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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폴 에머슨 케일 인스 (Paul Emerson Carlyle Ince) |
생년월일 | 1967년 10월 21일 |
국적 | 잉글랜드 (England) |
출신지 | 런던 - 일포드 |
신장 | 178cm |
포지션 | 미드필더 |
유소년 경력 | 웨스트햄 (1982–1986) |
소속 클럽 | 웨스트햄 (1986–198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89–1995) 인터 밀란 (1995–1997) 리버풀 (1997-1999) 미들즈브러 (1999–2002) 울버햄튼 원더러스 (2002–2006) 스윈던 타운 (2006) 메이클즈필드 타운 (2007) |
국가 대표: 잉글랜드 (1992–2000) | 53경기 2골 |
스태프 | 메이클즈필드 타운 감독 (2006–2007 ) MK 던스 (2007–2008) 블랙번 로버스 (2008) MK 던스 (2009–2010) 노츠 카운티 (2010–2011) 블랙풀 (2013-2014) |
리버풀 FC 역대 주장 | |||||||||||
존 반스 (1996~1997) | → | 폴 인스 (1997~1999) | → | 제이미 레드냅 (1999~2001) |
목차
1 소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의 레전드
근데 라이벌인 리버풀에서 주장을 했었다
선수 시절 강력한 카리스마로 동료들의 추앙을 받은 인물
그러나 감독으로서는....
폴 인스는 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다. 그는 선수 시절 엄청난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동료들을 사로잡았고 국가대표로서도 대단한 활약을 선보이며 "잉글랜드의 심장"이라는 칭송까지 받았다. 특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 그의 활약은 레전드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알렉스 퍼거슨에게 총을 겨누는 짓을 한 뒤 팀을 떠나버렸고 급기야 맨유의 최대 라이벌인 리버풀로 이적했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맨유 팬들은 그를 레전드로 여기지 않는다. 한편, 그는 선수 생활을 은퇴한 뒤 곧바로 감독 경력을 시작했는데, MK던스에서는 괜찮았지만 그 후로는 실패를 거듭하는 안습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웨스트햄 시절
인스는 어린 시절부터 웨스트햄를 응원했고 15살에 웨스트햄의 유스팀에 입단했다. 이후 인스는 1986년까지 웨스트햄 유스팀에서 기량을 갈고 닦았고 1986년 11월 30일 뉴캐슬과의 리그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뤘다. 그는 1987-88 시즌에 주전 선수가 되었고 지구력, 체력, 태클, 그리고 패스 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또한 그는 강력한 슛을 무기 삼아 중거리 슛을 간간히 꽃아넣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대활약을 했지만 웨스트햄은 정작 성적이 좋지 못했다. 1987년엔 리그 15위, 1988년엔 16위를 기록한 웨스트햄은 이후에도 별다른 성적 향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1988-89 시즌, 웨스트햄은 기어이 강등되고 말았다. 이에 인스는 팀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마침 그를 주의깊게 지켜보던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그를 전격 영입했다.
2.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
인스는 1989년 여름 백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맨유에 입단했다. 그때 인스는 맨유 입단이 확정되기도 전에 데일리 익스프레스 소속 기자에게 맨유 응원 문구가 새겨진 키트를 목에 매고 있는 사진을 찍혔고, 웨스트햄 팬들은 그후 오랜 세월 동안 그를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또한 인스는 메디컬 테스트에서 떨어져서 이적이 중단되었지만 1989년 9월 14일에 재검진을 한 끝에 무사히 통과되서 맨유에 입단할 수 있었다.
훗날 인스는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복잡한 이적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퍼거슨과 이야기를 나눴고 딜은 완료 단계에 접어들었다. 나는 휴가를 떠났고 내 에인전트는 딜이 완료되었을 때 맨유 셔츠를 입고 사진 찍는 건 아무 문제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난 사진을 찍기로 했고 그 사진은 계약이 공식 발표되었을 때 알려지기로 되어 있었다. 데일리 스타의 로렌스 루터가 사진을 찍었고 사진집에 그것을 잡았다. 얼마 후, 데일리 익스프레스에서 웨스트햄에서 뛰고 있는 내 사진들을 살피다가 맨유 셔츠를 입은 사진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를 공개했고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렸다. 나는 휴가에서 돌아왔고 웨스트햄 팬들이 분노한 걸 깨달았다. 그것은 정말로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애송이일 뿐이었고 내 에인전트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렸지.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맨유에 입단한 인스는 밀월과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뤘고 팀은 5:1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그는 브라이언 롭슨, 닐 웹과 함께 강력한 미들진을 형성했다. 비록 브라이언 롭슨은 첫 시즌에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빠졌지만, 인스는 닐 웹과 함께 맨유의 중원을 책임졌고 1990-91 시즌엔 부상에서 복귀한 롭슨과 함께 맨유를 지탱했다. 인스는 맨유 입단 첫 해에 크리스탈 팰리스를 1:0으로 격파하고 FA컵 우승을 거머쥐는데 큰 공을 세워 이 경기의 MOM에 선정되었다.
이후 인스는 4년간 맨유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마이크 팰란, 닐 웹, 그리고 대런 퍼거슨과 함께 중앙 미드필더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991년 유로파 위너스 컵에서 바르셀로나를 격파하고 우승을 달성했고 1992년엔 리그 컵에서 노팅엄 포레스트를 격파하고 맨유 입단 이래 세번째 우승 컵을 확보했다. 그리고 1992-93 시즌, 인스는 EPL로 개편된 리그에서 마크 휴즈, 에릭 칸토나, 피터 슈마이켈, 라이언 긱스 등과 함께 맨유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고 맨유는 이들의 활약을 앞세워 마침내 고대하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인스는 1993-94 시즌에서도 환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줬고 팀이 리그와 FA컵을 우승하여 더블을 거두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렇듯 팀에게 절대적인 공헌을 하던 인스는 1995년 6월 느닷없이 인터 밀란으로 이적했다. 이 이적은 맨유 팬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퍼거슨은 그를 왜 내보냈냐는 팬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퍼거슨이 그를 처분한 것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인스는 맨유에서 6년간 활약하면서 동료들을 특유의 카리스마로 사로잡았다. 심지어 몇몇 선수들은 그를 "총독"이라고 불렀고 "폴 인스는 우리의 총독이다"라는 문구를 새긴 컵을 들고 다니기까지 했다. 이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퍼거슨은 그를 배제하지 않는다면 그를 중심으로 한 파벌이 형성되어 두고두고 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점차 벤치에 박아두고 폴 스콜스 등을 기용했다. 그러자 자신을 홀대한 퍼거슨에게 격노한 폴 인스는...
1995년 어느날 감독실에 들이닥쳐서 퍼거슨을 향해 권총을 들이대고 협박했다!
그러나 퍼거슨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를 밖으로 도로 내보냈고 결국 인스는 인터 밀란으로 쫓겨나듯 이적해야 했다. 퍼거슨은 그가 권총으로 협박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십여 년이 흐른 뒤에 팀 동료였던 스티브 브루스가 이 일을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3 인터 밀란 시절
1995년 6월, 폴 인스는 7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인터 밀란에 입단했다. 인터 밀란은 1995-96 시즌에 7위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기록했지만 인스는 모든 경기에 출장하여 좋은 경기력을 꾸준히 보여줘 팬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듬 해, 인스는 24경기 6골을 기록하며 인터 밀란이 리그 3위를 기록하는 데 일조했고 팀을 유로파 결승으로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인터 밀란은 샬케 04와의 경기에서 원정에서 1:0으로 지고 홈에서 1:0으로 이긴 뒤 승부차기에서 4:1로 패하고 말았다. 이후 인스는 잉글랜드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는데...
2.4 리버풀 시절
맨유 팬들에겐 혐짤
인스는 이탈리아에서 2년을 보낸 후 아들인 토마스 인스(훗날 아버지 처럼 축구 선수가 된다)의 교육 문제 때문에 잉글랜드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는 4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리버풀에 입단했다. 이 일은 세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맨유에서 레전드였던 그가 맨유의 최대 라이벌 리버풀로 이적했으니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첼시의 레전드였던 그레이엄 르 소의 자서전에 따르면, 인스는 리버풀과 첼시와의 경기에서 르 소가 게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를 게이라고 조롱하고 르 소의 반응을 보고 즐거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리버풀에서 그다지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당시 리버풀은 팀 기강이 문란했고 선수들이 머리 스타일에 신경쓰느라 훈련도 제대로 하지 않아 당시 영국에서 대인기였던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를 빗대어 "스파이스 보이스"라는 조롱을 받고 있었다. 이런 지경이니 성적이 제대로 날올리 없었고 인스는 첫 시즌에서 아무런 트로피도 획득하지 못했다.
인스는 두 번째 시즌인 1998-99 시즌에서도 단 한 개의 트로피도 획득하지 못했고 리버풀은 7위에 그쳐 유로파 진출도 좌절되었다. 다만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에서 맨유를 상대로 훌륭한 경기를 펼쳐서 승리를 이끌어내 자신을 쫓아낸 맨유에게 복수한 것에서 만족할 따름이었다. 그래봤자 맨유는 이 시즌에 리그, FA컵, 챔피언스리그를 모두 우승하며 트레블을 이룩했으니 아무 상관 없었지만.(...)
2.5 미들즈브러 시절
1999년 여름, 리버풀의 신임 감독 제라르 울리에는 31세에 접어든 인스를 1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받고 미들즈브러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적 직후 미들즈브러의 주장이 되었고 3년 간 106 경기를 뛰어서 9골을 기록했다. 2002년, 인스는 계약이 만료되자 팀을 떠나 울버햄튼 원더러스로 이적했다.
2.6 울버햄튼 원더러스 시절
인스는 2002년 여름 챔피언십 소속인 울버햄튼 원더러스로 이적했다. 그는 첫 시즌에 팀을 승격 플레이오프를 치른 끝에 승격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울버햄튼은 다음 시즌에 바로 강등되고 말았다. 인스는 2004-05 시즌이 끝난 뒤 은퇴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그는 글렌 호들이 울버햄튼의 감독으로 부임하자 마음을 고쳐먹고 계속 울브스에서 뛰기로 결심했다. 울브스는 2005-06 시즌을 9위로 마감했고 승격 플레이오프 진출은 좌절되었다.
2006년 4월, 그는 울브스를 위해 좀더 헌신하고 싶다며 선수 생활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2006년 7월 호들이 사임한 후 울브스에 부임한 믹 매카시는 인스와 새로운 계약을 채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결국 팀을 떠난 인스는 선수 생활을 접고 2006년에 잠시 스윈든 타운의 선수 겸 감독 직을 맡은 후 2006년 10월에 메이클즈필드 타운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2.7 국가대표 경력
인스는 1992년 9월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뤘다. 잉글랜드는 1:0으로 졌지만 인스는 그 경기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여 감독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1994 월드컵 지역 예선전인 노르웨이와의 경기에서 국가대표로서 2번째 출장을 했지만 여기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1:1 무승부를 거뒀다. 게다가 인스는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말았고 결국 그는 잉글랜드가 1994 월드컵 진출을 실패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스는 잉글랜드 대표팀이 월드컵 후 미국 투어를 갔을 때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초로 흑인 주장이 되어 인종평등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하지만 잉글랜드는 인스가 주장이 된 날 2:0으로 패했다.
인스는 1996 유로 진출을 위한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자신만의 탁월한 볼 컨트롤 능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잉글랜드는 유로 지역 예선 첫번째 상대인 스위스와 1:1 무승부를 거뒀지만 뒤이어 스코틀랜드를 2:0으로 제압했고 네덜란드를 연이어 격파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후 유로 본선에 진출한 잉글랜드는 스페인 등을 격파하고 4강에 진출했다. 인스는 4강전 상대인 독일과의 일전을 앞두고 폴 개스코인, 데이비드 플랫과 함께 3미들의 일원이 되었다. 잉글랜드는 독일과 1:1 무승부를 거뒀지만 승부차기에서 패하고 결승전 진출을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인스는 승부차기를 형편없이 차는 바람에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이후 잉글랜드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글렌 호들은 인스를 중용했고 인스는 1998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6경기에 출전했다. 잉글랜드는 첫 4경기를 승리했지만 이탈리아에게 1:0으로 패했다. 이후 몰도바와의 원정 경기에서, 인스는 경기 도중 스타디움의 벽을 타고 올라가려고 해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쓸데없이 벽은 왜 타고 올라가?! 이때 한 사람이 그의 바지를 잡아당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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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인스는 1997년 5월 폴란드와의 경기를 맞이했는데, 이 경기가 그의 30번째 국가대표 출장이었다. 이날 잉글랜드는 2:0으로 승리했고 월드컵 본선 진출을 향한 여정을 순탄하게 이어갔다. 이후 잉글랜드는 몰도바를 격파하고 이탈리아와 0:0 무승부를 거두어 마침내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인스는 1998년 월드컵 스쿼드에 포함되었고 잉글랜드는 조별 예선을 무사히 통과하고 16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에서 패하고 말았다. 인스는 유로 2000에서 멀타와의 경기에서 교체 출전하여 그의 50번째 국가대표 출장을 달성했고 팀은 승리를 거두어 인스를 기쁘게 했다. 이후 인스는 3경기 더 출전했지만 정작 잉글랜드는 그 중 2경기를 지고 말았고 결국 유로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대회가 끝난 후 인스는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3 안습의 감독 경력
3.1 메이클즈필드 타운 시절
2006년 10월 23일, 인스는 메이클즈필드 타운의 선수 겸 코치로서 부임했다. 하지만 FA는 그가 선수 생활을 계속하는 한 이적 시장이 새로 열리는 1월까지 메이클즈필드 타운으로 갈 수 없다고 발표했다. 결국 인스는 1월이 될 때까지 팀에 부임하지 못하다가 2007년 1월 당시 4부리그에서 꼴지를 찍고 있던 팀에 전격 부임했다. 그는 팀을 곧바로 소생시켜서 채스터 시티를 상대로 3:0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에도 성적을 끌어올려서 시즌 마지막 날에 극적으로 강등권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인스는 2007년 5월 5일 메이클즈필드의 홈구장에서 노츠 카운티를 상대로 선수로서 마지막으로 출장했고 팀은 1:1 무승부를 거두었다.
3.2 MK 던스 1기
2007년 6월 25일, 인스는 MK 던스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했다. 던스는 2007년 9월 1위로 치고 올라갔고 많은 팀들이 그를 감독으로 데려오려고 했다. 특히 프리미어리그 팀인 위건, 더비 카운티와 챔피언십 팀인 노리치 시티가 그를 감독으로 데려오고 싶어한다는 루머가 파다했다. 하지만 인스는 이 루머들을 모조리 부인하고 던스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인스는 2007년 10월과 12월에 4부리그 이 달의 감독 상을 수상했고 2008년 4월에 다시 한번 이 달의 감독상을 받았다.
이후 인스는 2008년 3월 31일 그림비 타운을 2:0으로 제압하고 4월엔 스토크포드 카운티를 3:2로 제압하며 승격을 확정지었으며 뒤이어 브래드포드 시티를 2:1로 제압, 마침내 4부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잘 나가는 신예 감독이었고 많은 이들은 이 영국 축구 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이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3.3 블랙번 로버스 시절
2008년 6월 22일, 인스는 블랙번 로버스의 감독으로 부임헀다. 이로서 인스는 EPL 역사상 최초의 영국 출신 흑인 감독이 되었다.[1] 그는 에버튼과의 첫번째 경기에서 데이비드 던, 로케 산타 크루즈 등의 골을 앞세워 3:2 승리를 거두었다.이후 인스는 2008년 여름 폴 로빈슨 골키퍼를 영입하고 뒤이어 대니 심슨을 임대로 영입했으며 로비 파울러, 마크 번, 카일 앤드류스 등 명성이 자자한 스타 플레이어들을 대거 영입했다.
그러나 이후 블랙번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블랙번은 17경기에서 겨우 3승만 기록하고 19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결국 2008년 12월, 인스는 전격 해고되고 말았다. 그는 블랙번에서 고작 177일만 있었는데, 이는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가장 짧은 임기였다. 특히 2008년 12월 3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맨유를 상대로 5:3 패배를 당한 뒤 팬들에게 "너는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모를 거다", "우리는 인스가 꺼지질 바란다"라는 야유를 받는 굴욕을 당했다.
그가 이토록 참혹하게 실패한 것은 다름아닌 그의 능력 부족에 있었다. 인스는 선수 장악력이 형편없어서 선수들에게 경원시되기 일쑤였고 전술을 짜는 것도 형편없었다. 아니, 전술 자체가 아예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 때 인스의 전술 노트에는 단 한 글자, "Shoot"만 적혀 있었으니까.(...) 이런 사람이 4부리그에선 어떻게 성공했지?
3.4 MK 던스 2기
인스는 2009년 7월 3일 MK 돈스와 2년 계약을 체결하고 다시 던스로 복귀했다. 하지만 인스는 던스에서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리그 13위라는 불만족스러운 성적을 냈다. 2010년 4월, 인스는 2009-10 시즌이 끝난 뒤 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3.5 노츠 카운티 시절
인스는 2010년 10월 28일 4부리그 팀인 노츠 카운티와 3년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인스는 그곳에서도 별로 인상적이지 못했다. 결국 인스는 2011년 4월 3일 올드햄 아슬래틱에게 2:0으로 패함으로서 9연속 패배를 기록한 직후 상호 동의하에 계약을 해지했다. 이젠 4부리그에서도 안 통하네
3.6 블랙풀 시절
2013년 2월 18일, 2부리그 팀인 블랙풀은 인스와 1년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아들 토마스 인스를 팀에 소속시켰고 인맥축구 2012-13 시즌을 무사히 마무리지었다. 이후 블랙풀은 2013-14 시즌을 순탄하게 시작했다. 그들은 첫 6경기에서 5승 1무를 기록하여 승점 16점을 획득했다. 그러나 본머스와의 경기에서, 인스는 상대편 선수와 터널에서 주먹다짐(...)을 하는 바람에 5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고 별도로 4000파운드의 벌금을 내야 했다. 이후 블랙풀은 급속도로 침체되었고 2013년 11월 30일 이후 2014년 1월 21일까지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하는 졸전을 펼치고 말았다. 결국 인스는 블랙풀에서 42경기 동안 단 12승만 거두었고 2014년 1월 21일 경질되고 말았다. 참고로 그는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4번째로 조기 경질된 감독으로 기록되었다.(...)
4 수상
4.1 선수 시절
4.1.1 클럽
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그 우승 : 1993년, 1994년
FA컵 : 1990년, 1994년
리그 컵 : 1992년
커뮤니티 실드 : 1993년, 1994년
유로파 위너스 컵 우승 : 1991년
유로피언 슈퍼 컵 우승 : 1991년
2. 울버햄튼 원더러스
2부리그 승격 플레이오프 우승 : 2003년
4.1.2 국가대표
투르누아 드 프랑스 우승 : 1997년
4.1.3 개인
프리미어리그 이달의 선수 : 1994년 10월
PFA 올해의 팀 : 1993년, 1994년, 1995년
10년간 인상적인 팀 : 프리미어리그 10시즌 상 (1992-93시즌 에서 2001-02 시즌까지)
4.2 감독 시절
4부리그 우승 : 2008년
챔피언쉽 이달의 감독상 : 2013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