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존 베냐민 토샥 (John Benjamin Toshack ) |
생년월일 | 1949년 3월 22일 |
국적 | 웨일즈 |
출신지 | 웨일즈 카디프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소속팀 | 카디프 시티 (1965–1970) 리버풀 (1970–1978) 스완지 시티 (1978–1984) |
국가대표 | 웨일즈 축구 국가대표팀 (1969–1980) 40경기 13골 |
스태프 | 스완지 시티 선수 겸 감독 (1978–1984) 스포르팅 CP 감독 (1984–1985) 레알 소시에다드 (1985–1989/1990–1994/2001–2002) 레알 마드리드 (1989–1990/1999) 웨일즈 축구 국가대표팀 (1994/2004–2010)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1995–1997) 베식타쉬 (1997–1999) AS 생테티엔 (2000–2001) 칼초 카타니아 (2002–2003) 레알 무르시아 (2004) 마케도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2011–2012) 카자르 렌코란 (2013) 위다드 카사블랑카 (2014~) |
스완지 시티 AFC 역대 감독 | ||||
해리 그리피스 (1975~1978) | → | 존 토샥 (1978~1984) 덕 리버모어(감독대행) (1983) 레스 차펠(감독대행) (1984) | → | 콜린 애플턴 (1984) |
레알 마드리드 CF 역대 감독 | ||||
레오 베인하커르 (1986~1989) | → | 존 토샥 (1989~1990) | →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1990~1991) |
거스 히딩크 (1998~1999) | → | 존 토샥 (1999) | → | 비센테 델 보스케 (1999~2003) |
1 소개
웨일즈 역사상 최고의 축구인 중 하나
영연방 출신으로서 영국 내에서보다 해외에서 훨씬 많은 경력을 쌓은 몇 안 되는 인물
업적에 비해 저평가된 명장 중 하나
존 토샥은 웨일즈의 前 축구 선수이자 현재 축구 감독이다. 그는 1965년 카디프 시티에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선수 및 감독으로서 활동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선수 시절엔 카디프와 리버풀의 레전드였던 그는 특이하게도 감독 경력의 대부분을 영국이 아닌 해외에서 쌓았고 특히 스페인에서는 가히 명장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경력을 쌓았다. 비록 영국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고 국내에서는 듣보잡에 가까운 인지도를 보이지만, 그는 분명 한 시대의 명장으로서 여러 굵직한 커리어를 쌓아올랐다. 현재는 모로코의 축구 클럽 위다드 카사블랑카에서 활동하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카디프 시절
토샥은 1949년 3월 22일 웨일즈의 대도시 중 하나인 카디프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아버지와 웨일즈 출시의 어머니 사이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는 1965년 16살의 나이로 카디프에 입단했고 얼마 후 1965년 11월 13일 레이튼 오리엔트와의 경기에 데뷔했다. 이때 그의 나이 16살 236일로, 이는 아론 램지가 2007년 41년만에 이 기록을 깰 때까지 리그 역사상 가장 어린 선수의 출전 기록이었다. (경기 결과는 카디프의 3:1 승리였다.) 그는 카디프에서 팀동료 브라이언 클락과 함께 환상의 투톱을 갖춰 카디프를 이끌었고 5시즌 동안 162경기에 출전하여 74골을 기록했다. 이후 1970년 11월 11일, 리버풀의 레전드급 감독인 빌 샹클리가 11만 파운드를 지불하고 토샥을 영입했다.
2.2 리버풀 시절
배트맨과 로빈을 코스프레한 존 토샥과 케빈 키건
토샥은 리버풀에서 11월 14일에 친정팀인 카디프 시티와의 홈경기에 출전했지만 골은 기록하지 못했다. 그의 첫번째 골은 11월 21일 에버튼과의 머지사이드 더비에서였다. 에버튼은 전반전까지 2:0으로 압서가고 있었는데 리버풀의 스티브 하이웨이가 만회골을 넣은 데 이어 76번 토샥이 하이웨이의 크로스를 받아먹어 동점을 이끌어냈다. 그후 리버풀은 좀더 거세게 몰아붙였고 토샥은 팀의 세번째 골마저 기록하며 리버풀의 3:2 대역전극을 이끌어내 팬들의 찬사를 받았다.
1971년, 케빈 키건이 리버풀로 합류했다. 토샥과 키건은 곧 투톱으로서 최고의 팀워크를 보여줬다. 토샥은 상대 수비진을 휘저으며 찬스를 만들었고 키건은 골을 넣음으로서 마무리를 깔끔하게 수행했다. 두 사람이 어찌나 파트너십을 유감없이 발휘하는지, 어떤 이는 두 사람이 마치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한 몸인 것 같다고 평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듯 토샥은 리버풀에서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1970년부터 1978년까지 8년간 246경기 96골을 기록했다. 또한 그는 1부리그를 1973년과 1976년, 그리고 1977년에 우승했고 FA컵을 1974년에 우승했으며 유로파 대회를 1973년과 1976년에 우승했다.
토샥은 여전히 리버풀 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며 "콥들을 놀라게 한 100인의 축구 선수"에 선정되는 영광을 만끽하기도 했다.
2.3 스완지 시티 시절
조크 스타인과 함께.
토샥은 1978년에 스완지로 이적했지만 부상에 시달리는 바람에 선수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1984년까지 선수 겸 감독으로서 활동해야 했다. 그는 4시즌 동안 4부리그에 속해 있던 스완지를 1부리그로 4년만에 승격시키는 대활약을 선보여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982/83 시즌에는 거듭되는 연패로 인해 결국 21위를 찍고 강등당했고, 결국 토샥은 2부 리그에서도 성적이 부진해 1984년 3월 4일을 끝으로 경질당했다. 그가 떠난 뒤 스완지는 시즌이 끝날 즈음인 1984년 5월에 2부에서도 24위 꼴지를 찍고 3부로 강등되었다.
특히 1981/82 시즌에 스완지는 당시 잉글랜드의 최고 구단 중 하나로 손꼽히던 리즈 유나이티드를 5:1로 격파하는 파란을 일으키며 6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듬해 리즈는 강등되고 말았고 토샥은 선수 생활을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2.4 국가대표 경력
토샥은 1968년 19살의 나이에 웨일즈 U-23 대표팀에 소속되어 4경기를 소화했고 이후 1969년부터 1980년까지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어 40경기 13골을 기록했다. 특히 1979 영국 홈 챔피언십에선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활약을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웨일즈는 럭비에 환장한 탓에 워낙 축구계에선 듣보잡이라, 그는 국가대표로서는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3 감독 경력
영국인인데 이상하게도 해외 위키가 영국 위키보다 내용이 더 많다
3.1 스포르팅 시절
그는 스완지를 떠난 뒤 영국인 감독으로선 특이하게도 영국의 다른 클럽이 아닌 해외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선택한 곳은 포르투갈의 스포르팅 CP였다. 당시 스포르팅은 리그에서 포르투와 벤피카에게 빌려 만년 3인자에 머무르고 있었다. 토샥은 이 상황을 깨부수고 스포르팅을 포르투갈 최고의 구단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1984-85 시즌, 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포르투에게 밀려 2위에 그쳤다. 그래도 2시즌 연속 3위를 기록했던 지난 2년에 비하면 2위를 기록한 것은 한층 더 진보된 것이었지만 스포르팅 보드진에겐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고 결국 토샥은 시즌이 끝난 뒤 경질되었다.
3.2 레알 소시에다드 1기
1985년, 토샥은 레알 소시에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레알 소시에다드는 1981-82 시즌에 우승했지만 알베르토 오마에체아 감독이 1985년에 떠난 이후 선수진의 이탈로 침체되어 있었다. 그는 첫 시즌 초반엔 부진했지만 이후 승승장구하여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에 이어 3위를 기록했고 2번째 시즌엔 코파 델레이를 우승했으며 3번째 시즌엔 리그 준우승, 코파 델레이 준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레알 소시에다드에서의 네번째 시즌인 1988-89 시즌, 그는 팀을 잘 이끌던 도중에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3.3 레알 마드리드 1기
토샥은 1989-90 시즌 도중에 레알 마드리드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 첫 시즌에 슈퍼컵을 우승했으며 리그 역시 연속 V5를 달성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 시즌에 11경기에서 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는 이유로 엘 클라시코조차 못 치른 채 경질되었다.
사실 그는 레알 마드리에서의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64경기에서 41승 15무 8패를 기록, 승률 64.06%를 기록하고 있었으니 성적은 좋은 편이었고 리그도 한 차례 우승했다. 그럼에도 11경기에서 무승부가 좀 많았다고 경질된 것은 레알 보드진이 얼마나 감독 알기를 파리 목숨보다 못하게 아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곘다..
그러나 그는 레알 마드리드 감독 생활 동안 통제 불능의 상태로 락커룸 분위기를 지배한 '독수리 5형제'의 영향력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인 그는 '독수리 5형제'의 막내인 마놀로 산치스와 시시때때로 라커룸에서 싸웠는데, 1990년에 토샥은 경질되면서 산치스에 대해 "산치스는 최악의 인간이다. 그를 만난 건 내 생애 최대의 불운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999년에 토샥이 감독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그 산치스는 레알 마드리드에 남아 있었다(...).
3.4 레알 소시에다드 2기
그는 1990년에 레알 소시에다드 감독으로 돌아왔다. 이 후 그는 1990-91 시즌을 5위로마감했고 이후 4년 동안 팀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1991년엔 리버풀의 감독이었던 케니 달글리쉬가 시즌 도중에 사임하자 그가 감독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하지만 토샥은 레알 소시에다드와 함께 하고 싶다며 거절했고 그레이엄 수네스가 리버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리버풀은 멸망했다. 그러나 1994년 말, 토샥은 성적 부진으로 인해 또다시 경질되고 말았다.
3.5 웨일즈 축구 국가대표팀 1기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경질된 토샥은 1994년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그는 노르웨이와의 경기에서 3:1로 패한 뒤 41일 만에 사임했다.
3.6 데포르티보 시절
토샥은 1995년에 전임 감독인 아르세니오 이글레시아스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자 데포르티보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데포르티보에서 2년간 83경기 34승 28무 21패를 기록하며 중위권을 유지시키는데 기여했다. 그후 1996년, 토샥은 그에게 거액의 연봉을 제시한 터키의 베식타스로 이적했다.
3.7 베식타스 시절
1997년 베식타스로 부임한 토샥은 1997-98 시즌 터키컵에서 칼라타사라이를 격파하고 우승을 달성, 팬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리고 다음 시즌, 그는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지만 곧바로 1라운드에서 광탈하고 말았다. 그후 토샥은 스트라이커에 익숙한 선수를 수비수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거센 비난을 받았고 결국 1998-99 시즌 중반에 물러났다.
3.8 레알 마드리드 2기
당시 레알에서 왕따(...)였던 니콜라 아넬카와 담소를 나누고 있는 토샥
1999년 2월, 토샥은 거스 히딩크를 대신해서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문제의 마놀로 산치스와 또다시 갈등을 겪으면서도 두번째 레알 마드리드 임기 동안 37경기를 치뤄서 19승 9무 9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는 시즌이 끝난 뒤 그와 결별했고 비센테 델 보스케가 새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후 델 보스케는 레알에서 4년간 2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4년 연속 챔스 4강 진출, 라 리가 2번 우승을 이끌며 레알의 황금 시대를 이룩했다.
3.9 방황기
2000년, 토샥은 프랑스의 축구 구단 AS 생테티엔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한 시즌 동안 이끌었고 2001년에 레알 소시에다드로 귀환하여 전체 52경기 16승 13무 23패를 기록한 후 물러났다. 이후 그는 2002년 세리에 A의 칼초 카타니아에 부임하여 한 시즌을 이끌어쏙 2004년엔 레알 무르시아의 대체 감독으로 임명되어 18경기를 소화해 4승 1무 13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거둔 뒤 물러났다.
3.10 웨일즈 축구 국가대표팀 2기
토샥은 2004년 11월 웨일스 축구 대표팀 감독을 두번째로 맡았다. 그는 2010년까지 팀을 이끌고 53경기 21승 8무 24패를 기록하여 웨일스 같은 약체 팀 치곤 꽤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2010년 9월 5일 유로 2012 지역 예선에서 몬테네그로에게 1:0으로 패한 후 사임을 요청했고 결국 9월 9일 건강 문제를 이유로 공식 사임했다.
3.11 마케도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시절
토샥은 2011년 8월 7일 마케도니아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마케도니아에서 9경기 2승 4무 3패를 기록했고 2012년 8월 성적 부진과 현지 적응 실패로 인해 사임을 선언했다.
3.12 카자르 렌코란 시절
2013년 3월 8일, 토샥은 아제르바이잔의 축구 클럽 카자르 렌코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팀을 최종 순위 8위로 마감했고 아제르바이잔 컵에선 결승전까지 이끌었지만 아제르바이잔 리그 우승 팀인 네프트치 바쿠에게 5:3으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래도 2013년 8월 아제르바이잔 슈퍼컵에선 네프트치 바쿠를 격하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토샥은 다음 시즌엔 14경기에서 14승점 밖에 챙기지 못하는 부진을 겪고 결국 사임을 선언했다.
3.13 위다드 카사블랑카 시절
2014년 6월 20일, 토샥은 모로코의 축구 클럽 위다드 카사블랑카로 이적했다. 그는 2014-15 시즌 우승을 차지했으며 현재까지 29경기에서 16승 11무 2패를 기록하고 있다.
4 수상
4.1 선수 시절
1. 카디프 시티
- 웨일즈 컵 우승 : 1996-67, 1967-68, 1968-69
2. 리버풀
- 1부리그 우승 : 1972–73, 1975–76, 1976–77
- FA컵 우승 : 1973-74
- 커뮤니티 실드 우승 : 1976년
- 유로피언 컵 우승 : 1976-77
- 유로파 컵 우승 : 1972-73 시즌, 1975-76 시즌
- 유로파 슈퍼컵 우승 : 1977년
3. 스완지 시티
- 웨일즈 컵 우승 : 1980–81, 1981–82, 1982–83
4.2 감독 시절
4.2.1 클럽
1. 레알 소시에다드
- 코파 델레이 우승 : 1986-87 시즌
2. 레알 마드리드
- 라 리가 우승 : 1989-90
3. 데포르티보
- 슈퍼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 : 1995년
4. 베식타스
- 터키컵 우승 : 1997-98 시즌
5. 카자르 렌코란
- 아제르바이잔 슈퍼컵 우승 : 2013년
6. 위다드 카사블랑카
- 모로코 축구 리그 : 2014-15 시즌 우승
4.2.2 개인
라 리가 올해의 감독상 : 1989년, 199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