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중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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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én jiǒng míng, 陳炯明(진형명), (1878년[1] 1월 13일~1933년 9월 22일)

1 소개

중화민국의 군벌. 광둥을 기반으로 한때 세력을 떨쳤으나 쑨원과의 반목 끝에 그를 축출했고 결과적으로 쑨원의 북벌 사업의 첫 목표로 정해져 두들겨맞곤 몰락했다.

중국사에서 쑨원이나 쑨원의 후계자인 장제스, 그리고 장제스를 패퇴시킨 마오쩌둥 조차도 하나의 중국을 제창했기 때문에, 쑨원의 정적이자, 일종의 연방제를 주장했던 천중밍은 1980년대까지 대륙이고 대만이고 위안스카이급의 반역자나 한간 취급을 받고 있었으나 [2], 그의 이념이 뒤늦게 발굴되어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2 생애

2.1 신해혁명

1878년 광둥 하이펑 현에서 태어났다. 머리가 좋았는지 1898년 청나라 과거에서 수재 [3]가 되었으며 1909년 5월 동맹회에 가입했다. 1909년 9월 홍콩에서 동맹회지부가 성립되자 천중밍은 후한민 아래에서 혁명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임무는 혁명 선전과 혁명군의 봉기 촉구였다. 하지만 1910년 2월 10일 봉기는 실패하였고 천중밍은 다시 광저우에서 봉기를 시도하지만 또 다시 실패하였다. 1910년 3월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하여 광저우에서 청나라 군대 지휘관들의 암살을 시도하여 일부 성공을 거두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천중밍은 봉기군을 이끌고 여러 도시들을 점령, 광저우에 임성하여 후한민이 광둥 도독이, 천중밍이 부도독이 되었다. 혁명을 알게 된 쑨원이 상하이로 귀국하여 후한민이 도독을 사임하자 천중밍은 대리도독이 되어 광둥을 통치했다. 1913년 3월 위안스카이가 쑹자오런을 암살하여 2차 혁명이 발생하자 천중밍도 광두으이 독립을 선포하고 이에 가세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와 내통하던 부하들의 반란으로 광둥에서 축출되어 홍콩으로 망명해야 했다. 2차 혁명은 실패했고 쑨원을 비롯한 혁명파 다수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때 천중밍은 쑨원의 리더십에 불만을 품고 쑨원이 영도하는 중화혁명당이 아닌 황싱 노선을 선택했다.

2.2 호국전쟁과 2차 광둥정부 수립

1915년 위안스카이가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전국에서 이를 저지하기 위한 봉기가 일어나는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천중밍은 쑨원의 혁명활동에 다시 동참했다. 이들은 홍콩에서 광둥에서의 혁명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위안스카이는 전국적인 반발에 놀라 1916년 3월 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에 사망함으로 리위안훙이 대총통에, 돤치루이가 총리에 오르는 신체제가 시작되었다. 이때 약법 문제로 인한 호법운동이 벌어졌고 이것이 호법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이 시기에 천중밍은 반원세개 운동을 전개하며 쑨원의 지원을 받았지만 연성자치를 주장하는 천중밍과 중앙집권적 혁명정부의 수립과 삼민주의 실천을 주장하는 쑨원의 노선 갈등은 이 시기부터 내포되어 있었다.

이후 쑨원이 탕지야오, 루룽팅 등의 지원으로 광저우에 정부를 수립하고 북방의 돤치루이 내각과 대립하는 남북대립의 시대가 열렸다. 호법전쟁에서 직예파의 태업으로 인해 안휘파의 돤치루이는 참패를 면하지 못하고 하야했고 베이징과의 협상으로 자신이 원하던 영토 확장을 이뤄낸 남방 군벌들은 쑨원의 북벌 요구를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있었다. 1918년 5월 비상회의에서 대원수제가 7총재 합의제로 개편되자 쑨원은 대원수직을 사직하고 상하이로 떠나버렸다. 이에 광둥의 민심이 광둥 군벌 루룽팅에게 적대적으로 돌아가자 쑨원은 루룽팅 타도를 결심하고 천중밍을 포섭했다. 천중밍은 광둥을 얻어 자신의 정치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쑨원의 요구에 승낙하였고 푸젠에서 루룽팅 타도의 기치를 들고 거병했다. 천중밍은 광저우로 진군, 광서 군벌들을 몰아내고 쑨원을 다시 광저우로 초빙하여 제2차 광둥군정부를 조직하는데 성공했고 광둥성장, 육군부장 등을 겸직했다.이듬해엔 광서도 공격해 점령함으로 양광이 천중밍의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광서 평정에 있어 쑨원은 호법북벌을 위한 기반 마련을 목적으로 하였고 천중밍은 연성자치의 기본적 힘을 마련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천중밍은 광둥을 중심으로 지역개발을 하며 힘을 비축할 생각이었지만 쑨원이 줄기차게 북벌을 요구하면서 쑨원에게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2.3 1922년 봉기(천중밍의 반란)

천중밍은 일찍이 쑨원의 중앙집권적 통일방안에 대해 분명히 반대했고 쑨원의 북벌이 무모한 것은 둘째치고 그것이 실패하면 자신의 연성자치가 수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쑨원의 북벌 운동에 대해 적대적으로 바라보았다. 한편 북방에선 1920년의 안직전쟁과 1922년 5월의 1차 직봉전쟁 등으로 인해 북양 군벌들은 남방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이러다보니 적에 대항하기 위해 쑨원과 손잡을 필요성도 약해졌다. 게다가 쑨원이 데리고 있는 듣보잡 혁명가인 장제스란 자는 쑨원을 허풍선이로 여겨 비방하는 천중밍의 참모들을 보고 길길이 날뛰며 광둥정부에서 천중밍을 축출해야 한다고 연일 목소리를 높혔고 이에 천중밍도 불쾌해하며 쑨원에게 '무뢰배 장씨'를 쫓아낼 것을 요구했다. 쑨원의 중재에 장제스는 천중밍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며 쑨원의 북벌을 도와줄 것을 간청했지만 천중밍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실 천중밍의 이러한 연성자치는 단순히 한 지역 잡아 해처먹겠다는 이기심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태평천국운동, 호국전쟁, 호법전쟁 등을 거치며 전화로 폐허가 되고 탐관오리와 군벌들의 착취에 도탄에 빠진 광둥을 구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천중밍이 루룽팅을 축출하고 광둥을 점령했을때 광둥 사람들은 천중밍의 자치주의에 환호하며 그를 환영하였고 천중밍은 안정적인 정권을 확립했다. 하지만 쑨원이 장쭤린 ,돤치루이와 연합하여 반직삼각동맹을 추진하고 북벌을 시도하자 천중밍은 결국 쑨원을 더 이상 놔두면 안되겠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1922년 6월 16일 천중밍은 쑨원의 사령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쑨원은 위기에 빠졌으나 장제스가 융펑함을 몰고 와서 구출해준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천중밍은 쑨원을 축출하고 남방의 위험을 제거해준 대가로 우페이푸에게 양광총독에 임명되었다. 자치주의자들은 이를 연성자치론자의 승리이고 일종의 혁명이라 환호했다.

2.4 몰락

하지만 천중밍 정권도 오래가지 못했다. 쑨원이 쉬충즈, 류전환, 리쭝런, 바이충시 등을 규합하여 천중밍을 토벌하기 위한 전쟁을 준비한 것이었다. 1923년 1월 4일 천중밍은 쑨원이 구성한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축출당했고 2월 21일 쑨원은 다시 광저우에 입성했다. 천중밍은 광둥 동부 지역으로 철수하여 권토중래를 노렸지만 소련의 지원을 받아 창설된 국민혁명군과 장제스에게 잇달아 패했으며 결국 1925년 장제스의 동정에 참패하여 홍콩으로 망명갈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홍콩으로 망명간 그는 다시는 정치에 미련에 두지 않았다. 이후 자신의 국가건설 사상에 대한 저술을 하다가 1933년 사망했다.

3 평가

천중밍은 연성자치론자였다. 이것이 쑨원의 중국통일을 가로막았다는 평가가 확정되면서 천중밍은 쑨원을 배반한 반역자로 반동적이고 봉건적이고 매판적인 군벌이라는 낙인이 찍혀 평가가 그다지 좋지 못했으나 자료 발굴과 쑨원에 비판적이었던 서양 학자들의 연구로 인해 그의 개혁적인 국가구상이 재평가되면서 평판이 좋아졌다. 1962년 Winston Hsieh가 천중밍을 나름의 정치 신념가로 적극적인 평가를 내렸으며 쑨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던 Harold Shifrin도 1980년에 천중밍이 쑨원의 북벌을 무리하다고 비판했던 주장을 옹호했다. 이후 중국 내부에서도 천중밍이 주장했던 연성자치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며 천중밍 역시 쑨원에게 깝쳤던 군벌에서 나름의 사상가요, 신념가로의 평가가 이루어졌다. 1996년 일본의 요코야마 히로아키가 연성자치운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역시 천중밍에 대한 재평가를 일부 내놓았고 1999년에는 천중밍의 아들이 미국 국무성 자료 등을 모아 아버지의 치적에 대해 재평가하는 책을 내놓으며 천중밍의 행적에 대해 복원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천중밍의 평가를 둘러쌌던 오해와 폄하는 많이 걷어진 상태이며 1998년과 2003년에 천중밍 자료집과 천중밍 연보가 출간됨으로 천중밍의 정치사상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4 여담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성금으로 8만 위안을 내놓았다.

검소한 성격이라 죽었을 때 집에 침대 말고 남은 것이 없었으며 그를 담을 관이 없어 어머니의 관으로 준비했던 관을 썼다.

매우 개혁적인 성향으로 교육 보급, 아편 근절 등에 힘썼고 천두슈에게서 고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쑨원이랑 사이가 안 좋아서 반봉건, 반동 매판 군벌로 매도되어 쓸쓸이 죽은 것을 보면 안습...

5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진형명의 국가건설 구상, 중국통일추의 분석을 중심으로, 김세호, 서강대학교
  • 중국통일추의(1927)의 재검토, 진형명의 연성자치론의 성격, 김세호, 한남대학교
  • 진형명의 1922년 정변에 대한 재검토, 김유열, 서울대학교

6 관련문서

  1. 1875년 출생설도 있다.
  2. 쑨원의 전기를 보면 대부분 천중밍을 쓰레기 군벌에 배신자로 나온다
  3. 지방에서 치러지는 향시에 합격해서 베이징에서 치르는 과거에 합격할 수 있는 자격을 말한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