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베인하커르

이름레오 베인하커르 (Leo Beenhakker)
생년월일1942년 8월 2일
국적네덜란드
출신지로테르담
스태프SV 에페 감독 (1965~1967)
고 어헤드 이글스 코치 (1967~1968)
BV 페인담[1] 감독 (1968~1972)
SC 캄뷔르 감독 (1972~1975)
고 어헤드 이글스 감독 (1975~1976)
페예노르트 유소년팀 감독 (1976~1978)
AFC 아약스 감독 (1978~1981/1989~1991)
레알 사라고사 감독 (1981~1984)
FC 볼렌담 감독 (1984~1985)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85~1986/1990)
레알 마드리드 감독 (1986~1989/1992)
레알 마드리드 기술이사 (1991~1992)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감독 (1992~1993)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93~1994)
클루브 아메리카 감독 (1994~1995/2003~2004)
이스탄불스포르 감독 (1995)
CD 과달라하라 감독 (1996)
SBV 피테서 감독 (1996~1997)
페예노르트 감독 (1997~2000/2007(감독대행))
AFC 아약스 기술이사 (2000~2003)
더 흐라프스합 기술고문 (2004~2005)
트리니다드 토바고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5~2006)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6~2009)
페예노르트 기술이사 (2009~2011)
우이페슈트 FC 기술이사 (2011)
트리니다드 토바고 축구 국가대표팀 단장 (2013~2015)
레알 마드리드 CF 역대 감독
루이스 몰로우니
(1985~1986)
레오 베인하커르
(1986~1989)
존 토샥
(1989~1990)
라도미르 안티치
(1991~1992)
레오 베인하커르
(1992)
베니토 플로로
(1992~1994)

1 소개

네덜란드의 축구 지도자. 동시기에 활동한 거스 히딩크루이 반 갈과는 달리 선수 경력이 전무하나 하부 리그에서 차근차근 시작한 스몰스텝형 명장이다.

2 경력

1942년에 로테르담에서 태어난 베인하커르는 어린 시절에 RFC Xerxes[2] 유소년팀에 입단했으나 프로 선수는 되지 못했다. 대신 23살 때인 1965년에 하부리그 팀인 SV 에페의 감독으로 시작하여 페인담, 캄뷔르 등의 하부 리그 팀을 전전하다 1975년에 고 어헤드 이글스의 감독을 맡아 처음으로 에레디비지에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이후 페예노르트의 유소년 감독을 2년 동안 지내다가 1978년에 명문팀 아약스의 감독이 되어 1979/80 시즌에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어 처음으로 트로피를 들었고, 1980/81 시즌에는 요한 크루이프와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1981년 4월에 아약스를 떠난 그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레알 사라고사의 감독이 되어 준수한 성적을 거둔 뒤 1984년에 네덜란드로 돌아와 볼렌담의 감독을 거쳐 1985년부터 네덜란드 국대의 감독을 맡아 1986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서 5조에 편성되어 헝가리에 이어 2위로 플레이오프까지 도달했으나 이웃 나라인 벨기에에게 1-0으로 지면서 본선을 못간 채 결국 경질되었다.

이후 명예회복을 노리고자 1986년부터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한 뒤 당시 팀의 주축을 이루던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미첼, 마놀로 산치스, 미겔 파르데사, 마르틴 베스케스 - 이른바 '독수리 5형제'와 성공적으로 융화되어 감독생활 3년 내내 3년 연속 라 리가 우승, 코파 델 레이 1회 우승을 이끌어냈다.

스페인에서의 성공을 뒤로 한 베인하커르는 1989년에 아약스의 감독으로 다시 부임하여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부임 첫 시즌에 우승을 하는 한편 무명 선수 출신인 루이 반 할을 코치로 발탁하여 그를 발굴해냈고, 1990년에는 네덜란드 국대 감독으로 돌아와 팀을 이탈리아 월드컵에 본선 진출했지만 3위로 조기 탈락하고 말았다.

이후 1991년부터 레알 마드리드의 기술이사로 재직했다가 1991/92 시즌 도중인 1992년 2월 26일에 갑자기 경질된 라도미르 안티치의 후임으로 부임했는데, 사실은 라몬 멘도사 회장이 베인하커르를 지지했기 때문에 감독 자리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패착이었다. 레알은 안티치의 경질 이후 경기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결국 라리가 마지막 날에 바르셀로나에게 승점 1점이 밀려 2위에 그쳤고 UEFA컵에서도 토리노에게 4강전에서 패해 무관에 그쳤다. 이후 그는 다음 시즌에서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6개월 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이럴 거면 왜 불렀을까?

이렇게 스페인을 떠난 그는 1993년에 사우디 국대의 감독이 되어 1994 미국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크게 활약했으나 도중에 잘렸고, 이후 스위스, 멕시코, 터키 등지를 떠돌다 1997년에 페예노르트 감독이 되어 1998/99 시즌에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끈 바 있었다. 2000년에 감독 일선에서 물러난 뒤 아약스의 기술이사를 3년간 재직하다 이후 클루브 아메리카 감독과 더 흐라프스합의 기술고문을 거쳐 2005년부터 트리니다드 토바고 국대 감독직에 부임하여 팀을 2006 독일 월드컵 본선에 진출시킨 바 있다.

월드컵이 끝난 직후 폴란드 국대 감독으로 부임하여 당초 유로 2008 때까지 감독직을 수행하기로 했으나 유로대회 진출 이후 2010 남아공 월드컵 예선이 끝나는 2009년 11월까지 계약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예선 당시 폴란드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체코, 북아일랜드, 산마리노와 한 조에 편성되었는데, 산마리노를 제외하면 아주 강한 팀 없는 비슷비슷한 실력의 팀들이 모여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가운데 폴란드는 동네북이 된 산마리노를 10:0으로 누른 것을 빼면 꼴지 5위에 그치는 최악의 성적을 내며 탈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후 베인하커르는 약속대로 국대와 이별을 고하면서 감독직에서 은퇴했다.

2015년에 트리니다드 토바고 국대 단장을 끝으로 물러난 뒤 현재 야인으로 지내고 있다.

3 여담

영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3개 국어를 구사하며[3], 애주가이자 애연가이기도 하다.
  1. 2010년부터 SC 페인담으로 변경되었으나 2013년에 파산 후 팀이 해체됨.
  2. 2000년에 DZB Zevenkamp와 합병해 XerxesDZB가 되었다.
  3. 그 외에도 폴란드어도 조금 구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