (1995–1996)
사우스햄튼 (1996–1997)
토리노 (1997)
벤피카 (1997–1999)
블랙번 (2000–2004)
뉴캐슬 유나이티드 (2004–2006)
리버풀 FC 역대 주장
필 톰슨
(1979~1981)
그레이엄 수네스
(1981~1984)
필 닐
(1984~1985)
리버풀 FC 역대 감독
케니 달글리쉬
(1985~1991)
로니 머랜
(1991)
그레이엄 수네스
(1991~1994)
로니 머랜
(1992)
로이 에반스
(1994~1998)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역대 감독
바비 롭슨
(1999~2004)
존 카버
(2004)
그레이엄 수네스
(2004~2006)
글렌 뢰더
(2006~2007)
나이젤 피어슨
(2007)

1 소개

붉은 제국의 미들라이커(미들필더 + 스트라이커)

리버풀과 스코틀랜드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 TOP 10에 반드시 들어갈 선수

그러나 감독으로는 EPL 역사상 최악의 감독 WORST 10에 반드시 들어갈 인물

그레이엄 수네스는 리버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레전드다. 그가 아니었으면 1970~1980년대 붉은 제국의 위용은 탄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리버풀의 위대한 공격수 달글리시가 골을 책임진다면, 이 선수는 중원을 씹어먹고 여차하면 골을 집어넣어 왠만한 팀의 수비진을 붕괴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위대한 선수는 위대한 감독이 되기 어렵다는 속설은 그에게도 적용되고 말았으니... 그는 은퇴 후 감독 생활을 하면서 레인저스, 블랙번을 제외한 모든 팀에서 실패한 감독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그 외에도 위대한 선수였으나 감독으로선 실패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는 가는 곳마다 비난을 받았고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종종 저질러서 세간의 조롱을 받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하겠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유스 시절

수네스는 1953년 5월 6일 엘스버러의 생그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지역 팀인 하츠와 레인저스를 응원했다. 10대에 접어들 무렵, 수네스는 지역 유스팀인 North Merchiston에 입단하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68년, 수네스는 당시 토트넘 감독이었던 빌 니콜슨의 눈에 띄어 15살의 나이로 토트넘 핫스퍼 유스팀으로 이적했다. 그러나 그는 토트넘에서 별다른 기회를 받지 못했고 1972년에 북미 리그의 몬트리올 올림피크에 임대되어서 한 시즌 뛰고 돌아왔다. 출전 기회를 보장받지 못한 수네스는 불만을 품고 이적을 요청했고 토트넘은 그를 미들즈브러에 3만 파운드를 받고 보내준다.

2.1.2 미들즈브러 시절

수네스는 1973년 1월 6일 풀럼과의 경기 때 마침내 데뷔전을 치뤘다. 이때 팀은 2:1로 졌지만 수네스는 자신의 진가를 보여줬고 이에 감명받은 감독은 그를 계속 기용한다. 이후 수네스는 1973년 12월 11일 프레스턴과의 경기에서 프로 데뷔 첫골을 기록하며 팀의 3:0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수네스는 자신의 전재적인 재능을 본격적으로 보여줬다. 그는 1972-73 시즌에 중미와 공미를 번갈아 가며 뛰며 14번의 유효슈팅과 4개의 골을 기록했다. 당시 미들즈브러 감독인 잭 찰튼은 수네스를 주전으로 기용하기로 마음먹었고 수네스는 1973-74 시즌에 2부리그 우승을 이끌어 감독의 신뢰에 보답했다. 이때 수네스는 시즌 마지막 경기인 셰필드 웬즈데이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8:0 대승에 기여했다.

2.1.3 리버풀 시절 : 붉은 제국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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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하나

붉은 제국의 척추

1978년, 당시 리버풀의 감독 밥 페이즐리는 미들즈브러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는 수네즈를 눈여겨 보다가 그를 중원의 핵심 선수로 키우기 위해 미들즈브러를 직접 방문했다. 며칠 간의 협상 끝에, 미들즈브러는 수네스를 35만 파운드에 파는 데 동의했고 수네스는 1978년 1월 10일에 리버풀에 정식 입단했다. 수네스는 리버풀에 오자마자 바로 자신의 진가를 드러낸다. 그는 1978년 1월 14일 리버풀 데뷔전에서 웨스트브롬위치를 상대로 골을 넣어 팀의 1:0 승리에 기여했다. 그해 2월 25일에는 리버풀의 최대 라이벌 맨유를 상대로 페널티킥을 얻어내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어냈다.

수네스는 유로피언 컵에서도 대활약했다. 그는 중원을 언제나 씹어먹었고 리버풀의 핵심 공격수 케니 달글리시에게 언제나 정확한 쓰루패스를 전달했다. 이러한 그의 활약으로, 리버풀은 모든 대회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수네스는 1978-79 시즌에 첫 우승을 달성했고 이듬해에도 우승을 견인, 리버풀의 리그 2연패를 성사시켰다. 또한 1981년 유로피언 컵에선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팀의 1:0 승리를 이끌었고[1] CSKA 소피아와의 경기에선 해트트릭을 넣는 등 엄청난 활약을 선보이며 유로피언 컵 우승을 달성했다.

1981-82 시즌, 밥 페이즐리 감독은 팀의 주장 필 톰슨이 아스톤빌라 전에서 중대한 실수를 몇 차례나 저질러서 패배에 일조한 후 주장을 교체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시즌 중반에 톰슨의 주장 직을 박탈하고 수네즈에게 그 자리를 넘겨줬다. 수네스는 과연 주장으로서의 임무를 잘 수행하여 1982-83 시즌에서 맨유를 2:1로 격파하고 리그 컵을 우승하고 뒤이어 리그를 또다시 우승시켰다. 1983-84 시즌엔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감독 밥 페이즐리가 은퇴했지만 수네스는 명장의 퇴장으로 흔들리는 선수들을 다잡는데 성공했고 그해 리그컵, 유로피언컵, 그리고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트레블을 이룩했다.

그러나 리버풀은 나이가 들면서 노쇠화의 기미가 보이는 그와 더는 계약 연장을 하지 않았고 그는 계약이 만료되자 팀을 떠났다. 수네스는 리버풀에서 358경기 출장하여 56골을 넣었다.

2.1.4 삼프도리아 시절

수네스는 1984년 삼프도리아와 65만 파운드의 주급을 받고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삼프도리아에는 팀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 로베르토 만치니가 있었다. 수네스는 만치니와 환상의 호흡을 선보이며 팀 역사상 최초의 리그 우승을 견인했다. 이후 수네스는 삼프도리아에서 2년간 활동했다가 1986년 레인저스로 이적하여 플레잉코치가 되었고 50경기를 출장했다가 1991년에 정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수네스는 1974년 10월 30일 동독과의 경기에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뤘고 그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하여 팀의 3:0 승리를 이끌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감독이었던 알리 맥 로드는 그의 활약에 주목했고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때 그를 명단에 넣었다. 그러나 수네스는 불행히도 부상을 당했고 스코틀랜드는 수네즈의 공백을 메꾸지 못하고 페루와 이란에게 각각 패배와 무승부에 그쳤다. 이후 수네즈는 부상에서 회복된 뒤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중원을 씹어먹는 활약을 선보였고 스코틀랜드는 3:2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결국 1승 1무 1패로 조별 단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수네스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도 참가하여 3 경기 모두 뛰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이번에도 조별 단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후 수네스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 선수 겸 코치로서 참가했다. 그는 덴마크와 서독과의 두 경기에 모두 출전했으나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훗날 그는 "멕시코의 높은 고도에 적응하지 못해 체력에 문제가 생겨 최악의 경기력을 보였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감독이었던 알렉스 퍼거슨은 우루과이와의 3차전 때 그를 명단에서 제외했다. 훗날 수네스는 회고록에서 퍼거슨이 자신이 명단에 제외되었다는 것을 알린 후 진심으로 사과했고 그는 거기에 감동을 받아 그때부터 퍼거슨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수네스는 1986년 월드컵이 끝난 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국가대표로서 54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넣었다.

3 감독 경력

3.1 레인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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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네스는 1986년 4월 레인저스에서 선수 겸 코치로서 그의 감독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레인저스의 감독이었던 조크 월러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그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아 팀이 최대의 라이벌 셀틱을 무찌르고 리그를 지배하는 데 일조했다. 수네스는 주로 코치로 활동했지만 가끔씩 선수로 나왔고 그때마다 클래스를 보이며 팀내 어린 선수들의 귀감이 되었다.

수네스는 이 무렵 재능이 뛰어난 어린 선수들을 많이 발굴했다. 그는 입스위치의 주장이었던 테리 버처, 노리치 시티의 골키퍼 찰리 우드를 영입했고 트레버 스티븐, 게러 스티븐스, 트레버 프랜시스, 그리고 레이 윌킨스를 발굴했다. 레인저스는 그의 활약으로 영국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단이 되었다. 당시 영국은 헤이젤 참사로 인해 국제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스코틀랜드는 예외적으로 참가가 가능했고 스코틀랜드 리그를 지배하고 있던 레인저스는 이 때문에 영국 최고의 클럽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수네스는 이러한 팀의 명성을 발판으로 자신의 감독 커리어를 순조롭게 시작했다. 그는 1986-87 시즌에 셀틱을 2:1로 격파하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88-89 시즌과 1989-90 시즌에도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1988-89 시즌에 리그 컵을 우승했고 1990-91 시즌에도 리그 컵을 거머쥐었다.

게다가 단지 성적만 좋았을 뿐 아니라 레인저스 역사상 거의 최초로 흑인 선수를 영입하고 역시 거의 최초로 셀틱 출신의 가톨릭 신자 선수인 모 존스턴을 영입하여[2][3][4] 레인저스의 차별적인 분위기를 철폐하는 모습으로 개념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레인저스의 일부 팬들이 이스라엘 원정에서 나치 경례를 하는 등 21세기에도 파시스트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을 생각하면 1980년대에는 정말 편견을 벗어던지고 파격적인 모습을 보인 셈이다.

이때만 해도 그는 잘 나가는 젊은 감독이었고 그의 대활약을 주목한 리버풀은 마침 케니 달글리쉬가 감독 직을 사임하자 그를 선임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 결정이 양자 모두에게 해악을 끼칠 줄은 아무도 몰랐다.

3.2 리버풀 시절 : 영웅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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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네스의 안습 감독 인생의 시작

명선수가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다

수네스는 1991년 4월 16일 리버풀 감독으로 부임했다. 리버풀은 그해 아스날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이후 수네스는 리빌딩을 위해 댄 센터스를 당시로선 거금인 290만 파운드에 영입했고 뒤이어 수비수 마크 라이트와 롭 존스, 그리고 레인저스에서 인연을 맺은 미드필더 마크 월터스를 영입했다. 또한 그는 19세의 미들필더 스티브 맥마나만을 1군에 올렸고 유스팀에서 대활약하고 있던 스트라이커 로비 파울러도 역시 1군으로 올렸다.

1991-92 시즌, 리버풀은 처음에는 우승을 향해 순항하는 듯했다. 그러나 맨유와 리즈에 밀려 순위가 하락하기 시작했고 같은 선수만 계속 쓰고 로테이션을 거의 돌리지 않는 바람에 선수들의 체력이 바닥나 결국 막판에 연패를 거듭하여 시즌을 6위로 마무리했다.(이해의 우승 팀은 리즈였다.)한편 리버풀은 이 시즌에 헤이젤 참사 이후 처음으로 유로파 컵에 출전했으나 16강에서 제노아에게 패하고 말았다.

1992년 4월, 수네스는 심장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받았다. 리버풀은 감독이 없는 와중에도 분전하여 FA컵 4강전에서 포츠머스를 격파했다. 이때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인 더 선이 수네스의 병실을 방문하여 성공적인 수술 이후 쉬고 있다가 팀의 승리 소식에 어린 딸과 함께 기뻐하는 그의 모습을 찍어서 1면 기사에 올렸다. 이 기사를 본 리버풀 팬들은 격노했다. 왜냐하면, 더 선은 지난날 힐스버러 참사로 수백여 명의 리버풀 팬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리버풀 팬들을 비하하고 모욕하는 기사를 실어 리버풀 팬들의 공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천하의 개쌍놈들과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실게 했으니 어찌 화나지 않겠는가? 게다가 수네스는 일전에 리버풀 선수들에게 더 선과 절대로 인터뷰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그 자신이 더 선과 인터뷰를 했으니 앞뒤가 맞지 않은 행동을 한 셈이다. 수네스는 팬들에게 사과했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더 선과 인터뷰를 했을 거라고 밝혔다. 아무튼 리버풀은 1992년에 FA컵 우승을 차지하였고 수네스는 팬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다.

1992-93 시즌, 수네스는 딘 손더스를 아스톤 빌라에 팔았다. 손더스는 빌라에서 키 플레이어가 되어 아스톤빌라가 우승 타이틀에 경쟁하는 데 큰 기여를 해줬다. 반면 수네즈가 그 대신 선택한 폴 스트워트는 2시즌에서 겨우 32경기만 뛰고 많은 경기를 부상으로 날려버렸다. 게다가 수네스는 시대에 뒤쳐진 전술을 고집했고 리버풀의 공격수 이안 러시 마저 컨디션 난조로 골을 넣지를 못했다. 급기야 리버풀의 성적은 바닥을 찍어 3월이 될 무렵에도 15위에 머물렀다. 다행히 러시는 막판에 11골을 넣으며 분전했고 리버풀은 시즌을 6위로 마칠 수 있었다.

리버풀 팬들은 수네스에 대한 신뢰를 거뒀지만 보드진은 여전히 수네스를 신임했다. 그는 1993-94 시즌에서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수비수 윌리안 딕스와 스트라이커 나이젤 클러프[5]를 영입했다. 그해 시즌은 초반에는 잘 나갔지만 시즌 중반에 로테이션의 결여로 선수들이 체력에서 문제를 드러내 버렸다. 결국 1994년 1월, 리버풀은 FA컵에서 브리스틀 시티와의 경기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고 결국 수네스는 패배의 책임을 물어 해임되고 말았다.

리버풀 올드팬들은 선수 시절 수네스를 사랑했지만 감독으로서의 수네스는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비교적 많은 시간을 줬지만 그가 이뤄낸 것이라고는 FA컵 뿐이었고 리그에선 언제나 부진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치면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를 응원하는 올드팬들이 선동열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하겠다.

이에 대해서 수네스는 훗날 자서전에서 자신이 리버풀 감독을 하는 동안 압력을 줄곧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가 부임할 당시 리버풀 선수들 전원이 30세 이상이었고 그중 상당수는 이미 노쇠화되고 있었다. 그는 이들을 내보내고 젊은 선수들을 영입하기 위해 리빌딩을 실시하기로 했다. 보드진은 그의 생각에 동의했고 그가 원하는 선수를 영입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정작 보드진이 영입해준 젊은 선수는 별로 없었고 리빌딩은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수네스는 이안 러시와 레이 헤일턴이 영입생 마크 롸이트가 그들보다 더 많은 주급을 받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며 자신을 압박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부상이 너무 잦아서 로테이션을 돌리기 에는 부적절했다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의 항변은 어느 정도 일리 있지만 그렇다 하여 그전까지 잉글랜드의 우승권 구단인 팀을 한순간에 중위권으로 전락시킨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EPL 창립 이후 90년대 리버풀의 부진은 상당부분 그에게 책임이 있다. 그가 만약 리버풀의 성적을 상위권으로 유지시키고 리빌딩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면, 리버풀이 오랫동안 리그 우승을 못하고 중위권으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3 갈라타사라이 시절

리버풀을 떠난 뒤, 수네스가 미들즈브러 감독으로 부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미들즈브러는 브라이언 롭슨을 대신 선임했고 수네스는 1995년 6월에 터키의 갈라타사라이 SK 감독으로 부임했다. 스코틀랜드인이 터키의 클럽팀 감독이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어서 그는 한동안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수네스는 1995-96 시즌에 터키 컵에서 우승을 차지했고[6] 이듬해에는 터키 슈퍼 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 시기, 그는 갈라티사라이의 팬들로부터 옛날 터키의 영웅 울루아바트 하산을 빗대어 "울루아바트 수네스"라고 불렸다. 그러나 정작 리그 우승은 실패했고 1996년에 상호합의 하에 계약을 해지한다.

3.4 사우스햄튼 시절 : 희대의 개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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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97 시즌 EPL 희대의 개그맨

실패를 넘어 막장으로 전락하다

갈라티사라이에서 성공을 거둔 수네스는 자신만만하게 EPL에 복귀한다. 그가 맡은 팀은 바로 사우스햄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시기 후세에 길이 남을 기행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때는 1996년 11월 9일, 팀 성적이 바닥을 기어가고 있는 상황을 만회하려고 방책을 열심히 고안하고 있던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을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 조지 웨아라고 소개한 이 통화자는 수네스에게 축구 선수로 뛰고 있는 친척을 추천했다. 그가 말하길, 자신의 친척 알리 디아는 프랑스의 명문 구단 PSG에서 뛰었고 국가대표로 13경기를 출전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현재 자유계약으로 풀려 있으므로 이적료 한푼도 주지 않고 데려올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통화자가 정말로 조지 웨아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수네스는 통화자의 제안에 홀딱 넘어갔다.(...) 수네스는 통화자가 분명 조지 웨아가 맞다고 확신했고 어떠한 확인 작업도 없이 통화자가 추천한 알리 디아와 계약을 체결하기로 결심했다. 얼마 후, 수네스는 조지 웨아의 친척 알리 디아와 한달 계약을 체결했음을 세상에 알린다.

알리 디아는 33번 등번호를 단 채 1996년 11월 23일 리즈와의 원정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그전에 리저브 팀에 소속되어 아스날과 친선경기를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유스 경기장이 침수되는 바람에 취소되었고 이날에야 처음으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전반 32분경 메튜 르 티시에가 부상으로 나가자 그와 교체되어 처음으로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관중들은 조지 웨아의 친척이라는 그의 활약상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얼음 위를 돌아다니는 밤비 같았다. 나는 내가 보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매튜 르 티시에

알리 디아는 그날 정말 굉장한 활약을 보여줬다. 움직임, 팀워크, 슈팅, 탈압박, 수비가담 등등 어느 것 하나 프로 선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는 그저 밤비 마냥 위태롭게 돌아다닐 뿐이었고 공을 제대로 키핑하지도, 그렇다고 패스를 원활하게 배급하지도 못했다. 관중들은 이 말도 안되는 광경에 넋을 잃었고 그는 결국 85분경에 캔 몽구르 선수와 교체되었다. 그의 엄청난 활약에 힘입었는지, 이 날은 리즈가 사우스햄튼을 상대로 2:0으로 승리했다. 결국 그는 2주 후 계약해지되어 팀을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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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에 밝혀진 진실에 따르면, 수네즈에게 전화를 걸어 알리 디아를 추천한 이는 조지 웨아가 아니라 알리 디아의 학교 친구였다. 알리 디아는 프로 선수도 아니었고 축구를 취미로 즐기는 아마추어 선수였다. 당장 PSG 구단이나 조지 웨아한테 전화를 걸어서 사실 확인만 제대로 했어도 이런 조작극 따위 금방 들통났을 텐데, 수네스는 독단적으로 계약을 체결했다가 결국 경기마저 망쳐버리고 만 것이다. 아니, 훈련장에서 직접 눈으로 보거나 또는 코치한테 알리 디아의 기량을 점검하게 지시만 했어도, 하다 못해 선수들한테 얘기만 들었어도 사기였음을 금방 알아차리고 스쿼드에 포함시키거나 경기에 출전시키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지도 모른다. 팀 관리를 제대로 했던 건지 의문이 들게 만드는 사건. 아무튼 이 사건으로 수네즈의 명성은 추락했고 그는 희대의 개그맨으로 조롱받았다.

그는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고작 16위에 그치고 말았다. 수네스는 결국 한 시즌만에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이후 에버튼이 그를 감독으로 선임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헛소문임이 드러났다.

3.5 토리노 시절

수네스는 1997년 토리노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그는 토리노에서 선수를 사고 파는 것에 대해 어떤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고 오로지 구단주의 의사에 의해 결정되는 걸 바라봐야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수네스는 자신에게 영입 결정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으나 구단이 이를 거부하자 4개월 만에 팀을 떠났다.

3.6 벤피카 시절

토리노에서 나온 수네스는 며칠 만에 벤피카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EPL로부터 몇몇 잉글랜드 선수들을 벤피카로 데려왔다. 대표적으로 수비수 스티브 할킨스와 게리 찰스, 미들필더 마이클 토마스와 마크 펨브리지, 그리고 스트라이커 덴 서더스와 브라이언 딘을 들 수 있다. 반면 대단한 재능이 있었던 데쿠와 계약하는 것을 거부했다.(그리고 훗날 데쿠는 포르투에서 자리잡고 무리뉴의 황태자로 등극한다) 그가 데려온 영국 선수들은 모두 실패했고 2시즌 만에 경질되었다. 또한 그가 데려온 영국 선수들 또한 모두 쫓겨났다.(...) 이 글을 읽는 위키러들도 데려온 영국 선수들 이름을 읽는 순간 그다지 유명한 선수들이 아니란 점에서 이들의 운명도 바로 예감했을 것이다.[7]

3.7 블랙번 시절

벤피카에서 경질된 뒤 1년 간 휴식을 취한 수네스는 2000년 6월 블랙번 로버스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당시 블랙번은 1998-99 시즌 케빈 데이비스, 리 카슬리, 애쉴리 워드, 네이선 블레이크, 키스 길레스피 등을 거액을 들여 영입했으나 이들 모두가 실패작으로 드러나는 바람에 19위로 추락하여 강등되었다. 수네스는 강등의 여파로 흔들리는 팀을 다잡고 데미안 더프, 데이비드 던, 그리고 메트 젠슨 등 팀의 유스들을 적극 기용했다. 또한 앤디 콜, 브래드 프리델, 그리고 드와이트 요크 같은 유명 선수들을 영입했다.[8] 수네스의 리빌딩은 성공하여 2000-2001 시즌 블랙번은 2부 리그에서 2위를 기록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했다. 또한 이 시기 블랙번은 토트넘을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고 리그 컵 우승을 차지했다.

수네스는 2002-2003 시즌에서 팀을 잔류시키는 데 성공하고 뒤이어 2003-2004 시즌에서는 6위를 거두었다. 그러나 시즌 후 앤디 콜, 드와이트 요크 등이 떠나는 걸 잡지 못하자 구단의 만류를 뿌리치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9]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팀이 매트 젠슨을 첼시로 천 7백만 파운드에 팔았는데도 그 중 단 한 푼도 이적 자금으로 돌리지 않은 것이 자신이 사임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회상했다. 그래도 블랙번 감독을 할 때는 수네스에게 있어서 그 전이나 그 뒤에 비하면 나름 괜찮은 때였다.

3.8 뉴캐슬 시절 : 잔디 관리사 수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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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캐슬 팬들의 원수

3B와 함께 뉴캐슬을 망친 역적으로 전락하다

2004년 9월, 수네스는 전임 감독 바비 롭슨의 경질로 혼란스러웠던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10] 그는 뉴캐슬을 챔피언스리그로 진출시키겠다고 호언장담했고 팬들은 더비 라이벌 미들즈브러 출신인데다가 명장으로 추앙받는 전임 감독 바비 롭슨과 명확히 대조되는 그의 실패를 전전하는 과거 경력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레전드이고 갈라타사라이와 블랙번에서 나름 괜찮은 성적을 낸 그의 지도력에 기대했다. 그러나...

수네스는 뉴캐슬에 온 뒤 로랑 로베르, 올리비에 베르나르, 그리고 저메인 제나스 등 많은 선수들을 방출하여 팀의 리빌딩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통 스트라이커들이었던 숄라 아메오비크레이그 벨라미를 괜찮은 주력만을 보고 양쪽 윙에 기용하는 말도 안 되는 전술을 도입했고[11],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들만 계속 기용하고 로테이션은 전혀 돌리지 않았다. 그 결과 이전 시즌에 5위를 기록했던 뉴캐슬은 수네스가 맡은 후 14위로 추락했다. 뉴캐슬 팬들은 팀을 이꼴로 만든 수네스를 비난했지만 프레디 셰퍼드 구단주는 그를 한 번 더 신임했다.

간신히 감독 생명을 연장한 수네스는 2005년 여름 대대적인 보강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억지로 윙어로 기용되어서 부진했던 크레이그 벨라미는 셀틱으로 임대되었고 '원더키드' 마이클 오언레알 마드리드로부터 1700만 파운드(뉴캐슬 역사상 가장 많은 이적료다)를 지불하고 영입하고 뒤이어 당시 촉망받던 스트라이커 겸 윙어인 알베르트 루케를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서 천만 파운드에 영입하여 공격진을 보강했다. 또한 지난 시즌 약점을 보인 수비진을 보강하기 위해 장 알랭 붐송을 레인저스로부터 800만 파운드에 영입했으며 셀레스틴 바바야로를 60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이렇듯 적극적인 영입을 주도한 수네스는 2005년 여름에 도합 5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이적료를 지불했다. 또한 그는 잔디 상태가 고르지 않아 선수들이 제대로 활약하기 어렵다며 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잔디를 교체하는 데 2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금을 소비했다.(...) 팬들은 그런 그를 잔디 관리사라고 조롱했다.

아무튼 나름 착실한 보강을 했으니 팬들은 이제 잘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2002년에 뉴캐슬에 와서 잉여짓을 하고 있던 타이터스 브램블과 2005년에 새로 합류한 장 알랭 붐송과 셀레스틴 바바야로는 도원결의(...)를 맺고 역사상 최악의 수비진을 구축하여 상대 공격수에게 마음껏 찬스를 허용하고 자책골을 계속 삽입하며 당시 뉴캐슬의 골키퍼 셰이 기븐의 레벨업에 큰 기여를 했다.(...) 게다가 공격진 보강을 위해 영입한 마이클 오언은 부상으로 골골 거렸고 알베르트 루케는 잉여로 전락했다. 이렇게 해서 2005년 여름에 수네스가 영입한 선수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팀 분위기도 매우 좋지 않았다. 셀틱으로 임대 간 벨라미는 뉴캐슬이 FA컵에서 패하자 뉴캐슬의 주장이자 레전드 앨런 시어러에게 조롱하는 내용의 문자 메세지를 보내지 않나, 4월엔 아스톤 빌라와의 경기 도중 리 보이어와 키에런 다이어가 자기들끼리 주먹질하다 동반 퇴장당하질 않나(...) 이런 꼴이니 성적이 제대로 나올 리 없고 결국 뉴캐슬은 15위로 떨어졌다. 결국 수네스는 05-06 시즌의 끝을 보지 못하고 2006년 2월 2일 전격 경질되었다.

수네스의 뉴캐슬 시절의 전설적인 행각과 뉴캐슬 팬들이 수네스를 얼마나 싫어했는지에 대해서는 한국에 '뉴캐슬 팬들의 수다'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던[12] 현지 팬들의 포럼 반응에 잘 나타나 있다. 볼 수 있는 블로그

4 은퇴 이후

그는 뉴캐슬에서 해고된 후 감독 생활을 접고 SKY SPORTS, BBC 등지에서 축구 분석가로서 방송에 출연하여 축구 경기를 줄곧 논평하고 있다. 그는 2010 남아공 월드컵 때도 각각의 경기를 논평했다. 이때 그는 비디치토레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비디치는 리버풀의 토레스에게 강간당했...아, 죄송합니다. 압도당했죠.(Vidic got raped..... sorry, taken apart by Torres at Liverpool)"

이 일로 논란이 일자, 수네스는 다음날 자신이 잘못된 표현을 쓴 것을 사죄했다. 그 일의 여파인지, 이후로는 방송에 별로 출연하지 않고 있다.

2016년 3월 맨체스터 더비의 승장이 된 판 할을 칭찬하는 '축구 전문가 A'로 뜬금없이 해외축구 뉴스 섹션을 장식했다. 댓글 어디에서도 이 말을 한 사람이 수네스인지 누구인지 신경쓰지 않고 있는 게 포인트.

가끔 이 사람이 감독으로 복귀한다는 루머가 돌고 있지만 이제까지 한 행적을 보면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울리 슈틸리케처럼 유럽을 벗어나 아시아나 아프리카 쪽 국가대표 감독[13]으로 명예회복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별 얘기가 없는 걸 보면 본인이 관심이 없거나 그 쪽에서도 관심이 없는 듯.(...)

5 수상

5.1 클럽

5.1.1 현역 시절

FA컵 우승 : 1970년(토트넘)
2부 리그 우승 : 1974년(미들즈브러)
1부 리그 우승 : 1979년, 1980년, 1982년, 1983년, 1984년(리버풀)
리그 컵 :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리버풀)
유로피언 컵 : 1978년, 1981년, 1984년(리버풀)
코파 이탈리아 : 1985년(삼프도리아)

5.1.2 감독 시절

스코틀랜드 리그 우승 : 1987년, 1989년, 1990년 (레인저스)
스코틀랜드 리그 컵 : 1987년, 1988년, 1989년, 1991년(레인저스)
FA 컵 : 1992년(리버풀)
터키 컵 : 1996년(갈라티사라이)
터키 FA 컵 : 1997년(갈라티사라이)
리그 컵 : 2002년(블랙번)

5.2 개인

스코틀랜드 베스트 11에 선정.(1985년)

축구 레전드 100인에 선정.(1998년)

2007년 11만명의 리버풀 팬 중 100여 명이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선정.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포함.(2007년)

레인저스의 명예의 전당에서 71인과 함께 포함.
  1. 당시 상대팀 레알 마드리드엔 울리 슈틸리케가 있었다. 여기에 들어가면 당시 경기에서 슈틸리케를 상대로 태클하는 수네스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있다.
  2. 두 경우 '거의 최초'라고 하는 이유는 흑인 선수의 경우 20세기 초반에 월터 툴이라는 선수가 레인저스와 계약했었으나 경기에 출장하기 전에 1차 세계대전에 나가 전사했기 때문이고, 가톨릭 선수들의 경우에는 모 존스턴과 달리 가톨릭 신자임을 명확하게 드러내지는 않고 레인저스에서 뛴 선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3. 모 존스턴의 경우 당연히 파장이 엄청 났는데, 셀틱에서 바로 레인저스로 이적한 건 아니지만(셀틱에서 낭트를 거쳐서 왔다.) 셀틱 팬들이야 당연히 유다에 비유하며 비난했고 레인저스 팬들도 어떻게 가톨릭 선수를 영입하냐고 비난했지만, 모 존스턴이 올드펌 더비에서 인저리 타임에 결승골을 넣는 활약을 보여 이후 많은 레인저스 팬들이 그를 응원했다.
  4. 레인저스 감독을 하긴 했지만 수네스는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종교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다. 심지어 첫번째 부인은 가톨릭 신자였고, 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5. 브라이언 클러프의 아들.
  6. 이 때 상대가 이스탄불 더비의 상대로 유명한 페네르바체 SK였는데 우승에 기쁜 나머지 갈라타사라이의 깃발을 운동장 한 가운데에다가 꽂았다. 문제는 그 곳이 페네르바체의 홈경기장이어서 그렇지 않아도 라이벌 팀에게 우승을 빼앗겨서 열받아있는 홈팬들에 대한 도발이었다는 것.(...)
  7. 사실 잉글랜드 국가대표급 선수들이라면 굳이 해외진출하기 보다는 EPL에 그대로 남는 걸 더 선호하고, 굳이 해외진출을 한다고 해도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의 빅클럽들 아니면 갈 이유가 없다. 물론 벤피카도 유럽 축구계에서 꽤 인정해주는 클럽이긴 하지만.
  8. 참고로 수네스의 의중은 크게 관여하지는 않았겠지만 2002 월드컵이 한창 진행되는 동안에는 안정환이 블랙번으로 영입될 뻔 했다. 하지만 이게 복잡한 국제적인 소송까지 가면서 결국 영입 무산.
  9. 이 때 블랙번이 강등위기까지 갔다가 마크 휴즈가 감독으로 부임해서 잔류에 성공하고 이후 블랙번이 괜찮은 성적을 거두면서 마크 휴즈의 주가도 올라간다. 이후의 감독 커리어를 보면 그 때의 기대에 비하면 아쉽다는 평이지만.
  10. 바비 롭슨이 나이가 너무 많아서 개성 강하고 혈기 넘치고 반항적인 선수들을 통제하는 데에 실패해(심지어 롭슨은 앨런 시어러와도 불화까지 있었다는 루머도 돌았다.) 팀 분위기가 엉망이 되자 결국 경질이 되었고 선수들의 군기를 잡기 위해 수네스를 골랐다는 말이 있다.
  11. 반면 수네스와의 불화로 팀을 떠난 로랑 로베르는 프랑스 국가대표 출신으로 '미친 왼발'로 통하며 뉴캐슬의 21세기 최고의 윙어로 손꼽히는 명선수였다. 단, 성격적으로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고, 덕장인 전임감독 바비 롭슨만이 통제가 가능 했던 선수.
  12. 당시 번역자는 현재 뉴캐슬 한국 팬 사이트 '툰 코리아'의 운영자이다.
  13. 의외로 아프리카 쪽 국가대표 감독들은 유럽에서 활동하는 아프리카 선수들이 많은 덕분에 그들을 점검하고 관리한다는 핑계로 아프리카에 있는 것보다 유럽에 머물 수 있는 일이 많아 유럽 출신 감독들이 아시아 쪽 감독직을 하는 것보다 더 선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