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진 마틴 바키(Gene Martin Bacque)[1] |
생년월일 | 1937년 8월 12일 |
출신지 | 미국 루이지애나 주 라파예트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62년 |
소속팀 | 한신 타이거즈(1962~1968) 긴테쓰 버팔로즈(1969) |
1964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 |||||
이토 요시아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진 바키 (한신 타이거즈) | → |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타이거즈) |
미국 루이지애나 태생의 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로 포지션은 투수.
1 현역 시절
사우스웨스트 대학을 졸업하고 마이너리그 트리플 A 하와이 아일랜더스 에서 뛰었으나 얼마 안가 방출당했고, 1962년 한신 타이거즈의 입단 테스트에 합격하여 일본으로 건너왔다. 투수로서는 특이하게 등번호는 4번을 달았다.
한신 입단 초기 공은 빨랐지만 엉망진창인 컨트롤 때매 첫 시즌은 8게임 등판, 3패 평균자책 4.70의 초라한 성적만 남겼다. 그러나 투수코치 이던 스기시타 시게루의 맹훈련으로 하체를 강화하고 당시 무라야마 미노루와 함께 한신의 양대 에이스이던 고야마 마사아키의 슬라이더를 연구하면서 제구력을 키웠으며, 결정구로 너클볼을 장착하면서 바키의 기량은 급성장 하였다. 1963년 시즌 8승 5패 평균자책 2.49로 가능성을 보인 바키는 이듬해 1964년 46경기 등판, 29승 9패 평균자책 1.89, 200탈삼진을 기록, 다승왕과 평균자책 1위를 거머쥐었고 외국인 선수로는 최초로 사와무라상 까지 수상[2]하며 명실상부한 한신의 기둥 투수로 자리매김 했다. 더불어 그 해 한신이 센트럴리그를 제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3]
이후 고야마가 도쿄 오리온즈로 트레이드 되자 바키는 무라야마와 함께 한신의 에이스 쌍두마차로 마운드를 이끌었고 1968년 까지 5년 연속 두자리수 승리를 따내며 맹활약 했다. 1965년 6월 28일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바도 있다.
그런데 1968년 9월 18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 등판한 바키는 오 사다하루를 상대로 위협구를 던지며 난투극을 유발했고, 요미우리 타격 코치이던 아라카와 히로시[4]와 주먹다짐을 벌이다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5][6]
아라카와 코치에게 강펀치를 날리는 바키(맨 우측).
이 부상으로 인해 바키는 그 해를 끝으로 한신에서 퇴단하였고, 이듬해 킨테츠 버팔로즈로 적을 옮겼지만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단 1승도 못거둔 채 1969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하였다. 8시즌간 통산 성적은 251경기 등판, 100승 80패 평균자책 2.34.[7]
2 은퇴 이후
바키는 은퇴 후 고향인 루이지애나로 돌아가 고등학교 교사로 일했고, 현재는 농장을 경영하고 있다. 한편으로 OB전 출전 등으로 가끔 일본을 왕래하기도 한다. 자신의 은퇴의 빌미를 제공했던 오 사다하루와 아라카와 히로시 와는 예전의 감정은 잊고 한때 센트럴리그의 라이벌로서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현역 시절 바키는 일본어를 곧잘 하여 통역 없이도 팀 동료 들과 자유롭게 소통했고, 성격도 붙임성 좋고 쾌활했던지라 동료들은 "일본인 보다도 더 일본인스러운 외국인" 이라며 그를 좋아했다고. 지금도 한신 올드팬들은 왕년의 뛰어난 외국인 선수를 꼽을 때 "타자는 바스, 투수는 바키" 라고 할 정도로 칭송받고 있는 선수가 바키이다.
- ↑ 원래 발음은 "바퀘"에 가깝지만 바케모노(化け物, 도깨비)가 연상된다는 이유로, 1930년대 말엽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미국인 바키 해리스(Bucky Harris)의 이름을 따서 바키로 표기했다고 한다.
- ↑ 이후 두 번째로 사와무라상을 탄 외국인 선수는 무려 52년이 지난 2016년에야 배출되었다. 주인공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크리스 존슨.
- ↑ 일본시리즈 에선 같은 미국인 투수인 조 스탠카가 이끈 난카이 호크스 에게 패퇴하였다(...).
- ↑ 오 사다하루에게 외다리 타법을 전수한 코치이다.
- ↑ 아라카와는 바키의 펀치를 맞고 얼굴을 4바늘 꿰매는 부상을 입었다.
- ↑ 그런데 벤치 클리어링이 수습된 후 다시 타석에 들어온 오 사다하루는 한신의 구원투수로 나온 곤도 마사토시에게 뒤통수를 직격하는 사구를 얻어 맞았다(...). 그럼에도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은 직접 "곤도가 일부러 그런 공을 던질 리 없다"며 그라운드로 달려간 선수들을 불러들여서 이날의 두 번째 벤치 클리어링 으로는 연결되지 않았다. 이게 그럴 만도 한게 곤도는 야구계 안팎에서 상냥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유명했기 때문. 곤도가 1973년 시즌 후 한신 감독이던 가네다 마사야스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그를 두들겨 패버린 사건을 계기로 은퇴했을 때도 오죽하면 그랬겠나며 동정을 받았을 정도였다.
가네다가 한 짓이 워낙 막 to the 장인지라 - ↑ 일본에서 뛴 외국인 투수로는 조 스탠카와 함께 통산 100승을 거두었다.