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니 달글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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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케니 달글리시(Kenneth Mathieson "Kenny" Dalglish, MBE[1])
생년월일1951년 3월 4일
국적스코틀랜드
출신지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신체 조건173cm
등 번호7번(국가대표팀에서는 9번)
유스 팀셀틱 FC(1968~1969)
소속 팀셀틱 FC(1969~1977)
리버풀 FC(1977~1990)
국가 대표102경기/30골
감독리버풀 FC(1985~1991)
블랙번 로버스(1991~1995)
뉴캐슬 유나이티드(1997~1998)
셀틱 FC(1999~2000)
리버풀 FC(2011~2012)
1983 Ballond'or
수상
미셸 플라티니
2위
케니 달글리시
3위
알란 시몬센
리버풀 FC 역대 감독
조 페이건
(1983~1985)
케니 달글리시
(1985~1991)
로니 머랜
(1991)
그레이엄 수네스
(1991~1994)
로니 머랜
(1992)
로이 호지슨
(2010~2011)
케니 달글리시
(2011~2012)
브렌던 로저스
(2012~2015)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역대 감독
케빈 키건
(1992~1997)
테리 맥더모트
(1997)
케니 달글리시
(1997~1998)
루드 굴리트
(1998~1999)
스티브 클라크
(1999)

1 프로필

전 스코틀랜드의 축구 선수이자 전 리버풀 FC의 감독.

리버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플레이어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선수.
"King" Kenny

20년간의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셀틱 FC리버풀 FC 두 팀에서만 뛰었으며, 두 팀 모두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다. 셀틱 팬들로부터 '킹 케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1969년에 셀틱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했으며, 1977년에 리버풀로 이적한 뒤 1985년부터 리버풀의 선수 겸 감독으로 있었으며, 1990년에야 선수 생활을 은퇴하게 된다.[2] 힐즈브러 참사의 여파로 리버풀 감독직에서 사임했으며, 1991년 당시 2부리그에 있던 블랙번 로버스의 감독으로 취임한 뒤 1995년에 블랙번 로버스로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위업을 이룬다.[3] 1997년에 뉴캐슬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취임하였으며, 1998년에 사임. 이후 2000년 셀틱의 임시 감독을 맡았으며 2011년 로이 호구슨호지슨의 뒤를 이어 리버풀의 임시 감독으로 팀을 이끌다가 2011년 5월12일 정식감독계약체결. 기간은 3년. 하지만 한 시즌만에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 셀틱 FC(1969–1977)
    •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 우승 4회: 1971-72, 1972-73, 1973-74, 1976-77
    • 스코티시 컵 우승 4회: 1971-72, 1973-74
    • 스코티시 리그컵 우승 1회: 1973–74
  • 리버풀 FC(1977–1991,2011-2012)
    • 1부 리그 우승 8회: 1978–79, 1979–80, 1981–82, 1982–83, 1983–84, 1985–86(선수 겸 감독), 1987-88(선수 겸 감독), 1989-90(선수 겸 감독)
    • FA 컵 우승 2회: 1986(선수 겸 감독), 1989
    • 리그 컵 우승 5회: 1980–81, 1981–82, 1982–83, 1983–84, 2011-12
    • 채리티 쉴드 우승 5회: 1977, 1979, 1980, 1982, 1986
    • 유러피언 컵 우승 3회: 1977–78, 1980–81, 1983–84
    • 유러피언 슈퍼 컵 우승 1회: 1977
  • 셀틱 FC(2000)
    • 스코티쉬 리그 컵 우승 1회: 2000

1.1 개인수상

  • PFA Player of the Year: 1983
  • FWA Footballer of the Year: 1979, 1983
  • Scottish Premier Division top goalscorer: 1975/76
  • Manager of the Year award: 1985/86, 1987/88, 1989/90, 1994/95
  • Inaugural Inductee to the English Football Hall of Fame: 2002
  • Member of the Scotland Football Hall of Fame
  • Member of the FIFA 100
  • Freedom of the City of Glasgow: 1986
  • 1st in the Liverpool Football Club poll 100 Players Who Shook The Kop: 2006
  • 1985년 MBE(대영제국 5등급 훈장) 수여.[4]

2 선수시절

케니 달글리시의 선수시절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1986, ITV)

2.1 셀틱 FC(1969–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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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엔지니어의 아들로 태어나 레인저스의 서포터로서 자랐다. 밀튼 뱅크 초등학교에서 골키퍼로 시작했으며, 웨스트햄과 리버풀에서 트라이얼을 받았으나 입단까지는 이르지 않았고, 이후 1967년에 셀틱과 임시 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그의 첫 시즌은 컴버널드 유나이티드에서의 임대생활이었으며 한 시즌동안 37골의 활약을 보여준다.

다음해 셀틱과 정식 계약을 맺어 프로 선수가 된 달글리시는 1968년 스코티시 리그컵 8강전 해밀튼 아카데미컬과의 경기에서 교체 선수로 1군 데뷔전을 치룬다. 1971-72시즌 레인저스와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으로 데뷔골을 기록한 후, 49경기 출장에 23골을 기록한다. 다음 시즌 달글리시는 41골을 기록하며 셀틱의 주 득점원으로 발돋움하였으며, 1975-76시즌에 셀틱의 주장이 되기에 이른다. 269경기 출장에 167골이라는 기록을 달성한 달글리시는 1977년 당시 리버풀 감독인 밥 페이즐리에 의해 440,000파운드의 금액에 리버풀 FC로 이적한다.[5]

2.2 리버풀 FC(1977-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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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리버풀은 함부르크로 떠난 리버풀의 공격수 케빈 키건의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한 공격수가 필요했고, 리버풀의 7번을 달게 된 '킹 케니'는 넓은 시야와 정확한 패스, 냉정하고 침착한 플레이로 곧 리버풀 팬들의 영웅이 되었으며, 축구계에 끼친 공로로 5등급 대영제국 훈장(MBE)을 받았다. 당시 공격수이던 이안 러쉬와의 투톱은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투톱으로 손꼽힌다.

1977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채리티 쉴드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르게 되고, 미들스보로와의 경기에서 리버풀 데뷔골을 기록한다. 이후 1985년 조 파간의 은퇴로 선수 겸 감독이 된 달글리시는 1990년 더비 카운티와의 경기에서 교체출전으로 마지막경기를 치르기까지 리버풀에서 총 335경기 118골을 기록한다.

3 감독 시절

3.1 리버풀 FC(1985-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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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니 머랜, 로이 에반스 두 참모와 함께.

킹 케니의 감독 재임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비디오 (2007)

1985년 34살의 나이로 당시 헤이젤 참사로 인해 어수선했던 리버풀의 선수 겸 감독에 임명되었다. 감독으로서도 훌륭한 역량을 보인 케니 달글리시는 선수 시절과 감독 시절을 합해 리그 우승 8회, FA컵 우승 2회, 유러피언 컵 3회, 리그컵 4회, 채리티 쉴드 5회, 유러피언 슈퍼컵 우승 1회를 달성한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달글리시 앞에 악재가 닥쳐왔는데, 이가 바로 힐스버러 참사이다.

이 참사의 충격[6]으로 1990/91 시즌 도중에 감독직에 사임하면서[7] 케니 달글리시의 리버풀 FC에서의 감독 생활은 끝나게 되고, 그는 "만약 리버풀이 제가 감독으로 돌아와주길 기다린다면, 저는 돌아올 겁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게 된다. 그리고...

3.2 블랙번 로버스(1991-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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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셔우드와 함께.

이후 셰필드 웬즈데이에서 감독직 제의가 오지만 이를 거절한 케니 달글리시는 축구팬들을 놀라게 하며 2부 리그의 블랙번 로버스 감독으로 취임한다. 취임한 바로 그 해 블랙번 로버스를 프리미어리그로 승격시킨 후 달글리시는 잭 워커 회장이 다져놓은 탄탄한 자금을 바탕으로 1992년, 사우스햄프턴 소속의 앨런 시어러를 영입했고 승격 첫 해를 리그 4위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마치게 된다. 바로 다음해를 맨유에 이어 2위라는 성적으로 마쳤으며, 1995년에는 극적인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이는 블랙번의 81년만의 리그 우승이었다. 이후 케니 달글리시는 블랙번의 고문위원장에 임명되었으나 1996년 상호 합의하에 블랙번을 떠나게 된다.

3.3 뉴캐슬 유나이티드(1997-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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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취임 기자회견장에서 회장인 존 홀 경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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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시절 동료인 테리 맥더모트 코치와 함께.

그리고 1997년 1월에 갑자기 물러난 케빈 키건의 뒤를 이어 케니 달글리시는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케니 달글리시 취임 당시 4위였던 뉴캐슬은 시즌을 2위로 마감하여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성공하였지만,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바르셀로나전 3-2승리를 포함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13위라는 리그 성적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기에 이른다.

3.4 셀틱 FC(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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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휴식을 취하던 케니 달글리시는 1999년부터 친정팀인 셀틱의 단장으로 일하다가 2000년 2월, 자신의 리버풀 시절 제자인 존 반스가 감독직에서 해임되자 자신이 임시 감독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 해 스코티쉬 리그컵에서 에버딘을 2-0으로 물리치며 우승을 달성하고, 셀틱이 2위로 그 해 시즌을 마감하면서 케니 달글리시의 임시 감독 생활은 끝나게 된다.

3.5 리버풀로의 귀환(2009-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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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싱가포르 투어에서.

그 후 오랜시간 감독직에서 물러나 있던 달글리시는 2009년 리버풀 감독인 라파엘 베니테스의 제의를 받아 리버풀 유소년 아카데미의 관리를 책임지게 됨과 동시에 리버풀 FC의 대사직을 겸하게 된다. 2010년 6월 베니테스가 리버풀의 부진에 책임을 지고 경질됨과 함께, 케니 달글리시는 자신이 팀을 맡을 것을 구단 수뇌부에 건의하지만 팬들의 바람과 본인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로이 호지슨이 부임하게 된다.[8] 하지만 호지슨이 부임한 이후 리버풀의 성적이 좋아질 기미는커녕 더 추락하기에 이르자 팬들이 경기장에서 케니 달글리시를 연호하기 시작했고, 결국 리버풀에 존 헨리 구단주가 부임한지 얼마 지나지않아 로이 호지슨이 해고되었다.

3.6 리버풀 FC(2011-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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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케니 리턴즈

호지슨이 2011년 2월 8일 리버풀을 떠나게 됨에 따라 달글리시는 19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위해 시즌이 종료될 때까지 리버풀FC의 임시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달글리시의 복귀 첫 번째 경기는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FA컵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이었다.[9] 비록 이른 시간대의 페널티킥 판정으로 인해 1-0으로 패하긴 했지만 달라진 경기내용으로 인해 팬들로 하여금 앞으로의 시즌에 대한 기대를 품게 했으며, 리그 23라운드 울버햄튼 원정에서 3-0으로 승리하면서 복귀 후 첫 승을 신고하게 된다. 이어진 겨울 이적시장에서 앤디 캐롤루이스 수아레스의 영입과 함께 첼시전 1-0 승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 3-1 승리, 맨체스터 시티전 3-0 승리를 포함해 이전과 비교해 확실히 달라진 리버풀FC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부임 이후의 활약으로 3년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반년이 겨우 지나자마자 바로 폭풍같이 까이고 있는데...이유는 엄청나게 많지만 크게 몇개만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 하울 메이렐레스를 붙잡지 않은 점: 10-11 시즌 리버풀의 원동력은 스티븐 제라드도, 토레스도 아닌 하울 메이렐레스였다. 그런데 11시즌이 끝나자마자 리버풀은 메이렐레스를 이적 시장 마지막날 첼시에 12M에 팔아버렸다. 물론 이 이적은 메이렐레스의 의지가 강력했기 때문에 성사되었던 딜이었긴 하지만 10-11 시즌 팀에 가장 크게 기여했던 선수를 너무 쉽게 내준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형성되었다.[10] 만약 메이렐레스가 첼시에 가서 버로우를 탔다면 모를까 첼시에서 알짜배기 활약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약이 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루카스 레이바가 시즌 아웃된 상황에서 리버풀 팬들은 더더욱 하울을 그리워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부상등의 문제는 원체 예측하기 힘든 요소이기도 하고, 여기까지는 달글리시의 리빌딩이라 칠 수 있다. 그런데...
  • 시대착오적 뻥축구: 공간점유와 압박, 패스워크가 전술적 대세로 떠오른 와중에도 롱패스와 역습 위주의 90년대식 전술에만 의존했다. 그 결과 매일같이 상대의 볼 점유에 휘말리다 중원을 내주며 간단하게 실점하고, 공격시에는 뻥축만 반복하다가 제풀에 지치는 과정만 시즌 내내 반복되었다. 감독 취임 당시 거의 10년이나 지나 일선에 복귀했기 때문에 현대의 전술적 추세를 따라잡기 어려우리라는 세간의 우려가 그대로 현실화되고 말았다.
  • 이적시장 대참사: 리버풀을 인수한 존 헨리는 달글리쉬에게 무려 1억 유로의 이적자금을 제공했다. 돈싸움이 리그의 대세로 떠오른 이상 이 이적자금은 리버풀이라는 팀의 운명을 건 돈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달글리쉬는 이 자금을 앤디 캐롤, 조던 헨더슨[11], 스튜어트 다우닝, 찰리 아담 등 쓸데없이 고평가된 잉글리쉬 선수들에게만 퍼부었고 그 선수들은 약속이나 한 듯 전원 폭망하고 말았다(그나마 달글리쉬의 유일한 영입 성공작이라 불리는 호세 엔리케는 공교롭게도 영국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엔리케도 다음 시즌에는 신나게 삽을 들고 있다!). 챔피언스 리그 진출 실패+저조한 리그 순위로 상금 감소+거액의 이적료와 주급 지출이 겹치면서 리버풀의 투자여력은 사실상 무너져내렸고 무능한 선수들이 고액의 주급을 수령하며 주급체계마저 붕괴하고 말았다. 돈은 돈대로 쓰고 팀의 전력과 잠재력마저 형편없이 약해버져버린 것, 어찌보면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실제로 달글리쉬의 퇴임 후의 2012-2013 시즌 이적시장에서 리버풀은 전례없을 정도의 절약정책을 펴게 된다.

천만다행으로 호세 엔리케루이스 수아레스[12]가 잘해줘서 망정이지, 이 둘마저 못했으면...찰리 아담의 경우 스탯은 잘 쌓는데 실속이 빵점이라는 평이 지배적이고,[13][14] 토트넘 전 참패와 노리치 - 스완지 전 홈 무승부로 인해 달글리시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떨어진 상태다. 게다가 영국 FA가 수아레스를 인종차별 혐의로 기소했기 때문에 앞으로 있을 공청회에서 수아레스의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치명적인 전력 누수가 발생한다. 아니 그보다도 풀럼전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놀리는 바람에 출장 정지 당첨.아 망했어요

물론 알론소가 떠나고 팀의 기둥이었던 캐러거와 제라드가 하락세인 상황에서 리빌딩은 불가피하고, 그 리빌딩을 위한 과정은 적절한 가격[15]의 젊은 선수들의 영입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순리다. 그러나 10-11 시즌 후반기에 보여준 케니의 용병술은 팬들에게 상위권 재진입이라는 꿈을 꾸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성적에 대한 중압감은 점점 무거워졌으며, 가뜩이나 상위권 팀들과 달리 유럽 국제 대회를 치르지 않는다는 이점[16]을 전혀 살리지 못한다라는 점에서 케니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거기에 기껏 데려온 600억짜리 공격수가 벤치워머로 남아있다라는 것은 케니에게 정말 골칫덩어리로 남아버렸고, 여기에 루카스의 시즌 아웃으로 인해 박싱데이를 앞둔 리버풀에게 상당히 어두운 전망만이 보이고 있다. 추가로 최근 팀의 이 여러모로 뭐한 짓들만 골라서 하는지라 한번 정신차리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 팀 선수인 루이스 수아레스의 인종차별발언 문제와 관련된 일련의 발언과 대처가 큰 비난을 불러모으고 있다.[17] 그 때문에 실망한 팬들도 적지 않고 경기력도 여전히 강팀에게는 강하고 약팀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등, 그야말로 진퇴양난. 그나마 9년만의 칼링컵 우승으로 6년 무관의 한을 풀긴 했지만 비중이 낮은 대회라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정작 중요한 리그에서는 부진에 부진을 거듭하며 또다시 7위, 아니 이제는 7위권도 위협받을 상황에 놓여있다. 뭐 칼링컵 우승 덕분에 다음 시즌은 유로파 리그 진출권을 얻긴 했지만...4강 전문팀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여기에 그놈의 잉글랜드 집착병이 도지면서 정작 훌륭한 외국인 선수들을 외면하는 바람에 팬들의 속은 계속 타들어가고 있다. 그 밖에 시즌 FA컵 결승에 오르긴 했지만 첼시 FC에게 1:2로 패하면서 준우승에 그쳤다.

퀸즈 파크 레인저스전의 어메이징[18]한 패배 전후로 Red And White Kop, 국내의 T.P.T.P. 같은 리버풀 팬사이트에서도 케니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아직까지는 레전드로 믿어보자는 의견도 많지만 점점 불신이 커지는 중. 심지어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의 복귀 떡밥을 미는 팬들도 있다.(...)

결국 리버풀은 마지막 스완지시티 원정 경기마저 패배하면서 8위로 리그를 마감했다. 그것도 9위 풀럼과는 승점도 같아서 골득실까지 따져야 했다. 리버풀의 골득실 +3. 풀럼은 -7.

리그를 마친 후,경질하네마네 연임하네마네등의 설이 분분하다가 결국 한국 시각으로 2012년 5월17일 새벽에 공식적으로 경질되었다.# #
참고로 경질된 후, 보상금을 받았는데 트위터에서 그가 그 보상금을 팀의 이적자금에 보태쓰라고 거절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콥들을 감동시켰으나 그 다음날, 그게 사실이 아니며 그가 보상금을 전액 수령해갔다는 사실이 지역지 리버풀 에코를 통해 확인되었다.보상금 수령 자체는 당연한 것이지만 덕분에 모양새가 더 우습게 된 것은 사실.

4 기타

셀틱과 리버풀에서 모두 레전드로 추앙받고 있다.

오래전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감독직을 쉬고 있던 탓에 전술감각이 떨어져있을 거란 걱정이 많았다. 일각에서는 모자란 부분은 스티브 클락 코치를 위시한 코치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낙관하는 듯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걱정은 정확하게 맞았다. 그냥 뻥축만 하는 데다 위기 상황에서 번뜩이는 교체도 전혀 기대할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나마 들만한 장점은 선수단 사기에 미치는 부분. 어린 선수들에게 농담을 섞어가며 긴장을 풀어주는 장면도 볼 수 있고, 인터뷰에서 보여주는 말빨은 그야말로 팬들에게 닥치고 킹케니 찬양이라는 결과가 나오게 만들었다. 다만 루이스 수아레스의 문제와 관련된 인터뷰나 대처로 인해 언론을 잘 다룬다는 말은 더 이상 하기 어려울 듯.[19] 게다가 팀의 성적도 나쁘고 경기력도 엉망인데 계속 초점을 빗나가는 인터뷰만 반복함으로써 팬들조차 뒷목을 잡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인으로 마리나 달글리시가 있는데, 유방암을 앓고 완치된 이후 유방암 기금 마련을 위해 마리나 달글리시 재단을 세워 유방암 환자들의 치료 기금 마련에 힘을 쏟고 있다. 부인 마리나는 이 노력을 인정받아 2009년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을 수훈해, 부부가 모두 MBE 수훈자가 되었다.

이후 리버풀과 글래스고 지역에서는 케니를 Knight Bachelor[20], 즉 기사작위에 서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2016년 6월 서훈명단(2016 Birthday Honours)까지 공식 발표된 2016년 10월 현재까지, 케니가 기사작위를 받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대영제국 훈장과 기사작위에 대한 설명은 대영제국 훈장 항목을 보면 자세히 되어 있다.

그리고 리버풀에서 경질된 지 17개월 만에 리버풀로 복귀했다. 단 감독이 아닌 디렉터로. 다행이다

기사
  1. 이름 뒤에 붙은 'MBE'란 케니 달글리시가 1985년 받은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 수훈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2. 헤이젤 참사의 여파로 잉글랜드 클럽의 유럽대회 진출이 좌절된 후라 감독으로서의 유럽 무대 데뷔는 2011년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3.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우승팀은 맨유, 첼시, 아스날, 블랙번 단 4팀이다!!! 맨시티: ?? 레스터: ??
  4. 1985년 신년 서훈명단(1985 New Year Honours)에서 선정됐다.
  5. 당시 페이즐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기전에 빨리 이 글래스고를 떠나는게 낫겠다."
  6. 당시 감독이었기에 책임을 지고 매일같이 유족들과 만나고, 장례식을 찾아다니면서 정신적/육체적으로 굉장히 피폐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유족들은 아직도 그런 킹의 모습을 잊지 않고 최근 들어서 '킹 케니 기사작위 주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7. 남은 시즌은 수석코치인 로니 머랜이 맡았다. 참고로 그는 1965년부터 1998년까지 리버풀을 위해 오랫동안 헌신한 지도자였다.
  8. 이때문에 이것을 결정한 퍼슬로우와 톰 힉스&조지 질레트는 두고두고 까인다. 애초에 이때 후보는 케니, 호지슨, 페예그리니였다. 제정신이 박혀있었다면 호지슨을 고르는 짓은 안해야 했다.그러나 호지슨 이후 부임한 케니의 성적도 별반 나을 것도 없었으며 심지어 돈을 더 많이 쓰고도 그 정도 성적이란 점에서 별 차이 없는 선택. 하지만 페예그리니가 했다면 어땠을까? 실제로 저 당시 팬층에서 제일 선호도가 높았던 후보가 페예그리니였다. 킹 케니는 후술되어 있듯이 오랫동안 현장을 떠나있던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고 호지슨은 그동안 보여준 모습만 봐도 팀을 챔스권에 올려놓기에는 답이 없어보였기 때문에. 결국 우려대로 저 두 감독은 팀의 부활에 실패하고 리버풀은 챔스로 돌아가기 위해 브렌던 로저스의 부임까지 기다려야 했다.
  9. 이 때 퍼거슨이 케니 달글리시의 귀에 대고 속삭인 첫 마디는 'Welcome Back.'이었다고 한다.
  10. 특히 첼시 팬들은 어잌후 리버풀님들 ㄳ요, 리버풀 팬들은 야이 #$!#@$!@#$들아 메이렐레스 왜 팔아 1@#!@$ 소리가 나왔다.
  11. 그러나 13/14시즌 기준으로 평가할 때, 조던 헨더슨은 잘 샀다고 할 수 있다.
  12. 루이스 수아레스는 엄밀히 말하면 달글리쉬가 대려왔다고 하기엔 좀 애매한데, 호지슨이 지도하던 10년 11-12월경부터 이미 리버풀과 강력한 링크가 있어왔고, 호지슨이 임기 말년 시절에 수아레스를 원한다는 인터뷰도 한적이 있다. 달글리쉬가 수아레스를 영입했다고 하기엔 좀 모호한면이 있다.
  13. 11/12시즌 12월 현재 팀 내 스탯 1위의 선수이다. 90분당 0.64의 공격포인트.(2골 7어시)
  14. 볼을 소유했을 때는 이를 전개하는 과정이 괜찮은데(말이 긍정적이지 탐욕을 좀 부린다.), 볼을 소유하지 않았을 때의 움직임이 너무 구리다. 특히 이 문제는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후반에 더욱 두드러진다. 뭐 저정도의 공격포인트만 해도 사실 중간은 가지만...
  15. 존 헨리가 부임했지만 재정 상황이 맨체스터 시티나 첼시처럼 빵빵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캐롤과 같은 영입을 함부로 할 수 없다.
  16. 유럽 국제 대회를 치르지 않는다는 것은 리버풀 수준의 팀에게는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뒤집어 말하면 국내 리그와 컵 대회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EPL의 수익 분배를 감안했을 때 유로파 리그는 우승권에 근접하더라도 리버풀에게 큰 이익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리그 4강에 들어 챔피언스 리그 티켓을 따는 것이 훨씬 경제성에서 좋은 결과를 낳는다. 물론 들처럼 조별예선 광탈하면 도루묵...
  17. 물론 팀의 선수에 대해 변명이 필요한건 사실이며 수아레스가 다른 표현의 의미로 사용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보호가 필요하긴 하지만, 솔직히 지속적으로 수아레스에게 불리한 증언만 나오는 상황에서 무의미한 쉴드만 계속 치는 바람에...
  18. 2-0으로 앞서고 있다가 후반에 15분 동안 세 골을 연속으로 내주며 패했다(...)
  19. 하지만 이 부분은 후에 인터뷰에서 수아레즈 지지 티셔츠를 입은 것은 선수단의 결정이었으며, 보드진에서 허가가 떨어진 것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결정권이 있었다면 더 적게 말했을 것이며, 다른 판단을 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20. 알렉스 퍼거슨, 알프 램지, 스탠리 매튜스, 보비 찰튼, 바비 롭슨 등 '경'으로 불리는 축구인들은 바로 이 Knight Bachelor를 받음으로써 기사가 된 것이다. Knight Bachelor는 대영제국 훈장 등의 '훈장'과는 다른 별개의 특전이며, 서열은 훈장으로 치면 2등급에는 살짝 못미치고 3등급보다는 높게 취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